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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joFWwBmiXRU?feature=share&t=221

 

 

2023122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2

또 다른 반역과 또 다른 죽음

(사무엘하 201~13)

 

[들어가는 말]

 

어떤 어려움을 당해서 갖은 노력 끝에 그것을 간신히 극복했는데 바로 이어 또 다른 시련이 닥치는 것을 일컬어 보통 산 넘어 산이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뭘 하나 해결했더니 그다음에 또 문제가 오고, 그것을 간신히 해결하니까 또 문제가 옵니다. 산 넘어 산이고 또 산 넘어 산입니다. 지금 당하는 어려움도 힘든데 그다음에 온 것이 더 어려우면 얼마나 힘듭니까?

 

사실 우리는 한 가지 어려움만 당해도 진이 다 빠지는데, 그 어려움을 극복한 후 곧바로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친다면 막막하고 힘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그 어려움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뭔가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힘든 상황입니까?

 

뭔가를 이루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만 되면 좋겠다. 내가 이것만 되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니까 또 다른 것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이것만 되면 진짜 잘되겠다.’라고 했는데, 그것을 하니까 또 다른 게 있습니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의 연속입니다. 단기 목표도 있지만, 진짜 목적이 아닌 것, 도구인 것이 나의 목표가 되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해결하면 또 해야 하는 게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간에 이루고 또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움이 닥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능력이겠습니까? 지혜이겠습니까? 물론 능력도 지혜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대강절 때부터 다른 말씀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다윗에 대한 말씀으로 돌아왔는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악한가?’라고 느꼈습니다. 뉴스를 보아도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 인간이 인간을 무참히 살해하거나 억누를 때 그렇게 느낍니다. 잔인한 살인사건을 볼 때 인간이 어떻게 이리도 악합니까? ‘과연 인간에게 소망이 있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마음이 중요합니다. 악한 행동은 악한 마음에서 나오고, 선한 행동은 선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중요한데, 오늘 성경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내 마음은 어떤가?’ 하는 것을 잘 점검해보며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변화시키기로 결단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세바의 반역 (1~3)

 

이전 본문은 압살롬 반역 이후 압살롬이 죽자 다윗을 왕으로 복귀시키고 영접한 유다 사람들과 그 과정에서 소외된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논쟁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다윗이 유다 지파이니까 아무래도 유다 지파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그를 다시 모셔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에게 불평을 토로했지만, 다윗도 그들을 유대 사람들과 화해시키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의 반란 이후 새롭게 시작된 다윗 왕국에서 유다 사람들은 일종의 특권 백성이 됩니다.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과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유다 지파를 우대하는 정책을 씁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가 특권층이 되고 나머지 지파들은 소외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나라가 나중에 나뉘게 됩니다.

 

대화와 토론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다윗도 중재자로 역할을 다하지 못하자, 세바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일어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달리 이것은 다윗 왕조 내부의 권력 투쟁이 아니라, 백성들의 반 다윗 왕조 운동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윗 왕조가 싫다. 새로운 왕조를 원한다.’라고 하는, 진짜 쿠데타입니다.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1)

 

거기에라는 말은 요단 강가에 있는 길갈 근처에서 벌어진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 사이의 분쟁 현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무엘서는 세바라는 사람을 언급하는데, 세바도 다윗을 모셔올 때 서로 자기들이 하겠다고 논쟁을 벌이던 그 현장에서 같이 논쟁을 벌이던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무엘서는 세바를 다양하게 묘사하는데, 먼저 그를 불량배로 부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상형을 군자, 부자, 용사’(이쉬 하일)로 불렀고, 그것에 정반대되는 인물을 불량배로 불렀습니다. 영어로는 그냥 ‘troublemaker’라고 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 한국의 아이돌 남녀 두 명이 트러블메이커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생각하며 아름답고 좋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트러블메이커라고 가사가 나올 때마다 불량배, 불량배라고 하면 어감이 좋지 않습니다. 실제로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백성을 배려하지 않는 분열과 이기심의 사람(삼상 30:22), 약자를 무시하고 돌보지 않는 사람(삼상 25:25),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삼상 10:27), 종교와 율법을 이용해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삼상 2:12, 15:9),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자고 선동하는 사람(13;14)이 불량배로 불린다.

 

사무엘서에서 세바를 불량배로 부르는 것은 다윗의 아내 중 하나인 아비가일의 원래 남편이었던 나발을 가리켜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자라고 하는 나발 이야기(삼상 25)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문학적 인격 살인입니다. 아예 그렇게 지정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바 이야기와 나발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즉 다윗을 홀대한 나발이 정의로운 역사의 편이 아닌 것처럼, 다윗 왕을 거부한 세바의 행위도 정의로운 행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둘째, 세바가 베냐민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베냐민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매우 독특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단 세 명에 대해서만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먼저 여기 나오는 세바, 그리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 그리고 에스더의 사촌오빠로서 그녀를 키워 주었던 모르드개에 대해서만 사용된 표현입니다. 모르드개가 사울이 실패한 역사적 사명(아말렉에 대한 심판)을 완수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세바는 사울과 그 후손들처럼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거부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그는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왜 나팔을 불겠습니까? 사람은 감정이 있기 때문에 그냥 나를 따르라.’ 하는 것보다 나팔을 막 불면서 나를 따르라.’ 하면 훨씬 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여 선동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다.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고 외치는 말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역하는 사람들의 단골 구호가 됩니다. 세바는 다윗을 으로 부르기를 거부하고 그저 이새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19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왕에 대해 불만을 말하면서도 그를 왕이라고 불렀는데(19:43), 세바는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시하는 겁니다.

 

또한 세바는 다윗 왕에게 지분이 하나만 있다고 주장한 동료 이스라엘 사람들과 반대로, 다윗에게 어떤 지분이나 유업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다윗과 자기는 어떤 언약 관계도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세바는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고 외치며, 다윗에 대한 어떤 세금도 내지 말고 부역도 거부하라고 선동합니다. 그런데 그의 선동이 성공을 거둡니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2)

 

여기서 무엇을 봐야 하는가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을 선동한 적이 없는가?’입니다. 선동이라고 하면 나는 없지.’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부추기는 경우가 다 있습니다. 특히 이렇게 사실이 아닌 것을 부풀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면서 자기 이득을 취하려 하는 게 없는가를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하는 겁니다.

 

성경은 비그리의 아들을 따르는 무리를 온 이스라엘 사람들로 표현합니다. 다윗을 따르는 유다 사람들은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따랐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요단까지로 범위를 국한합니다.

 

물론 그것의 표면적 의미는 유다 지파 사람들이 길갈 근처 요단강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다윗 왕을 호위했다는 말이지만,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표현은 원래 이스라엘을 표현할 때 단에서 브엘세바라는 표현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한국식으로 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것과 같습니다. 저 북쪽 끝에서부터 저 남쪽 끝까지를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말은 우리식으로 하면 시청에서 한강까지정도가 됩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표현하던 것과 대조하여, 이제 세바의 반역으로 다윗의 통치 영역이 전국을 아우르는 게 아니라 아주 적게 줄어들었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초기에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세바가 자신을 으로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그가 왕이 되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세바는 압살롬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가 왕이 되지 못했을까요? 그를 표현할 때마다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고 하는 것에 열쇠가 있습니다. 비그리는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부족 이름에 가깝습니다. “비그리의 아들이라는 말은 비그리 부족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비그리 부족은 베냐민 지파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힘이 없고 변방에 머문 사람들이음에 틀림없습니다.

 

함께 모인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바를 그 자리에서 왕으로 세우지 않은 것은 그가 비그리의 아들즉 비주류이자 변방 출신이기 때문이고, 그가 일으킨 반란의 동력이 점점 떨어져서 실패하게 된 이유도 그가 변방에 속해 있었으니까 중앙 정치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반짝하다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3)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윗은 그가 궁에 남겨두고 떠났던 열 명의 후궁들을 가택 연금에 처합니다. 그들에게 음식과 생활의 필요한 것들을 공급했지만, 그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첩들은 죽을 때까지 생과부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후궁들에 대해 한 일이 세바의 난을 서술하는 중간에 삽입된 이유가 뭡니까? 그냥 세바가 어떻게 되었다고 말하면 되는데 왜 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까? 빼도 큰 상관이 없는데 굳이 이 이야기가 여기 들어가 있는 것은 그 숫자에 힌트가 있습니다. 후궁의 숫자를 보십시오. 열 명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후궁들에게 한 일이 압살롬의 반란과 세바의 반역 이후에 다윗이 열 지파의 지분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쓰인 히브리어에는 이런 표현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숫자라든지 언어유희를 통해 의미를 전달해주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왜 여기서 후궁이 열 명이겠습니까? 왜 이스라엘 북쪽 지파들이 열 지파이겠습니까? 둘을 연결시켜서, 앞으로 다윗이 열 지파와 관계가 멀어질 것을 암시해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모든 이스라엘이 자기가 다스리는 땅이지만, 또한 북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치안과 국방과 사법적, 행정적 지원을 제공하겠지만, 그가 열 명의 후궁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이스라엘 열 지파 백성들을 형제처럼 돌보아주지 않을 것을 여기서 암시하는 겁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전처럼 온 백성에게 더 이상 사랑받는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가 나이 들어 힘이 약해졌을 때, 또 한 번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암시해줍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비록 큰 죄를 짓기는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아닙니까? 다윗보다 훌륭한 왕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아무리 인간이 훌륭해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못 미친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사람, 이렇게 불완전한 사람이 인간 중에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제일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아무리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다.”라고 인간이 말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택도 없고 전혀 미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너무 미치지를 못해서 저 아래 보이지도 않으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게 이를 수가 없으니까, 그것이 가능해지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다윗은 개인적으로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나발이 죽은 후 아비가일을 아내로 취했고, 원래 아내였던 미갈이 다윗 자신의 도망자 시절에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을 때 굳이 되찾아 옵니다.

 

사실 법적으로 왕은 이전 왕의 후궁들을 이어받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압살롬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면 이전 왕의 후궁들을 이어받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다시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왕위를 되찾았을 때 빼앗겼던 후궁들을 회복하는 것도 고대사회에서는 전혀 흠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다윗의 정치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 생각해야 할 것은,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아브라함, 요셉, 다윗 등등)이 정말 훌륭하지만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형편없는 모습이 너무 많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행동이 왜 정치적인 행위입니까? 다윗은 압살롬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사실 이전에 압살롬은 사람들이 추대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과 성관계한 여자들은 절대로 왕의 여자가 될 수 없다는 관례에 따라, 다윗은 압살롬과 관계한 여인들을 자기의 여자로 다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다윗이 후궁들을 가택 연금시키고 그들과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음으로써 압살롬이 한때 왕이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역사에서 압살롬은 쿠데타에 성공하여 왕이 된 역적이 아니라 그저 다윗에게 반역한 아들로 기억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정치적인 것들, 술수라면 술수, 방법 등을 통해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다윗도 그런 인간이었구나.’ 하고 머무는 게 아니라,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닌가?’ 하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완전한 화해 없이 다투면서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자고 했는데 결국 그러다 갈라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진행했을 때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 특히 인간관계의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대충 덮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나가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노력을 해야 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결과는 맡기지만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2.   아마사와 아비새 (4~7)

 

“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4-5)

 

이제 다윗은 세바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얼마 전 요압을 밀어내고 군대 장관이 된 아마사를 불러서 그에게 사흘 안에 유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예루살렘에 대기하라고 명령합니다. 동원 범위가 유다 지역에 국한되기 때문에 사흘은 충분한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사는 다윗이 정한 날짜가 되어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그러자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6)

 

다급해진 다윗은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세바를 추격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요압이 있는데도 그를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의도적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편한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다. 요압이 자기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도 이런 마음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 요압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세바의 반역을 압살롬보다 더 재앙적인 것으로 말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세바의 난이 주는 위험을 과장해서 평가합니다. 압살롬에 비하면 별것 아닌데도 엄청날 것이라고 과장합니다.

 

압살롬이 왕으로 평가되는 것은 막았지만, 다윗은 아버지로서 아들 압살롬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죽인 요압을 다시 신뢰하여 높은 위치에 올려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아비새에게 명령할 때 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요압이 아니라 너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압이 아니라 네가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7)

 

아비새가 이끄는 부대는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라고 되어 있습다. 이들은 외국 용병을 포함한 다윗의 최정예 부대를 가리킵니다. 유다 사병들을 모집하기 위해 떠난 아마사가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않으니까, 다윗은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자신의 최정예 상비군을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요압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아비새에게 네 주의 부하들”(6), 즉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세바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는데, 7절에서는 그것을 요압의 따르는 자들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이 표현은 요압이 이끄는 특수 부대를 말합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요압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세바를 추격하는 군대의 실질적 리더가 아비새가 아니고 요압임을 암시해줍니다.

 

 

3.   아마사의 허망한 죽음 (8~14)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8)

 

아비새와 요압이 이끄는 정예 부대는 기브온에 있는 큰 바위곁에서 대기합니다. 그때 아마사가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아마사는 왜 정한 날까지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못한 것입니까? 그리고 왜 이때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7마일 정도 떨어진 기브온 큰 바위에 나타난 겁니까? 유다 사람들을 모으려 했다면 예루살렘 남쪽의 유다 지역을 다니며 거기 있어야 하는데, 그런 그가 북쪽인 기브온에 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아마사가 다윗을 반역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지만, 압살롬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도운 것 같지 않습니다. 삼촌 다윗이 그를 군대 장관으로 임명한 것도 며칠 전의 일입니다. 세바의 반역을 진압하라는 명령은 그의 첫 번째 임무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윗을 배반할 이유가 전혀 없는 아마사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기브온에 나타났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리로 오라고 전해준 겁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이겠습니까? 요압입니다. 요압이 사람을 보내서 그리로 오라고 한 겁니다. , 요압이 그에게 따로 전령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이 아닌 기브온에서 왕의 정예 부대와 합류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던 겁니다. 이전에 요압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아브넬을 거짓말으로 유인하여 헤브론으로 데리고 온 후 암살했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어떤 이유였든 간에, 아마사는 다윗이 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기브온으로 옵니다. ‘기브온 큰 바위는 다윗의 최정예 부대와 아마사 군대가 만날 만남의 장소로 미리 정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기브온 큰 바위는 아마사가 별도의 메시지를 받고 예루살렘이 아닌 기브온으로 왔다는 증거가 됩니다. 요압이 사람 편에 아마사에게 기브온 큰 바위 알지? 그리로 와.’라고 한 겁니다.

 

놀랍게도 기브온 큰 바위는 이전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그것은 2장에 기록된 기브온 전투입니다. 사울이 죽고 그 아들 이스보셋이 따로 왕이 되었을 때 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이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전투를 벌였던 곳입니다. 무엇보다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곳이 바로 여깁니다. 요압은 이에 대한 복수로 아브넬을 다윗 몰래 암살했는데, 바로 그곳으로 몰래 아바사를 불러낸 겁니다.

 

“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9-10a)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방식은 전형적인 거짓과 배신의 암살입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내가 누구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슬쩍 거짓말하며 배신한 적은 없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마사가 요압을 신뢰하고 자신의 수염을 잡힌 것은 그가 같은 왕을 섬기는 동료이자 사촌일 뿐 아니라, 요압이 그를 그곳으로 불러낸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만났습니다.

 

요압은 암살을 위해 검을 보통 차는 허벅지가 아닌 허리에 찼습니다. 또 의심을 피하기 위하여 검집에 담긴 검을 옷 아래가 아닌 옷 위에 찼습니다. 요압은 아마사에게 나아갈 때 일부러 칼집을 떨어뜨립니다. 이제 칼은 칼집이 빠진 채로 요압의 허리에 둘러져 있습니다.

 

요압이 내 형은 평안하냐!”라고 인사하면서 오른손으로 아사마의 수염을 잡았습니다. 오른손잡이는 칼을 오른손으로 휘두르는데, 오른손으로 수염을 잡으니까 아마사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요압이 공격하려 했다면 왼손으로 수염을 잡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공격할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칼이 허벅지가 아닌 허리에 있었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빼서 휘두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마사는 요압의 왼쪽에 있는 검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요압은 아마사의 복부를 칼로 찔렀고, 내장이 밖으로 나온 아마사는 즉사했습니다. 두 번 찌를 필요도 없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요압의 칼 솜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압이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연습했는가를 말해줍니다.

 

골프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전혀 치지 않고 있다가 시합에 나가면 어떻게 잘할 수 있겠습니까? 연습을 많이 하고 나가도 잘할까 말까 한데, 연습을 안 하면 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압은 왼손으로 찌르려고 하니까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겠습니까?

 

이 장면을 종합해보면, 요압이 허리에서 칼을 뽑지 않고 단지 칼끝을 아마사 방향으로 향해 찔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검은 긴 것이 아니라, 단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가까이서 찔러야 합니다. 끄래서 인사하는 척하며 허리에 찬 채로 그대로 찌르는 연습을 엄청나게 한 겁니다. 굉장한 노력을 한 것은 좋은데, 악한 노력이었습니다.

 

이전에 아브넬을 죽일 때도 거짓으로 전령을 보내어 돌아오게 해서 를 찔러 죽였고, 지금도 거짓 전령을 통해 아마사를 기브온으로 오게 한 후 수염을 잡는 형제의 인사를 나누는 척하다가 를 찔러 죽였습니다.

 

여러분, 나쁜 일에 성공하려고 연습을 많이 하십니까? 그것이 좋은 일이라면 괜찮지만, 악한 일이라면 그 연습은 과연 무슨 연습입니까?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10b)

 

아마사의 암살 이후 본문은 세바 추격의 실질적 대장이 요압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사가 없어지니까 요압은 실질적으로 다윗의 군대 장관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하지만 요압이 아마사가 데리고 온 군대를 장악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11)

 

살해당한 아마사의 시체가 땅에 누워 있는데 피가 얼마나 많이 나왔겠습니까? 창자가 나올 정도로 배가 쫙 갈라진 것인데, 그것을 보는 병사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방금 전까지도 자기들의 장군이었는데 저렇게 죽어 있으니까 보고 멍하니 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압의 부하 중 하나가 외칩니다. “요압이 좋은 사람은 누구든지,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든지, 요압을 따르라!” 그는 의도적으로 요압과 다윗이 한편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얼마 전 다윗이 요압을 강등시킨 것을 염두에 둔 것인데, 요압을 따르는 것이 다윗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또한 여기서 아마사가 반역자라는 뉘앙스가 그 부하의 구호에서 느껴지는데, 요압은 이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아마사가 반역자라고 몰아가는 프레임을 거는 겁니다. 그런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프레임을 사용할 것을 암시해줍니다. 일단 아마사가 다윗의 명령대로 군인들을 몰고 예루살렘에 오지 않은 것이 반란 행위라는 겁니다. 그런 아마사가 죽었으니까 반란자를 처단한 것이라는 프레임을 걸었고, 그것을 변명할 수 있는 사람은 사라졌습니다.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12)

 

그 부하는 사람들이 서서 움직이지 않으니까, 아마사의 시체를 길에서 밭쪽으로 멀리 치웁니다. 아마사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흥건히 도로를 적시니까 사람들이 피를 밟고 걸어가기를 꺼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체를 길에서 치운 후에도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밭에 버려진 시체를 보기 위해 멈추어 서니까, 요압의 부하는 그 시체를 옷으로 덮어서 그것이 뭔지를 모르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죽은 아마사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병사들의 떨어진 사기를 다잡고 지체된 세바에 대한 추격을 재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의 종이 아마사의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은 역적의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마사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역적이라고 몰아가는 겁니다.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 (13)

 

이때 세바는 이미 모든 이스라엘 지파 영토를 통과해 벧마아가의 아벨로 은신해 들어갔습니다. 그의 부족 비그리 사람들도 세바를 따라 아벨에 집결합니다. 세바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녔다는 말이 있는데(14), 이것은 그가 단순히 도망 다녔다는 의미를 과장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세바가 모든 이스라엘을 돌며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아직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세바는 각 지파를 돌아다니면서 일종의 선거 운동을 하고 유세를 한 겁니다. 다윗이 기약한 사흘이 지나도 아마사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아비새를 대장으로 한 추격대를 서둘러 보낸 것은 바로 이런 세바의 선거 운동또는 유세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사건 진행으로 볼 때 세바가 이스라엘 지파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가 숨어 있을 때 그 소식이 다윗 진영에 퍼졌고, 결국 거기서 그는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나가는 말]

 

요압은 예수님이 경고하신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라는 말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칼을 잘 써서 온 이스라엘의 군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개인적 분노와 질투를 해결하고자 여러 사람을 칼로 죽였습니다. 요압은 칼로써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압에게 칼은 성공을 보장하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다윗의 또 다른 아들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결국 칼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왕상 2:34).

 

요압에게는 칼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무엇입니까?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될 수 있고,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권력이 될 수 있고, 학자에게는 학문이 될 수 있습니다. 칼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를 죽일 때 악한 도구가 됩니다. 돈이든 학문이든 사회적 위치이든, 그 자체로는 괜찮지만 잘못 사용할 때 악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를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나에게 주어진 도구로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을 나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요압이 자기 칼을 잘못 사용한 것은 결국 자기 마음의 죄악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칼이 문제가 아니라, 요압의 마음속에 있던 분노, 경쟁, 시기, 질투, 미움, 교만, 폭력 같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도구를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겉으로 우리가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지만, 속으로는 두고 보자.’라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겉으로는 잘 지내시죠?”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너는 내가 죽인다.’라고 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겉을 보십니까, 속을 보십니까? 물론 둘 다 보십니다. 특히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행동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도구가 많으면 뭐 하겠습니까? 악하게 사용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내가 가진 도구는 무엇인가? 나에게 지금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선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음을 늘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삶 공부를 하며,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몸을 가꾸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마음을 가꾸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적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사람들로서 세상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성공하여 주님께 기쁨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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