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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가정에 계속되는 불행의 의미" (창 27:41-46)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6 (9/06/2020)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LGOHAKiBWjQ?t=1885

 

 

202096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6

믿음의 가정에 계속되는 불행의 의미

(창세기 2741~46)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어떤 개그맨이 유행시킨 유행어 중 인간이 아니무니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전혀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이 아니무니다.”라고 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실수를 안 한다면 완벽하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실수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가 곧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수를 할 때 대가를 치르거나 괴로움을 당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실수를 한 그 자체가 아니라, 실수를 했는데 그것을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를 계속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보면 이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결코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실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까? 무수히 실수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이어가는 야곱도 마찬가징딥니다. 그들은 분명히 많은 실수를 했고, 잘못된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고, 어떤 사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왜 그런가? 왜 어떤 사람은 쓰임을 받고 어떤 사람은 그냥 사라지는가? 사실 일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들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별로 크게 취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에 쓰임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사라지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로 이 세상의 것을 움켜쥐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고난이라는 과정입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꽉 잡았고 이제 성공해서 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전부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배우는 것은, ‘내가 그 동안 믿음으로 살지 않고 내 꾀와 고집으로 살아온 결과가 이것이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땅에는 정말 아무 것도 붙들 것이 없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붙들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해 다시 일어서게 되는데,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어떤 사람보다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그의 삶의 여정을 보면 은혜 그 자체입니다. 은혜 없이는 야곱이 없습니다. 나중에 이집트의 바로 왕 앞에 서서 자기 인생을 가리켜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거기에는 그를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끈질긴 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원래 비열한 사람, 발뒷꿈치를 잡는 사람, 사기꾼이라는 뜻의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합니다.

 

이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결코 몇 천 년 전에 일어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야곱을 죽이려는 에서 (41~42)

 

야곱은 쌍둥이 아들 중 둘째입니다. 게다가 형 에서에 비해 신체적으로 열등했습니다. 물론 그도 힘이 꽤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보면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에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형은 사냥하는 사람이었고 성격도 남자다웠습니다. 그 당시 인기가 있었던 남자의 스타일은 털이 많고 짐승 같은 사람이었는데, 에서가 바로 그런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도 그를 더 선호했습니다.

 

에서는 마치 요즘의 국가대표 같이 대단한 운동신경과 강함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야곱도 어느 정도 신체적인 힘이 있었지만 그는 동네에서 잘하는 수준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좋지 않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강한 집념으로 온갖 악조건을 이기고 인간 승리를 쟁취했다고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런 것이 정말 승리이겠습니까? 오히려 야곱이 얼마나 거짓된 사람인가, 또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복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이제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도 받았고 장자권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제는 다 됐다. 이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아버지 집에 있는 모든 재산이 자기의 것이 됩니다. 자기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제 자기를 우러러보며 자기 말을 듣게 될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1)

 

야곱의 계산에 의하면 그는 이제 높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장자의 축복을 자기가 받고 형이 못 받았으니까, 형은 자기 앞에서 굽실거리며 무언가를 더 얻어내기 위해 타협을 해오는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도 재벌인 자기 앞에 아부하기 위해서 줄을 서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계승 다툼 끝에 자기가 차기 회장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이 자기 앞에 와서 죽 줄을 서는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형 에서는 마치 미친 짐승처럼 야곱을 죽이겠다고 날뛰기 시작합니다. 에서는 진짜 분노하면서, 재산 같은 것은 필요 없고 오직 야곱을 죽이기만을 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상당히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호탕하고 남자다운 것은 좋은데,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와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뭡니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됐지.’ 하고 뉘우치면서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에서도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는데, 자기가 잘못한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만 계속 생각하며 그것만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 에서는 야곱을 죽이겠다고 하는데 언제 죽이겠다고 합니까?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41). 그런데 심중에 이르기를”, 즉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연세가 많아서 곧 돌아가실 테니까, 돌아가시기만 하면 죽이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야곱이 이때 여기를 떠나서 20여년 있다가 돌아오는데, 그러니까 이삭은 20년 이상 더 삽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곡할 때가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뭡니까? 실제로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뜻보다는,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오래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빨리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식으로서 말이 안 되는 거빈다.

 

분노로 인해 야곱을 죽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자기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버지도 빨리 죽어줘야 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고 뭐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 아버지입니까? 그런데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야곱을 죽이겠다고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입니다.

 

에서는 정말 사고뭉치 같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가끔 농담할 때 유명한 신화에 나오며 뭐든지 손을 대면 고쳐지는 마이더스(미다스)의 손을 빗대어, 손을 대기만 하면 고장 나는 마이너스의 손을 이야기합니다. 에서가 그와 같습니다. 에서가 끼기만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2)

 

지금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한다는 소리를 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서 에서가 야곱을 죽여 한을 풀려 한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야곱에게 속았던 한을 풀겠다고 하는데, 살인을 통해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에서는 굉장히 단순한 사람입니다. ‘야곱을 죽이기만 하면 내 한이 풀린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문제가 많이 일어날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생각인 동시에, 아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야곱을 죽이면 한이 풀립니까? 살인이 모든 것을 해결해줍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이 있지 않습니까?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이 헤롯인데,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안디바)입니다. 자기 형제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던 세례요한을 죽였을 때 시원해지고 한이 풀렸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소식을 듣고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망상에 빠질 정도로, 해결이 전혀 안 됩니다.

 

요즘 접촉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미국에는 가족끼리 지내는 시간이 많은데, 한국에는 가족끼리 뿔뿔이 흩어져 지냅니다. 아침에 흩어졌다가 밤에 간신히 만납니다. 그래서 서로 접촉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학생은 학생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는 사람대로 바쁩니다. 그런데 요즘 코로나 때문에 계속 집에만 같이 있어야 하니까 자주 싸운다는 겁니다. 그래서 못 살겠다.’라고 한다는 것이 신문 기사에까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가족이 그렇게 안 좋은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어떤 사람이 나를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섭섭할 수도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괴롭힐 때 나도 탁 맞받아치고 공격하면 시원해질 것 같습니까? 한이 풀립니까? 그럴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또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밟아버리고 해치워버리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한이 풀리고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착각입니다. 오히려 더 마음이 더 괴로워집니다. 그것이 계속 내 마음을 괴롭히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억울해도 당하는 것, 억울해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억울하고 괴로워도 주님만 바라보며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인도해주십니다. 알아서 가장 좋은 길로 처리해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것은,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리브가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분명히 41절에서 심중에즉 마음속에 아버지 돌아가실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가 야곱을 죽이겠다.’ 하고 자기 혼자 생각한 것인데 리브가가 알았습니다.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렸다는 것은, 누군가가 리브가에게 그 말을 듣고 전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만 하면 야곱을 죽이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떠들고 다녔다는 겁니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야곱이 나를 속였어. 그 놈을 죽여 버릴 거야.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 계셔. 돌아가시면 죽일 거야.’라고 떠들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들은 사람 중 누군가가 이거 큰일이구나하고 리브가에게 와서 알려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에서는 정말로 경솔한 사람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 그것도 자기 쌍둥이 동생을 죽이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그런데 살인을, 그것도 자기 동생에 대한 살인을 짐승 사냥하는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고 보통 일이 아닌데, 에서는 그것을 또 막 떠들고 다녔습니다. 에서는 참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당연히 말을 조심해야 하지만, 특히 화가 났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화가 났을 때는 말이 막 나갑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객관성이 떨어집니다. 어떤 사람에게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사람에 대해 제3자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화가 났을 때는 이미 이성을 잃었고 생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객관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정확히 말할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그 말한 것 때문에 나중에 분명히 후회하는 일이 생깁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나 혼자 생각했으면 몰라도 누군가에게 말했다면 그것 때문에 나중에 분명히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 손해입니까? 자기 손해입니다.

 

제가 이전에 다른 교회에 있을 때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서 분노하며 다른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을 공격하며 화를 쏟아 부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이 당사자에게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를 한 겁니다. 결국 사람들 사이에 다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열을 받아서 이야기했던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괜히 알지도 못하고 분노해서 관계만 깨졌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걸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것을 너무 기뻐하시겠습니까? 기뻐할 존재는 딱 하나입니다. 사탄입니다. 사탄은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을 취소하지 못하니까 이 땅에서라도 지옥 같이 살도록 미움을 부추깁니다. 그래서 아군끼리 서로 총을 쏘게 만듭니다. 적군을 향해 총을 쏴야 하는데 아군끼리 총을 쏘며 난리를 치니까, 저 뒤에서 사탄이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도 말을 조심해야 하지만, 특히 화가 났을 때 조심해야 하고, 화를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하면 이것이 정말 사실인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도 아닌 것을 가지고 화를 내면 나중에 얼마나 우스워지겠습니까?

 

억울하고 괴로워도 일단 참고 인내하면, 나중에 분명히 잘 풀립니다. 누가 봐도 화를 낼 상황인데 화를 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오히려 기도하고 나아간다면, 나중에 혹시 상황이 더 안 좋아진다 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은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의 사람이다.’ 하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이 풀어주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특히 화가 날 때, 예수님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 그리고 돌아가신 예수님. 돌아가시면서까지도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주십시오.’ 하신 그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도 인내하고 용서할 때 분명히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2.   에서를 피해서 도망가는 야곱 (43~46)

 

지금까지 야곱의 삶을 드라마로 표현한다면, 리브가가 PD(감독)이고 야곱이 주연 배우인 드라마였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각본대로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마음대로 되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감독이 되셔서 각본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붙들고 있었던 게 뭡니까? 리브가의 지혜, 즉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리브가의 자기를 향한 맹목적 사랑(편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리브가는 더 이상 야곱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이 도와주었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도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 있게 날뛰며 큰소리 칠 때 보면 뭔가 뒤에 의지하는 것, 믿을 만한 것이 있을 때입니다. 큰소리치는 사람을 보면 뭔가 믿을 것이 있습니다. 집안이 좋든지 학벌이 좋든지 돈이 있든지 건강이 있든지, 뭔가 자기가 믿을 만한 것이 있으니까 큰소리를 칩니다.

 

야곱이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 있게 살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자기 어머니 리브가의 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리브가의 든든했던 빽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43-45)

 

여기서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라고 한 말을 보면, 리브가가 에서를 미워했던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에서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훨씬 더 사랑했습니다. 지금 야곱에게만 하는 이야기니까 본심이 나오는 건데, 그러니까 에서도 리브가가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붙들고 있었고, 여기서 리브가가 뭐라고 합니까?

야곱아, 이제는 나도 더 이상 너를 지켜줄 수가 없구나. 에서로부터 너를 보호해줄 수가 없다. 그러니 먼 곳으로 도망쳐라.’

 

리브가 생각에 피신하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 자기 오빠인 라반의 집이었습니다. 역시 자기 친정집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거기가 야곱의 무덤이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자기는 가장 안전한 곳이 자기 오빠 집, 즉 친정집이고 거기에 피해 있으라고 했는데,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리브가의 계획을 사용하셔서 야곱을 훈련시키시는 훈련장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가서 정말 혹독한 인생 수업을 받게 됩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어땠습니까? 어머니 그늘에 있었습니다. 어머니 밑에만 있으면 다 괜찮았습니다. 아버지는 자기를 조금 덜 사랑하시지만 어머니가 사랑해주시니까 괜찮다고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해 야곱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야곱이 도망갈 때 그가 청년이었거나 많아야 40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계산을 해보면 이때 야곱은 이때 70대였습니다. 70대가 되도록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바로 왕 앞에 설 때의 나이 110세를 거꾸로 계산해보면, 이때 77세가 나옵니다. 다르게 계산하면 70대 초반이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70대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에서도 야곱도 70대였는데, 옛날에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결코 젊은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때까지 계속 70대 남자가 엄마, 엄마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야곱은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 리브가 때문에 정작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혼자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사이에 끼어서 내가 해줄 게, 내가 해줄 게라고 하면 하나님 앞에 홀로 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 사람을 통해서 가면 되는 겁니다. 그 사람 뒤에 숨으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을 의지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분명히 리브가는 믿음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정작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자기가 의지하던 그 사람, 자기가 의지하던 그것을 거두어가십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을 또는 그것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환경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선 자기의 진짜 모습을 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굉장히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우리가 머리를 복잡하게 굴릴수록 삶이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움켜쥐고 자랑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한 것을 붙들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공급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삶의 목적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미련해 보이고 바보 같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인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짜로는 믿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믿는 것이 자기 돈, 은행의 어카운트, 능력, 학벌, 집안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것을 자꾸 움켜쥐려고 노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느끼지만, 욕심 때문에 하고 마는 겁니다.

 

바로 그런 기질이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사실 이게 다 야곱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꾸 그런 것들을 의지하며 나아가려는 야곱의 삶에서 끈질기게 그가 붙드는 것들을 없애기 시작하십니다. 바로 그 훈련과정이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까지 야곱은 자기 신앙이 없고 모두 엄마 신앙이었습니다. 리브가의 신앙만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가 홀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진짜 신앙을 가져야만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야 진짜 장자가 될 수 있고 그래야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그것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도 홀로 서는 신앙이 참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의 기치 중 하나가 오직 말씀으로였습니다. 그 당시 중세 때 가톨릭교회에서 라틴어로 성경을 읽고 설교했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말씀을 신자들의 손에 들려주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국 교회의 병폐 중 하나가 뭔가 하면 너무 목회자를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들은 열심히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듣는 것으로 끝나고 말면 누구의 신앙입니까? 자기 신앙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신앙입니다.

 

몇 만 명 모이는 유명한 대형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데, 거기 교인이 되면 자기도 무슨 엄청난 레벨의 신앙인이 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신앙은 각자의 몫입니다.

 

여기든 어디든, 말씀이 선포되고 성경공부를 하고 여러 목회자나 부흥강사들의 말씀을 들었으면, 듣고서 위대한 신앙인이 되거나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귀한 신앙인이 되는 게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삶에서 실천할 때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련의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각자 훈련하며 하나님 앞에 홀로 서야 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코로나 사태가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됩니다. 시험대이기도 하고 기회도 됩니다. 말씀을 그냥 듣고서 목회자가 그러니까 그런가 보다하는 식의 신앙이 아니라, 정말 그 말씀을 붙들고 그렇지, 내가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하며 나가서 정말 그렇게 살아보며 연습하고 훈련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 때문에 편하게 하려면 마냥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온라인 예배로 하시는 분들은 잠깐 보고 그냥 끝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너무 편안하니까 다음에 시간 날 때 보면 되지.’ 하며 안 하고 있다가 아무 때나 시간 날 때 틀고 보면 얼마나 편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할 때 과연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신앙이 되겠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자기 신앙을 자기가 키워야 하는데, 말씀대로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야곱처럼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의 조상, 그것도 이스라엘로 변화됩니다. 다른 사람이 이스라엘이 되지 않고, 야곱 같이 비열한 사람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야곱의 삶은 정말 부족하고 형편없는 우리도,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겠다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46)

 

지금 리브가가 이삭에게 가서 말하는 이 내용은 사실이긴 하지만 야곱을 도망시키기 위해 이삭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서 둘러대는 말입니다. 야곱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나, 리브가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다라고 말할 때 헷 사람의 딸들은 에서가 가서 마음대로 결혼하고 온 여인들,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26:34)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사실인데, 그들이 전혀 믿음이 없는 여인들이기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습니다(26:35).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인 사실입니다. 야곱을 보내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를 죽이려는 에서로부터 피신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대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니까 빨리 도망시켜야 합니다.’라고 하면 이삭이 믿겠습니까?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야곱이 아내를 구하는 문제를 구실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니까 야곱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말하면, 이삭은 여전히 에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동생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놓쳐버린 에서에 대해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이삭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럴 리가 없다. 내 아들 에서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죠? 요즘도 많이 쓰는 말입니다. 눈이 멀면 진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이 들리지 않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사기꾼 같던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뛰어난 조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뛰어난 훈련조교 두 사람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첫 번째는 에서이고, 두 번째는 라반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집에서 떠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떠나지 않았으면 계속 엄마, 엄마하면서 엄마 신앙으로만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떠나게 만듭니다. 비록 살인하려고 했지만, 그의 실수와 잘못된 악한 생각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그의 악함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집을 떠난 뒤 하나님은 라반이라는 리브가의 오라버니를 준비하셔서 야곱을 혹독하게 훈련시키십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힘들 때마다 어땠겠습니까? ‘엄마~’ 하면서 엄마 품에 안기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죽이겠다고 날뛰는 에서가 아직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에서와 라반, 두 사람 때문에 야곱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에서나 라반은 야곱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는데 실제로는 원수였습니다. 그들의 역할이 뭡니까? 야곱으로 하여금 철저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훌륭한 훈련조교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상이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자기 기질과 악함에 따라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나타난 결과는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에서와 라반이 없었더라면 믿음의 조상 야곱(이스라엘)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미우시죠? 치가 떨리시죠?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기 위해 보내신 훈련조교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빚으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기 위해서 지금 그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조교로 붙여주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또 지금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면,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고통스런 상황을 통해 나를 빚어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이 없이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끝까지 연단이 하나도 없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이며 그분의 목적을 위해 쓰임 받는 사람이라면, 내 삶은 절대로 나의 뜻대로 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다른 사람, 특히 미워하는 사람과 바른 관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상황이 어렵다면,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하나님을 붙들며 나가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애쓰며 나아갈 때, 분명히 연단의 과정을 거친 후에 풍성한 삶을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역사가 우리 삶에 충만하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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