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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29C4MH7U2TI?feature=share&t=179

 

 

202335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48/최종

재앙을 그치게 한 예배

(사무엘하 2416~25)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천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십니까? 그러면 귀신은 어떻습니까?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으십니까? 달걀귀신이나 처녀귀신 같은 것 말고 정말 귀신 말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분명히 천사와 귀신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천사가 나타나는 장면도 많고, 천사의 종류도 여럿이며,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 천사나 귀신을 직접 목격한 분이 계십니까?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저는 귀신을 본 것 같습니다.’라고 하시는 분이 있다면,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겁니다. 이번에 다니엘 금식기도를 통해 미디어 금식이 꼭 필요하신 분입니다. 반드시 하시기 바랍니다.

 

천사든 귀신이든 영이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천사를 눈으로 본 경우가 성경에 나옵니다. 원래 영이기 때문에 천사는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어쩐 일인지 그 시간에는 하나님이 천사를 볼 수 있게 해주신 겁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곳 중 하나입니다.

 

 

1.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16~18)

 

다윗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지난주 본 것처럼 그날 아침부터 지체함 없이 시행되는데, 그 진노는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즉 이스라엘의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이스라엘 전역에 임하게 됩니다(15). 그래서 무려 7만 명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방인들에게나 유대인들에게나 똑같이 신속하게 진행되는데, 하나님의 징계는 온 이스라엘이 진멸 당할 위험이 있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전 나라가 망하게 생겼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에게 그 손을 거둘 것을 명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조차도, 그의 사랑하는 백성도 전염병에 다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처음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까? 우리가 협력하던 선교사님도 그때 선교지에서 산소호흡기만 있었어도 살 수 있었는데, 당시 인도에서 그것이 너무 부족할 때였기에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50세도 안 된 분이셨는데 그렇게 된 것으을 보며 우리 모두가 슬퍼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도 그러한데, 고대사회에서 악성 전염병이 약도 없고 지금 같은 의료 체계도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7만 명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이 다 죽을 위험에 빠진 겁니다.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 (16)

 

인간의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다는 것을 여기서 봅니다. 오늘 사무엘하 본문에는 천사가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아주 구체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역대상 21장을 보면 천사가 나타난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천사에게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어라.”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셨다고 나옵니다. ‘아유, 내가 잘못했네.’라고 하는 게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실수하셨다고 느낄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슬퍼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후회하셨다는 것은 인간에 의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서 후회하셨다’, ‘뉘우치셨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수하셔서 아이고, 내가 잘못했네.’ 하며 후회하고 뉘우치시는 게 아닙니다. 슬퍼하셨다는 겁니다. 비록 징계하시느라고 전염병을 보내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은 안타까우셨던 겁니다. 그래서 그날로 바로 그만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면서도 왜 뉘우치며 그만하라고 하시나 하고 의아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뉘우치며 후회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슬퍼해서 마음을 바꾸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 징계하겠다고 선언하셨지만, 그 선언을 바꾸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시지 않았다면 다 멸망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답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국이든 한국이든 전 계적으로 나라마다 우왕좌왕했습니다. 공항 등에서 해외 입국을 막는 노력도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수없이 바이러스에 걸리고 죽어 나갈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물론 과학자들과 의료진들이 백신도 만들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며 여러 가지로 대처를 잘했는데, 그런 과학이나 의학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온 게 아닙니다. 다 쌓이고 쌓여서 그런 것이 나오는 겁니다. 교회도 막막했고 다시 모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렇게 다시 자유롭게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셨으면 인류는 그냥 끝납니다. 그런데 너무 안타까워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뉘우치셨습니다. 슬퍼하셨습니다. 그래서 중단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말씀을 곧이 곧대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하시는 게 더 중요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게 더 중요합니다.

 

여기서 천사가 예루살렘을 파괴하려고 손을 들었다고 표현하는데, 그때 하나님이 재앙 내리신 것을 뉘우치시고 천사에게 족하다. 됐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인데, 이 사랑이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 불쌍히 여기심, 자비를 깨달은 사람은 그 후 뭔가 믿음의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대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 바로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리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충분하다. 네 손을 거두라.”라고 말씀하시는 시점에 주님의 천사가 어디 있었습니까? 바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었습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너무나 놀랍게도 몇 년 후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질 곳입니다. 성전이 세워질 바로 그 장소에 천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성전의 제단에서 앞으로 드려질 제사를 미리 당겨서 예배하는 것으로 봐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여기서 또 흥미로운 점은, 전염병을 가져온 죽음의 사자(천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모세 당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던 출애굽 당시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인 장자의 재앙 때 죽음을 가져온 죽음의 사자를 묘사하는 같은 단어와 같다는 것입니다(12:13). ‘전염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도 열 번째 재앙을 표현하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양을 잡아서 피를 바른 집을 뛰어넘었듯이,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양의 피가 뿌려질 미래의 제단 앞에서 전염병의 사자가 멸망의 손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17)

 

여기서 다윗이 천사를 보았다고 되어 있는데, 역대상 21장에는 조금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천사가 보이도록 임했다는 겁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막 쓰러지니까 천사가 치는 것처럼 느낀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있고 그 후 다윗의 회개의 고백이 이어졌다는 겁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먼저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손을 거두셨다고 보기도 하지만, 오늘 본문을 그대로 보면 하나님이 천사에게 그만하라고 하시고, 그때 다윗이 회개 기도를 한 겁니다.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즉 전염병의 사자가 아리우나의 타작마당 근처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10절에서 인구조사를 하고 큰 죄를 범했다고 하며 회개한 데 이어 다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물론 이때 다윗은 하나님이 이미 그 사자에게 손을 거두라고 명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두 번째 죄 고백은 첫 번째의 그것과 세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첫째로, 죄를 고백함에 있어서 다윗은 자신과 백성을 구분하고, 전적으로 패역과 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한다.

 

둘째, 하나님의 손, 즉 전염병이 자기와 자기의 가문만을 치기를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의 양 무리인 백성을 살리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전염병을 선택했으니 백성들이 죽을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백성이 죽는 모습을 보며 너무 안타까워서 백성을 치지 마시고 저와 저의 집을 쳐주십시오.’라고 하며 백성을 살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진정한 목자, 선한 목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다윗도 죄인이고, 그동안 살펴본 것처럼 실수도 많았고 엄청난 죄도 저질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린다.”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같은 급의 선한 목자는 아니지만, 자기는 죽어도 백성은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다윗의 모습에서 참된 목자의 그림자를 보기에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어느 사본에 기록된 다윗의 죄 고백에는 저는 목자입니다. 목자인 제가 악을 행했습니다.”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셋째, 두 번째 회개의 고백에서 다윗은 자기 죄를 사하여 달라고 간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첫 번째 회개 때는 분명히 종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10)라고 간구했는데, 그 첫 번째 죄의 고백에서 다윗이 죄 사함을 구했어도 하나님은 그에게 죄의 결과로서 용서 대신 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죄의 고백에서는 다윗이 용서가 아니라 형벌을 구하는데도 하나님은 다윗과 그 백성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다윗이 백성을 위해 죽기로 결심했을 때 모두가 살게 되었다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자기가 살려고 했을 때는 안 되었는데, 자기가 백성 대신 죽겠다고 했을 때는 다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이고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17절에 나오는 다윗의 겸비한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잘한들 하나님이 우리 기도 때문에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 변덕스럽게 바꾸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다윗이 한 것입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다윗의 마음 가운데 있던 교만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구조사는 교만 때문에 한 것입니다. ‘내 군사력이 이렇게 강하다.’ 하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군사들의 수를 센 것인데, 그 교만이 지금 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목자로서의 위치를 회복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끄는 왕으로서, 목자로서 세워주셨는데 그것을 망각하고 이런저런 죄도 짓고 정치적 술수도 쓰며 살았습니다. 물론 중심은 늘 하나님께 두기는 했지만, 늘 그런 상황에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백성이 죽는 것을 보면서 자기와 자기 집이 벌을 받겠으니 살펴달라고 기도합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죽어 나가도 저는 살려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어떻게 이리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까? 차라리 저와 저의 집을 치시고 다른 사람들을 살려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겁니다.

 

비록 직접적으로는 내 잘못이 아닐지라도, 비록 내가 한 일이 아닐지라도,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는 다른 형제자매, 또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할 때, 물론 건설적인 비판이 있어야 바로잡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는 비난이 아니라 통회하며 대신 회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사람보다는 자기 죄가 아닌데도 그것을 끌어안고 대신 회개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구약을 보면 에스겔이나 예레미야 등 많은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럴 때 내가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18)

 

이날이라고 하며 이날 갓 선지자가 다윗을 다시 찾아왔다고 되어 있는데, “이날이 어느 날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 근거해 어떤 학자들은 아침부터 시작한 역병이 하루가 채 가기 전에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역병이 그 아침”(15)에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찾아온 갓 선지자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올라가, 거기에서 주님께 제단을 쌓으십시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25)

 

다윗이 그곳에서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재앙이 그칩니다. 희생 제물을 드렸을 때 죽음의 전염병이 멈추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생명만이 생명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제단에서 죽는 양과 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며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이 그 진노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비록 훌륭하고 위대한 왕이었지만 그도 타락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그도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의 실수는 수많은 사람에게 죽음과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는 다윗이 통치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고 여겨지는 다윗이었지만, 우리는 다윗 왕국의 한계를 보면서 완전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게 됩니다.

 

 

2.   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윗 (19~25)

 

하나님은 그 진노를 거두심에 있어서 다윗의 중보기도에 더하여 아라우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진노를 거두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보다 다윗과 하나님,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 회복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지금 전염병만 그치는 게 주님의 관심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가 다시 제대로 회복되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 전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항상 말씀드리며 <생명의 삶> 공부에서도 강조하는 것이지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것저것 활동을 많이 해도,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약하고 이웃 사랑이 없다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첫째와 둘째는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똑같이 중요한데,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는 순서는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 되어야 이웃 사랑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기서 진노를 통해 단순히 벌을 내리시다 그만하는 게 아니라, 이것을 통해 다윗이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마음이 떠나있는데, 다시 관계를 제대로 세우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야 이웃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참이 없이 그냥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저 윤리, 도덕 차원에 머물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을 때는 하고 힘들거나 하기 싫으면 안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설 때 이웃 사랑도 올바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이 뭡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천국에 간다는 게 뭡니까?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아 지옥에 안 가고 천당 간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새가족반>이나 <생명의 삶> 공부를 할 때 오늘이라도 세상을 떠나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으면,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이 못 간다.’ 또는 모르겠다.’라고 답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도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하는 분들이 많다는 겁니다. 모르겠다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그 사랑에 확신이 없는 겁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할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데, 나는 그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산 것 같지도 않고...’ 자꾸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모르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가 없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은 상관없이 천국 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천국이 뭡니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하나님이 늘 함께하시며 하나님이 주인으로,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곳, 즉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확실해서 들어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것이 다윗을 향하신 관심이기도 했고, 이스라엘을 향하신 관심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라우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신 또 다른 이유는, 그 제단이 죽음과 생명 사이에서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른 곳이 아닌 굳이 이곳, 하나님의 진노가 그친 바로 그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제단 쌓으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사실 18절과 25절은 하나님의 명령과 다윗의 순종이라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는 18절 뒤에 25절이 붙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에서는 책을 끝내면서 18절과 25절 사이에 짧으면서도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여부스 사람 아리우나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전염병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일입니까? 이것은 분초를 다투는 일이고, 그 일을 위해서는 제단을 빨리 쌓아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서는 중간에 다윗이 아리우나로부터 타작마당을 구입하는 한 이야기를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야기의 속도를 늦추면서, 이 사건을 전염병의 문제, 징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예배의 문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19)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은 지금의 성전 산에 위치했습니다. 지금도 가면 성전산’(Temple Mount)라고 부릅니다. 언덕 위에 있기 때문에 다윗이 그곳으로 올라가다라는 동사로 표현됩니다(19). 이곳이 어디입니까? 놀랍게도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바쳐라.” 하셨던 바로 그 모리아 산입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세운 바로 그곳입니다(역대상 3:1).

 

이 산은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한 양을 준비해주신 여호와 이레의 산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대표적으로 미리 보여주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는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미리 드려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갓을 통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올라갑니다. 역대상 21:20에 보면 거기는 아라우나가 아니라 오르난으로 나오는데, 그가 전염병의 고통 중에 있는 게 아니라, 평화로이 밀을 타작하고 있다가 천사를 보고 무서워 숨어 있습니다. 그때 자신에게 나아온 다윗 왕을 보고 나아가 절을 하는데, 그로부터 그 타작마당을 사겠다는 제안을 받습니다.

 

아리우나는 여부스 사람인데(18), 그의 이름 자체가 이스라엘 사람의 이름과는 다릅니다. 아라우나(또는 오르난)가 여기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원래 여부스 사람들의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다윗성으로 삼으며 수도로 삼았는데, 그들을 다 죽이거나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거나 추방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조공만 거두어들이기로 하고 계속 살게 해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인 아라우나도 자기 재산을 그대로 가지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준 다윗에게 평소에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왕이 와서 자기 타작마당을 사겠다고 합니다.

 

“20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21 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 (20-21)

 

아리우나의 집의 위치와 그가 다윗에게 베풀었던 관대함의 정도를 생각해볼 때, 그는 여부스 사람 중에도 지위가 꽤 높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 왕과 아리우나 이야기의 핵심은 다른 어느 것보다 다윗이 값을 지불하고 타작마당과 번제에 쓸 소와 기구를 구입했다는 것입니다.

 

“22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 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22-23)

 

이런 것들을 죽 볼 때, 아라우나라는 사람은 원래 여부스 사람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아리우나가 내 주 왕께서는, 무엇이든지 좋게 여기시는 대로 골라다가 제물로 바치십시오.”라고 말하며, 제단과 번제에 필요한 땅과 제물과 나무 등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것을 거절합니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24)

 

다윗은 주 나의 하나님께 공짜로 번제를 올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50세겔로 그것들을 구입한 후 번제를 올립니다.

 

이 다윗과 아라우나의 이야기가 18절과 25절 사이, 즉 다윗에게 하나님이 갓을 통해 주신 명령과 다윗의 순종 사이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다윗이 아리우나의 타작마당과 제물과 도구에 대해 값을 치르고 구입했다는 사실, 왜 공짜로 한 게 아니라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 중요합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이 땅의 소유권이 확실하게 다윗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리우나가 이방인인 여부스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돈을 지불하고 그로부터 땅의 영구적 소유권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 때 하나님께서 각 지파, 족속, 가문에게 영원한 유업으로 땅을 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그 사용권이 다른 사람에게 갈 수는 있지만, 희년마다 다시 돌려줘야 합니다. 소유권을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방인이었던 아리우나의 땅은 다릅니다.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것을 통해 소유권이 완전히 다윗에게 이전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 대한 존경심과 전염병을 같이 퇴치하자는 뜻에 동참하는 의미로, 아리우나가 다윗에게 왕이여, 아리우나가 이 모든 것을 왕께 바칩니다.”(22)라고 하며 드리겠다고 하지만, 다윗은 아니라고 합니다.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것을 통해 소유권을 확실히 자기에게 가져오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법에 따르면, 왕이라도 백성이 기업으로 받은 토지를 함부로 빼앗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비슷한 사건이 창세기 23장에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값을 치르고 사라의 장지를 구입했습니다. 그때 에브론이라는 사람에게 그의 소유인 굴을 팔라고 제안했습니다. 에브론은 헷(히타이트) 사람인데, 아브라함에게 거저 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지만 아브라함이 거절합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거래가보다 비싼 돈을 주고 그의 밭과 굴을 구입합니다. 그래서 소유권은 영원히 아브라함에게로 가게 됩니다. 나중에 아브라함도 거기 묻히고, 아내 레아와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도 거기 묻힙니다. 그렇게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언제 흐지부지해질지 모르기 때문에 법적으로 확실히 돈을 주고 구입한 것입니다.

 

사람은 사실 변심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우리가 지금 호의로 뭔가를 해도 나중에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희미해집니다. 원래는 주기로 했는데 나중에 가면 반만 사용하게 해준 것이라고 말이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당시 상거래 절차에 따라 원래 가격보다 훨씬 비싸도 막벨라 굴을 구입한 것은 훗날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의미도 있는 겁니다.

 

둘째, 다윗이 값을 지불하고 아라우나로부터 땅 소유권을 영구적으로 넘겨받았다는 사실은 이 땅이 얼마 후에 솔로몬이 지을 성전 터가 된다는 의미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이야기의 문맥상 타작마당에 하나님을 위해서 제단을 세우라는 명령은 사실 전염병을 없애기 위한 임시 제단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다윗이 아리우나의 타작 기구와 소와 장비들로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그것이 임시 제단내지 간이 제단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당시 예루살렘에는 주님을 위한 제단이 아직 없었음을 암시해줍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아직 성전이 없을 때 기브온에 가서 왕실 제사로서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다윗이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 세운 제단이 그 후 제도화된 성소로 발전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곳에서’(25) 전염병을 그치게 한 제단이 세워졌다는 이 기억은 나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전의 제단이 세워지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된 겁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기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가다가 하룻밤 자던 중 꿈을 꾸고 하나님의 천사들을 본 후 거기에 제단을 쌓고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며 임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벧엘에서 성소를 세우는 근거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비록 다윗 자신이 성전을 짓지는 못했지만,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한 부지를 구입한 겁니다. 그리고 성전이 앞으로 어떤 기능을 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왕상 8:28-30)을 제시해주는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로 일어난 3일간(사실은 하루로 보임)의 전염병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제단에서 드리는 예배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 징계하실 때 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것을 통해 배운 겁니다.

 

그 제단과 제단 부지에 대한 값을 지불하고 구입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통치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성격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는 참된 성전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완벽히 성취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가 됩니다.

 

아라우나는 제단을 쌓을 타작마당과 제사에 쓸 모든 것을 그냥 바치겠다고 했는데, 다윗은 값을 주고 샀습니다. 사무엘하에는 그 가격이 은 50세겔로 되어 있지만, 역대상 21장에는 금 600세겔로 되어 있습니다. 은과 금의 차이도 있고, 세겔은 무게이니까 50600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맞습니까? 사무엘하에서는 타작마당과 소만 계산한 것이고, 역대상에서는 부지 전체에 지불한 금액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둘 다 맞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격이 얼마였느냐가 아니라, 값을 지불했다는 사실입니다. 용서와 회복은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돈을 내야 하는 거냐? 그래서 헌금 하는 거냐?’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부터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을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결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은혜로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25)

 

은혜로 주신 구원이 무엇입니까?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선물의 특징은 공짜입니다. 받는 사람에게는 공짜입니다. 그러나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가를 지불하고 사서 주는 것입니다. 수고가 거기 들어가 있습니다. 구원을 선물이라고 할 때, 우리 입장에서는 공짜로 받은 것이고, 하나님 입장에서는 외아들의 생명을 내어준 결과로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 값이 지불된 사건이 구원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값을 지불하면서 드린 번제 사건은 바로 그것을 미리 보여줍니다이 타작마당에서 나중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상징이 구약시대 때는 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고통이나 어려움을 당할 때 반드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데서가 아니라 고통의 그 현장에서 하는 겁니다. 도망가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예배가 아니라,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대가를 치르며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시간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하는 태도를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단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여러분이 대가를 치르신 겁니다. 코로나 사태 때 온라인예배가 우리 신앙에 아주 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어쩔 수 없었을 때는 그것을 통해 간절히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익숙해지니까, 해보신 분들은 아시지만, 온라인예배에는 집중이 잘 안 됩니다. 얼마든지 딴짓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예배드린다는 것은 뭡니까? 오려면 차를 운전하든지 같이 타고서 와야 합니다. 직접 몸을 움직여서 와야 하고, 오기 전에 준비하고 와야 합니다. 그냥 오는 게 아닙니다. 다들 준비하고 오지 않습니까? 또 차를 타고 개스를 사용하면서 옵니다. 그게 다 대가입니다. 대가를 치르고 와서 예배하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잘 봐달라는 게 아니라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있습니다. 나는 뭐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차원으로 헌금도 하는 것이지, 용서해달라는 차원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나가는 말]

 

구약의 이러한 제사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한 모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흠 없는 화목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제물로 바쳐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를 짓습니까, 안 짓습니까? 여전히 짓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도 있고,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악함도 있습니다. 이런 교만과 악함은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 노릇을 하려는 죄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징계하실 수밖에 없고,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죽어 마땅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잠잠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만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 필요합니다. 오히려 신앙이 자랄수록 자기 죄에 대한 민감성이 커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의존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매주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또 이웃 사랑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우리는 각자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개인 예배를 드립니까? 그것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져야 이웃 사랑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사라졌다면, 그것을 잊어버렸다면, 혹시 내가 그냥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매주 함께 모여서 갱신(renew)하는 것이고, 매일 각자 집에서 혼자 하나님 앞에서 갱신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특히 공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함께 모여서 하기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도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는 다윗의 인생의 대장정의 역사를 마무리하면서 결코 그를 멋지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의 인생의 끝에는 뭐가 남았습니까? 하나님이 남으셨습니다.

 

우리 인생 끝에도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남는 인생이 되어야겠습니다. 다른 것이 남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 인생이 끝날 때 뭔가가 남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면, 이 세상이 끝날 때 다 끝납니다. 뭔가를 잘했더라도 주님이 남으셔야 세상이 끝나도 우리 인생은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합니다.

 

결국 하나님만 남는 인생이 올바른 인생이라는 것을 다윗의 인생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배자가 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최우선 순위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공 예배도 그렇고 개인 예배도 그렇고,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참된 예배자로서,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만 남게 되는 역사가 우리 각 개인과 가정과 또 온 교회에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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