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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xE7akhqLcL8?t=1881

 

 

2020104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30

불꽃 튀는 경쟁이 되어 버린 자녀 출산

(창세기 2931~308)

 

[들어가는 말]

 

이 세상을 보면 아주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제가 아는 이전 교인들 가운데에도 그런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이전 시대에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요즘도 그런 아이들이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복잡한 가정환경 속에서 고아와 같이 성장한 사람도 있고, 실제 고아도 있고, 깨어진 가정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자란 사람도 있고, 특히 요즘에는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바뀌는 환경에서 성장한 자녀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복잡한 가정 또는 결손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지는가? 어떻습니까? 아마 우리 가운데에도 굉장히 어렵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어려운 환경 가운데 나고 자라면 반드시 불행해지는가?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말씀합니다. 복잡한 가정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 때문에 오히려 더 위대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실 성경만이 아니라, 실제 이 세상의 역사를 보아도 그런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 한 예를 보면, 유교의 시조라고 하는 공자는 사실 누구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일단 부모가 비정상적입니다. 아버지가 64, 어머니가 16세였는데, 3세 때 아버지를 잃고 16세 때 어머니도 잃었으며, 부모가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낳은 사생아로서 어릴 때부터 이복형제들에게 온갖 멸시를 당했고 천한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환경은 오히려 공자로 하여금 더 깊은 사상가로 만든 토양을 마련해주었고, 그는 모든 환경을 배움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모든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이 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누구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귀한 결단을 하고 나감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성공에는 물론 환경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인물들은 모두 어려운 환경에 긍정적으로,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에게 찾아온 고통스러운 환경에 대한 반응,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집안을 보면 이런 가정이 도대체 어떻게 믿음의 가정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정말 형편없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와는 달리 아이들을 많이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집안은 아이들이 자라기에 정말 좋지 않은 환경입니다. 온갖 갈등과 시기와 미움과 다툼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야곱은 정식 아내가 두 명이고 첩이 두 명, 즉 네 명의 아내들이 있으니 얼마나 복잡합니까? 또 아이들끼리 얼마나 복잡합니까? 성경이 그렇게 부끄러운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는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야곱의 집과 같이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열두 아들에 관련된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우리가 발견하기 원합니다.

 

 

1.   레아의 출산 (2931-35)

 

지난주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야곱은 일주일 사이에 두 자매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사이에 두 번을 결혼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라반의 계략 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상처를 받은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이겠습니까? 야곱도 상처를 받았겠지만,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단연 레아일 것입니다.

 

레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기는 아버지가 굉장히 귀찮아하는 딸입니다. 시집을 보내야 하겠는데 보낼 수 없으니 참 기뻐하지 않는 딸입니다. 골치 아프고 짐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들은 예쁜 동생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자기를 비웃거나 동정합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라헬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질투가 나는 동시에, 또 자기 때문에 시집을 가지 못하는 동생에 대해 미안함도 있고, 감정이 아주 복잡합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원하지 않던 딸은 이제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원하지 않는 아내가 됩니다. 야곱이 원한 여인은 당연히 레아가 아니라 라헬이었는데, 첫날밤을 지내고 보니까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레아와 결혼하고 계속 결혼생활을 해나가는 겁니다.

 

부부관계가 이렇게 시작이 되었으니까 야곱이 레아를 사랑했겠습니까?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사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레아를 하나님이 돌보아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1)

 

레아가 연속으로 네 명의 아들들을 낳는 것을 보면 좀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단 결혼했으면 남편이 아내에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지 않는 아내라도 가끔씩은 그 아내의 장막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남편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 레아의 장막에 들어갔고, 놀랍게도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레아의 태를 여셔서 자녀를 낳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임신이 잘되고 자녀를 잘 낳는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더 사랑하셔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레아를 위로하시기 위해 이렇게 아들들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아는 처음에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남편 야곱의 사랑을 얻는 데에만 집착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음으로써 남편의 마음을 얻어 보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2)

 

르우벤이라는 이름은 보라, 아들이라라는 뜻입니다. ‘드디어 내가 아들을 낳았다. 이것 좀 봐라.’ 하는 레아의 자랑스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아들을 낳는 것이 여인에게 축복인 동시에 남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내가 아들을 낳으면 남편도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 내 불행한 삶도 해결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아들이다하고 낳았는데 사랑을 못 받습니다. 그래서 낳고 또 낳습니다.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3)

 

시므온은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으면 낳을수록 레아는 더 깊은 외로움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자신이 가장 갈망하는 남자가, 자신이 평생 따라갈 수 없는 것을 가진 여자(그것도 자기 동생)의 품에 늘 안겨 있는 모습을 봐야 하는 하루하루의 삶이 어땠겠습니까? 곧 지옥이었습니다. 아기를 낳으며 사랑받는 아내가 되고자 했던 시도가 실패한 것입니다.

 

레아는 남편이 몸으로는 분명 자기 옆에 들어와 있고 잠자리를 함께 했지만 그의 마음은 자기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야곱의 사랑과 헌신은 늘 라헬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아기를 계속 낳음으로써 어떻게든 야곱의 마음이 자기에게 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4)

 

레위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연합함입니다.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 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 연합하겠지.” 지금까지는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서 자기와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 셋째 아들까지 낳아주었으니 조금 더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나와 연합하겠지.’라고 하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레아의 이런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레아와 연합하기를 거부합니다. 별로 레아와 연합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에 따라 레아의 마음은 늘 공허하고 그녀의 삶은 언제나 불행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35)

 

유다는 찬송함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아주 전심으로 주님만 바라본 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정말 주님만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지금 라반과 야곱과 레아와 라헬은 모두 가족들인데, 이들 사이에 전혀 믿음의 가정다운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 여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도 전혀 역사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상황인데, 놀랍게도 레아가 하나님 안에서의 영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레아 안에 행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못 봤지만 레아는 그것을 느꼈습니다. 레아가 하는 말에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처음 르우벤을 낳을 때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32)라고 합니다. 또 둘째 시므온을 낳을 때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33)라고 합니다.

 

레아는 특별히 하나님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단어는 엘로힘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문화에 신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이 있었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또는 요즘 학자들은 야훼가 더 맞는 발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레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야곱이 이야기를 해주었어야 알 수 있는 겁니다. 야곱이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하여 들었던 것을 레아에게 말해주었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을 레아에게만 이야기한 게 아니라 라헬에게도 이야기했고 라반에게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서 유일하게 레아만 여호와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레아는 혼란에 빠져 너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인격적인 은혜의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 레아는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라고 합니다. 셋째 레위를 낳았을 때는 약간 믿음이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남편만 이야기하는데, 넷째 유다를 낳은 다음에는 하나님만 바라보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라고 하는 이 고백에 뭔가 후련함과 당당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전에 세 아들들을 낳고 말한 것과는 다릅니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 믿음은 여호와께서 내가 이제 남편의 사랑을 받게 해주신다.’라고 하며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시는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이용한 겁니다.

 

르우벤을 낳을 때 주님께서 나의 고통을 살피시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구나. 이제는 남편도 나를 사랑하겠지.”(31)라고 했습니다. 시므온을 낳을 때에도 주님께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렇게 또 아들을 주셨구나.”(33)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를 낳고는 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 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34)라고 했습니다.

 

이 말들을 보면, 레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부른 이유는 아들을 주셨기 때문이고, 또 아들을 통해 남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갈망과 집착의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을 때마다 이제는 남편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라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네 번째로 유다를 낳고는 남편이나 아들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레아는 마음속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제는 남편이나 아들에게 두기를 그만두고 내려놓으며 오직 제가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라고 한 겁니다. ‘이제는 아들을 주시든 안 주시든, 남편이 나를 사랑하든 안 하든, 나는 주님을 찬양하겠다.’라고 놀라운 믿음의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아버지 라반과 남편 야곱은 레아 자신에게서 인생을 빼앗아갔지만, 자신을 무시하고 미워했지만, 그녀는 결국 하나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 새로운 인생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레아의 입장에서 보면, 결혼했는데도 사랑받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항상 남편이 자기를 볼 때마다 차가운 눈길로 보고, 자기 동생도 자기를 볼 때마다 경멸하는 눈길로 볼 때 얼마나 비참합니까? 또 야곱은 동생 라헬만 사랑하는 것을 볼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너무 괴로웠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포기하거나 공격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레아는 포기하거나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참 놀랍습니다. 모든 괴로움을 자기가 견디면서 하나님께 나아가, 이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간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결코 무슨 완벽한 신앙이 아닙니다. 레아의 신앙이 무슨 완벽한 신앙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그냥 단순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 삶에도 위기가 많이 찾아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위기가 닥칠 때 우리가 열심히 생각하고 뛰어난 아이디어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겉으로 보면 기도하기 전이나 기도한 다음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목소리가 조금 쉴 수도 있고 얼굴이 조금 붉어질 수도 있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는 별 변화가 없어도 영적인 세계에서는 엄청난 대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지금 변화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이 지금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회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2.   라헬의 질투 (301~2)

 

언니 레아가 연속해서 4명의 아들을 낳는 것을 보고 라헬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조카가 생겼다고 좋아합니까?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1)

 

자기는 아기를 아무리 갖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는데 레아는 계속 낳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시기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실 근본적으로는 야곱이 두 아내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문화에서는 일부다처제는 당연히 불법이 아니고 아주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중동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아무리 그것이 괜찮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이 바로 일부다처제입니다.

 

물론 야곱이 이렇게 두 아내를 두게 된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속아서 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하나님의 질서가 깨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내 중 하나인 라헬의 불같은 시기와 질투입니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 언니는 아들을 넷이나 낳았는데, 훨씬 더 건강하고 예쁜 자기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패배감이 라헬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라헬이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겁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렇게 합니까? 라헬이 원래부터 이렇게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라헬이 지금 아기를 못 낳는 것이 야곱이 그것을 원하지 않아서 그런 겁니까? 남편에게 이런 식으로 대들며 나 죽겠다하고 위협을 한다고 아기가 생깁니까? 알면서도 이렇게 한다는 것은 라헬도 얼마나 괴로운 입장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운 순간에 레아는 믿음으로 나아갔는데, 라헬은 인간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격이 무너지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되면,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다고 하거나 성령의 불이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해주십니다.

 

그러나 자기가 느끼는 대로 분노하고 시기하고 자기 마음대로 나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 늘 함께 있지만 자기가 벽을 쳐서 그것을 못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계셔도 마치 성령이 떠나신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공격하고 물어뜯고, 그저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라헬의 말을 들은 야곱은 또 어떻게 반응합니까?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2)

 

야곱도 화가 나서 라헬의 말을 받아치며 공격합니다. 평소의 야곱 같았으면 아마 조금만 더 참아봅시다.’라고 할 수도 있고, 능글능글 하면서 아유, 화를 내니까 더 예쁘네!’라는 식으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내심도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의 가정에는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거나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거기 있는데 그들이 그것을 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고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보면 됩니다. 특히 가족과의 관계를 보면 됩니다. 싱글 청년들은 룸메이트와의 관계나 친구와의 관계를 보면 됩니다.

 

충분히 넘어갈 수도 있는 사소한 일 때문에 주변 사람이 자꾸 미워질 때, 괜히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날 때, 누가 무슨 말 한 마디만 해도 민감해져서 분노가 일어날 때, 그럴 때에는 사실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나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소망이 가득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게 특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고갈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컵을 뒤집어놓아서 그렇습니다. 똑바로 놓아야 은혜의 폭포수를 받을 수 있는데 뒤집어놓으니까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개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맘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 맘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자녀를 두신 분들은 내가 낳은 자식인데도 내 마음대로 됩니까? 안 됩니다. 심지어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희어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내 몸인데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내 자식인데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듣고 내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일이 잘 안 되거나 다른 사람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막 분노한다면 사실은 그게 교만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은 딸을 원하는 가정이 많은데, 옛날 같으면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았다고 화를 내고, 또는 딸을 원했는데 아들을 낳았다고 분노한다면, 그것도 교만입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정치권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열을 받을 때가 많으시죠?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지나쳐서 너무 열을 받아 뭘 확 던져서 깨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교만입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분들은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졌다고 열 받아서 집어 던지고 깨뜨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교만입니다. 다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하는데 안 된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래야 하고, 국회의원도 이래야 하고, 대통령도 이래야 하고, 심지어 하나님도 이래야 하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못 믿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잘 안 된다고 분노하면 그것은 하나님 필요 없고 내가 하나님이다. 내 맘대로 내가 하겠다.’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교만이고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폭발하고 분노하면 해결이 됩니까? 그래서 해결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뭔가를 집어던져서 깬다고 해결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결이 됩니까? 그 바닥난 마음, 고갈된 상태, 파산한 마음의 상태 그대로 주님 앞에 그냥 나아가는 겁니다. 포장을 잘해서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이게 접니다.’ 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나에게서 지금 주님의 은혜가 고갈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채워주시도록, 뒤집어져 있던 컵을 바로 놓는 겁니다.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성령께서 은혜의 단비로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3.   인간적인 방법의 사용과 그 결과 (303~8)

 

자기에게 문제가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대신 남편에게 분노하며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 전가시키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3)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보던 게 아닙니까? 이렇게 먼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16:2). 야곱의 할머니입니다. 그러나 사라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을 때, 하갈로부터 고통을 당하게 되고 자신의 존귀함에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마음 아픈 일도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헬은 그러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4-6)

 

라헬의 여종 빌하가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그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십시오. 단은 원한을 풀었다라는 뜻입니다. 빌하가 또 둘째를 낳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어떻게 짓습니까?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7-8)

 

납달리는 경쟁함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아이들 이름을 이렇게 전투적으로 짓습니까? 아이 이름을 원한을 풀었다라고 짓고는 , 원한을풀었다야, 이리로 와라. , 경쟁아, 이리로 와라.’라고 합니까? 그리고 이게 무슨 억울함을 푼 것이고 경쟁하여 이긴 것입니까? 실질적으로 따져도 4:2입니다. 그리고 레아는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고, 라헬은 자기 종이 낳은 자식들이니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런데도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라헬은 그렇게 자기 종이 아들을 낳았어도 만족이 안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써서 아들을 낳았지만, 라헬의 마음은 더 답답하고 더 미칠 지경이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아이를 낳으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막상 빌하가 둘을 낳으니까 더 답답해집니다. 마음에 평안이 더 없습니다. 오히려 언니를 향한 질투심이 더 올라갑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지금 라헬의 문제가 뭡니까? 진짜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자기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안에 있는 문제를 보지 못하고 자꾸 문제의 원인이 밖에 있다고, 남들 때문에 이렇다고 하며,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면서 인간적인 방법을 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한쪽이 100% 잘못하고 한쪽이 100% 잘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잘한 부분과 잘못한 부분이 다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100% 맞고, 저쪽은 100% 틀렸다.’라고 갈 때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몰아붙여도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답답해집니다. 그리고 문제는 더 꼬이고 복잡해집니다. 무엇보다 자기 마음에 평안이 없어지기 때문에 지옥 같은 삶이 계속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시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 자꾸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기분과 내 감정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이 복잡해집니다. 나의 잘못을 돌아보고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순수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때, 그때에만 문제가 해결됩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런데 뭘 기도합니까? 지금 내가 기도하는 제목들을 잘 점검해보십시오. 보통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아니면 어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주님, 길을 열어주십시오. 환경을 바꿔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당연히 그것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환경이 바뀌고, 길이 열리고, 좋은 길을 만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도록, 주님, 상황도 변화시켜주시면 좋겠지만, 무엇보다 저를 변화시켜주십시오. 저의 속사람을 변화시켜주십시오. 제가 제 맘대로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저를 다스려주십시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 즉 자기가 열심히 하는 자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의지하는 자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할 때 내 답을 가지고 하나님께 결재 받기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직 주님만 잠잠히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레아가 유다를 낳고서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버지에게 짐만 되었던 딸인 레아,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던 레아였지만, 놀랍게도 레아가 믿음의 고백을 하며 낳은 이 아들 유다를 통해 그 후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허락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무릎 꿇으며 나아감으로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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