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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고 받은 축복" (창 27:1-14)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4 (8/23/2020)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VfKshdpNcRM?t=1886

 

 

2020823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4

속이고 받은 축복

(창세기 2715~29)

 

[들어가는 말]

 

우리 가운데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거짓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라고 하시는 분은 손들어 보십시오. 한 분도 없을 줄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다 거짓말을 해본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한두 번이 아니라 아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에도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권 선교지에서 자기가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부모님에게 감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해하려는 거짓말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감안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알렸다가는 집안이 다 뒤집어지고 최악의 경우에는 교회에 못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한국도 불교 집안이나 유교적인 집안이면 교회에 다닌다고 할 때 난리가 나기 때문에, 일요일에 나갈 때 쉬어야지 어디 가느냐고 하면 학교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모님을 속인 것 때문에 마음이 괴롭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이런 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도 정당합니까?

 

성경에 보면 가끔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 두 명을 숨겨주었는데, 여리고 군인들이 와서 내놓으라고 했을 때 이미 떠났다고 거짓말을 해서 보호해준 경우가 있습니다.

 

또 출애굽기에 보면, 이집트에서 산파들에게 왕이 명령을 했을 때 산파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워낙 건강해서 빨리 아기를 낳아 자기들이 손을 쓸 수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약간의 거짓말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쁜 의도가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하는 거짓말도 잘못인가?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말은 남을 해하려고 거짓을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인 것, 남을 해치기 위해 남을 속인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볼 때 거짓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짜고 변장까지 해가면서 야곱은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속였습니다. 아무리 축복이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과연 앞을 못 보는 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속이면서까지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이것이 정단한지 의문이 듭니다.

 

 

1.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이삭

 

1)  영적으로 어두우면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지난주 본문에서 리브가는 야곱에게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받을 것을 권고합니다. 그래서 에서가 사냥하러 나간 사이에 야곱에게 염소의 좋은 새끼를 한 마리 가져오면 자기가 별미를 만들어서, 야곱에게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들어가라고 이야기합니다(9-10). 심지어 자기가 저주를 받더라도 그렇게 하자고 합니다(13).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리브가가 염소 요리를 해서 야곱에게 주어 들어가게 합니다(14). 그 다음이 오늘 본문입니다.

 

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자기가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니” (15-17)

 

먼저 리브가는 집에 있던 에서의 옷을 꺼내어 야곱에게 입히고(15), 야곱의 매끈매끈한 피부를 가리기 위해 그의 손과 목에 염소 털을 붙여서 변장을 시켜줍니다(16). 그리고 자기가 만든 별미와 떡을 야곱의 손에 들려서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가도록 합니다(17).

 

여기 보면 이 모든 행동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바로 리브가입니다. 리브가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야곱이 받을 수 있도록 아주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각본, 연출, 주연 모두 리브가인데, 이제부터는 야곱이 주연배우입니다. 야곱이 잘해야 합니다. 이제 야곱이 얼마나 연기를 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연기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리브가가 깜짝 놀랄 정도로, 아니 야곱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천부적인 연기의 실력을 보여줍니다. 타고난 배우와도 같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18-19)

 

그때는 다 장막이니까 야곱이 자기 장막에 들어와서 아버지!” 하고 불렀을 때 이삭은 뭔가 이상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목소리가 이상합니다. 그래서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뿐 아니라 짐승 한 마리를 사냥해서 잡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너무 빨리 돌아온 것도 이상합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0)

 

이건 완전히 거짓말 아닙니까? 사냥을 나가지도 않았는데 무슨 짐승을 잡고, 또 무슨 하나님이 도와주셨겠습니까? 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상황이 급하니까 야곱은 하나님까지 팔아 버립니다. 아무리 그래도 여전히 이상한 느낌이 든 야곱은 이번에는 가까이 오라고 합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1-22)

 

이삭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져서 자기에게 온 이 아들을 직접 만져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리브가와 야곱은 이미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평소에 늘 에서를 만졌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목과 손에 털을 붙이고 온 상태입니다.

 

이삭이 아들을 만져보니까 분명히 에서와 같이 털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은 염소 새끼의 가죽을 붙인 것이기 때문에 만져보면 뭔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털과 염소 털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그런데 리브가가 얼마나 정교하게 붙였는지 만져본 이삭이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리브가는 손재주가 굉장히 좋았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삭이 아주 희한한 말을 합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22). 이때 야곱이 자기 목소리 그대로 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최대한 자기 형과 비슷하게 했을 것이고, 쌍둥이니까 형과 목소리가 아주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최대한 에서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하여 아버지라고 평소와 다르게 냈을 텐데, 그래도 이삭은 목소리가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일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이것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라고 알아차려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몇 번씩 확인을 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축복을 해버립니다.

 

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23)

 

이 장면에서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무리 눈이 안 보이더라도, 어떻게 이 정도의 변장으로 이삭이 그냥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눈이 안 보이면 다른 감각이 발달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눈이 안 보일 때 후각이나 촉각이 더 발달할 텐데 어떻게 속아 넘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무리 노년에 영적 분별력이 흐려졌다고는 해도, 이삭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위대한 약속을 받아서 이어가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임하시는 사람이고 선지자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당시 공식적인 선지자가 없는 고대사회에서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삭이 어떻게 여기서 이토록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지금 상식적으로는 속을 수 없는 상황인데 속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에 이삭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삭은 그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믿음의 조상의 모습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믿음의 어르신이 아니라, 그저 눈이 안 보이는 초라한 노인에 불과합니다. 그 당시 이삭의 삶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단되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도의 응답도 많이 받았던 이삭이, 왜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 되고 만 것입니까? 그것은 그의 고집 때문입니다. 쌍둥이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은 분명히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고집스럽게 에서를 축복하겠다며 우기고 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족들을 인도했다면, 리브가와 야곱이 감히 자기를 속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늘 함께하시는 성령 충만한 사람을 어떻게 속일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때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보다는, 자기 육신의 정욕과 욕심을 따르며 배를 불리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2)  우리에게는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깨달음을 주실 때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깨달음을 가리켜 성령의 감동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성령을 선물로 다 받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님이 늘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을 뿐이지 늘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는 찔러주십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리로 가면 안 된다.’ 또 잘할 때는 막 기뻐하시면서 참 잘한다. 계속해라.’ 하십니다.

 

이런 성령의 감동에 민감한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령의 감동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없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도 아니고, 또 성령의 감동이 없어도 먹고 사는 데 별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됩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뜻과는 동떨어진 삶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 없이 살게 되면,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데에 혼동이 오게 되고 삶에 혼란이 생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내 나름대로의 생각과 상식과 지식으로 보고 있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봐야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뭐가 뭔지 판단이 제대로 안 되고, 심지어 망했는데도 망했는지 모르게 됩니다. 뭔가 문제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이 다 끝날 때까지도 그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끝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게 되고 강퍅해지며 고집만 세집니다. 더 문제는 뭔가 하면, 그렇게 살면서도 자기는 잘하는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지금 참 안타까운 일들이 바로 이런 데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 없이 자기 생각과 판단으로 나가다 보니까 여러 가지 혼란한 일들이 지금 생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어떤 일이 탁 벌어질 때 먼저 성령님이 우리에게 뭔가 신호를 보내시는데, 그게 뭔지를 잘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뭔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네. 왜 그러지? 이상하네.’ 이런 식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밖에 못합니다.

 

이때 이삭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여쭈어보기만 했어도 이렇게 속지는 않았을 겁니다. ‘주님, 지금 아들 하나가 들어와서 축복해달라고 하는데, 저는 눈이 어두워서 분간이 안 갑니다. 분명히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입니다. 그럼 이게 도대체 누구라는 말입니까? 주님, 가르쳐주십시오.’라고 짧게 기도만 했어도 하나님의 영이 감동을 주셔서 이 아들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다. 비록 그가 너를 속이려고 하지만, 너는 야곱을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그를 축복하라.’ 하는 식으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함께 계셔서, 순간순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뭘 하든지, 먼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뭘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하고 해야 합니다. 성령님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보다 앞서지 않는 게 무엇입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앞서는 겁니다.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라고 제 어머니가 항상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않는 게 뭡니까? 한마디로 기도하지 않고서 어떤 일을 결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하면서 나아갈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결정할 때 그것이 잘된 결정이라고 어떻게 보장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두 번 실수할 수는 있지만, 만약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한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 문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불순종입니다. 알면서도 안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 것,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기가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불순종입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자기가 알아서 할 때는 알아서 잘못되게 되어 있습니다.

 

 

3)  ‘에게만 집중하며 살면 초라한 노년이 되고 만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이삭은 고집스럽게 에서를 축복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뭡니까? 단순히 에서가 장자이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장자이니까 장자의 축복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에서가 자기 마음에 드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별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자기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축복을 해주겠다는 겁니다. 장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을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불순종하니까 거두어가십니다. 그러다 보니 이삭은 리브가와 야곱에게 어처구니없는 속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목소리를 알고도 그냥 속아 넘어갑니까?

 

지금 자기가 에서라고 주장하는 아들이 들어와서 축복해주세요라고 했을 때, 이삭이 하나님께 잠깐 기도로 여쭤보기만 했어도 이렇게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삭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였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삭은 노년에 접어들면서 이전과 같이 기도생활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그가 왜 이토록 판단력이 흐려진 것입니까? 애초에 이삭이 에서에게 사냥해서 고기 요리를 가지고 오라고 했던 말을 보면 우리가 어느 정도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가 죽기 전에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2-3)

 

뭐가 강조되고 있습니까? ‘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밖에 없습니다. ‘밖에 모릅니다.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삭은 모든 것이 , , 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습니다. ‘I, my, me, mine’이 어린아이들이 처음 배우는 단어들인데, 그것밖에 모릅니다. ‘내 만족을 위해 사냥해서 별미를 만들어와 내가 먹고 내가 너를 축복하게 하라.’ 축복에 중심이 있는 게 아니고, ‘내 만족에 중심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의 말씀에 집중하며 살았던 이삭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만족이 최우선순위에 올라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받는 것보다는,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입을 즐겁게 하고 맛있는 음식을 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걸 보십시오. 이삭의 문제도 어떻게 보면 먹는 문제가 아닙니까? 처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사건도 뭡니까? 먹는 문제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따먹은 것은 먹은 것 자체가 아니라 저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사탄의 꾐에 넘어간 겁니다.

 

이삭이 여기서 내가 하나님처럼 되겠다.’ 하고 별미를 먹은 것은 아니지만, 잘보면 결국 그가 왜 그렇게 했습니까?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니까 나는 나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겠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만족을 추구하여 고기를 만들어 와서 먹게 하라는 겁니다.

 

이삭은 자기 입을 즐겁게 해주고 자기 배를 채워줄 수 있는 별미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 말대로 늙어서 정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죽겠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약속의 말씀을 내 후손에게 전해줄까? 어떻게 하면 내 후손도 믿음의 길을 가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오직 내가 어떻게 하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내 배를 채울까?’ 여기에 모든 생각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아니라 , , , 내 것, 내 만족에 집중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람이 자기에게 집중하면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엉뚱한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 중에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계신데, 몸이 약해지고 점점 늙어간다고 해서 마음까지 약해지고 늙어가서는 곤란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꾸 의도적으로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매일 모든 것이 에게만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사실 점점 노년이 될수록 시야도 좁아지지 않습니까? 건강도 그렇고, 자기를 많이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의도적으로라도 자꾸 주변을 바라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눈이 침침해서 읽기가 힘들면, 요즘 유튜브에서 창세기 개역개정으로 치면 나오고 창세기 새번역으로 치면 또 나옵니다. 그럼 그걸 틀어놓고 들으면 됩니다. 요즘 설교도 좋은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단은 조심해야 하지만, 그런 것들을 듣고 말씀을 붙들며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멀리 가라는 게 아니라 내 가족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내 가족도 나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내 가족에게 자꾸 뭔가를 해주는 것을 연습해보는 겁니다. 요즘은 우리가 서로 만날 수 없는 상황인데, 산책하다가 지나치는 사람에게 ‘Hi’ 웃으며 인사하는 겁니다. 자꾸 우리 관심을 밖으로, 밖으로 해보는 겁니다. 그런 습관이 들 때 아름다운 노년을 보내면서 믿음의 어르신이 되는 것입니다. 초라한 노인이 아니라 믿음의 어르신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장년이나 젊은 분들도 이 훈련을 지금부터 계속 해야 합니다. 젊을 때 이런 훈련이 되어 있으면 정말 아름다운 노년으로, 믿음의 어르신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주님께 여쭈어보며 항상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이 연습, 이 훈련을 우리가 매일매일 하며 나아갈 때, 아름다운 노년을 향해 나아가고 믿음의 어르신으로 후배들에게 본이 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님이 늘 함께 하시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고 내가 잘 모르겠으면 여쭈어보십시오. 그럼 됩니다. 삶에 뭔가 미묘한 부분이 있을 때, 뭔가 석연치 않을 때,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은 에서네.’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지 말고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가르쳐주십니다.

 

 

2.   아버지를 속이는 야곱의 태도

 

그렇다면 속여서라도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는 야곱의 태도는 옳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말씀을 붙들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랬어도 충분히 말씀을 주셨을 겁니다. 만약 아버지가 악한 것을 요구하고 우상 숭배를 강요했다면 당연히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만일 야곱이 하나님을 믿고 그냥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론 에서가 축복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축복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축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 선한 뜻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믿음이 아니라, 사실은 나는 에서에게 지기 싫다.’라는 자존심과 오기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겠다는 태도가 야곱에게 있는 것을 나중에 봅니다. 라반의 집에서 라헬을 얻는 과정을 보면, 야곱은 대단한 집념의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집과 집착과 오기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고, 나중에 이집트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자기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고백하는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이 보기에 아버지가 에서를 축복하려 할 때 얼마나 피가 마르고 속이 탔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도 기다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갔어야 했는데, 자기 성격과 기질대로 행동하면서 아버지를 속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은 사건을 우리에게 자세히 알려주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축복을 받은 것은 좋은 것이라고 가르쳐주기 위함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축복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곱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이 빚으시고 깨뜨리시고 세우시고 회복시키시고 만드셔서, 나중에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사실 이렇게 거짓말하고 속임수를 써서라도 축복을 받겠다고 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고, 이삭도 젊을 때 말씀으로 살았으니, 어떻게 보면 그들은 우리가 감히 범접하기 힘든 믿음의 인물들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데, 야곱은 우리와 얼마나 비슷합니까?

 

그래서 야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앞으로 수없는 환난을 통해 그의 잘못을 고쳐주시고 닦으시고 단련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이스라엘로 만들어주십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지금 어려움이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3.   결국 야곱을 축복하는 이삭

 

그런데 이삭이 축복하는 과정을 보면 뭔가 이상하고 복잡합니다. 아들을 축복하기 위해 먼저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십니다(25). 그러자 아주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아직은 다 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6-27)

 

이삭은 아들을 자기에게 오게 하여 입 맞추게 합니다. 아직도 의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까 조금 축복할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옷 냄새를 맡으니까, 이것이 에서의 옷 냄새이므로 비로소 축복할 마음이 일어납니다.

 

축복은 대화와 달라서, 거기에 반드시 기쁨과 감사가 들어가야 합니다.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안에 미움이 들어가 있습니다. 축복이든 저주이든, 문장으로 표현하면 마침표(.) 찍고 끝나는 게 아니라 느낌표(!)로 끝납니다. 감정이 들어갑니다. 저주는 대개 화가 날 때 하지 않습니까? 축복도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횡성수설 하며 죽 열거하는 게 축복이 아닙니다. 마음에 축복의 대상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가득 올라오면서 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야곱을 축복하는 이삭의 모습을 보십시오. 축복을 억지로 짜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들어서 가지고 온 음식을 먹었는데, 그리고 포도주를 마셨는데, 감동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입을 맞춰 달라고 했는데, 그래도 감동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들 옷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으니까 감정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에서의 옷 냄새는 대부분 땀 냄새가 아니겠습니까? 그게 뭐가 그리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냄새를 맡는 순간 ,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면서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자극을 주어서 하는 게 무슨 축복입니까?

 

음식 가져와 먹게 해라. 포도주 가져와라. 내게 입 맞춰라. 옷 냄새 좀 맡자.’ 왜 이렇게 요구가 많습니까? 성령의 감동에서 나온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동이 없이 억지로 하려니까 수단을 쓸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막 애를 쓰니까 또 힘이 듭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인도함을 받으면서 축복을 했다면, 아들이 그냥 들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니까 이삭은 온갖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해서 억지로 분위기를 만들어 축복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내용을 보면, 이것 역시 핵심을 찌르지 못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28-29)

 

하나님의 복, 특히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에는 두 가지가 꼭 들어갑니다. 하나는 많은 자손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입니다. ‘많은 자손을 주겠다. 이 땅을 주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빠지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닌데, 많은 자손과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나라의 구약식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가 너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너는 그 나라를 이루는 데 중요한 일꾼으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이 야곱에게 한 축복의 내용을 보면 앞뒤가 내용이 다릅니다. 그가 원래 축복하고 싶어 했던 내용은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로 가면서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한 겁니다. 이삭이 처음에 아들에게 주려고 한 것이 뭡니까?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입니다. 왜 이런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축복합니까? 자기가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뱃속에 들어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뒤에 있는 내용이 진짜입니다. 비록 이삭이 잘못된 축복으로 시작했지만, 이때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정말 중요한 축복을 하게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처음에는 억지로 짜내며 횡설수설하던 이삭이, 나중에는 진짜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도 모르게 예언과 같은 축복의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우리를 떠나면 우리 삶에는 혼동이 오고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도 속게 되고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의 특징은 성령의 감동과 역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정말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축복을 하고 또 진정으로 축복을 받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런 참된 축복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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