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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MXDxjL3Id7g?t=2168

 

 

2020719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9

소중한 것을 내버린 어리석은 자

(창세기 2527~34)

 

[들어가는 말]

 

저는 평소에 좋은 글이 있으면 나름대로의 예화 파일을 만들어서 저장해놓습니다. 오래 전에 저장해놓은 글들을 살펴보니까, <단순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저장해놓은 글이 있었습니다. 그 글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줄여라.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1만 개의 물건을 갖고 있다고 한다. 먼저 서랍 속부터 정리하라. ‘이 물건을 지난 3년 동안 쓴 일이 있나?’ 스스로 물어보고 없다면 과감하게 버리라. 그 다음 책상, 옷장, 부엌, 창고 순서로 정리하라. 복잡한 환경 속에서는 어떤 좋은 생각도 떠올릴 수 없다.”

 

부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정하라. 티베트 속담에 충분히 갖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부자다.’라는 말이 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거야.’라는 생각은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 행복과 부유함의 순서를 뒤바꾸자. 값비싼 옷을 사는 등, 자기를 위해 돈을 쓸 때 부자로 느껴질 거라 생각하는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자선단체나 돈을 꼭 필요한 곳에 주고 나면 부자가 된 기분이 들고, 실제로 기부는 지출을 줄여 주는 효과를 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루 한 가지에만 최선을 다하라. 돼지 두 마리를 한꺼번에 안고 뛰면 서로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해서 시간과 노력이 더 든다. 불필요한 일은 제쳐 두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시작하라. 하루에 딱 한 가지만 우선순위에 올려놓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라.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만족하려고 노력하라.”

 

정말 그렇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과 안 중요한 것 또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을 잘 구분하여 살면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과 안 중요한 것을 구분할 줄 몰라서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말았던 사람이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것을 오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너무나 다른 두 아들과 편애하는 부모 (27~28)

 

이삭이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쌍둥이였지만 완전히 다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고 자라났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7)

 

본문은 에서를 익숙한 사냥꾼이며 들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27). 쉽게 말해서, 당시 에서가 야곱에 비해 훨씬 더 잘나가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고대 사람들의 직업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바로 사냥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남성다움이 매력이었고, 그때는 강한 힘이 지배하는 사회였으니까 남성다운 것이 중요했고 남성다운 사람의 대표 격이 바로 사냥꾼이었습니다.

 

사냥꾼들은 한 번 나가면 며칠이고 들에서 보내면서 짐승을 추격하여 사냥을 해옵니다. 요즘처럼 총으로 잡는 게 아니고 단순히 칼과 활을 사용해서 짐승을 잡으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니까 굉장히 몸이 재빠르고 날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힘이 또 장사이어야 했습니다. 짐승과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에 힘도 좋아야 하고 빠르기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잡은 짐승을 죽인 다음 목에 턱 걸치고 돌아오는 모습을 여자들이 보면 요즘 말로 오빠!’ 하면서 인기를 끄는 겁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차분)해서 장막에 거주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며 잠만 자고 놀고 쉬기만 했다는 게 아니라, 그는 목축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집에 있으면서 양을 돌보고 목축을 했습니다.

 

나중에 보면 알지만, 야곱은 아주 두뇌가 빠르고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막 하는 게 아니라 양을 치는 것도 계획적으로 생각을 해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야곱은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4차 산업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인정을 받았을 텐데, 고대사회의 눈으로 보면 에서에 비해 야곱은 그저 별 볼 일 없는 사람,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에서가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우리는 아브라함이 엄청난 거부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거의 재벌 수준이었습니다. 5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이삭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남겨줍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쌍둥이 아들이던 에서와 야곱은 이러한 재벌 집의 아들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재벌 3세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대에 재벌 집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게다가 그 모든 권한을 이어받을 장자 에서는 그야말로 태어나보니까 부자라고 하는, 횡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많은 복을 받은 에서가 사냥꾼이 됩니다(27). 나중에 26장을 보면, 아버지 이삭이 농사도 하면서 더 엄청난 거부가 됩니다. 그러니까 이삭 집안은 목축업도 하고 더불어 농업도 했던 가문입니다. 목축업과 농업을 꽉 잡고 있던 부자 가문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에서는 목축도 농사도 아닌, 사냥꾼이 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냥은 대개 두 가지 목적으로 합니다. 먼저, 가난한 사람들이 음식이 없어서 밖에 나가 주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합니다. 하지만 에서는 집안이 워낙 부자였기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 사냥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사냥꾼이 되었겠습니까? 다른 목적 때문입니다. , 그는 재미를 위해 사냥을 한 것입니다.

 

요즘도 사냥(hunting)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냥을 해본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스포츠가 사냥이라고 합니다. 축구, 농구 등은 아무것도 아니고 사냥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에서는 바로 그런 사냥의 재미에 빠져서 사냥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 재벌 가문의 상속자로서 에서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엄청난 규모의 목축과 농사 현장을 둘러보면서 파악하고, 또 많은 종들을 이끄는 요즘의 CEO 같은 사람으로서 경영 수업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재벌들은 자녀들에게 경영 수업을 시킵니다.

 

또 그때는 따로 제사장이 없던 시대였으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집안의 대표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제사 드리는 법,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시고 계속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그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짜릿한 스포츠인 사냥을 즐기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27절에서 에서를 익숙한 사냥꾼이라고 표현하는데, ‘익숙한(skillful)’이라는 말은 타고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연습해서 숙달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어릴 때부터 신앙을 지키는 일, 하나님 말씀을 붙드는 일, 또 막대한 재산을 잘 관리하고 경영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쾌락을 위해서 사냥을 즐기는 일에만 몰두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집에 머무는 시간보다는 들판에 나가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고, 성경은 그러한 에서를 가리켜 들사람”(27)이라고 부릅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이 말을 “a man of the open country”라고 번역했습니다. 꼭 들에만 있던 게 아니라 여기저기 아무 데나 막 다니던 사람, 마음대로 쏘다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서에 대해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에서가 들판을 다니면서 아무 짐승이나 잡아 끼니를 때우고 밤에는 아무 땅에나 대충 깔고 자면서 생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요즘 권력자 집안 자제들이나 재벌 2, 3, 4세들이 고급 호텔이나 클럽이나 유흥가를 드나들며 술에 취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가끔 신문에 나오지 않습니까? 에서가 바로 그런 생활을 한 겁니다. 그는 이곳저곳 경치 좋은 사냥터에 별장을 마련해놓고 다니면서 지냈거나, 요즘 식으로 하면 최고 5성급도 넘는 최고 호텔에서 가장 좋은 스위트룸의 단골손님으로 살았던 겁니다.

 

혈기 넘치는 남자가 낯선 곳에서 홀로 자유로운 밤을 맞게 되면, 웬만한 영성 훈련을 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밤에 거룩하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잠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신앙의 훈련을 잘 받지도 않은 채 그저 자기 육체의 쾌락을 따라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놀던 에서는 어땠겠습니까?

 

돈 많은 재벌 집 아들인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다니면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돈을 뿌려대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고, 이곳저곳 술집을 다니고 여자들을 만나고 어울리면서 방탕하고 쾌락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직접적으로 성경에 안 나오니까 에서에 대해 너무 박한 표현이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2634절을 보면 갑자기 에서가 가나안 여인 두 명과 결혼해서 데리고 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26:34-35)

 

부모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나가서 그렇게 이곳저곳 다니며 어울리고 흥청망청 놀던 여자들 중 두 명을 골라서 자기 마음대로 결혼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붉은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사건에서 야곱이 비열한 차원이 아니라, 장자권을 막 넘긴 에서의 모습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래 그렇게 아무렇게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만 살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8)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합니다.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이 두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각각에 대해 서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삭과 리브가는 두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했겠습니까?

 

남성다운 기질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소위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는 에서에게는, 인간적인 능력과 육신적 강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또 야곱에게는 그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임한 사람임을 알려주면서, 그러니까 더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섬기며 살라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인간적인 강함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고, 야곱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께서 자비와 사랑으로 택함을 받은 것이므로 겸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과 리브가는 두 아들을 놓고 각각 한 사람씩 편애를 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한 아들씩 정해서 이삭은 에서를,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 명을 훨씬 더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식을 키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준으로 편애했습니다.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의 특성을 따라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지 않고, 자기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면서 자기 기준에 맞는 아들을 사랑한 겁니다.

 

이삭은 에서가 잡아오는 들짐승 요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에서를 사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물론 이삭이 육식을 너무 좋아해서 에서가 사냥해온 짐승을 잡아 고기를 요리해주는 것이 좋아서 에서를 사랑한 것이라기보다는, 에서가 자신이 생각하는 아들 상에 딱 맞고 자기 취향에 꼭 맞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사랑한 겁니다.

 

이삭 자신이 조용하고 집에 머물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평소에 활발한 사람이 부럽다고 하며 살았는데, 마침 그런 아들 에서가 나온 겁니다. 에서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다니고 남자답게 다니니까 마음이 훨씬 끌렸습니다. 그래서 끌렸습니다. 반면 야곱은 너무 조용하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머리를 굴리고 집에만 있으려고 하고,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쩌면 야곱은 마치 이삭이 자기를 보는 것 같아서 별로 안 좋아했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23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었기 때문에 야곱을 사랑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 역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야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이 큰아들을 편애하니까 그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을 것이고, 또 작은아들이 늘 집에 있으면서 자기를 늘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좋아한 겁니다.

 

어느 부모이든 자녀가 둘 이상이면 똑같이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편애는 자녀에게 상처를 줍니다. ‘내적 치유책들을 보거나 강의를 들으면, 상처의 대부분이 권위의 인물인 부모와의 잘못된 관계에서 옵니다. 특히 부모가 편애를 하면 자녀는 온갖 상처를 다 받습니다. 물론 저희 같이 자녀가 하나인 가정은 걱정이 없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라고 걱정이 없는 게 아닙니다. 자녀가 자기 마음에 맞는 방향으로 끌어가고 자꾸 집착을 하면 자녀가 상처를 받습니다.

 

남편이 큰아들을, 아내는 작은아들을 편애하는데, 그럴 때 소외된 자녀가 상처를 받지만 편애의 대상이 된 자녀도 상처를 받습니다. 참 놀랍고 신기합니다. 편애를 받는다고 상처를 안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편애를 하는 그 이유를 보면, 아이를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이 우선해서 편애하는 겁니다. 자기 기준으로 아이들을 보니까 편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내 기준으로 보면 자꾸만 끼리끼리가 됩니다. 내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만 뭉치니까 끼리끼리가 되는 것입니다.

 

짐승의 고기를 좋아한 이삭이 에서의 기질을 인정하고 , 참 잘한다.’라고 했기 때문에 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질 기회를 놓쳤습니다. 야곱도 부모가 그를 격려하면서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라는 것을 가르쳤다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장자권을 가로채고 축복을 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택함을 받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20년이 넘는 오랜 연단과 환난을 겪은 후에 하나님께 믿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에게서, 특히 아버지 이삭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이미지와 사랑을 느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2.   붉은 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는 거래 (29-34)

 

그렇게 에서와 야곱이 갖고 있던 사고방식은 한 사건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사건입니다. 어느 날 야곱이 죽을 쑤고 있는데 에서가 아주 지친 상태로 집에 돌아오게 됩니다. 에서는 죽을 보자마자 당장 좀 달라고 말을 합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29-30)

 

야곱이 일부러 장자권을 얻기 위해서 수를 쓰기 위해 죽을 끓였다기보다는, 문맥을 볼 때 야곱이 자기도 배가 고파서 먹으려고 죽을 끓이고 있는데 마침 그때 에서가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에서가 배고파 죽겠다고 하며 죽을 달라고 과장을 섞어가며 말합니다. 이때 야곱은 머리가 빨리 돌면서 기회는 이때다하며 재빨리 주제를 바꾸어서 말합니다.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1-32)

 

사실 죽게 된 게 아닌데 얼마나 가볍게 보고 있습니까? 30절에 붉은 것”(red stew)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히브리어 원어로 붉은 죽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경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놀랍게도 이 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단어가 에돔입니다. 그런데 붉은도 역시 에돔입니다. 25절에서 에서가 태어날 때 붉다고 한 것도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날 때부터 붉은 에돔이었고, 지금은 야곱이 만든 붉은 죽에돔 에돔을 먹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에돔에돔 에돔을 먹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언어유희인데, ‘에돔/붉은/은 에서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에서는 결국 을 먹기 위한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육신의 만족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육체의 만족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고, 그의 후손 역시 그렇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이 에돔민족입니다.

 

반면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갖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이 장면에서 본문은 두 사람을 아주 극명하게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장자권을 갖고 있는 에서는 뭐가 없습니까? 에서는 장자권이 있고 죽이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죽이 있고 장자권이 없습니다. 서로 자기에게 있는 것을 사용해서 없는 것을 가지려고 시도합니다. 지금 에서는 가장 소중한 장자권을 잃더라도 자기 배를 채워줄 수 있는 죽을 원하고 있고, 야곱은 자기 배를 채워줄 수 있는 죽을 포기하더라도 소중한 장자권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의 인생은 여기에서부터 분명하게 갈립니다. 무엇이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맏아들의 권리를 원하는 것과 죽을 원하는 것은 둘 다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장자의 명분은 앞으로 시간이 걸려야만 누릴 수 있는 만족이고, 죽은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만족입니다. 그래서 기다릴 수가 없고 지금 당장 장자의 권리를 팔아서라도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야곱이 죽을 끓인 것은 배가 고파서 먹으려고 그런 것이었겠지만, 그는 장자의 명분(맏아들의 권리)을 위해서라면 배고픔을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서는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는 것이 더 중요했고, 야곱은 맏아들의 권리를 얻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인생관이자 가치관이었습니다. 에서는 미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야곱은 미래를 생각합니다. 에서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고, 야곱은 비전이 있습니다. 에서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이 하루하루 아무렇게나 자기 육신이 원하는 대로 육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인생이었고, 야곱은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미래를 위해 지금 참고 오늘을 준비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은 어떻습니까? 지금 당장 배를 채우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까? 내 만족을 위해 사는 인생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압니까?

 

여러분, ‘최고’(best)의 가장 큰 적이 무엇입니까? ‘최고의 가장 큰 적은 최악’(worst)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좋은 것’(good)입니다. ‘great’의 적은 ‘bad’가 아니라 ‘good’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최고를 얻으려면 지금 힘들어도 인내하고 희생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bad의 상태에 머물러도 안 되지만, good의 상태에만 머물러도 최고를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3)

 

31절에서도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했는데, 여기서도 오늘 내게 맹세하라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입니다. “오늘을 강조합니다. 나중이 아니라 오늘 하라고 합니다. 지금 당장 법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맹세를 시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34)

 

이것을 보십시오. 일단 떡과 팥죽을 먹고 맹세하며 장자권을 넘기라는 것이 아니라 맹세를 먼저 하라고 합니다. 맹세하고 장자의 권리를 받는 딜(deal)이 성사되자, 그제야 떡과 죽을 에서에게 줍니다. 야곱은 아주 치밀한 사람입니다.

 

반면, 에서는 아주 즉흥적이고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34절에서 그가 한 일이 다섯 개의 동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먹다, 마시다, 일어나다, 가다, 가볍게 여기다.’ ‘생각하다’, ‘고민하다라는 게 없습니다. 그냥 즉흥적으로 막 나가는 사람입니다. 먹고 마시고 일어나고 가고 가볍게 여깁니다. 특히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라는 말을 보면, 이 모든 것의 책임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야곱이 꾀를 내어 에서가 배고픈 틈을 타서 장자의 명분을 달라고 흥정을 벌였지만, 에서가 맏아들의 권리를 정말 중요하게 여겼다면 그런 흥정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가 고파도 참았든지, ‘,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느냐?’라고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32)라고 합니다. 그런 장자권 같은 것은 별로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당장 죽을 달라고 합니다. 야곱이 맹세하라고 하니까 맹세까지 하면서 장자권을 넘겼습니다(33).

 

에서는 당장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해서 장자의 명분도 가볍게 내어놓습니다. 그것을 별로 중요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중에 장자의 권리를 잃게 되는 것은 야곱이 자기를 약삭빠르게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그렇게 내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결국은 에서 자신의 탓입니다. 누구를 탓할 입장이 아닙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자꾸 남의 탓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있는데, 엄격하게 따져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일이 안 되는 게 정말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이라면, 모든 사람이 다 안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환경이 나쁘고 다른 사람이 못된 짓을 했는데 그럴 때도 잘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나아갈 때 잘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의 탓이나 환경 탓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가 그렇게 되도록 놓아둔 거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하면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때 우리 인생이 아름답게 될 수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결코 돈을 주고 사거나 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장자권이 자기가 원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내버리는 사람에게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업신여기고 팥죽을 먹기 위해 팔아버렸을 때, 그는 장자에게 약속된 축복을 포기하고 내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장자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자에게 그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에서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건장한 사냥꾼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고 인기를 끄는 것에 만족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현재만을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 육신을 믿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단한 복을 누리도록 해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당장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과, 비록 힘들어도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코로나 사태를 지나고 있는 지금이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습니다. 테스트의 기간이 되고 있습니다. 당장 편안하고 배를 채우는 데 만족하는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어려움이 닥쳐오고 힘들더라도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미래에 주실 복을 바라보고 준비하면서 살 것인지?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아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곱의 길이 아니라 에서의 길을 선택해서 그리로 가고 있습니다.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좀 더 나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을 포기해버립니다. 지금 당장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돈을 더 벌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신앙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당장의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얼마든지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마치 신앙이 액세서리나 여가활동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나면 하고 시간이 없으면 안 하는 식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에서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팥죽 때문에 장자권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자의 삶입니다. 그것이 잠시 허기를 면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영원히 배부르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신앙이 에서의 신앙입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열매도 못 거두며, 헛된 신앙생활에 불과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할 것은, 우리 각자가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살면 우리가 지금 힘들어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당장 어려움이 있어도 참아내며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붉은 죽이 아니라 장자권을 택하고 나아감으로 결국 그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바로 그렇게 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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