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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다" (창 28:10-22)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7 (9/13/2020)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H3u2RMIPEtc?t=2251

 

 

2020913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7

인생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다

(창세기 2810~22)

 

[들어가는 말]

 

올해 코로나 사태 때문에 전 세계 스포츠가 모두 중단되었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한국 같은 곳은 그래도 조금 더 일찍 시작했고, 미국도 지금 NBA Playoff가 올랜도에 모여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홈앤드어웨이(Home and Away)로 해야 하는데 한 군데에 모여서 하고 있습니다. 관중이 없이 하는데, 관중석에 화면들을 설치해놓고 관중들이 화면을 통해 소리를 내며 응원하니까 꼭 진짜 같습니다.

 

저도 스포츠를 좋아하는데, 스포츠 리그들이 오랫동안 중단된 사이에 티브이 방송국이나 유튜브(YouTube)에서 옛날에 했던 경기들을 많이 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중 2년 전인 20186월 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과 독일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유튜브에서는 자기가 많이 보는 것과 비슷한 동영상들이 자동으로 뜨게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축구를 몇 번 보았더니 한국과 독일 경기가 뜬 겁니다.

 

당시 세계축구연맹(FIFA) 랭킹 57위이자 이미 앞의 두 경기에서 2패를 당하여 조 최하위에 있던 한국이, 전 대회 우승 팀이자 FIFA 랭킹 1위였던 독일을 상대로 2:0의 승리를 거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그냥 충격이 아니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이변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당시 세계 최강이던 독일이 축구 비주류이며 변방인 아시아의 국가 한국에게 무승부를 거둔 것도 아니고 패배, 그것도 무득점 패배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이 경기 전에 확률을 따져보았을 때 한국이 2:0으로 이길 확률보다 독일이 7:0으로 이길 확률이 더 높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경기를 보니까 독일 선수들이 엄청나게 슈팅을 많이 쏘아대는 겁니다. ‘야 이러다가 엄청나게 골을 먹고 이전에 5:0으로 질 때도 있었는데 정말 7:0으로 지고 창피를 당하는 게 아니냐?’ 하며 마음 졸이면서 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계속 골이 안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마지막 후반 추가시간에 한국이 두 골을 넣어서 아시아 팀 최초로 독일을 이겨 역사에 기록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독일은 지금까지 조별 예선에서 한 번도 탈락한 일이 없었다는데, 한국이 독일을 탈락시켰으니까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번 코로나 때 유튜브에 독일과의 경기 하이라이트 동영상이 떠 있어서 보았는데, 다시 봐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물론 독일 사람들은 아주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졸이면서 생중계를 보던 2년 전의 그때와, 이번에 비디오로 보던 때의 마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생중계 때는 굉장히 떨리고 긴장되었는데, 비디오로 볼 때는 이미 이긴 것을 알고 보았기 때문에 아주 편안하게 보았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안다면, 사실은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나도 별로 감동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안해서 잠이 안 올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미래를 모르게 해주셨다는 것은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 아니라 사실은 굉장히 감사할 일입니다. 미래를 미리 알고 그것을 잘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록 미래가 불확실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의 삶이 더 흥분되고 기대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불과 몇 분 뒤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지금의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어려움은 찾아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통에는 뜻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뜻은 놀라운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은 결코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만 된다는 점을 오늘 본문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1.   길을 떠나 잠을 자던 중 하나님을 만난 야곱 (10~11)

 

야곱은 장자의 권리를 사모했고 또 아버지의 축복을 사모했습니다. 자기가 몇 년 뒤에 태어난 동생이었다면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동생이었으니까 몇 분 차이로 늦게 태어났으니 얼마나 아쉬웠겠습니까? 그래서 장자의 권리를 사모하고 또 아버지의 축복을 굉장히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마침 에서가 배가 고파 왔을 때 붉은 죽으로 장자의 권리를 샀으며, 또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됐다. 이제부터는 좋은 일만 생길 거다.’라고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 축복의 길로 들어섰습니까? 축복은커녕 오히려 에서가 지금 자기를 죽이겠다고 날뛰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길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0)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갔다는 것에 대해 <말씀의 삶> 같이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그냥 보면 옆동네로 갔나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제주도에서 중국 연변까지 갔다고 할 때 우리는 감이 오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 남쪽 제주도에서 저 북한까지 지나 연변까지 갔나?’ 그런데 한국 지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제주도에서 연변까지 갔어요.’ 하면 , 옆 동네로 이사 갔구나.’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모르고 보면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간 것이 요기에서 요기로 간 줄 알 수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멀리 저 남쪽에서 저 북쪽까지 간 겁니다. 이제 야곱은 에서를 피해서 집을 떠나 700마일이나 떨어진 하란으로 길을 떠납니다.

 

이게 무슨 비극입니까? 지금 형제끼리 죽이겠다고 하는 집안이 제대로 된 집안입니까? 그것도 이게 믿음의 집안이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믿음의 조상인 이삭의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바로 그것을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1)

 

야곱이 길을 떠나서 하란으로 향해 가다가 해가 저물자 한 곳에서 잠을 자게 되는데, 무방비 상태로 들판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지금 맹수가 달려들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에서가 알고 쫓아와서 자기를 죽이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이때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또 얼마나 처량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인가? 부모님 집에서 편하게 잘 지내던 내가 왜 이렇게 된 건가? 앞으로 내 삶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식으로 외삼촌의 집에 무사히 갈 수 있겠는가? 혹시 가더라도 이런 상태로 제대로 살 수나 있고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내 삶에 정말 미래가 있을까?’

 

이런 수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연 하나님은 계시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 같긴 한데,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가? 왜 그 하나님이 나에게는 안 나타나시는가?’

 

야곱은 그토록 복을 받고 싶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흥정도 하고 사기도 치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믿음의 길로 가려 하다가 망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의 미래와 운명을 자기 스스로 개척해보려고 애를 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야곱이 그렇게 흥정하고 딜을 하고 속이고 노력을 했을 때 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집을 떠나, 특히 어머니 품을 떠나, 들판에서 초라하게 또 불안하게 잠이 들어 있을 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이 이토록 외롭고 힘들게 되어서야 야곱을 만나주시는 겁니까? 왜 진작 그에게 나타나셔서 에서, 너는 잘못됐다.’ 하고 꾸짖으시고 야곱이 옳다.’ 하고 보호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왜 이렇게 실패하고 도망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서야 만나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지금이야말로 야곱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마음자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야곱이 그 동안 집에서 살았을 때도 항상 거기 함께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실 계속 야곱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없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늘 함께 해주셨지만, 야곱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복을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되기를 원하시지, 우리가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은 결코 우리가 열심히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열심히 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은혜를 받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대가일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복을 주십니까? 사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지금도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받지 못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복을 받습니까? 그냥은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추구하던 잘못된 방식을 버릴 때, 참 모습을 가리던 가면들을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올 때, 그때 복을 주십니다. 사실은 복을 그때 주시는 게 아니라 이미 주고 계신데, 그때에야 그것을 깨닫고 자기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가 쏟아질 때 그릇을 바로 놓아야 물을 담을 수 있는데 거꾸로 놓으니까 한 방울도 들어가지 못하던 것이, 바로 놓을 때 들어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내가 못 받고 있는 겁니다. 바로 놓을 때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어떤 자격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과 흥정을 하려고 듭니다. 예를 들어, 헌금을 할 때 감사함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흥정을 합니다. ‘하나님, 내가 미리 $1,000을 드릴 테니까 $10,000을 주십시오. 믿습니다.’ $10,000을 주시니까 감사해서 $1,000을 드리는 것이지, $10,000을 노리고 미리 $1,000을 하는 마음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너무 바쁜 것을 아시죠? 그래도 내가 이렇게 봉사를 해드리고 있습니다. 그걸 아시고 특별히 복을 주세요.’ 이런 식으로 뭔가를 열심히 해서 흥정을 하여 얻어내려는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뭔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항상 주고 계십니다. 내가 못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언제 받을 수 있는가? ‘주님 밖에는 정말 의지할 데가 아무 데도 없구나.’ 하고 깨달을 때, 그런 처절하고 간절한 고백을 할 때, 베풀어주신 은혜를 받을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나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게 없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때, 바로 그때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이 집을 나와 들에서 누워 있는 야곱의 상황처럼, 맹수가 와서 공격하거나 형 에서가 와서 칼로 찔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에 처한 야곱과 같이, ‘정말 나는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구나하고 깨달을 때, ‘나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살 수 있구나하고 깨달을 때, 바로 그때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이것은 꼭 물질적으로 어렵게 되어야 한다거나 힘든 문제가 생기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어쩔 수 없는 게, 그런 상황이 되어야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일이 엄청나게 잘 풀리고 있을 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저 자신부터 해서, 모든 게 잘되고 있는데 간절히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금식기도를 하는 경우가 어디 많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 여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는구나!’

 

그런데 어려운 문제가 생겼는데도 전혀 마음이 가난해지지 않고 전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아직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을 못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는 바로 가난한 마음과 애통해하는 마음을 가질 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히 무너지고 회의하며 , 나는 안 되는구나하면서 간절히 하나님만 바라볼 그때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어려운 상황에 있으십니까? 우리 모두 코로나 때문에 어렵지 않습니까? 세계가 다 어려운 이때에, 또는 특별히 나에게 임한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렵다고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때가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때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질 수 있는 때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복을 누릴 수 있는 때입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약속 (12~15)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2)

 

야곱은 그날 밤 꿈을 꾸는데, 계단이 땅에서부터 하늘에까지 닿아 있는 꿈이었습니다. 천사들이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고, 주님께서 그 위에 서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보통 꿈이 아닙니다. 항상 꾸는 꿈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꿈,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꿈입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3-14)

 

주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하시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놀라운 약속들을 주시는데 모두 일곱 가지입니다. 여기에 먼저 세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 ‘네가 누워있는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13).

둘째,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져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이다’(14).

셋째,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자손 때문에 복을 받을 것이다’(14).

 

여기까지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도 하신 약속입니다. 그런데 15절에 나온 네 가지 내용은 야곱에게만 주어진 새로운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5)

 

첫째,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둘째,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켜줄 것이다.’

셋째, ‘내가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넷째, ‘내가 너에게 한 이 모든 약속들을 이룰 때까지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이 약속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나는 네가 죽을 때까지 너와 함께 살겠다.’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시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후에도 계속 천국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도 죽을 때까지 계속 함께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부터 정말 원하시던 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그저 복을 받고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야곱과 항상 동행하시면서 야곱도 그것을 깨닫고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3:20, 새번역)

 

늘 함께 먹으면서 같이 사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식구입니다. 가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가 너의 가족이 되어 주겠다.’라는 약속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무슨 비즈니스 거래하는 것처럼 네가 이거 해주면 나도 이거 줄 게.’라는 게 아닙니다. 가족관계를 원하십니다. 필요할 때는 찾고 필요 없을 때는 안 보는 관계가 아니라, 늘 함께 사는 관계, 어려우나 좋으나 늘 함께 사는 가족관계를 원하십니다.

 

부모와 자녀는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부모에게 자녀가 아빠 엄마가 이걸 나에게 해주면 나도 효도하겠다.’라고 하고, 부모도 자녀에게 네가 이걸 해주면 나도 이걸 하겠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비즈니스 관계가 아닙니다. 해주던 못 해주던, 어쨌든 함께 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자식이 잘되기 원합니다. 자기보다 자식이 잘되기를 원하는 게 부모입니다. ‘내가 더 잘되어야지 내 아이는 잘되든 안 되든 상관없다.’고 하면 비정상입니다. 또 자기가 자녀에게 해준 것을 계산해서 청구서를 주며 내놓으라고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이상한 부모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고, 자녀는 당연한 것처럼 부모의 것을 누리지 않습니까? 지금 사는 집도 사실은 부모님 집인데 내 집, 내 방, 내 음식이라고 우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말이 맞습니다. 부모님 것이 내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필요할 때는 부모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필요가 없을 때에는 마치 남인 것처럼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녀가 있다면, 진정한 자녀가 아닐 겁니다.

 

물론 필요할 때 찾고 필요 없을 때는 가서 자기 일을 하지만, 전혀 관계가 없다면 이상한 겁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서 희생하며 베풀어주고, 자녀는 그러한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공경하고 섬기는,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신앙생활인가? 무엇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그저 일주일에 한두 번, 한두 시간 정도 예배에 참석하고 여러 활동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보다 조금 더 열심히 해서 새벽기도나 수요예배에 참석하는 것? 그 정도도 아닙니다. 거기에 더 보태서,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 부르는 것? 그 정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까지 하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종교적인 활동을 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정말 24시간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우리가 늘 함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거나 성경 읽고 기도할 때만 크리스천이고 다른 것을 할 때는 내 방식과 내 생각과 내 고집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 있든지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조금 전 부른 찬양의 가사에서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와... 주님만 사랑합니다.’라는 것처럼, 내가 주인이 되어 내가 해보려 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 맡기며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겁니다. 그래야 삶이 제대로 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주인이 되면 얼마나 사고가 많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있을 때나 영적인 일을 할 때만 크리스천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 있든지 있는 바로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깨닫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네 몸을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내가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이며 예배의 처소임을 깨닫고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정말로 원하시는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대충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실은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은 예수 믿고 천국 간다.’가 아닙니다.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게 핵심이라면, 믿자마자 죽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 죽고 살아 있습니다. 사명이 있으니 사명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입니까? 쉽게 말해서, 내 혀가 바뀌는 삶입니다. 지금 어떤 언어가 내 입에 있습니까? 옆에서 하나님이 듣고 계시다면,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별로 안 좋은 것일 경우, 내가 느끼는 대로 마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아름다운 말을 해야겠다고 하는 겁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하는 겁니다.

 

내 손과 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지 생각하며, 내 손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을 가는 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삶이 바로 그것입니다.

 

 

3.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야곱 (16~22)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6-17)

 

하나님께서 꿈에 생생하게 나타나셔서 약속을 주시니까, 야곱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공포(fear)가 아니라 경외심(respect)입니다. 존경과 존중의 마음이 드는 겁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진심으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전에 아무리 자기가 흥정을 하고 속이고 애를 써도 하나님을 이렇게 생생하게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야곱은 이 꿈을 통해 받은 약속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이때 꾼 꿈과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꾸는 꿈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주로 꿈과 환상을 통해 계시해주셨습니다. 예언자(선지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기록하고 선포했겠습니까? 꿈과 환상과 음성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요즘에도 그러한 일들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뭐든지 가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늘날 주로 사용하시는 방법은 바로 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입니다. 여기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주어져 있지 않았으니까 환상과 꿈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말씀이 있는데도 환상만 쫓아다니다가 이상한 것을 보고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잘못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생생한 꿈을 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통해 뭔가를 알려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우리는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꿈을 꾸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영적인 꿈을 주셨을 때 그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꿈 의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을 전혀 보지도 않고 기도도 안 하면서 내가 꾼 꿈이 효험이 있다.’라고 꿈만 의지하면 문제가 됩니다. 꿈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최고의 통로가 된다면 문제라는 겁니다. 성경을 제치고 최고의 통로가 꿈이라면 문제이고 위험합니다.

 

어쩌다가 꿈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맞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그럴 때는 생사람 잡습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봅니다. 교회에서 한 형제가 자매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이 자매와 결혼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며 계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매는 전혀 그런 계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꿈을 꾸고 와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며 엉뚱하게 생사람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야곱은 잠에서 깨어, 자기가 자던 바로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며 하늘의 문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고백합니다(17). 그리고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는데 내가 알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여기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기와 함께 하셨는데 몰랐다고 고백합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18-19)

 

이전까지 야곱이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간접적인 말씀, 누구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 또 아버지 이삭을 통해 들은 간접적인 말씀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베고 잤던 돌을 세워 기름을 붓고 벧엘이라 이름을 짓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 돌을 베고 자면 입이 돌아가는데.’라는 것을 생각하는데, 그런 차원이 전혀 아닙니다. 거기에 얼마나 두꺼운 것을 해놓고 잤겠습니까? 성경이나 책 같은 것을 놓고 자도 머리에 쥐가 납니다. 그런데 거기에 얼마나 푹신한 것, 양털 같은 것을 놓고 잤겠습니까? 그러니 입이 돌아갔을까 봐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20-22)

 

여기 보면 야곱이 서원을 하는데, 하나님과 딜을 하며 조건을 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마음이 아마도 약간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의심스러워서 재확인을 받겠다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이런 약속을 듣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제가 이것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믿음이 적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믿음의 표시를 보입니다.

 

이전에는 그저 간접적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통해 들었고 멀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서 자신에게 생생하게 역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물론 아직 야곱의 믿음은 완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무슨 꿈 하나 꾸고 완전한 믿음이 됐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정말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작이 되는 사건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딸이 레고 조각들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본 엄마가 뭘 만드는지 궁금해져서 물었습니다. “, 우리 딸, 지금 뭘 만드는 거야?” “, 엄마, 조용히 해! 지금 교회를 만드는 거야.” 교회를 만드니까 조용히 하라는 말이 기특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엄마가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지?” 딸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예배하니까 조용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엄마,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다 졸고 있잖아. 그러니 시끄럽게 하면 안 되잖아.”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듣지만 별로 깨닫는 것이 없습니까? 성경을 읽어도 별 감동이 없고 잠이 안 오면 펼치는 수면제 같은 역할을 할 뿐입니까? 뭐가 문제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실종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며, 지금 여기서 내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의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치 벼락이 치는 것 같은 충격으로 말씀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물론 말씀을 늘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떠났는데 갑자기 벼락 치는 것처럼 오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믿음 안에서 계속 머물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충격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나를 찌르고 마음속을 파고드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전혀 긴장감 없이 편안하게 지냈는데, 믿음생활도 그냥 편안하게 적당히 했는데, 남을 거쳐서 간접적으로 전달되던 하나님의 말씀만 의존하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인가 고압 전류처럼 내 몸 속을 흐르는 엄청난 충격이 느껴집니다.

 

이상하게도 말씀을 듣기 전부터 눈물이 납니다. 성경을 펴기 전부터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기대감이 올라옵니다. 이전에는 나와 별로 상관이 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전부 다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이게 왜 그렇습니까? 성경이 달라졌습니까? 편집이 새로워졌습니까? 내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편안했으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어려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실은 그랬습니다. 제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닌 모태신앙인이지만, 매주 그냥 적당히 교회에 잘 다니며 하라는 대로 잘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인격적으로 주님을 뜨겁게 만난 때가 중학교 2학년 겨울수련회 때였습니다. 그때 가정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어린 마음이지만 진실로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제 마음을 만지시고 저를 바꾸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편안한 것만 추구하고 세상의 재미만 따라 살려고 하면,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망가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냥 두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간절한 마음이 생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시고 우리가 변화되게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때로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의 통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은 결코 완벽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간절한 마음,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그럴 때 바로 그곳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깨닫는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되고,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 되며, 그 약속을 붙들고 믿음의 결단을 내리게 되는 장소가 됩니다.

 

이처럼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지금의 불확실한 현실을 헤쳐 나가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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