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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훈련소에 도착하다" (창 29:1-14)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8 (9/20/2020)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HfB4OeS74bk?t=2328

 

 

2020920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8

하나님의 훈련소에 도착하다

(창세기 291~14)

 

[들어가는 말]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 이야기되던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아줌마와 아가씨의 차이점이 뭔가?’입니다. 이전에는 60, 70대를 어르신이라고 했지만 요즘은 아저씨, 아줌마라고 할 정도로 다들 젊어지셨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아니라 태도로 볼 때 아가씨와 아줌마의 차이점이 뭡니까? ‘긴장감입니다. 지하철에서 학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줌마라고 합니다.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웃고 떠들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은 드디어 하란 땅에 도착합니다. 그는 새로운 곳에서 무엇보다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외삼촌 라반을 빨리 찾아야 합니다. 또한 얼마 동안 여기 있을지는 모르지만, 항상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야곱은 여기로 오는 도중에 이미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은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해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나가리라는 소망을 이미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란 땅에서 실제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신앙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영적 긴장감을 놓아버리고 그냥 살아갑니다. 남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좋은대로 마구 행동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처럼, 남이야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그는 줄줄이 자식을 낳아 키우고 재산을 모으는 데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빈손으로 와서 거부가 되니까 그는 놀라운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자수성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철저히 실패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영적 긴장감을 놓아버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벧엘에서 주신 약속과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어버린 채 하나님을 떠나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인생에 하나님의 어떤 소망이 남아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코로나 사태 이후에 계속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잘 보여주는 삶이기 때문에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1.   하란에 도착한 야곱 (1~3)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하란에 도착하게 되는데, 하란 근처까지 왔을 때 하란에서 온 목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1-3)

 

하란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바로 믿음의 조상이며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이 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살았던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가 아브라함이 보낸 종(엘리에셀)을 만나서 이삭과 결혼하기 위해 떠난 리브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야곱은 왜 이곳 하란으로 왔습니까?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피해서 온 것입니다. 또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는 이번 기회에 하란에서 야곱이 신부 감을 데려오길 원했습니다(28:1-5).

 

그런데 여기서 약간 이상한 점은, 신부를 데려오기를 기대하면서도 신부를 데려오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신부대금을 주지 않은 채 야곱을 보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는 남자가 여자를 데려올 때 여자의 집에 신부대금을 지불하고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돈이 전 혀 없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에서를 피하기 위해 급히 떠나서 하란으로 왔고, 자기 손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도 이번에 신부를 구해 오길 기대했다기보다는, 잠시 알아보고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산다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결코 상식적인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줄줄 읽는 것은 상식이 아닙니다.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님의 말씀이 읽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자동으로 술술 되는 게 아니라,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새로운 힘을 공급받으면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세상의 강한 물결에 맞서서 거꾸로 헤엄쳐 올라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피곤하거나 귀찮다고 흐르는 물 가운데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에 빠지든지 아니면 물결에 떠내려갑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그 자리를 유지하고 거기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빠지든지 물결에 따라 떠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 낭떠러지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것을 할 때는 신앙생활이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사는 내 인생인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가만히 있으면 유지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몸부림을 치며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게서 보았던 것이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우리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그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는 정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의 은사가 있어서 저절로 하나님이 믿어지고 그런 게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는 아무렇게나 산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 앞에서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얻은 모든 땅을 포기했습니다. 소돔에서 얻을 수 있는 재물을 포기했습니다. 믿음을 이어가는 아들이 아닌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삭의 아내를 구할 때 이삭을 하란으로 보내지 않고 종을 보내서 아내를 구해오게 했습니다.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헷 사람들이 묘지를 그냥 주겠다고 해도 굳이 돈을 주고 샀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삶은 끝없이 헤엄치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이었습니다. 쉽게 쉽게 가지 않았습니다. 쉽게 갈 수도 있었지만, 쉽게 가면 금방 다 잃어버립니다. 그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어려운 길을 택해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살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항상 그렇게 꾸준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삶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삶이 어려워도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에게서는 그렇게 절실한 몸부림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이삭이나 야곱의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계속해서 몸부림치며,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은 그저 큰 무리 없이 편안하게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편안함과 안정감만 추구하며 가다 보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삶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경우는 그렇게 살다가 결국 어디에 도착했습니까? 하란에 도착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말씀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이 하란 땅으로 그의 손자 야곱이 다시 돌아와서, 마치 할아버지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다시 줍는 것과 같은 삶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가만히 두면 잘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원래 있던 좋지 않은 데로 돌아가고 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되는 것 같아도, 영적 긴장감을 놓아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 보면 옛날의 더러운 자리로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영적 긴장감을 늦추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지내고 안정과 편안함만 구하다 보면, 잘되는 게 아니라 더러운 자리로 되돌아가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을 때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는데, 안 믿는 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윤리적, 도덕적으로 더 뛰어납니까, 아니면 뭐가 나은 게 있습니까? 주님과 늘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오히려 더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요즘 자신의 신앙생활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영적 긴장감을 놓지 않고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퍼져서 그냥 될 대로 되라 하며 알아서 자기 마음대로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 본능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즘 가장 안타까운 것들 중 하나가, 이 시대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겠다하며 몸부림치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제가 저 자신을 봐도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든 몸부림치는 모습보다, 자꾸 쉽게 쉽게, 편안하게 가려고 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되면서 라이브영상 목회편지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고 있는데, 굳이 할 필요는 없었지만 소통이 필요할 것 같아서 시작하여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도움이 된다고 하며 격려의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사실 저에게 좋습니다. 새벽기도 끝난 후 피곤하고 배고파서 쉴 수도 있고 다른 것을 할 수도 있는데, 또 큐티를 하고 말씀을 붙들고 그것을 나누고 그러니까, 그것이 저 자신을 세우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편안하고 적당히 하며, 그냥 놀 것 다 놀고 쉴 것 다 쉬면서 적당히 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로 자기는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자기위주로 편안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당히 종교적인 활동을 몇 가지 해주고서 그 다음에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모습이 많은 크리스천들의 삶 가운데 보여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영적 긴장감이 잘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정말 자기에게 좋은 것입니까? 내가 편안하고 안정적이 됩니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흐름에 그냥 묻혀서 같이 떠내려가고 맙니다. 그럼 저 낭떠러지 절벽으로 떨어져서 망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거기에서도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편안하게 세상의 물결에 자기를 맡기고 떠내려가는 대로 알아서 떠내려가도록 하면 그것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겁니다.

 

우리는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물결을 거슬러서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거꾸로 올라가는 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냥 편안하게 흘러가는 삶이 아닙니다. 거꾸로 가는 삶입니다. 그럴 때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인도하심 (4~8)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4-6)

 

이것을 그냥 읽으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사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요즘처럼 교통 표지판이 있고 휴게소가 있는 게 아닌데, 지금 야곱이 하란에서 나홀의 손자인 외삼촌 라반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서울에 가서 김 선생을 찾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어디서 찾겠습니까? 특히 목축을 하는 사람들은 매일 자리를 옮겨 다니기 때문에 정확한 주소도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우연히 우물을 발견하게 되고, 마침 거기에 목자들이 있고, 또 그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하니까 사방에서 목자들이 오는 자리인데도 마침 하란에서 왔다는 겁니다(4). 그래서 혹시 라반을 아느냐고 했더니 그를 잘 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가 평안한 것도 아는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마침 저기 라반의 딸 라헬이 양을 몰고 오고 있다는 것도 알려줍니다(6).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야곱은 지금 자기가 에서를 피해 집을 떠나 타지에서 헤매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너무 처량하고 힘든 신세였습니다. 과연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를 아주 정확하게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대충 감으로 방향을 잡아서 북쪽에 있다는 하란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목자들을 만나서 대화하니까 너무나도 정확하게 목적지를 향해 다 온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은 결코 그냥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확하게 그의 걸음을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일행과 함께 오는 것도 아니고 혼자 오는데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런데도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겁니다.

 

비록 하나님이 야곱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매순간 걸음을 인도하셨고, 또 그를 보호하시며 그의 삶을 책임져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신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눈에도 하나님이 안 보이신다고 안 계신 게 아닙니다. 우리 삶에 늘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그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끼며 어떻게 나와야 합니까? ‘,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구나. 말로만 약속하신 게 아니구나. 그렇다면 이제는 정말 인간적인 생각은 다 버리고 하나님만 붙들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겠다.’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이렇게 쉽게 라반의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자기가 노력해서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여기저기 정보를 알아보며 수소문을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을 떠나 어떻게 하다가 이 우물까지 왔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곳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특히 주변에 사람들의 목숨을 노리는 강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대사회 때 그런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강도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켜주신 겁니다. 그는 그것을 전혀 몰랐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보호해주신 겁니다. 강도들이 노리고 오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다른 데로 가는 식으로 역사해주신 겁니다.

 

그런 일이 우리 삶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모르는데 하나님이 막아주시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저쪽으로 갔으면 교통사고가 나는 건데 하나님이 막아주셔서 사고가 안 나고 평안하게 갑니다. 우리는 그것도 알지 못하고 내가 운전을 잘해서 잘 다니는 줄 아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야곱은 이전까지 했던 것처럼 머리를 굴리는 것을 그만하고, 이제 벧엘에서 약속을 주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이제 자신의 하나님, 그리고 약속대로 지금 인도해주고 계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이제 내가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합니까?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7-8)

 

이것을 보면 야곱은 양을 치는 데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장막 안에 머물며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는 어머니 리브가의 집안일만 도운 게 아니라, 들판에 나가 아버지의 양 떼를 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식으로 하란의 목자들에게 말하기를, 이 양들에게 물을 먹이고 풀을 뜯게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야곱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지금은 해가 높아서 가축들이 모일 때가 아니니까 물을 마시우고 풀을 뜯게 하라고 하는데 목자들이 듣지 않습니다. 그들이 야곱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게을러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것을 보면 야곱은 전문적인 지식과 함께 뭘 하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주인의식입니다. 교회생활을 같이 해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뭘 하든지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있고, 뭘 하든지 열심히 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뭘 하든지 주인처럼 하는 게 주인의식인데, 이런 사람이 직원으로 들어오면 주인은 굉장히 편합니다. 하나만 알려주면 자기가 알아서 척척 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이러한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야곱이 나중에 부를 이루게 됩니다. 그가 운이 좋아서 잘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하란의 목자들은 자기 양 떼가 아니니까 대충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누가 와서 돌을 치워주면 물을 마시게 하고 돌을 닫으면 가만히 있고, 누가 또 열면 마시게 하고, 그런 식입니다. 적당히 놀고 있다가 다 모이면 그때 하겠다는 겁니다.

 

야곱이 뭘 하든지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태도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요즘말로 너무 오버를 하면 오지랖이라고 합니다. 뭘 하든지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면 이것 참견 저것 참견으로 가는 겁니다. 물론 그런 열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기는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때 야곱에게 원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벧엘에서 자기를 만나주시고 그때 주신 약속대로 정확하게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제 정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는 것, 하나님을 정말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 그래서 믿음의 조상으로 변화되어 나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여전히 내 힘으로 삼촌의 집에 도착했구나. 내가 판단을 잘했구나.’라고밖에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 자기 뜻과 생각대로 행동하며 살게 됩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처량한 나그네 신세로서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까?’ 하며 오는 상황이었는데, 그러면서 뭘 느꼈습니까? ‘인생이 내가 열심히 하는 대로 다 되는 게 아니구나. 정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되는구나. 길을 열어주셔야 되는 거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무기력함과 비참함을 느낄 때 벧엘에서 하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뭔가 길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하란 근처까지 와서 외삼촌 라반을 찾게 되니까, ‘내가 열심히 노력만 하면 되눈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면서 본성이 다시 올라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탄한 길도 주시고 어려운 길도 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좀 순탄한 길만 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형통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들에게 탄탄대로만 있었던 것이 절대 아닙니다. 숫자로 표현하면 100 중에 90 이상은 실패입니다. 그 실패를 딛고 성공한 것이지, 100이면 100이거나 80, 90 이상으로 성공만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인 우리가 어려운 길도 겪게 하십니다. 왜 그러시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바른 길을 가고 정결한 길을 감으로 진정한 복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복(돈이나 건강 등)이 복은 복인데 진짜 복이 아닙니다. 진짜 복이라면 영원해야 하는데 그런 건 영원하지 않습니다. 진짜 복은 영원한 복, 즉 하늘의 복입니다. 그 진짜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가는 겁니다. 그런데 막 고생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길이 조금 열리는 것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더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정말 적고, 일이 조금 풀리는 것 같으면 하나님을 그냥 잊어버립니다. ‘아유, 잘됐다.’ 하면서 자기가 열심히 해서 된 줄 알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다 또 조금만 막히면 다시 침체가 되고 나 죽겠네하면서 먹지도 않고 드러눕고 화를 냅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야곱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빈들에 누웠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약간 길이 열리고 일이 풀이는 것 같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또 머리가 팽팽 돌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한 야곱을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바로 혹독한 종살이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소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훈련시키시고 변화시키셔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혹독한 종살이를 시키십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스스로 멍에를 매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진짜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자기 욕심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 때 거기에 진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싫어하며 내가 왜 어디에 메이는가? 왜 교회나 신앙생활에 메이는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라고 할 때 뭐가 됩니까? 자유인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추구하는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돈이면 돈, 성공이면 성공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신앙생활은 뭘 위해서 합니까? 뭘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 즉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며 사명을 다하는 것은, 뭔가를 얻어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해서 하는 겁니다.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감사해서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감사하니까 하는 겁니다. 왜 지금 예배합니까? 그냥 편하게 자거나 쉴 수 있는데 왜 예배합니까? 나를 구원해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왜 이렇게 일부러 나와서 봉사합니까? 감사해서. 왜 우리가 믿지 않는 VIP 분들을 인도해보자고 애를 쓰며 나아갑니까? 나를 구원해주신 것이 감사해서, 저분도 주님을 만나면 좋겠다는 마음이 아닙니까.

 

그렇게 사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나 시간을 쓸 때도 자기만 위해서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쓸 줄 압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나를 위해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내가 왜 저 사람을 위해 희생을 해야 되나?’라는 마음이 든다면,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겁니다. ‘나 혼자 잘 믿겠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냥 종교심일 뿐입니다.

 

진짜 믿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형통한 길을 열어주실 때, ‘, 이제 됐다하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기회로 삼고 나아가는 사람은, 어느 날 자기 삶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을 느낄 때가 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해서 다 같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누가 하라고 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믿음으로 사는 건데, 그럴 때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더 자발적으로 감사해서 기쁨으로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생각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갑자기 며칠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 있자, 내가 지금까지 산 정도로 또 살면 어떻게 되나?’ 했더니 100살이 넘게 되는데, 그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 마음에 확 와 닿았습니다.

 

20대 청년들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두 번만 더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나이가 됩니다. 30, 40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정도만 더 살면 마지막이 되는 겁니다. 정말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열심히 살다가 갑자기 주님이 이제 다 놓고 오라고 하시면 가야 되는 겁니다. 그때 주님 앞에 갑자기 갔는데 어떻게 살다 왔는지 좀 내놓아보아라.’ 하실 때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한 인생이겠습니까?

 

요란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많이 한 것 같은데, 정작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내놓을 것이 없다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이 땅에서 했는데 다 놓아두고 왔습니다. 천국에 가져갈 수가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했어야 되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안 하고 이 땅에서 다 없어질 것들만 하다가 갑자기 주님 앞에 서면 들고 온 게 없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지금 코로나 사태 가운데 계속 살면서 코로나이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한다.’라고 있다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코로나 시대에 뭘 했느냐?’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기회는 이때다 하며 좋아하는 비디오와 영화만 하고, 내 볼 일만 보며 살다가 왔습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이제 다 끝났다. 이리로 와라.’ 하고 부르실 때가 언제 올지 모릅니다.

 

하란으로 도피한 야곱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뭔가 애를 쓰고 굉장히 복잡하고 시끄럽고 엄청나게 많이 그리고 열심히 한 것 같았는데, 결론은 도망쳤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럴 때 오히려 모든 것이 자리를 잡고 정리가 됩니다.

 

 

3.   라반과의 만남 (9~14)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9-10)

 

라헬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이었겠습니까? 요즘 피트니스나 운동을 열심히 하는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이 라헬의 모습이었습니다. 딸인데 양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치니까 얼마나 멋집니까?

 

드디어 야곱은 라반의 식구인 그 딸 라헬을 만납니다. 야곱은 이때 굉장히 감정이 복받쳐올라왔을 것이 분명한데도 잘 참으며 일단 라헬을 돕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감정이 폭발합니다.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11-13)

 

야곱이 나타나니까 라반의 가족들은 리브가가 시집을 간 이후 처음으로 아브라함 집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야곱의 나이를 거꾸로 계산한 것이 정말 맞는다면, 리브가가 시집간 이후 거의 100년이 다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하셨고 지켜주셨고 복을 주셨는가 하는 것을 야곱이 나누지 않았겠습니까? 야곱이 라반의 가족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와서 어떻게 살았다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어머니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기가 아버지의 축복을 속여서 받은 것이나 그 때문에 형의 미움을 받아 도망치게 된 것을 이야기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아마도 했을 것입니다. 라반이 야곱을 탁 봤을 때 어떤 모습이었겠습니까? 완전 거지입니다. 돈 한 푼도 없이 초라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왔는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러니 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최대한 자기 입장에서 자기를 미화하며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모든 말을 듣고 나서 라반이 뭐라고 합니까?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14a)

 

이게 무슨 말입니까? 처음에 야곱에게 입 맞추며 환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십 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실은 처음 만난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의 조카인지 의심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까 야곱이 정말로 자기 동생 리브가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리브가의 아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했을 겁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말과 꾸며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은 어느 정도 구별이 갑니다. 거짓말을 하면 갈수록 말이 안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정직해야 합니다.

 

 

[나가는 말]

 

우리가 살다 보면 예기치 않게 신앙적인 이유나 그 밖의 어려움으로 인해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사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마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때 우리는 낮아지고 겸손해지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만 나아져도 기회는 이때다 하며 또 자기 욕심이 올라올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이든지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경이 어떻게 바뀌든지 상관이 없어집니다. 환경에 휘둘리는 삶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해서 안타깝게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은혜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야곱을 붙들어주고 계십니다. 나중에 야곱은 그것을 깨닫고 이스라엘이 됩니다.

 

우리 모두도 그렇게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로서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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