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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cLWGUZDTVgM?t=1524

 

 

20201011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31

출산 경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구인가

(창세기 309~24)

 

[들어가는 말 - 굶주린 마음의 상처]

 

한국에서 오래 전에 13녀의 셋째 딸로 자라며 아버지의 사랑에 굶주렸던 한 여자 성도가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의 무관심 속에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계속 100점을 맞아오니까, 처음으로 아버지가 기뻐하면서 무릎에 올리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 후부터 이분은 공부에 집착했는데, 오직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빈 마음이 채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부작용으로 공부를 못하는 사람들이나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을 향해 무시하는 경향이 생겼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분노하는 상한 내면의 증상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결혼을 했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에서 도무지 만족이 없고 무능력해 보이는 남편을 향해 온통 불평과 비난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니까, 분명히 믿는 사람이었지만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통 가시가 돋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절망 가운데 빠져 있다가 교회에서 열린 내적치유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굶주린 마음의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며 나아가 치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여성도와 아주 비슷하게 굶주린 마음의 상처를 갖고 있었던 성경의 인물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뭡니까? ‘집착하는 삶입니다. 굶주린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뭔가에 집착합니다. 야곱은 무엇에 집착했습니까? 먼저는 장자권에 집착했습니다.

 

야곱은 어린 나이에도 의문이 들어 스스로 질문했을 것입니다. ‘왜 아버지는 형만 사랑하고 나는 사랑하지 않으실까? 그것도 같은 날에 단지 몇 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인데 왜 그러실까?’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비록 몇 분 차이라도 내가 장자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작된 집착은 내가 장자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저 장자권을 얻을 수만 있다면...’ 하는 것이었고, 어느 날 형이 헐레벌떡 와서 죽을 달라고 조르자 얼른 장자권을 팔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장자권에 대한 집착은 결국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한 집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굶주린 마음은 장자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서 온 굶주림이지, 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온 굶주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자기도 모르게 굶주린 마음의 상처를 갖게 된 사람들은, 종종 그 이유를 찾아서 나름대로 고치거나 소유하게 되면 사랑을 경험할 것으로 생각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집착하는 가운데 더욱 사랑받지 못하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받지 못해서 굶주린 사람은 남들보다 사랑에 훨씬 더 민감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은데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을 갈구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사랑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굶주린 마음의 소유자는 사람에게도 집착합니다. 야곱은 어떤 집착을 보였습니까? 사람에 대한 집착을 보였고, 특히 자신의 굶주림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집착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에게 집착한 것이고, 나중에 라헬이 낳은 요셉과 베냐민에게도 집착합니다.

 

야곱이 갈구했던 것은 사실 아버지의 사랑인데, 라헬에게서 아내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구했기 때문에 집착했지만, 아무리 집착해도 채워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라헬에게서 채워지지 않으니까 다시 요셉과 베냐민에게로 그 대상이 옮겨집니다.

 

 

1.   레아의 상처와 그 결과 (9~13)

 

이러한 야곱의 태도로부터 아주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 레아입니다. 물론 아버지 라반으로부터 먼저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끼워 팔기식의 결혼을 통해 엄청난 상처를 입었습니다. 레아는 자기가 원하는 결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끼워 팔기 식으로 결혼하는 것을 원했겠습니까?

 

어릴 때 자라면서 아버지나 가족들로부터 그렇게 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 텐데, 항상 동생과 비교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컸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남편도 아주 표시가 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결국 레아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녀 출산입니다.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었습니다.

 

레아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찾았고, 조금씩 변화되어 가다가 유다를 낳고서는 남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포까지 했습니다(29:35). 그리고 감사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레아는 기쁨이 사라지게 되고 다시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동생 라헬이 자기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 두 아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자기가 낳은 네 명의 아들들(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은 보고 싶어서 자주 자기 장막에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여종을 통해 단과 납달리를 낳으니까, 야곱이 이제는 그리로 더 자주 가는 겁니다. 그래서 레아에게는 이미 네 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40이었다가 42가 되니까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레아는 수적 우세를 압도적으로 더 늘리기 위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유다를 낳고 하나님을 향해 귀한 신앙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하나님의 방법이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채 라헬과 똑같은 인간적 방법을 쓰게 됩니다.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9)

 

라헬이 자기 여종 빌하를 통해 두 아들(, 납달리)을 낳은 것처럼, 레아도 자기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첩으로 주어 아기를 낳게 합니다. 이러한 레아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어 실바가 두 아들을 낳게 됩니다.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10-13)

 

복되도다’, ‘기쁘도다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은 것을 보면 레아가 그래도 신앙이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굉장히 긍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행한 과정을 가만히 보면, 이 야곱의 가정이 과연 믿음의 집안인지, 야곱이 정말 믿음의 조상이 맞는지, 이 사람이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헷갈립니다. 이런 가정이 무슨 믿음의 집안이고, 이런 사람이 무슨 믿음의 조상이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이상하고 자격미달인 야곱과 가족들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자격이 없는데 주시는 선물이 은혜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많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십니까?

 

레아와 라헬이 직접 낳은 아들들은 물론 혈통으로 야곱의 아들들이지만, 레아와 라헬은 자기 여종들을 통해 얻은 아들들도 자기 아들로 입양을 했습니다. 이걸 보면, 빌하가 낳은 단과 납달리, 그리고 실바가 낳은 갓과 아셀은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사랑받는 아들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양어머니 라헬과 레아의 남편 사랑 탈취 작전과 경쟁의 수단에 불과한 겁니다. 얼마나 안 됐습니까?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두 여인은 잘못된 마음으로 경쟁하며 그렇게 한 것인데, 그리고 거기에 많은 상처와 갈등이 있었을 것인데, 이것이 참 놀랍습니다. 이것은 혈통을 통해서만 아니라 입양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많은 민족이 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육신의 후손으로부터 여러 민족이 나온다는 뜻도 되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여러 민족이 혈통이 아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다양한 민족이 그를 통한 주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 사도 바울이 잘 해석하여 기록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같이 혈통으로는 아브라함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짐으로써 그의 후손으로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거나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 나중에 성인이 되어 주님께 나온 분들도 계십니다.

 

또 우리는 가정환경이 모두 다를 겁니다. 다른 가정들을 보면서 자신의 부모님은 다른 부모님들처럼 사랑해주지 않는 것을 느끼며 자란 사람도 있고, 자신의 성장 과정이 다른 사람처럼 정상적이거나 순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부자가 아니고 가난한가? 아니, 부자도 아니고 그냥 보통 중산층 정도만 되면 되는데 왜 이렇게 가난한가?’ 하며 괴로웠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어릴 때 받은 상처나 충격으로 괴로워하며 살아온 사람, 특히 부모님이 그냥 말로 하는 게 아니라 집안이 날아갈 정도로 엄청나게 부부싸움을 해서 그것을 보면서 자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는 그런 경우가 없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쓸 데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는 쓰레기통이 없다.” 하나님 나라에는 쓰레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쓰레기 인생이 아닙니다. 아무리 힘들었어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고귀한 인생입니다.

 

어떤 과정으로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왔든지 간에, 어떻게 주님을 만났든지 간에,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도록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종에게서 태어난 단, 납달리, , 아셀이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나올 때를 생각해보면, 넉넉하거나 잘될 때가 아니라, 대개 어려움과 고통을 겪을 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간절히 나아오게 됩니다.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의 어떤 순간도 다 사용하셔서, 지금의 내가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십니다.

 

 

2.   합환채 사건 (14~16)

 

레아와 라헬은 자매이면서도 갈등관계에 있었는데, 한 사건으로 인해 갈등이 더욱 심해집니다.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4)

 

합환채라는 것은 요즘 식으로 하면 사랑의 묘약같은 것입니다. 열매가 노란 토마토같이 생겼다고 하는데, 남자가 먹으면 성적 충동이 강해지게 되고 여자가 복용하면 곧바로 임신하게 만든다고 고대시대에 알려져 있던 식물입니다. 더 자세한 것은 저에게 묻지 마시고(?)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루는 르우벤이 들에서 바로 그 합환채를 발견하여 들고서 어머니에게 갖다줍니다. 그런데 라헬이 그것을 어떻게 알고는 쫓아와서 달라고 요구합니다. 르우벤이 야곱의 맏아들이지만 당시 십대 소년 정도였을 텐데, 들에 있는 많고 많은 풀들 중에서 이것이 뭔지를 어떻게 알고 가져왔습니까? 그러니까 르우벤은 어릴 때부터 조숙하고 그런 쪽으로 밝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레아와 라헬은 어떤 어머니들이기에 르우벤이 들고온 합환채를 서로 가지려고 싸웁니까?

 

이런 것을 보면 이런 것이 무슨 믿음의 가정인가 하는 의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도저히 믿음의 가정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또 어떻게 르우벤 같은 아이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로 보입니까? 이상한 쪽으로 밝히고 그런 쪽으로 빠진 아이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남편과의 잠자리를 위해 합환채를 놓고 거래하는 레아와 라헬이 믿음의 여인들입니까? 레아가 라헬에게 한 말을 한 번 자세히 보십시오.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15-16)

 

이걸 보십시오. 야곱은 아무 선택권이 없습니다. 이러라면 이러고 저러라면 저럽니다. 처음에는 야곱이 라헬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서 결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레아와 결혼해야 했고, 두 여종들도 첩으로 얻었습니다. 자기가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라헬과 결혼하면서 처음에는 뭔가 되는 것 같았지만, 사실 원하는 대로 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여자들의 싸움에 끼어서 노예가 되어, 이러라면 이러고 저러라면 저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한심한 모습입니까? 이런 게 믿음의 조상의 모습이라는 말입니까? 한 여인을 위해 7년을 일하고 또 7년을 일하면서 사랑과 열정으로 불타는 사나이인 줄 알았는데 이 얼마나 허망한 모습입니까? ‘내가 당신을 샀다. 그러니 나에게로 들어와라.’ 하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들어가는 노예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업을 할 때 자기가 보기에 괜찮아 보여서 사업을 시작합니다. 자기 판단대로 사업을 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그 쪽으로 빠져듭니다. 사실 처음에는 나름대로 각오도 합니다. ‘내가 이 사업만 잘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십일조도 많이 하고 선교헌금도 많이 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참 좋은데 이 일만 잘 되면이라는 부분이 쉽지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하다가 갑자기 공부하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저기 붙기만 하면 주님을 잘 섬겨야지.’라고 하는데, ‘붙기만 하면이 잘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저 직장만 되면 하나님을 잘 섬겨야지.’라고 하는데 저 직장만 되면이 안 되는 겁니다. ‘내 자녀가 잘 풀리고 학교를 잘 가면 자유롭게 하나님을 잘 섬겨야지.’라고 하는데 자녀가 잘 풀리면이라는 부분이 잘 안 되는 겁니다.

 

또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더라도, 자기가 원래 생각한 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길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참 이상해서 더 큰 욕심이 생깁니다. ‘이것만 되면 내가 하나님을 잘 섬겨야지.’라고 하는데, 그게 되고 나면 다른 더 큰 게 보입니다. 그러면 요번까지만 내가 빠지고 다음부터 잘 섬겨야지.’라고 하는데, 다음이 오지 않습니다. ‘이번만빠지면 될 줄 알았는데 그 이번만이 또 생깁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런 식으로 나를 옭아매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신앙생활을 더 잘 해야지라고 하는데 그렇게 못하게 만들고 방해하는 것을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지금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나를 바보처럼 만드는 것, 한심한 모습으로 만드는 것을 빨리 끊어내야 합니다.

 

이번만’, ‘이것만 되면’, ‘다음에와 같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말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뭔지를 잘 봐야 합니다. 그게 바로 유혹입니다. 계속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 과거의 실패를 들추어내는 것, 분별력을 흐리게 하는 것들이 다 사탄이 주는 유혹입니다. 그런 것들을 빨리 끊을 필요가 있습니다.

 

 

3.   레아와 라헬의 출산의 원인 (17~24)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17-21)

 

결국 이 치열한 자녀 출산 경쟁에서 이긴 최후의 승자가 누구입니까? 아들 여섯에 딸 하나를 쑥쑥 잘 낳은 레아가 최후의 승자입니까? 아니면 아무리 그래 보았자 남편의 사랑은 내가 독차지했다.’라고 하는 라헬입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에게 이삭,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 등, 손이 귀한 집안에서 이렇게 아들을 많이 낳은 야곱이 최후의 승자입니까? 아니면 딸들을 이용해서 자기 이득을 잘 챙긴 라반입니까?

 

이들 중 아무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최후의 승자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보십시오. 결국에 합환채를 손에 넣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라헬입니다. 그런데 합환채를 가지고 라헬이 아기를 낳았습니까? 못 낳았습니다. 아기는 누가 낳았습니까?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합환채 같은 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만 가지면 되겠지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누가 생명을 줍니까? 레아는 18절과 20절에서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하는데, 실제로 하나님이”(17) 주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해주시는 겁니다. 결국에 가서는 라헬에게도 아들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2-24)

 

이것도 잘 보십시오. 여기도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도 들으셨고, 하나님이 라헬도 생각해주셨습니다. 합환채 때문에 아들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습니다.

 

라헬과 레아는 합환채도 사용하고 여종들도 사용해보았지만, 결국 자기들의 계획대로 되어 자녀를 생산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또 들으시고자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최후의 승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과 레아와 라헬과 그 여종들의 깊은 갈등과 괴로운 관계 속에서 아들들이 태어났지만, 또한 그들의 불순종과 비신앙적인 모습 가운데 경쟁 속에 태어난 아이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계획이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것처럼 살고 있던 야곱의 가족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키시고 열두 지파를 일으키시는 놀라운 계획을 하나님이 지금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미움과 갈등과 혼란과 경쟁 속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조용히 당신의 선한 역사를 이루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때로 우리가 나름대로 계획하고 온갖 방법을 써보며 열심히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애도 씁니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생각한 대로 이루어져서 기뻐하기도 하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속상해하며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지 않은 일까지도 선으로 바꾸셔서 당신의 선한 계획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거기에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자기 꾀로 잘못 살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지도 모르면서 거기에 사용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아는 감격과 기쁨 속에서 살면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굶주린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던 야곱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는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인 것이 사실입니다. 야곱이 만일 굶주린 마음에서 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의 극단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바로 앞에 섰을 때 그가 한 말 그대로 험악한 삶,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망가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채우다 채우다 채울 수 없는 지경이 될 때 하나님을 찾았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것을 깨달으며 보게 된 것입니다. 루스 땅(벧엘)에서도 그랬고, 나중에 얍복강 나루에서도 그렇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의 체험은, 나중에 디나 사건으로 세겜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 그가 다시 한 번 벧엘로 올라가 예배하는 결단을 하게 만듭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만 참된 위로와 만족을 얻을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이 쌓이면서 믿음의 조상, 그것도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윗 왕도 야곱처럼 굶주린 마음의 상처가 있던 사람입니다. 8형제 중 막내로 집안에서 취급도 못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몇몇 대상에 집착했었고, 그것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맛보게 된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상하게 여인들에 대해 집착하고, 자식들에 대해 집착합니다.

 

다윗의 시편들 속에는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을 나눈 고백들도 많이 나옵니다.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인격이고 친밀한 교제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참 예배를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제와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뜨거운 만남과 그런 시간을 통해서, 인간 아버지 이새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굶주린 마음이 치유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상처를 치유받은 결과물이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많은 시편들입니다. 다윗 하면 떠오르는 것이 예배자의 이미지인데, 그가 경험한 깊은 예배는 굶주린 마음을 치유했습니다.

 

다윗처럼 굶주린 마음의 소유자였던 야곱 역시 하나님을 향한 깊은 예배를 체험하고 치유 받았습니다. 예배는 모든 상처의 치유책이지만, 특히 굶주린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져 들어오는 예배는 가슴 벅찬 경이로움과 감격이며, 그럴 때 예배는 강렬한 치유의 현장이 됩니다.

 

지금 문화가 많이 변하고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했지만, 인간은 그대로입니다. 몇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은 똑같습니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또는 행복하게 하는 것 역시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우리의 굶주린 내면은 과학기술이나 물질이나 어떤 향락의 재미로도 채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굶주린 마음은 오직 사랑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해주는 권위의 인물의 사랑으로만 채워집니다. 그런데 최고의 권위의 인물이 누구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으로만 굶주린 마음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치유 받고 자유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는 것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뜨겁게 맛보는 그 자리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한 시간 정도 와서 참다가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로 나아가게 되면 이런 굶주린 마음뿐 아니라 거절감과 분노와 두려움과 열등감과 죄책감과 이 모든 상처에서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예배가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참된 예배자로 늘 나아감으로 모든 상처를 치유 받고 세상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귀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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