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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1uPi3LRBAxo?feature=share

 

 

#2023-15 2/5/23(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4

블레셋의 거인들을 이긴 다윗의 용사들

(사무엘하 2115~22)

 

[들어가는 말]

 

성경은 신비한 책입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적인 책은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책을 버려도 됩니까, 안 됩니까? ‘어유, 큰일 날 소리! 절대 버리면 안 된다. 벼락 맞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성경도 책이니까 다 낡으면 버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는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 같고, 버려도 된다고 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평하게 둘 다 괜찮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또 불편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특별한 책이고, 절대 버리면 안 된다. 아무리 낡고 찢어졌어도 어떻게 감히 성경을 버릴 수 있는가?’라고 할 때, 그 마음의 중심이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잘 보관해야 하며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정말 옳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안 버리는 게 중요합니까, 말씀대로 행하는 게 중요합니까? 성경을 절대 버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성경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절대 버리면 안 된다고 하면 성경대로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대로는 전혀 살지 않고 성경에서 주는 말씀을 무시하면서 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면, 자칫 그것은 우상화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사실 책입니다. 인쇄된 인쇄물에 불과하지, 이 자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서 성경인 것이지, 이 책 자체에 무슨 신비로운 능력이 있고 절대 버리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그래도 버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는 것은 아주 옳은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성경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매일매일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낡아서 볼 수 없고 다 찢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은 그런 경우가 별로 없는데, 이전에는 한 번 성경책을 구입하거나 받으면 정말 찢어질 때까지 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워낙 성경책이 너무 흔해서 찢어질 때까지 보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저도 성경책을 사용하다 찢어지는 경우 많은데, 그럴 때 성경을 바꾸면서 고민이 됩니다. ‘낡았는데 버려야 하나, 아니면 성경이니까 놓아두어야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버리면 안 된다고 하는지, 또는 어떤 마음으로 버려도 된다고 하는지 마음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버리면 안 된다고 하는 경우, ‘나는 말씀대로 잘살고 있는가? 순종하고 있는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서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자칫 성경책을 우상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기록했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하나님의 손이 내려와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기록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을 기록한 분들 위에 성령이 함께하시며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전체가 6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한 권인 줄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66권의 다른 책들을 모아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처음부터 끝까지 일맥상통하고 연결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이 기록했지만 인간의 말일 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끔 성경을 읽다 보면 틀린 부분이 나옵니다. 그것은 번역하다가 실수한 것이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이 틀린 게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성경은 모두 사본을 번역한 것이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상한 내용도 있고, 여기서 무슨 진리를 발견할 수 있나? 왜 이런 설명이 들어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21장 뒷부분이 바로 그런 마음이 드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구조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데 21장부터 24장까지는 일종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장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뒤쪽에 기록해놓은 게 아니고,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다윗의 왕국 이야기를 다 한 후에 뒤에 붙여 놓은 것이라고 학자들이 말한다는 것을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부록은 시간 배열이나 이야기 앞뒤가 안 맞을 수 있습니다.

 

구약학자들은 이 내용이 시간상으로 볼 때 사무엘하 8장과 9장쯤이라고 봅니다. 8장에서는 블레셋을 비롯하여 주변 나라들과 전쟁해서 모두 승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9장에서는 다윗이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불러다 자기 상에서 함께 먹도록 은혜를 베푸는 내용이 나옵니다.

 

성경은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기도 하지만, 앞의 내용이 뒤에 또 나오기도 합니다. 다윗 왕국이 통합 왕국으로 마무리되면서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이전에 일어났던 일을 뒤에 붙여서 기록한 것이 바로 21장 이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무슨 얘기를 한참 하다가 그 얘기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 왜 우리 3년 전 여행 갔을 때 그런 일이 있었잖아?” 하고 갑자기 이전 일 얘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21~24장이 바로 그런 식의 표현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사무엘하 21장은 9장의 사건에 이어서 붙여 보면 흐름상 자연스럽습니다.

 

 

1.   다시 일어난 블레셋 (15~17)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15)

 

이전에 8장에서 다윗 군대는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 메덱암마라는 곳을 빼앗았습니다. 메덱암마는 모성의 굴레라는 뜻으로, 블레셋 전체 성들 중 어머니 성이 되는 가장 큰 성을 점령했다는 말입니다. 그때부터 사실상 블레셋은 궤멸되고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실 블레셋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오랜 대적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에는 후기로 갈수록 가장 큰 대적이었고, 사울 시대를 거쳐 다윗 시대까지도 가장 큰 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이라는 것은 성도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영적 공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블레셋이 다 궤멸 된 줄 알았더니 다시 일어나 공격해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한 번 영적으로 승리했다고 해서 계속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한 번 은혜 받았다고 그 은혜가 평생 지속되는 게 아닙니다. 계속 받아야 합니다.

 

오래전 제가 어바나 선교대회(Urbana Mission Conference)에 갔을 때 강사로 오신 분 중 조지 버워(George Verwer)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OM (Operation Mobilization) 선교회 총재였습니다. 그분이 그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은혜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새기 때문입니다(because we are leaking).” 20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아직도 기억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는 표시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자꾸 이전의 좋았던 과거를 떠올린다는 겁니다. ‘내가 왕년에 이랬다.’라는 말을 많이 할수록 지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지 못하는 겁니다. 신앙생활뿐 아니라 뭘 하더라도 지금 잘하고 있지 못하다면 이전에 어땠다는 것을 자꾸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가리키는 전문용어가 나왔는데 바로 라떼는입니다. “나 때는 말이지...”라고 하면서 자꾸 옛날이야기를 하고, ‘이전에, 과거에, 옛날에, 청년 시절에, 한국에 있을 때...’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지금 나는 이렇다.’라고 해야 하는데 자꾸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간증도 한 달 이상 된 것은 간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보통 간증이라고 하면 내가 1.4 후퇴 때...”라고 간증하는 경우가 있는데, 몇십 년 전이 아니라 지금 생생하게 내 삶에서 하나님이 해주시는 일들을 나누는 게 간증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계속 찾아옵니다. 하루도 방심하고 살 수 있을 때가 없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매일 어느 정도의 긴장을 가진 채 살아야 합니다. 너무 편안하게 살면 오히려 내가 괜찮은지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너무 편안하면 이상한 겁니다.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자기가 겪었던 무섭고 살벌한 실전 경험에 대해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첫째, 진짜 전쟁은 최전선의 초병들과 초급 간부들이 제일 잘 안다는 것입니다. 둘째, 참혹한 패배는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평안할 때,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방심하고 긴장의 끈을 놓게 될 때 갑자기 치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패배는 전력이 약해서 당하기도 하지만, 정신력으로 강하게 무장하고 긴장하며 집중해서 나아가면 괜찮은데 이제 우리가 이겼다.’ 하고 마음을 놓고 있을 때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신앙생활도 똑같습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지금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닌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서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가끔 보면 동물원에서 사자나 곰이 탈출했다는 뉴스가 나서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공포에 떠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몇 년 전 이 근처 제인스빌(Zanesville)에서 개인적으로 사자, , 호랑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 맹수들이 탈출해서 그 일대가 공포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그나마 가둬놓고 키우던 경우이지만, 저 야생의 사자가 나를 잡아 삼키려고 다가온다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상황입니까? 마귀는 바로 그런 모습으로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면서 어느 교회를 공격할까, 어느 신자를 물어뜯을까를 찾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 물어뜯길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너무 편안하게 있다가 공격당해서 무너지면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기 위해서 마귀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편안하게 해서 우리가 방심하게 만든 다음 공격해서 무너뜨린다는 겁니다.

 

이전에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교회를 졸업했습니다. 학생 때는 열심히 다녔는데 대학 가면서 안 나가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라고 하는 분을 가끔 봅니다. ‘이 정도 기도했으면 됐지. 이 정도 성경 읽었으면 됐지. 이 정도로 교회에 오래 다녔으면 됐지. 매주 나가는데 한두 번은 빠져도 괜찮지.’라고 하며 방심할 때 공격이 오고 무너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더라도 하루에 몰아서 20, 30장을 읽고 나머지 6일 동안은 하나도 안 읽는 것보다, 하루에 다섯 절, 여섯 절이라도 꾸준히 매일 읽는 것이 자신을 위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긴장하며 항상 깨어 있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읽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내가 오늘 이렇게 많이 읽었으니까 내일은 쉬어야지. 어제 그렇게 많이 기도했으니까 오늘은 쉬어야지.’라고 되는 겁니다.

 

제자훈련을 하는 교회들의 고민도 그겁니다. 1년 동안 제자훈련을 아주 열심히 받으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숙제도 성실히 하고, 실습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나가는 등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하고서 그다음 해가 되니까 작년에는 내가 너무 열심히 했어. 그래서 진이 빠졌어. 올해는 안식년을 가져야겠다. 편안하게 지내야겠다.’라고 합니다. 그때가 무너지는 때입니다. 그때가 공격당하고 무너지는 때임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매일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합니까? 죽을 때까지, 아니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하는 겁니다.

 

거인족의 아들 중에 무게가 삼백 세겔 되는 놋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16)

 

이제는 완전히 무너졌겠다 싶었던 블레셋이 다시 일어나 공격해옵니다. 게다가 그들 중 장수들이 있는데 어마어마한 거인입니다. 모든 블레셋 군대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들 중 엄청난 거인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다윗이 소년 시절 죽인 블레셋 장군 골리앗은 키가 3m 가까이 되는 엄청난 거인이었습니다. 과장도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기네스북 기록으로 가장 큰 사람이 2미터 50센티미터 정도 됩니다.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됩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그대로 3미터 된다고 감탄이 나올 겁니다. 그런 식으로 고대 사람들도 말한 겁니다.

 

이때 다윗은 피곤한 상태인데, 거인족의 공격으로 죽음의 위기에 빠집니다. 거인족인 이스비브놉은 300세겔 되는 놋 창을 들고 새 칼을 찼다고 되어 있습니다. 300세겔은 사실 약 3.5킬로그램 정도, 7.7파운드 정도로, 엄청난 무게는 아닙니다.

 

그는 그 정도 되는 놋 창을 들었고 새 칼을 찼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거인이니까 엄청난 무게의 무기를 들고 왔다는 게 아니고, ‘새 칼즉 다윗을 죽이기 위해 특별히 새로 제작된 무기를 들고나왔다는 게 초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비브놉은 전쟁을 하던 중에 어쩌다가 다윗과 마주해서 공격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윗을 죽이라는 지령을 받고 온 암살자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부터 다윗만 노리고 나온 무시무시한 암살자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거인 암살자를 상대로 싸워야 하는 다윗은 굉장히 피곤하고 연약한 상황입니다(15). 이 위기 상황에 다윗이 어떻게 됩니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17)

 

다윗은 자기 누이 스루냐의 아들, 즉 자기의 조카이자 충성스러운 부하 아비새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아비새가 위기의 순간에 다윗을 구했을 때, 그와 모든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에게 간절히 요청합니다. “왕은 다시는 전장에 나가지 말아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해주십시오.”

 

이 부분이 사무엘하의 뒷부분인 21장에 있기에 이때는 다윗이 나이가 60, 70대로 많아서 싸울 힘이 없었나 보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 완전히 전성기는 아니었고 중년의 나이였지만, 그래도 충분히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부하들이 말린 것은 혹시 모르니까 나오지 말라고 한 겁니다. 아직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용맹한 장수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다시는 나와서 싸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무엘하 9장 전후로 벌어진 일인데 뒷부분에 붙였다고 했습니다. 이때 부하들의 간청 때문에 다윗은 11장에서 왕들이 전쟁에 나가서 싸울 시기가 되었는데도 나가지 않고 혼자 궁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간음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부하들이 다윗에게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에 나가지 않은 이유가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는 내가 좀 쉬어야겠다.’ 하고 방심하다가 죄에 빠지게 된 겁니다. 부하들이 다윗에게 전장에 나가지 말라고 부탁한 이유는 다윗과 다윗의 왕국을 이스라엘의 등불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대하 21:7).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질 때도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에게 한 지파를 주어서 택하신 성 예루살렘에서 다윗과 후손들이 항상 주님 앞에 등불을 갖고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왕상 11:36).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믿음에서 실패할 때도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셔서 계속 그의 뒤를 잇게 해주셨습니다(왕상 15:3-4).

 

모든 전쟁을 마무리한 끝에 이 부분을 사무엘하 뒷부분에 부록처럼 붙여 놓은 이유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얼마나 잘 지키셨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여기서 아주 피곤해하고 위기에 빠진 약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다윗 왕국에 위기가 온 겁니다. 게다가 상대가 보통 군대입니까? 엄청난 거인입니다.

 

8장에서 다 멸망한 줄 알았던 블레셋 군대가 이제는 네 명의 거인을 내세워 다윗 군대와 나아가 이스라엘을 파괴하기 위해 일어난 겁니다. 그 앞에 서 있는 다윗 왕국은 지금 꺼져가는 등불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40:30-31)

 

이것이 언약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나라가 바로 다윗 왕국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거대한 파도 같이 덤벼들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고 파괴하려 들지라도, 하나님이 언약을 주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 즉 약속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반드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주신 약속 때문에 하나뿐인 외아들도 우리를 위해 구원의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무엘하 9장 전후로 들어가야 할 이야기가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고 반역들도 다 정리한 다음에 여기 들어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왕국이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붙들기로 약속하신 나라이기 때문에 세상 그 누구도 다윗과 그의 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다.’라고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윗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나라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것까지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2.   용사들과 함께 이룬 승리 (18~22)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혼자 싸웠습니다. 그때는 십대소년 때인데, 군인도 아니지만 아버지가 전쟁터에 있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라고 해서 갔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흐른 사무엘하 21장에서는 용사들과 함께 승리를 거둡니다. 이번에는 거인들이 앞장 서서 나오는 버거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18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는 1)거인족의 아들 중의 삽을 쳐죽였고 19 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은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20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 곳에 키가 큰 자 하나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기 여섯 개씩 모두 스물네 개가 있는데 그도 거인족의 소생이라 21 그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18-21)

 

여기 네 명의 거인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 했던 이스비브놉(16)은 아비새가 죽입니다(17). 또 다른 거인족 삽(Saph)은 후사 사람 십브개가 쳐 죽입니다(18). 또 무시무시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는 베들레헴 사람 엘하난이 죽입니다(19). 또 이름이 안 나오는 거인이 20절에 나오는데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6개씩 24개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셋째 형인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죽입니다(21).

 

네 명의 거인이 나온 것을 네 명의 다른 용사들이 싸워서 이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한 사람이 다 이긴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전투를 벌이면서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다윗 군대에는 이렇게 용맹한 장수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가 되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함께 승리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거인이 네 명인데, 한 명은 죽였지만 세 명을 못 죽이면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 같이 하나 되어 싸움으로 다 같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혼짜 싸우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씩 붙어 싸워 이겼지만, 수많은 군사들이 함께 싸운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 공부에 그런 부분이 나옵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은 혼자 선포하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전쟁은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 군대가 함께 싸웁니다. 영적 전쟁은 영적 군대가 같이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얼마든지 혼자 드릴 수 있습니다. 각자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굳이 함께 모입니까? 함께 싸워야 하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함께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고 섬기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같이 하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셔서 함께 그것을 이루라고 교회로 묶어주셨는데,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필요하셔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 혼자서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솔직히 우리처럼 말을 잘 안 듣고 걸리적거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억지로 하시는 것보다, 혼자 하시는 게 훨씬 더 좋고 훨씬 더 편하실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놀랍게도 꼭 우리를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필요가 없으신데도 불러서 쓰십니다. 왜 쓰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일상을 위해서만 살다가 이 세상에서 끝나면 천국에 가지고 갈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아니라, 천국에 가지고 갈 것이 있는 인생이 되도록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사역에 부르시고 사용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네 사람 가드의 거인족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의 부하들의 손에 다 넘어졌더라” (22)

 

다윗의 손과 그의 부하들의 손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들은 하나가 되어 싸워서 승리했다는 겁니다. 이 구절로 21장이 끝납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다윗의 용사들 명단은 거의 아둘람 굴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입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빚진 자, 마음 상한 자,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나라에서 대우를 못 받고 억눌리고 억울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때는 다윗이 도망자 시절 초기였고, 20대였습니다. 이제 다윗 왕국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는 이전에 사회의 낙오자였던 사람들이 모여서 다윗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도 변화되어 이렇게 아름다운 왕국을 함께 이루어 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둘람 공동체에서부터 다윗과 함께했던 그 낙오자들은 함께 지내고 함께 싸우면서 점점 용사가 되어 갔고, 다윗의 영향을 받아 부족한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들로 변화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둘람 굴의 낙오자들이 바로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도 형편이 어렵고 배경도 없는데, 우리가 함께 모였을 때 하나 되어 주님 안에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뭐든지 다 홀로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세상에 보여주는 역사에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입니다. 사랑의 공동체, 함께하는 공동체, 하나 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무슨 순위를 매기며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결과물을 가지고 평가하는 곳도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어떤 사역자가 어떤 사역을 잘해서 열매를 얼마나 많이 거두었나를 비교하고 평가하는 곳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세상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그런 세상의 가치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서 흉내를 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말 그대로 함께하는 공동체이고, 그래서 축제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턱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잘했다고 칭찬해주십니다. 결과를 보고 그러시는 게 아니라, 얼마나 충성했는가, 얼마나 신실하게 했는가를 보시고 그렇게 해주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다 하신 건데도 우리에게 잘했다고 해주십니다. 나를 드리기만 하면 잘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도 전부 하나님과 동역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도 원래는 형편없었지만, 하나님이 키우셔서 같이 하나님과 일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함께하는 하나 됨의 원리이고 함께 사역하는 동역의 원리입니다. 혼자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자기가 하고 싶을 때는 하고 하기 싫을 때는 안 하고, 스케줄이 될 때는 하고 안 되면 안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안 하는 것은 하나 됨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다윗 왕국이 끝날 때쯤 드러내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선교사님들과 협력해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것도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하실 것입니다.

 

 

[나가는 말]

 

그러므로 오늘 이 세 가지는 꼭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신실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남과 못남과 상관없이 그 약속을 펼쳐, 만들고, 이루어가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골리앗과 그의 후예인 거인들과 같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 매일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졌나 싶으면 다시 찾아옵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이 싸움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잠시도 영적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함께 붙들고 기도해야 할 제목은 그래서 항상 함께하고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혼자서 하실 수 있지만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 영원한 가치가 있는 상을 받고 천국에 가서도 그것을 누리게 해주는 분이심을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탁월하고 뛰어나고 세상에서 높은 사람들 몇 명이 나와서 이끌고 가고 나머지는 따라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그러면 큰일 납니다. 그것은 기업에서나 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기업은 그래야 하는지 모르지만, 교회에서는 그러면 안 됩니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의견에 대해 결정을 내릴 때도 편의상 투표로 결정하기는 하지만, 의견이 나뉘는데도 무조건 찬반투표를 해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우리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을 하는 겁니다. 과정을 거치고 거치고 또 거치고 마지막에 마음을 모아 결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6일 동안에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푹 젖어 살다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또 6일 동안 헤매는 게 현실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형편에서 한 번이라도 예배 자리에 빠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일 한 번뿐 아니라, 어떻게든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수요예배, 토요새벽예배, 삶 공부, 목장 등 어떻게든 나 자신을 공동체에서 하나 되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채찍질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된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면서, 비록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공동체에서 힘을 얻고, 또 나가서 세상 속에서 부딪쳐 보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살고 와서 그것을 나누고, 또 나가서 그렇게 살면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또 교회생활입니다.

 

우리 모두 함께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 속에서 새 힘을 얻고 그래서 나아가 승리하는 매일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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