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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6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복음 56)

 

[들어가는 말]

 

20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는 인간의 욕구에 단계별로 순서가 있다는 욕구 5단계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인간에게 5단계의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생리적(physiological) 욕구로,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 배설하는 욕구입니다. 두 번째는 안전(safety)에 대한 욕구입니다. 세 번째는 소속(belonging)과 애정(love)에 대한 욕구입니다. 첫 번째(생리적 욕구)와 두 번째(안전 욕구)가 개인적인 욕구인 반면, 세 번째는 사회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존중(esteem)에 대한 욕구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며 존경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자아실현(self-actualization)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 다섯 가지 욕구는 피라미드와 같아서 첫 번째 것이 채워져야 다음 욕구가 일어난다고 매슬로우는 말합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안전하게 살고 싶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사랑받고 싶어지며, 또한 소속된 곳에서 존중받고 싶어지고, 마지막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싶어집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다급한 사람이 존중받고 싶어 하거나 자아를 실현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당장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그다음 것에 대한 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매슬로우가 주장한 5단계 욕구는 인간의 갈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에서도 가장 앞에 나오는 팔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가르쳐주신 영적 욕구의 8단계라고 이름을 지어볼 수 있겠습니다. 신앙의 성숙 과정을 마치 그림처럼 보여 주시는 것이 팔복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팔복중 세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여기까지는 문제를 보기 시작한 단계인데, 문제를 발견했으면 놓아두지 말고 그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에 대해 조금씩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가운데 신앙생활에서의 초점도 단계마다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그 해결책의 첫걸음이 바로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받는 복입니다.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복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땅을 살아갈 때 누리는 여덟 가지 복을 알려주는데, 첫 세 가지인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하는 것, 온유한 것은 모두 자기를 돌아볼 때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비추어졌을 때 너무나 가난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고, 나름대로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까 사람들 앞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별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보았을 때 자기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것을 보니까 완전히 파산한 상태인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이렇게 잘났다고 내보일 것도 없고, 굶주리며 가난한 상태인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어느 정도 속이거나 가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진짜 내 모습을 알지 못하도록 얼마든지 숨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비추어진 자기 모습에서 죄로 인해 부패하고 악한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그 모습 때문에 애통하고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정직하게 대면해서 보고 나니까 남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해도 그다지 서운하지 않고, 내가 상대방에게 반격하고 누를 힘이 있지만 나를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세 가지, 즉 심령의 가난함과 애통함과 온유함은 모두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한 단어로 무엇입니까?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세워지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우고 흘러넘쳐 이웃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세워져야 이웃 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우선인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잘 비추어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잘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관계에서 핵심입니다. 하나님께 비추어진 나의 모습만 보는 게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람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보면 꽤 괜찮은 사람 같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면 한없이 초라하고 죄악으로 가득하기에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하나? 다른 사람 앞이나 하나님 앞이나 나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은데.’

 

만약 그런 분이 계신다면 제가 강력히 권해 드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이 앞의 스크린에 그대로 비춰보기를 원합니다. 자신 있다고 한다면 평소에 뭘 생각하며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이 앞에 그대로 비추어보십시오. 솔직히 자신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람 앞에서 다 드러나지 않으니까 괜찮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보십시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잘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낙심하고 절망하며 좌절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구나. 나는 가망이 없구나.’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서 더 나아가는 겁니다. 좌절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먼저 자기를 돌아봅니다. 남들 앞에서 가려진 나의 모습이나 적당히 비추어진 나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거울 앞에 비추어졌을 때 그대로 드러난 나의 실체를 보고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거기서 그냥 좌절하고 끝나는 것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니까 가망이 없다.’라고 끝나는 것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를 바꾸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자기를 보는 데서부터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바로 이것이 네 번째 복입니다. 마음의 가난함과 죄로 인하여 애통한 마음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온유하게 반응하는 세 가지 복을 넘어, 자기를 돌아보던 눈을 돌이켜 이제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듦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해답을 얻고 변화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복이 오늘의 네 번째 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6)

 

네 번째 복의 특징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을 가지고, 또 채워지지 않는 자기의 수많은 한계와 허물과 죄 됨을 가지고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게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어느 정도 신앙적으로 거룩해지면 그다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해봐야 어떻게 거룩해지고 어떻게 흠이 없이 되겠습니까?

 

흠이 있고, 한계가 있고, 허물이 있고, 죄도 있고, 남들이 모르는 비밀도 있고 다 있지만,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찾으며 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자기를 보는 동시에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만 보면 좌절했다 우쭐했다 반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수많은 한계를 가진 그대로 복의 근원이시며 우리에게 참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나아갈 때 소망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도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1:16-17)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난과 죄를 보고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구하는 가운데 참된 만족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자꾸만 속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걸 하면 만족을 얻을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학벌이 좋아지면 만족을 얻을 것이다.’라고 우리를 속입니다. ‘사람들에게 받는 홀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분과 지위가 높아져야 한다. 그러면 아무도 너를 깔보지 못하고 오히려 네가 위에서 군림할 것이다.’라고 속입니다. ‘너는 이제 한계가 있고 발전 가능성이 적은데 네 자식을 잘 키우면 남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다. 내 자식을 보라고, 내 자식이 이렇게 잘됐다고 남들 앞에서 과시하며 우쭐거릴 수 있다.’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면 만족할 거라고 속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루신 분들도 계시지만 만족이 되십니까? 만족이 안 됩니다. 성경은 미리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세상이 그리는 그림은 전부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으로 만족이 오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가서 그분으로부터 채우심을 받아야 배고픔과 목마름이 해소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증명할 수도 없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텅빈 공간이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허무감, 가지고 있는 끝없는 갈구, 갈망, 외로움 등의 근원지가 되는 공간이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허무함을 느끼고 왜 외로움을 느낍니까?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외로움을 느끼고 봄바람이 불어와도 또 외로움을 느끼며 나를 채워줄 사람이 없구나.’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사랑하며 사귀고 있어도 여전히 외롭습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곳에 있어도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외롭습니다. 결혼해도 외롭습니다. 여러분, 결혼으로 채워진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바람을 피우며 외도를 합니까? 안 채워진다는 겁니다.

 

부자가 되면 채워질까 하여 돈을 많이 벌어봅니다. 그런데 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이 더 탐욕스럽게 , , 라고 돈을 추구합니까? 그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왜 더 구합니까? 돈으로도 안 채워진다는 겁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이자 나중에 신학자가 된 파스칼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뻥 뚫린 공간이 있다.”

 

이런 것을 <새로운 삶> 공부에서 다루니까, 안 하신 분들은 꼭 하셔야 합니다. <생명의 삶>은 예수 믿는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를 주로 다룹니다. <새로운 삶>은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그런데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사는 건지도 모른 채 그냥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만족이 없습니다.

 

왜 이런 공간이 생겼습니까? 인간이 타락하면서 파괴된 인격의 공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셨는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만들어진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텅 빈 배, 채워지지 않는 배, 그래서 인간이 채우려고 노력하는 빈공간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수없이 말해줍니다. 이런 공간이 있고, 그래서 그런 공간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마음속의 빈공간을 채워보려고 계속 노력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빈 공간을 대개 두 가지로 채워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첫째,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면 이 공간이 채워지겠지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가치를 높이는 일을 추구합니다. 자기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면 그 공간이 채워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학생이 공부를 왜 이렇게 열심히 합니까? 가정을 안정시키려 왜 이렇게 노력합니까? 내 아이가 좋은 학교에 가게 하려고 왜 이렇게 애를 씁니까? 또 승진하려고 왜 이렇게 애를 씁니까? 성공하려고 왜 이렇게 애를 쓰고, 돈을 벌려고 왜 이렇게 애를 씁니까? 나름대로 다 자기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입니다. 왜 가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까? 자기 속에 있는 빈공간을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그렇게 하면 채워지겠지.’ 하며 해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해도 안 채워진다는 겁니다.

 

이 공간을 채우려는 노력의 두 번째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누군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서 채워보려고 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노력에서 만족하지 않고 남들이 그것을 인정해주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가끔 하는 말 중에 기분 나쁠 때 내가 어떤 사람인데 그래?”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인정받음으로써 내 안의 허무한 공간, 채워지지 않는 그 공간을 채워보려고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안 채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더 부족함을 느낍니다.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을 가졌고 가장 최고의 부자였고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솔로몬입니다. 그가 쓴 전도서를 읽어 보십시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라고 합니다. 아무리 해봐도 헛되다는 겁니다. 자기가 다 해봤는데 안 채워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입니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12:1) 하나님을 믿으라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안 채워집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그럼 한 번 해보십시오. 정말 안 채워집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되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행복합니다. 편리하고 좋습니다. 뿌듯한 것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또 공허해진다는 겁니다.

 

흔한 예로, ‘내가 돈이 없는데 내 통장에 만 불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만 불이 채워지면 어떻게 합니까? 만족합니까? ‘에이, 십만 불은 있어야지.’라고 합니다. 십만 불이 생기니까 , 부자시네요.’라고 하면 어유, , 부자 아녜요. 저 사람은 백만 불이 있어요.’라고 합니다. 백만 불 있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정말 부자군요.’ ‘아닌데요.’라고 합니다.

 

실제로 오래전에 USA Today 신문사에서 백만 불 있는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부자입니까?” 대다수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보통 사람에게 얼마를 가지면 부자라고 물었을 때 백만 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백만 불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나는 부자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안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차가 없으니까 고물차라도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생겼는데 자꾸 고장 나니까 만족이 안 됩니다. ‘새 차를 사면 좋겠다. 작은 차라도 새 차가 있으면 좋겠다.’ 새 차를 사게 되니까 차가 너무 작아. 더 큰 차가 필요해.’ 그래서 큰 차를 사니까 이건 너무 수준이 보통이야. 고급 차가 있어야 해.’ 그래서 고급 차를 사고 또 더 고급 차를 사고 또 사도 안 채워집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이것을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안 채워지는지 아십니까? 아무리 억만금을 갖다 부어도 내 마음의 빈공간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큰 것에 작은 것을 넣으면 채워집니까? 안 채워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 큰 빈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내 마음보다 더 큰 존재는 하나님밖에 안 계십니다. 이것은 크리스천이라서, 교회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것밖에는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알려주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 마음의 공간은 타락으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울 생각을 해야지, 자꾸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면 안 채워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구주로 믿고 주인으로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주로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갑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지, 그렇지 않고 자꾸 다른 데로 눈을 돌리면 안 채워집니다. 불행합니다. 만족이 안 됩니다. 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채워보려고 하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마음이 채워지지, 다른 것을 자꾸 돌아보며 좇아다니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고 안 채워집니다.

 

가끔 부부끼리 왜 부부싸움을 합니까? 나를 채워줄 줄 알았는데 안 채워주니까 불만이 생기는 겁니다. 결혼할 때 내가 채워지지 않는 것을 내 배우자가 채워줄 거라고 생각하며 결혼합니다. ‘그동안은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지 않았는데, 너만은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고 가치를 높여주어야 해.’라는 생각과 기대감으로 결혼하면, 틀림없이 불행한 결혼이 됩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혼한다고 채워지는 게 아닙니다. 잘못된 목표를 가졌으니까 안 채워집니다.

 

그런데 대부분 인생이 이렇게 가는 겁니다. 채워지지 않는 것을 채우려고 자꾸 안간힘을 쓰며 나아갑니다. 세월지 지남에 따라 그 방법은 조금씩 바뀝니다. 어릴 때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인정받으려 하고, 나중에는 돈 많이 벌어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으려 하고, 또 사회에서의 성공으로, 결혼해서 남편을 통해 아내를 통해 또는 자녀의 성공을 통해 채우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해보니까 안 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라고 하신다면 안 해보신 겁니다. 해보시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병도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낮은 자존감도 그렇습니다. 앞에 나가 간증을 하라고 하면 나는 절대 앞에 못 나갑니다. 절대 못합니다.’라고 하는데, 왜 이렇게 절대못합니까? 마음의 병이 있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엄청 이야기를 잘하면서 절대 앞에는 못 나간다고 한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낮은 자존감,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 불안, 초조, 염려, 걱정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공간은 결국 하나님 외에는 채우실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큰 존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채우겠다고 하는, 다른 것으로 채우겠다고 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으로 채우겠다고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그렇게 나아갑니다.

 

 

2.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사람들의 인정과 존중으로 채워지지 않는 영역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것 아니고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은 오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 righteousness)라는 단어가 중요한데, 의가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흔히 공의, 정의를 생각합니다. 인간은 완벽한 정의를 구현할 수 없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나와도 불만인 사람들이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완벽한 정의는 인간사회에서 이루어질 수가 업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는 공의롭고 정의롭게 살라는 게 아니라,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는 것을 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거나 왜곡되거나 막히지 않고 올바로 되어 있는 상태가 여기서 말씀하시는 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즉 하나님만을 갈망하며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내가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만 붙들며 나아가는 것이 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 자격도 공로도 없는 우리가 예수님의 완전한 공로와 의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져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의롭지 못한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간주되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쭉 찢어졌습니다. 성소 앞에 있는 지성소는 1년에 딱 한 번 그 해의 대제사장만 들어가서 섬기는 곳입니다. 딱 한 명이 그것도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마음껏 나와서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머물기를 사모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때로는 부족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면 내가 안 해야지.’라고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해봐야지.’라고 애쓰며 나아가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와 악은 어떠한 모양이나 형편이라도 버리려 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 신자, 성도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형성된 은혜 안에 거하기 위해서 내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지.’ 하며 나아가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입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하려는 욕구는, 사람이 가진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강렬한 생리적 욕구가 아닙니까? 일차적 욕구는 그것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하는 것의 충족을 바라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런 예배로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예배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겠다는 겁니다. 또 이런 공적 예배는 이웃과의 관계도 아름답게 하고 싶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가져야 할 핵심적 가치와 소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나 특별한 사람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임하는 복

 

이렇게 세상을 살면 많은 수고와 아픔이 있음에도 성경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면 세상에서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 있는 인생이라고 오늘 예수님이 말씀해주십니다. 인간적인 수를 잘 써서 이 땅에서 잘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며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것이 복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제대로 믿는지 안 믿는지 안 믿는 분들도 다 압니다.

 

이전에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예수 안 믿는 분들을 제가 전도하겠습니다.” “어떻게 전도하실 건데요?” “클럽에 가서 같이 술 마시면서 전도하겠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며 전도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이 되는 것 같은데 사실은 궤변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 앞에서는 쿨하다고 하며 사람이 좋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뭐라 하겠습니까? ‘너나 나나 똑같구나. 아니 너는 나보다 못하구나. 그런데 내가 왜 네가 다니는 교회를 다녀야 하고 네가 믿는 예수를 내가 뭐 하러 하냐?’ 안 믿는 분들도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는지 안 믿는지 다 압니다. 모르는 것 같지만 다 압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은 안 믿지만, 믿게 되더라도 너처럼은 안 믿겠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을 안 주실 때가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은 Yes(주겠다), No(안 된다), Wait(기다려라) 세 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응답에 No는 없습니다. 우리가 달라고 할 때 하나님이 No라고 하셨을 때는 구한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구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때가 안 되었으니 기다려라.’라고 하시는 것이거나 다른 것을 주겠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틀린 것을 구하지 않는데도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올바른 길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잘 안 될 때가 있고 자녀가 잘못 갈 때가 있습니다. 직장과 사업을 위해 기도할 때도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반드시 얻게 된다는 겁니다. 반드시 채움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약속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뭐라고 했습니까? “먼저입니다.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겁니다. ‘너희는 다른 것은 필요 없으니까 다 구하지 마.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만 구해.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아. 다른 것은 필요 없어.’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면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다 공급해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몇 시간 후면 시험을 보는데 그의 부모님이 자녀에게 말합니다. “너 이제 몇 시간 후면 중요한 시험이 있지? 그럼 넷플릭스 보고 드라마 보고 그러면 안 돼. 끝까지 공부해.”라고 한다면, 이것이 억압입니까? 잘못된 겁니까? 지금 중요한 시험이 있는데, 티브이 보거나 인터넷을 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잘 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겁니다. ‘너는 저런 것은 쓸데없으니 하나도 하지 말고 보지도 말고 오직 기도, 말씀, 예배만 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을 지금 먼저 해야 하는지 때를 잘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시험 보는 학생이 마지막 정리를 하지 않고 드라마만 보고 있어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좋을까 말까인데 결과가 좋겠습니까?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네가 지금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게 네가 먼저 할 일이다. 그다음에 최선을 다해서 네가 할 일을 해라. 그러면 인생을 책임져주겠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먼저 채워주시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당장 몇 시간 후에 시험인데 일단 이것이 너무 재미있고 지금 너무 보고 싶고 지금 막 나왔으니까 이것을 먼저 보고 그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시험공부를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먼저 공부하고 나서 나중에 봐도 되는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파악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바로 파악하고 살아가면 먹고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사는 성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배고픔과 목마름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향한 허기와 갈증을 가지고 구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늘의 자원으로 채워주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새로운 배고픔과 목마름이 생깁니다. ,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채워지면서 다른 사람들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들을 돕는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많이 채워주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6)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먼저 구하며 나아가는 사람은 빈공간의 채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족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그게 너무나 황홀하고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에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되고, 잠깐 넘어질 수는 있지만 다시 일어나 또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갑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사랑을 실천하며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나아갑니다.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바른 길로 성공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높이 올라간다고 채워지지 않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보았습니다. 상류층의 삶이 어떤가를 보십시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이 사회의 최상위층에 올라간 사람들이 파티를 하면서 무엇을 합니까? 마약을 합니다. 섹스를 합니다. 술로 무너집니다. 아니,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왜 저렇게 됩니까? 안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배부름만이 참된 만족을 준다는 것입니다. 소유가 행복을 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채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망하며 나아갈 때 채움을 받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늘의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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