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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24일 수요예배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8

오바댜(맡김의 기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갚아 주소서

(오바댜 11~21)

 

1.   기도할 때 되갚아 주시는 하나님

 

오바댜서는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으로, 전체가 딱 한 장이고 21절로 되어 있습니다. 오바댜서는 에돔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담은 책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실제적인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바댜를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대개 하나님의 공의에 초점을 맞춰 말씀을 전합니다. 그냥 보면 에돔에 대한 심판, 곧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메시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과 이 책을 기록한 오바댜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말씀을 처음 받았던 그 시대 백성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면, 이 안에서 또 다른 메시지를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오바댜라는 선지자가 누구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언서의 말씀은 예언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바댜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1절에 오바댜의 묵시라라고만 되어 있지 그에 대한 소개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바댜라는 이름은 노동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아바드여호와가 합쳐진 말로서, ‘여호와를 섬기는 자혹은 여호와의 일꾼이라는 뜻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바댜서의 내용이 바로 그의 이름의 뜻처럼 진행됩니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바댜서를 받는 원래 독자인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 역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들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바댜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아합의 사위) 때인 주전 850년경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한참 후대인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고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바로 직후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말씀의 삶> 공부 때는 전통적 의견을 따라 여호람 때라고 하고 공부하는데, 사실은 유다가 멸망할 때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이는데, 그 내용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바댜의 활동시기가 언제였든지 상관없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기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호람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세력을 굳히자, 자기 아우들을 모두 죽이고, 이스라엘 지도자들 얼마도 함께 칼로 쳐죽였다. 여호람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서른두 살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덟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아합 가문이 한 대로 곧 이스라엘 왕들이 간 길을 갔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 (대하 21:4-6, 새번역)

 

여호사밧은 굉장히 의롭고 훌륭한 왕이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는데, 그는 사실 유다에서 Top 3 안에 드는 왕입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인 여호람을 아합의 딸과 결혼시키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전에는 나라끼리 싸웠으니까 이제 친하려고 정략적으로 결혼시킨 것인데,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습니다. 아달랴가 뭘 갖고 오는지를 몰랐습니다.

 

여호람이 왕이 된 후 자기 형제들을 다 죽여 버리는데, 정말 끔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힌트를 주는 것은,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아합 가문이 한 대로 그 길을 갔다.’고 합니다. 동생들을 다 죽여 버리는 이 일을 누가 뒤에서 조종했겠습니까? 아달랴가 사주한 겁니다. 여호람 남편을 꾀어서 다 죽여 버려라. 그래서 당신의 왕위를 굳건하게 해야 한다.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한 겁니다. 나중에 아달랴가 스스로 왕비가 되어서 유다 왕족들의 씨를 다 죽여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견해를 따라 그런 여호람 때 오바댜가 말씀을 선포했다고 볼 근거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호람은 의로운 왕 여호사밧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길이 아니라 아합의 길로 갔습니다. 아버지보다 장인 쪽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악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모두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의 때에 에돔이 유다에 반기를 들고 왕을 따로 세우며 독립했습니다. 다윗 때에는 완전히 에돔을 밑에 두고 조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고 점점 힘이 약해지다가 여호람 때에 에돔이 독립을 한 겁니다.

 

그런데 오바댜는 여호람이나 예루살렘 멸망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하지 않고, 에돔에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원래 생각해보면 에돔은 사실 이스라엘과는 형제지간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이고, 그의 후손들이 에돔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때 가나안 땅으로 가면서 에돔 땅을 지나갈 때 하나님은 에돔과 싸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돔은 유다가 어려웠던 순간에 아주 비열하게 행동합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11)

 

오바댜의 연대를 남 유다 멸망 시기로 보는 사람들이 가장 큰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11~14절 내용입니다. 분명히 이방 군대에 의해 패망하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로 본다면,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쳐서 멸망시킨 그때 바벨론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뒤를 봐준 게 에돔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 그 틈을 노리고 가서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 군대를 피해 도망칠 때 길목을 지키고 있다고 잡아서 넘겨준 것도 에돔이었습니다. 원래는 대적이 아니라 형제인데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이 자신들을 멸망시킨 것도 괴롭지만, 에돔이 한 짓 때문에 더욱 속상하고 화가 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가까운 형제자매에게 배신당해서 상처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바로 이것이 오바댜가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사실은 에돔에 대한 심판이나 시대가 언제였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까운 사람, 친한 사람, 형제자매 같이 사랑하는 사이에 배신당했을 때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이것은 결코 옛날에 살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심각한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철천지원수는 없겠지만, 뭔까 껄끄러운 사람, 안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나에게 못되게 해서 주는 상처가 있을 때 그것도 아프지만, 그런 것은 원래 그런 거니까 힘을 내서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었던 사람, 서로 사랑했던 사람, 형제자매,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받는 상처는 정말 견디기가 힘듭니다. 그런 상처는 우리의 힘을 다 빼 버리고 우리를 무너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주 싸우기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마주 싸울수록 더욱 비참한 상황만 커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집안에서 친 형제자매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재벌들이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가지고 형제자매끼리 싸우는 일이 여전히 많습니다. 법적으로 형제끼리 다툽니다. 누가 뭘 가져갈지, 누가 더 많이 가질지를 놓고 다툽니다. 그렇게 싸우는 걸 보고 , 잘 싸운다.’ 하고 칭찬해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것들 또 싸운다. 에이, 형편없다.’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재벌이고 돈이 많으면 뭐 하겠습니까? 비참할 뿐입니다.

 

교회에서도 형제자매라고 하는데 형제자매끼리 싸운다면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교회에서 맨 날 사랑, 사랑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싸운다.’라고 비난하며 욕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억울하고 마음이 아픈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럴 때 최선의 방법이 있습니다. 사실 이 방법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는 가운데 그것을 되갚아주는 것입니다. 정말 그것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나가서 싸우면 그게 해결됩니까?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나에게 억울하게 하고 상처를 주어서 나도 확 때려주고 복수하면 좋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하면 큰일 납니다. 이것은 비난 차원이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마귀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끼리 싸우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내가 누구를 욕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요즘은 우리가 직접 만나지 못해서 온라인으로 모임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없을 때 나가서 싸우는 건 아니더라도 뒤에서 욕하고 험담한다면, 그럴 때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형제자매에 대해 그 사람 말이지...’라며 마구 험담을 합니다. 그럴 때 방에서 구석 모서리를 보십시오. 거기서 마귀가 씩 하고 웃고 있습니다. 마귀가 아주 좋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면 마귀가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되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12-14)

 

원어에도 그렇지만, 영어 성경에는 각 문장마다 ‘You should not’이라는 구절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했다.’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때 그렇게 유다가 패망한 것을 기뻐하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바벨론 군대와 같이 들어가서 약탈하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도망친 사람들을 가로막아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웃어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이 다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에돔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바댜의 이런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다 사람들입니까? 그들에게 선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는 메시지는 유다 백성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유다 백성은 재앙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이것은 에돔에 대한 말씀이지만, 오바댜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던 중에 특별히 동족 형제자매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하여 마음이 찔리고 무너지는 아픔을 자기가 경험하면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독백하듯 풀고 있는 선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바댜의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오바댜에 대한 많은 정보가 있지는 않지만, 그도 동족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같은 사람도 바벨론에게 망하는데 빨리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다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수모를 당하고 죽을 뻔했는지 모릅니다.

 

오바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니까 돌아오는 것은 괴로움뿐입니다. 핍박입니다. 그것도 자기 형제자매들, 동족에게 받는 상처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향해 선포하는 것입니다.

 

 

2.   기도함으로 마음을 지키라

 

정말 어떤 상처나 아픔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와 기도하는 것 외에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아픔과 상처가 그렇습니다. 결코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같이 악을 쓰고 싸우면 같이 무너지고 같이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있자니 미칠 것 같이 힘들지 않습니까? 바로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그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터뜨리는 것입니다. 뒤에서 험담하고 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아뢰는 것입니다. 마치 그 사람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1)  마음의 독을 빼낼 수 있다

 

첫째는, 그렇게 해야 우리 마음에 있는 독을 빼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을 때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악한 독에 내 마음이 중독되어 썩어 간다는 것입니다. 상처는 독입니다. 우리 안에 상처가 들어오면 우리는 그 독에 중독되고 맙니다. 그러면서 우리 내면이 썩어 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독을 빼내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살기는 사는데 제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오바댜와 같은 이런 기도가 그 독에 대한 해독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토하듯 내뱉으면 우리 안에 있는 독이 다 빠져나오게 됩니다. 한나의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 1:6, 10-11)

 

이것은 유명한 한나의 서원기도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남편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는데 한나가 있고 브닌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 때문에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자식이 없는 것도 괴로운데, 엘가나가 한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브닌니가 화가 나서 애도 없는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으며 조롱하고 괴롭혔습니다.

 

10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라고 되어 있는데,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브닌나와 머리를 잡고 싸웠다.’ 보통 이럽니다. ‘브닌나와 욕을 주고받으면 싸웠다.’라는 게 보통 사람인데,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통곡했습니다. 다 쏟아냈다는 겁니다.

 

한나는 브닌나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 거기서 모든 것을 쏟아냈습니다. 가지고 나가서 가만히 갖고 있어도 안 됩니다. 그걸 쏟아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자리까지는 가는데 가만히 갖고 있습니다. 쏟아내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다고 옵니다. 그러나 쏟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결과 마음의 독이 해독되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렇게 기도해야겠습니다. 평소에 계속 그렇게 기도하라는 게 아니라, 뭔가 큰 상처가 있을 때 그 마음의 독을 가지고 사람에게 가지 말고 하나님께 먼저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께 갔으면 가만히 있지 말고 그것을 쏟아놓고 오라는 겁니다. 그래야 마음속의 독을 빼낼 수 있습니다.

 

 

2)  마귀의 전략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렇게 기도해야 마귀의 전략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를 통해 상처받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연약한 부분을 이용하는 마귀의 무서운 공격입니다. 주로 우리는 말로 상처를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남에게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은 이미 스스로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마귀의 공격이 노리는 것은, 형제자매끼리 서로 싸우게 해서 같이 무너지게 하는 것, 이 땅에서 절대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고 지옥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는데 맛보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폅니다. 사탄의 전략은 대부분 그겁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취소할 수 없으니까 천국을 맛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마귀가 가장 원하는 노림수는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니까 자녀끼리 싸우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에게 막 벌을 내리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시면서 , 나는 얘가 좋다.’라고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 하고 안타까워하실까요, 아니면 거기서 더 나아가 아주 마음 아파하실까요? 어떤 모습입니까?

 

그러나 내가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마귀의 전략은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깊이 기도하게 되므로, 마귀 입장에서는 역효과가 나게 되는 겁니다. 괜히 우리를 건드려서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니까 완전히 전략을 잘못 짠 게 됩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온유함을 지키고 이룰 수 있다

 

셋째는,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의 중요한 성품인 온유함을 지키고 이것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12:3)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온유한 성품으로 인해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순간적으로 그러한 온유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므리바 사건 때 백성의 말도 안 되는 원망 때문에 온유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온유함을 잃은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온유함은 정말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온유함이 단지 성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온유함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모든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거룩함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형제자매에게 상처를 받으면 이 온유함을 지키는 게 쉽지 않습니다. 거룩함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 상황을 가지고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하면 온유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오바댜의 기도는 되갚아 주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상처 받은 일이 있을 때 오바댜처럼 기도로 되갚아 주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리처드 포스터가 <기도>라는 책에서 말하는 저주하는 기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저주는 진짜 벌 받으라는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되갚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살다 보면 상처를 받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럴 때 내가 원수를 갚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게 아니라, 오바댜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되갚아 주는 기도를 드리기 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해결해주시는 것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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