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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10일 수요예배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2

에스겔: 고민의 기도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나이다

(에스겔 11~3)

 

1.   포로지 한가운데서

 

에스겔은 구약에서 많은 분들이 읽을 때 어려워하는 책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에스겔이라고 하면 영어로 Ezekiel이니까 이곳 Ohio State 출신 football 선수로 알지, 성경의 책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제2차 바벨론 포로 때 잡혀간 사람이고, 오늘 성경은 에스겔이 제사장이라고 소개합니다.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3)

 

당시 제사장은 단순히 종교인이나 영적인 부분에서만 지도자가 아니라, 바벨론 포로였던 유다 사람들의 사회에서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특히 제사장은 자기 혼자만 하고 그만두는 직책이 아니라, 아론 때부터 시작해서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가는 직분이었습니다. 예언자는 한 사람씩 따로 부르셔서 사용하셨지만, 제사장은 아론부터 시작하여 그의 아들들과 또 그들의 아들들로, 레위인들 중에서도 아론의 아들들로 이어져 내려가며 세습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그런 모델을 가지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도 계속 세습했기 때문에 중대형 교회에서 아버지가 목사일 때 아들도 목사가 되어서 담임목사직을 세습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제사장들도 세습했으니 담임목사도 세습이 괜찮다. 성경적으로 옳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전혀 성경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교회가 시작되고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제사장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만 제사장이어서 세습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틀린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에스겔이 제사장이었다는 것은, 그 자신과 그의 아버지 부시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와 고조할아버지와 그 이전 조상들이 다 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영적으로 권위가 있는 집에서 태어나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에스겔은 어릴 때부터 자기 자신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대로 살도록 훈련받은 사람이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있는 이때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제사장 에스겔이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사장이 되는 것과 예언자가 되는 것은 그 성격과 맡은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당연히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이고, 예언자는 백성들 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박해에도 불구하고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전혀 사역이 다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제사장으로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겁니다.

 

에스겔이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몇 살이었습니까? 인생에서 가장 혈기왕성하고 아름다운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1)

 

여기서 서른째 해라는 말의 해석이 분분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나이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왕의 연호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라의 특별한 어떤 날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타당한 해석은 이것이 에스겔의 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이유가 그 다음 절에 나옵니다.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달 초닷새라” (2)

 

에스겔이 환상을 본 그때는 서른째 해인 동시에, 유다의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혀온 지 5년째 되는 달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사로잡혀온 것은 주전(BC) 597, 2차 예루살렘 멸망 때입니다.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났다고 했으니 지금 이 에스겔서의 배경은 주전 592년입니다.

 

그렇다면 주전 592년이 서른 번째 해가 되는 해는 주전 622년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30년째를 기념해야 할 만큼 특별한 사건이 없었습니다. 또한 왕으로 따져서 계산하더라도, 그때까지 30년째 다스린 바벨론 왕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은 에스겔의 나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입니다.

 

그것을 전제로 하여 계산해보면,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올 때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5년 동안 지내온 것입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에스겔의 마음속에는 갈등이 많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이미 그 이전 십대 때부터 엄청난 괴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제사장이 되기 위한 신앙 교육을 받고 제사장으로 섬기는 꿈을 꾸면서 아름다운 사명만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13세였던 주전 609년 유다의 가장 위대한 왕인 요시야가 제1차 갈그미스 전투에 나아가던 이집트의 바로느고 군대를 막고 므깃도에서 싸우다 전사한 이후 급격히 나라가 쇠약해지더니, 결국 BC 605년 제2차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쳐들어 내려와서 1차로 포로들을 끌고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제사장으로 섬겨야 할 성전이 유린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라가 풍비박산나는 모습을 청소년의 나이에 본 것입니다. 그러다 주전 597년 바벨론의 제2차 침공 때 여호야긴 왕과 그의 모친과 아내들과 내시들과 나라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비롯하여 방백들과 백성 총 1만 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끌고 감으로써, 비천한 자들만 남겨두어 유다를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바로 그 2차 때 끌려간 무리 가운데 여호야긴 왕도 있었고 에스겔도 포함되었습니다.

 

에스겔은 자신의 꿈을 펼쳐 보기도 전에 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자신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5년이 지났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 20대 나이에 아무것도 못하고 30세가 되어서 그냥 포로의 신분으로 이방 땅에서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삶에 대한 기대와 목표를 가지고 있던 에스겔에게는 아주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그는 머리가 뛰어나고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갈등도 더 많았습니다. 구약학자들에 의하면 에스겔서가 가장 뛰어난 문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가장 유식하고 화려한 문체를 사용한, 예언서 중 최고가 에스겔서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에스겔은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갈등도 많았습니다.

 

 

2.   에스겔의 세 가지 질문

 

구약학자들은 당시 에스겔이 가졌을 갈등과 고민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에스겔만의 갈등이 아니라, 사실상 당시 유다 포로 전체의 고민과 갈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어떻게 이방인들에 의해 멸망당했는가?

 

이것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유다 백성의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아무리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도 어떻게 악한 이방인들에 의해 이처럼 비참하게 멸망당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이처럼 포로로 잡혀와서 이러한 포로 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갈등은 우리에게도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다 잘 먹고 잘 사는데, 돈도 잘 벌고 성공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는 이런 나쁜 일이 계속 일어나는가?’

 

 

2)  과연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

 

이것은 훨씬 더 절박한 질문입니다. 이미 망하고 포로가 된 채로 벌써 수년이 지났는데, 과연 자기들에게 소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점점 더 강해지고 그들에게 잡혀 있는 유다 백성은 계속해서 무너지고 있으며, 더구나 전혀 회개할 기미도 안 보이는데, 정말 이 백성에게 소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이것은 앞의 두 질문을 포함한 근본적인 질문과도 같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이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신앙인들이 어려움을 겪게 될 때 가장 먼저 내리는 결론이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 같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지금 함께 계시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에스겔의 이러한 고민은 무슨 한가한 철학적인 고민이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런 힘든 고민과 갈등을 혼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쏟아 버리거나, 그냥 묻어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이 고민을 그대로 들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중요한 핵심입니다.

 

 

3.   그발 강가로 나아가라

 

신앙인은 살아가는 자체가 고민이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기준이 정해져 있는데, 그 기준대로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민과 갈등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이 고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에스겔이 그렇게 했습니다. 에스겔은 그 젊고 똑똑한, 그러나 망한 민족의 포로 된 제사장으로서의 갈등과 고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기도했다는 말이 없는데 에스겔이 기도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의 소명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때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오일이었다. 그 때에 내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 가에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 주신 환상을 보았다... 주님께서 바빌로니아 땅의 그발 강 가에서 부시의 아들인 나 에스겔 제사장에게 특별히 말씀하셨으며, 거기에서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 (1, 3, 새번역)

 

본문에서는 두 번에 걸쳐 그가 부르심을 받을 때 그발 강가에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발 강가라는 장소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발 강은 특별하거나 유명하거나 무슨 영적 의미가 있는 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정해주신 장소도 아닙니다.

 

그발 강은 유다 민족이 포로로 잡혀 와서 살아가는 바벨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강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왜 그곳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발 강가가 갖고 있는 특별한 의미 때문입니다.

 

강가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원으로 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하기 위해 강가나 광야로 나갔습니다. 특별히 강가는 이방 지역이나 낯선 곳에 갔는데 기도하고 싶을 때, 정말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싶을 때 가는 곳이었습니다. 성경의 몇몇 구절이 이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6:13)

 

빌립보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 일행이 기도하기 위해 강가로 나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37:1)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서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들 중 에스겔도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그발 강가로 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민과 갈등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중요한 영적 메시지입니다.

 

갈등이 있을 때, 고민이 있을 때, 고통을 경험할 때, 모든 문제를 가지고 나의 그발 강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 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엎드려 이 모든 사정을 아뢰고 응답받아야 합니다. 얼마가 되었든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은커녕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아서 기도했는데, 기도하는 중에 오히려 완전히 나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에스겔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는데도, 나중에 그가 들은 소식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제사장에게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절망과도 같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스겔은 그런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고민과 갈등이 바뀔 때까지, 사실은 하나님이 바꾸어주실 때까지 기도한 겁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때가 더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내 마음의 묵상 주제가 바뀌는 것을 경험합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적인 정서가 바뀌는 겁니다. 기도하다 보니까 내 생각이 붙들려 있는 어떤 내용이 바뀌는 겁니다. 또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비관적이었는데 소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럴 때까지 우리는 계속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그렇게 될 때까지입니다. 내 정서와 생각과 시선이 바뀔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꾸어주십니다. 그때까지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고 포기하지 않은 시간 동안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세게 기도해서 응답되는 게 아니라, 기도는 성령님이 역사하실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4.   절망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성령의 능력

 

에스겔서는 성령에 민감한 책입니다. 구약성경에 성령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루아흐350번 이상 나오는데, 그 중 에스겔에서만 52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에스겔은 성령을 정말로 경험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고민과 갈등과 절망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새로운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응답이 왔습니다. 결론적으로 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어째서 악한 이방인에게 멸망을 당했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땅을 두고 예언하고, 산과 언덕에게, 시냇물과 골짜기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뭇 민족에게 수치를 당하였기 때문에, 내가 질투와 분노를 그대로 쏟으면서 말한다.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직접 내 손을 들고 맹세하였다. 진실로 너희의 사방에 있는 이방 민족들이 스스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36:6-7, )

 

그의 고민에 대해 하나님은 너희가 당한 수치를 내가 반드시 갚아 줄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 어째서라는 질문 앞에 그래서라는 응답을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과연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37:7, 10)

 

더 이상 소망이 없을 것 같은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마른 뼈가 살아나 생기를 얻어 군대를 이루는 환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여기서 마른 뼈는 소망이 없음을 상징하고, ‘생기는 생명, 곧 소망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것 같은 이 백성이 살아나고,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43:5)

 

“1 그가 나를 데리고 다시 성전 문으로 갔는데, 보니, 성전 정면이 동쪽을 향하여 있었는데,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의 오른쪽에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서,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2 또 그가 나를 데리고 북쪽 문을 지나서, 바깥으로 나와, 담을 돌아서, 동쪽으로 난 문에 이르렀는데, 보니, 그 물이 동쪽 문의 오른쪽에서 솟아 나오고 있었다. 3 그가 줄자를 가지고 동쪽으로 재면서 가다가, 천 자가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 보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발목에까지 올라왔다. 4 그가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자가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 보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그가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자가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 보라고 하기에, 건너 보니, 물이 허리까지 올라왔다. 5 그가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자가 되는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는 물이 내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쳐서나 건널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물은 아니었다.” (47:1-5, )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48:35)

 

에스겔의 세 번째 고민에 대해 하나님은 엄청난 규모의 성전을 보여주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아주 새로운 성전과 그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아름다운 제사와 예배가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점점 커져서 발목에, 무릎에, 허리에 차더니, 이제는 건널 수 없을 정도의 강이 되어 흘러 세상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염두에 두시고 초막절에 성전에서 물을 흘려 보내는 행사를 보시고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리라.”라고 하셨습니다(7:38). 새로운 성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백성이 된 우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놀라운 소망의 메시지를 에스겔에게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는 온 세상이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로 재정립되기 시작합니다. 각 지파별로 해당하는 몫이 주어지고, 그 한복판에 성소가 세워집니다. 성읍에는 각 지파의 수에 해당하는 열두 개의 문이 달려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완성한 후 그 성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강력하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그저 함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서, 너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그 역사에 네가 나와 함께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까지 이어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은 질문이 바뀌어서 새로운 깨달음이 되었습니다. 갈등이 변해서 꿈과 비전이 되었습니다. 의심이 바뀌어서 확신과 삶의 방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발 강가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질문과 갈등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 고민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하지만 또 기억할 것은, 고민만 하는 신앙은 더 신앙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항상 고민만 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저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건 더더욱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신앙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인지 고민하면서 그 고민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현실을 보니까 믿음과 현실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삶의 고민과 문제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런 게 있다고 신앙인이 아닙니까? 신앙인입니다. 진짜 신앙인은 바로 그런 것들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민과 갈등을 가지고 그발 강가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놀라운 응답으로 역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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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야베스: 삶의 기도 “나를 도우사 내게 근심이 없게 하소서” (역대상 4:9-10)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7(1/06/21) kpccoh 2021.01.07 1321
282 "광야를 기억하며 옥토로 나아가라" (신 8:1-20) 새해맞이 감사에배 (12/31/20) kpccoh 2021.01.01 767
281 크리스마스이브 축제 (12/24/20) kpccoh 2020.12.27 165
280 히스기야: 관계의 기도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사 38:1-8)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6(12/16/20) kpccoh 2020.12.17 704
279 "느부갓네살이 만난 하나님” (다 4:28-37) 조준오 목사 (12/02/20) kpccoh 2020.12.03 164
278 이사야: 헌신의 기도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1-8)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5 (11/25/20) kpccoh 2020.11.26 869
277 여호사밧: 송축의 기도 “두려움이 찬송으로 바뀌었나이다” (대하 20:1-13) <삶의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4 (11/18/20) kpccoh 2020.11.19 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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