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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1sIBV6hZJsc?t=1891

 

 

202142일 성금요일예배

성금요일 메시지

그 사랑 때문에

(누가복음 2332~38)

 

[들어가는 말]

 

누구나 죽기 직전에 유언은 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인격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길 수 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죽거나 병에 걸려 말을 남길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미리 남겨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사람들이 죽으면서 남긴 말들이 있는데, 한 번 비교해보십시오.

 

나는 내 때가 되기 전에 죽는다. 이제 내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계의 명장이라고 불리던 나 나폴레옹의 운명도 이런 것이구나! 나의 깊은 비참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 사이에는 너무도 큰 간격이 놓여 있구나.” 이렇게 한탄하며 죽은 사람은 프랑스의 장군이자 황제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입니다.

 

반면 이 사람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땅이 물러간다. 천국이 열린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구나!” 이렇게 말하며 죽은 사람은 유명한 복음전도자였던 D. L. 무디입니다.

 

또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6개월만 생명을 연장시켜준다면 나에게 가치 있는 모든 것의 반을 드리겠소. 난 두려운 지옥으로 가게 되오. 당신도 가게 될지 모르오. , 그리스도여!” 이렇게 후회와 한탄 속에 죽어간 사람은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였던 볼테르였습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라고 하며 세상을 떠난 사람은 감리교의 창시자라고 하는 존 웨슬리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다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하루치의 생명과 바꿀 것이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내 앞에 다가오는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 있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껑충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 같다.” 영국의 유명한 회의주의 철학자였던 토마스 홉스가 이렇게 말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예전에 헤어졌던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될 날을 생각하니 너무 기쁘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집에서 만나면 다시는 이별이 없을 것이다.”라는 이 말을 죽기 전에 남긴 사람은 버마 선교사였던 아도니람 저드슨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엄청난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정작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어떤 모습을 보여주셨습니까?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전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얼마나 우리를 생각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일곱 마디 말씀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과 복음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1.   원수를 용서하시는 능력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2-33)

 

예수님은 그 혹독한 채찍질을 당하시고 갖은 모욕과 조롱을 다 당하신 뒤에 드디어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지금 이때는 이미 엄청난 채찍질과 고문을 당하셔서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놀라운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 새” (34)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시고 거기 모여 있던 120명의 성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죄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루에 3천 명이 구원을 받고, 또 얼마 후에는 5천 명이 하루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해외에서 명절을 지키러 왔던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들 중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보며 조롱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6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믿게 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제사장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에 복종하고 믿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였고, 그래서 이 기도가 확실하게 응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바로 이 기도 때문에 우리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기도를 드리실 때 여기 있는 우리 모두를 염두에 두시고 기도한 것도 됩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도 생각하셔서 이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도 죄 용서를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가만히 보면,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선을 선으로 갚고 악은 악으로 갚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어떤 존재입니까? 악을 악으로 갚고 선도 악으로 갚는 존재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선도 선으로 갚으시고 악도 선으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악도 선으로 갚아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남이 나에게 못되게 하고 해를 끼쳤는데, 그것을 선으로 갚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 하나님을 닮은 자녀다운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 우리는 해를 받으면 해로 되갚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1이라는 해를 받았으면 2로 갚아주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것은 위기입니다. 사람은 하나를 받으면 두 개로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율법에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눈 한 개당 한 개로, 이 한 개당 한 개로 갚으라.’라고 제한을 둔 것입니다. 안 그러면 그냥 마구 보복하기 때문입니다.

 

해를 받지도 않았는데 남에게 해를 끼치면 사탄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고, 선하게 해준 사람에게 악으로 갚으면 그것은 완전히 마귀의 자식이 된 겁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는 대개 누가 나에게 못되게 굴면 나도 그대로 받아쳐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딱딱한 콘크리트 벽에 대고 돌을 확 던져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돌이 그대로 확 튕겨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벽이 딱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찰흙이나 밀가루 반죽 같은 것을 놓고 거기에 돌을 던져보십시오. 어떻게 됩니까? 그 속에 푹 들어가고 파묻혀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렁물렁하니까 그렇습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이 둘 중에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까지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가해진 날카롭고 악한 죽음의 공격조차도 다 십자가 위에서 흡수해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사랑이 넘치는 분이셨기 때문에, 아니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대적들의 악독함을 다 흡수해버리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짊어지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저주하고 도전하고 조롱하는 인간의 용서받지 못할 죄와 온갖 악독함을 십자가에서 다 품으시고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물리칠 힘이 없으셨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당연히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기 전에도 그렇게 할 수 있으셨고,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셨을 때 거기서 모함하며 고발할 때 바람을 불게 해서 거기를 다 날려버릴 수 있으셨고, 또 그 무지막지한 채찍질을 당하실 때도 맞지 않고 튕겨나게 함으로써 오히려 때리던 로마 군인들이 맞아서 엄청난 부상을 입도록 할 수 있으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흑암뿐 아니라 토네이도가 불어서 그들을 휩쓸어가게 할 수 있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도 밑에 와서 조롱하던 종교지도자들에게 그대로 내려가셔서 다 쓸어버리시고 다시 올라갈 수도 있으셨습니다. 당연히 그런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그 모든 가해자들에게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상처를 입히거나, 그들이 죄를 지은 목록을 폭로함으로써 창피하게 하고 사회에서 매장되게 하거나 심지어 죽일 수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죄악을 다 자신 안에 흡수하시고 대신 받아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비참하게 죽으심으로 우리가 거기 원래 달려야 했는데 달려서 처참하게 죽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 용서와 사랑이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바로 그 용서와 사랑이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혹시라도 지금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나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게 저지른 것 같은 만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 정도의 악을 당하는 적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 정도로 우리가 연약합니다. 아니, 사실은 연약한 게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 있습니다. 부드럽고 물렁물렁하면 그대로 흡수해버릴 텐데, 부드럽지 않고 딱딱하니까 다 튕겨 버립니다.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갚아 버립니다. 그 정도는 사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사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저 그 정도 수준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우리는 그 정도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시며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혹시 지금 나에게 섭섭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로 상처를 준 사람이 있습니까? 왜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합니까? 물론 그쪽에도 문제가 있으니까 못되게 구는 겁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관계에서 한쪽이 100% 잘하고 다른 쪽이 100% 잘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실 문제는 나에게도 있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사실은 딱딱한 게 문제입니다. 내가 부드러우면 뭘 던져도 괜찮은데, 내가 부드럽지 못하니까 튕겨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할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사랑할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을 안 믿는 정도로 하면서 산다면 도대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난 그런 기도를 할 수 없다.’라고 하십니까? 이 기도를 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그 뒤에 있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니까 이런 악을 행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이해하니까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되면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 긍휼이 올라오면서 그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가 우리 마음으로부터 나오게 됩니다. 진심으로 상대를 축복해보십시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사랑하고 용서해도 조롱당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런데 슬픈 사실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과 용서도 무참하게 짓밟히고 거부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엄청난 기도를 들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바로 십자가의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5)

 

1)  백성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백성은 서서 구경합니다. 48절에 보면,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장면을 구경하러 온 무리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경제적인 문제로, 가정의 위기로, 심한 병으로, 또는 사업이 실패해서, 직장에 문제가 생겨서 고통을 당하는데, 그것을 보면서도 구경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조용하고도 소극적으로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어떻게 되는지 지켜봅니다. 물론 우리가 어떻게 문제를 다 해결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흥미를 가지고 구경을 한다는 겁니다.

 

가끔 주변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를 봅니다. 요즘도 간혹 그런 경우를 보는데, 그때 굉장히 흥미를 가지고 봅니다. 어떻게 되나, 누가 이기나 구경 좀 해보자고 합니다. 이런 태도가 의외로 많습니다. 옆 교회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되나 보자. 흥미롭네.’ 하고 무슨 격투기 구경하는 것처럼 보는 태도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며,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태도를 보입니다. 조금 더 심하면 조롱도 합니다. ‘얼마나 한심하면 이런 일을 당하나?’

 

그러나 우리 형제자매들 중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 같은 자세가 아니라, 어려움을 당한 지체를 보며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서 기도해주며 뭔가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쓰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예수 믿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옆에서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다른 데 있는 교회나 사람이라면 기도해주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습니까? 어려움을 당한 친구와 함께 있어줄 때 그 친구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2)  관리들

 

두 번째로, 유대 관리들이 있는데,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합니까? 예수님을 조롱하며 비웃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그리스도라면 자기를 한 번 구원해봐라.’ 하고 외치며 조롱합니다(35). ‘남들은 구원했는데 자기는 구원 못하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속에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사람 예수가 정말로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능력이 있을 텐데, 예수가 메시야라고 믿지는 않고 또 말로는 조롱을 하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두려움을 가지고 주의 깊게 주목하며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할수록 오히려 강한 말로 비판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에이, 저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어. 저 사람은 이게 부족하고 저게 부족해. 더 발전할 필요가 있어. 아직 멀었어.’ 라이벌 의식을 느낄수록 불러다가 충고를 해준다고 하며 가르치기도 합니다.

 

회의나 토론을 할 때도 지나칠 정도로 자기 의견만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강한 확신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는 마음속에 뭔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럴 때는 함께 열을 내며 논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미루고 기도해보자고 하며 나아가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대해줘야 합니다. 논쟁을 해서 이길 때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경험할 때 변합니다.

 

 

3)  로마 군인들

 

34절을 보면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 새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제비뽑을 때 그 바로 위에는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서 극심한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는 이미 잔인한 채찍질을 당해서 수십 대를 맞아 살아 다 찢어지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입니다. 따귀와 주먹으로 여러 대 맞아서 이곳저곳에 멍이 들어 있고 눈도 부어 있습니다.

 

게다가 두껍고 날카로운 가시로 엮은 관의 가시에 찔려서 머리에서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손과 양발에 굵은 못이 박힌 채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 끔찍한 모습에 소름이 끼치고 두려움을 느낄 정도입니다.

 

이렇게 아무도 똑바로 쳐다보고 싶어 하지 않을 비참한 순간에, 군인들은 그 아래서 뭘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고 있습니다. ‘, 뽑아, 뽑아하면서 낄낄거리며 웃고 떠들면서 그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그들은 오직 물질적인 이득에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예수가 죽든 말든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 많이 죽는 중 하나일 뿐입니다. 오직 그의 옷을 가지기만 원하고 있습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6-37)

 

군인들은 예수를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권하는데 그 목적이 뭡니까? 지금 그들은 예수님에게 신 포도주를 주어서 예수님이 정신을 잃지 않고 계속 깨어 있게 하여, 혹시라도 기적을 일으킬지를 보려는 것입니다.

 

지금 한 인간이 지금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이 순간에 그를 이용해서 즐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힘든 이 상황이 그들에게는 엔터테인먼트 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악하고 잔인한 마음입니까?

 

이 군인들처럼,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이 자기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것을 기뻐하고 환영하기까지 합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고 남의 실패가 나의 성공이라는 태도입니다.

 

같은 계통의 사업을 하는 사람이 망하게 되었을 때, 속으로는 기분이 좋지만 겉으로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마세요.’ 하고 위로합니다. 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의 아이보다 공부를 잘할 때, 속으로는 기분이 좋지만 겉으로는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직장에서도 나는 잘 올라가는데 다른 사람은 일이 안 풀릴 경우, 겉으로는 위로하지만 속으로는 좋아합니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는 진정한 마음을 숨기고 그런데 그렇지 않은 척,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즐거워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신문이나 뉴스를 보실 때마다 뭔가 사건이 터질 때 흥미를 가지고 볼 뿐 아니라, 이게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을 넘어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군인이 민간인을 쏴서 죽었다는 소식을 볼 때 그저 안 됐네.’라고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 순간 마음이 무너지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나가는 말]

 

영화 <벤허>의 스토리를 보면, 주인공 벤허가 자기 가족을 몰살시키고 자기를 노예가 되어 팔려가게 했던 친구였던 철천지원수를 죽이고 통쾌하게 복수를 합니다. 그러나 복수했지만 마음속의 공허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복수했는데도 복수의 칼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그렇게 허탈한 마음으로 예루살렘 거리를 헤매던 중, 오래 전 자신이 노예선에 끌려갈 때 사막에서 물을 주었던 젊은이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갑니다. 그를 알아보니 예수입니다.

 

벤허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직접 박았던 군인들을 위해, 또 그렇게 끔찍한 죽임을 당하게 만들었고 지금도 그 밑에서 조롱하고 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 기도를 듣고 벤허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무엇이 머리를 꽝 때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아니,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서 저런 기도를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벤허는 예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심에 감동을 받는데, 그 순간까지 자기가 쥐고 있던, 아니 자기를 붙들고 있던 복수의 칼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오랫동안 나병에 걸려 있던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서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물론 이것은 영화이지만,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힘은 이렇게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때, 인간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그런데 치유의 대상은 내가 용서한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용서를 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치유 받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용서를 하는 그 사람입니다. 진실한 용서를 하고 나면, 자기가 풀어준 포로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무슨 철천지원수가 많겠습니까? 그런 사람만 용서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지금 약간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사람, 심지어 이미 돌아가신 분일 수도 있고 가족 중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개인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뉴스에 나오는 사람,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 내가 싫어하는 유명인도 내 용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용서는 그들에게 보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렇게 유명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보복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등장해서 내가 싫어하는 말을 할 때마다 비난하거나 험담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리고 보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은 계속해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서하기로 결단하며 나아갈 때, 놀랍게도 감옥에 갇혀 있던 나 자신이 해방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생명을 얻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 죽어가던 영혼들이 살아나고 병들었던 사람들이 치유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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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다니엘 2(동역의 기도):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비추소서 (단 9:1-19)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4 (2/24/21) admin_p 2021.02.25 370
289 다니엘 1: 결단의 기도 - "사자 굴에 던져져도 감사하나이다" (단 6:1-10)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3 (2/17/21) admin_p 2021.02.18 636
288 에스겔: 고민의 기도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나이다" (겔 1:1-3)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2 (2/10/21) admin_p 2021.02.11 1236
287 에스더: 도전의 기도 -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9-17)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1 (2/3/21) admin_p 2021.02.04 1888
286 에스라 2: 회개의 기도 -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스 9:1-6)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0 (1/27/21) admin_p 2021.01.28 1063
285 에스라 1: 돌파의 기도 -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게 하소서" (스 8:15-23)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9 (1/20/21) admin_p 2021.01.21 1272
284 느헤미야: 인내의 기도 - "종이 형통하여 은혜를 입게 하소서" (느 1:1-11)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8 (1/13/21) admin_p 2021.01.14 1439
283 야베스: 삶의 기도 “나를 도우사 내게 근심이 없게 하소서” (역대상 4:9-10)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7(1/06/21) kpccoh 2021.01.07 1319
282 "광야를 기억하며 옥토로 나아가라" (신 8:1-20) 새해맞이 감사에배 (12/31/20) kpccoh 2021.01.01 767
281 크리스마스이브 축제 (12/24/20) kpccoh 2020.12.27 165
280 히스기야: 관계의 기도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사 38:1-8)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6(12/16/20) kpccoh 2020.12.17 704
279 "느부갓네살이 만난 하나님” (다 4:28-37) 조준오 목사 (12/02/20) kpccoh 2020.12.03 164
278 이사야: 헌신의 기도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1-8)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5 (11/25/20) kpccoh 2020.11.26 869
277 여호사밧: 송축의 기도 “두려움이 찬송으로 바뀌었나이다” (대하 20:1-13) <삶의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4 (11/18/20) kpccoh 2020.11.19 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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