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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4uaur9Torp4?t=111

 

 

2023115일 주일예배

신년 메시지 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한일서 47~12)

 

[들어가는 말]

 

지난 10월 말 제가 한국을 방문하고 있던 당시 이태원에서 핼러윈 축제에 참석하고 있던 많은 젊은이가 죽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최종적으로 159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국정조사가 있었는데, 이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음으로써 분노하며 울부짖는 유족들을 볼 때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이런 일은 정치적인 것을 떠나 빨리 잘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앞길이 창창하던 20대 젊은 자녀를 잃은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오래전부터 한국 뉴스를 보면 수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불평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봅니다. 누가 갑질을 했다거나, ‘미투같이 성추행 등의 문제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을 보면 그런 상황이 이해가 갑니다.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힘들어서 다들 민감해져 있기에, 조금만 무슨 일이 일어나면 화가 나고 불평을 터뜨리는 일이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장 슬프거나 엄숙한 상황에서, 심지어 기쁜 잔치의 자리에서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분노입니다. 아무리 기쁜 잔치 자리라도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은 마음속에 미움이라는 감정이 있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미움이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초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미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을 보신다면 꼭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인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미움의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나와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속상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또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또는 내 가족 특히 자녀에게 고통을 주면 그 사람이 미워집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미움의 감정을 사랑으로 바꾸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성경이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저 사람을 계속 미워해라.’라고 하시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크리스천이라는 가장 분명한 표시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1.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7~8)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사랑하는데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 것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의 관계에 문제나 갈등관계가 생겼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지를 보면 하나님을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는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면 좋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7-8)

 

어느 집에서 아이가 잘못하여 엄마가 야단치니까 아이가 재빨리 성경을 들고 나와서 읽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그래서 더 혼났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됩니다. 그 결과로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결국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사도 요한이 분명히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본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데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신데, 그러한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안에 사랑이 들어 있는데 어떻게 그게 안 나오느냐는 겁니다. 사랑이 안 들어 있으니까 안 나오는 것이지, 들어 있으면 나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데 사랑이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믿슙니다! 아멘!’을 크게 외친다고 잘 믿는 게 아니고(물론 잘 믿으면 그렇게도 하겠지만), 정말 믿음이 좋다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안 믿으면서 사랑을 조금 실천하는 것은 소용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삶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복잡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됩니다.

 

수영하려면 물에 들어갑니다. 물속에 들어갔는데 물이 안 묻었다면 말이 됩니까? 옷을 입고 물에 빠졌는데 물에 하나도 안 젖었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물에 들어가면 당연히 물에 젖게 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천인데 사랑하지 않는 것과, 물에 들어갔는데 물에 젖지 않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크리스천이 사랑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부정적 의미로).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않은 것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특히 믿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에 동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실제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인구가 아주 많은데 어떻게 모든 사람을 다 찾아다니며 사랑을 실천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셔서 최소한 이 사람들이라도 사랑을 실천하고 연습해보라고 공동체로 묶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몇십 명만 되어도 어떻게 일일이 모두에게 사랑을 실천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장과 같은 소그룹에서 몇 명끼리라도 정말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하며 실천해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무리 못생겼어도, 아무리 능력이 없어도,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 안에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이 그 안에 있는 겁니다.

 

아무리 지금 세상의 쾌락을 따라 살며 죄를 짓는 악한 사람이라도 그렇습니다. 단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통해서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짐승 같은 사람도 천사 같이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2.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9~12)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로서의 사랑이 놀랍게도 우리 인류 역사에 나타났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게 나타났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류 역사에 나타난 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9-10)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말하면서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0). 우리는 하나님을 원래 사랑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라는 표현을 보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신 게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로마서 5:6-8, 새번역)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약하고 경건하지 않고 죄인이고 원수였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뭘 잘했거나 잘나서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게 아니라,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격 없는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시되, 자신의 독생자(외아들)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무자격자를 사랑하시되 최고의 선물인 외아들을 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인데, 우리는 감이 잘 안 잡힙니다. 가장 귀한 것을 아주 자격 없는 사람을 위해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래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오래전 가출한 딸에 대한 엄마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90년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10대 소녀가 가출해서 마약을 하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문란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녀의 어머니는 딸의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자기 딸을 목격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로스앤젤레스 어느 지역에서 창녀 노릇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된 딸의 처지에 대해 충격을 받은 이 어머니는 막상 딸을 찾으려 했지만 LA 지역이 너무 넓어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모래사장에 핀 한 개가 떨어졌는데 그것을 찾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소녀의 어머니는 잃어버린 딸을 포기하지 않고 찾기 위해 딸의 사진이 들어 있는 전단을 만들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막상 그것을 만들고 보니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여기 자기 얼굴 사진이 들어 있는 이 전단을 보면 아이가 얼마나 창피해할까? 오히려 숨어 버리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녀의 어머니는 고심 끝에 전단에 딸의 사진 대신 자기 이름과 사진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구를 적어 넣었습니다. “이 사진 속의 엄마가 잃어버린 딸을 애타고 찾고 있음.” 그로부터 단 3일 만에 딸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사실 이 어머니도 자기 딸이 가출해서 창녀 짓을 한다고 광고를 내며 거기에 자기 사진을 실었을 때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아는 사람들이 보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얼마나 수치스럽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이 수치스러울까 봐 딸의 사진이 아니라 자기 사진을 넣는 마음, 바로 이것이 엄마의 사랑이고, 이런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무너져도 내가 무너지는 것이 낫고, 창피를 당해도 내가 창피를 당하는 것이 낫다. 해를 당해도 내가 당하는 것이 낫다.’라고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는 자존심은 지킬 테니 너는 창피를 당해라.’ 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겠습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사실 아무리 사랑해도 자기 외아들을 줄 수 있겠습니까? 저희 집도 외아들이 있는데, 누군가를 위해 제 아들을 내어준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것도 굉장한 사람을 위해서 내 아들을 데려다 쓰십시오.’ 하는 것도 아니고,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마음껏 내 아들을 데려다 괴롭히든 뭘 하든 쓰십시오.’라고 하는 게 말이 됩니까?

 

나에게 못되게 굴고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을 위해 내가 가장 아끼는 보물을 내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못해 조금 남는 것을 줄 수는 있어도, 가장 귀한 것을 누가 그런 사람에게 줍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가장 형편없는 사람들을 위해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외아들을 주실 때 무엇으로 주셨다고 합니까? 바로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구악시대 때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간과 다시금 평화를 누리고 친교를 맺으시기 위해 동물을 대신 희생으로 바침으로 죄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열리는 제사였습니다(3:1-7).

 

그러니까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없애주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죄로 꽉 막혀 있던 것을 뚫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별 볼 일 없는 것을 내어주신 게 아니라 외아들을 내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그 막힌 담을 허시고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 죄가 그 길을 꽉 막고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닿을 수 없고 우리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그 길을 뚫고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심으로써 그 관계가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외아들을 죽게 내어주는 사랑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아주 극악무도한 사형수가 있는데 저 사형수를 살려주십시오. 제 아들을 대신 사형시키십시오.’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들으면 아니 근데, 내가 뭘 그렇게 죄인이라고 그러나? 내가 무슨 죄인인가? 나는 별 죄를 안 지었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범죄(crime)를 생각하는 겁니다. 살인, 강도, 사기 등을 당연히 안 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sin)는 남을 해코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이고, 마음속으로 짓는 것도 죄입니다. 마음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인했습니까?

 

오래전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1993)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로부터 유대인들을 구해준 쉰들러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의 박물관에 가니까 그를 기리는 쉰들러의 나무’(Schindler’s Tree)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보호해주고 살려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영화에 보면, 나치 장교가 나무 위에 집을 지어놓고 밤에 잔 후 아침에 일어나 , 잘 잤다.’ 하고 기지개를 켭니다. 그러고는 오늘도 몸 좀 풀어볼까?’ 하고 총을 가지고 나와 저 아래 걸어가고 있는 유대인 포로들을 쏴서 죽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엄마와 어린 아들이 같이 걸어가고 있는데 아이를 겨냥하여 탕 쏴서 죽여 버립니다. 엄마는 오열하며 무너집니다. 그 장교는 , 몸 잘 풀었네.’ 하고 들어갑니다.

 

그 독일군 장교가 전쟁 전에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평범한 동네 아저씨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극악무도한 살인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살인해도 자기를 아무도 터치하지 않으니까. 그건 살인이 아니니까. 그렇게 죽여도 누가 뭐라고 안 합니다. 그러니까 막 죽이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성인군자 같아도, 내가 그렇게 살인해도 나에게 아무 해가 오지 않는다면 무법천지가 됩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나에게 해가 오지 않는다면, 나에게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가서 죽이는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몰래 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안 들키고 하려 시도합니다. 떳떳하면 들켜도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들키면 잡히고, 그러면 자기 인생이 망가지니까 못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에 아무 해가 오지 않는다고 보장만 해주면 얼마든지 그런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가장 귀한 분을 내어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 꼭 그렇게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피를 흘려야만 죄 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격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시되,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시는 사랑을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죽는 데 내어주신 사랑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이 크고 엄청난 사랑이고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식으로 나타난 것을 알려주면서 외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1)

 

여기 사용된 언어를 보십시오. “이렇게”(9), “여기”(10), “이같이”(11). 요한이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아주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고 나서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랑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런 사랑에도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이야기하시는데,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절대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나가서 자기에게 조금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내놓으라고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조금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우리도 이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 사랑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2)

 

우리가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3.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이 뭡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을 용납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예쁜 사람, 말 잘 듣는 사람만 사랑하신 게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엄청나게 반역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내 말 잘 듣는 사람, 나와 친한 사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나를 모함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인데,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은 너무 개인주의화가 되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뭐 하러 귀찮게 용서합니다.’라고 합니까? 그냥 딱 끊고 안 보면 그만입니다. 그 사람 없어도 내가 사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보통인데, 예수 믿는 사람도 그렇게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하더라도,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진짜 사랑을 산상설교에서 가르쳐주셨습니다.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태복음 5:43-48, 새번역)

 

예수님은 이런 참사랑을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는 악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23:34, 새번역)

 

지금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고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우리가 이분을 믿는 겁니다.

 

교회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는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스데반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고 깊이 깨달았습니다. ‘, 이것이 진짜 사랑이구나.’ 그래서 스데반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인 게 아니라 실천했습니다. 오해로 인하여 돌에 맞아 죽는데, 예수님처럼 자기를 죽이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죽은 것입니다.

 

=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7:59-60, 새번역)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Paul, the Apostle of Christ)>이라는 영화가 몇 년 전에 나와서 당시 고등학생이던 아들을 억지로(?) 데리고 가서 보았는데, 별로 재미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스데반이 죽는 자리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 사울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울이 젊었을 때 예수 믿는 것들을 다 잡아 죽이겠다.’라고 하던 사람이었는데, 스데반이 죽는 자리에서 뒤에서 조종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서 로마제국 이곳저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데, 헬라 사람들 가운데 활동하려면 사울이라는 유대식 이름보다는 바울이라는 헬라식 이름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다 그 영화에서 마지막 순간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합니다. 군인이 그의 목을 탁 자를 때 장면이 확 바뀌는데, 저쪽에서 몇 사람이 걸어오고 가장 앞의 한 사람이 와서 바울을 안아줍니다. 그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바울이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스데반이 기다리고 있다가 변화된 사울(바울)을 안아주는 그 장면을 볼 때 큰 감동이 왔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깨닫고 실천한 분들이 우리 믿음의 조상들입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한 스데반, 바울, 요한과 같은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져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분들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갈라졌으면 어떻게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자존심, 시기, 질투를 다 내려놓고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을 때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온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먼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것도 먼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사랑하시되, 먼저 하시는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사랑하면 나도 봐서 사랑해주지.’라는 식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나오니까,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사랑해주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나오기 전에 먼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철천지원수는 없더라도, 혹시 마음에 불편한 관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를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 앞에서 나에 대해 험담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괜히 말을 툭 해서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경우 사실 너무 많습니다. 솔직히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용서하기가 힘드시죠? 아예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듭니다. 그런 사람을 뭐 하러 용서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보시면서 아이, 얘들을 내가 뭐 하러 용서해? 그냥 죽어!’라고 하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도들이 가서 당한 대로 원수를 갚고 보복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주님의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겠습니까?

 

우리는 미움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미움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가서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지만, 그냥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미움의 고리를 끊으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내가 사는 길입니다. 복수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했으니 나도 가서 똑같이 해줘야지.’라고 하는 게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또 옵니다. 악의 고리는 계속됩니다. 이쪽에서 공격하고 저쪽에서 받아치고 하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한쪽에서 그 미움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하더라도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봐서 용서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먼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 난 자의 특징입니다.

 

의학 연구 결과를 보아도, 마음속에 미움이 있으면 안 좋은 세포가 자라며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연구 결과가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면 스트레스가 없어지고 몸도 건강해진다는 연구 결과도 아주 많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두 번째 의미는 서로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분명한 특징이 바로 완전한 자기희생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부터가 희생입니다. 천국에 그냥 사셨으면 편하셨을 텐데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외아들을,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여기서 안 죽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다 죽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실 것 같으십니까? ‘너는 얼마나 성공했냐?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냐? 너는 투자해서 얼마나 이익을 많이 봤냐? 네 구좌에 얼마가 있었냐?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냐? 너는 어느 학교 나왔냐? 어디까지 학위를 했냐?’ 이런 걸 보시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한 가지를 보십니다. ‘너는 내가 준 사명을 다했느냐?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느냐?’ 그것을 보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가, 그래서 사명을 이루었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성공 기준입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나 높아졌느냐,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냐, 무슨 차를 타고 다니고 어떤 집에 사느냐를 보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희생했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느냐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즉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만 한 것이 아니고, 가장 귀한 것을 보내셨습니다. 죄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엄청난 값을,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보며 잘 웃어주고 부드럽게 대하며 말도 행동도 친절하게 해주더라도, 거기에 희생이 빠져 있으면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희생이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을 실천하고 희생할 때 나에게 손해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요리조리 피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안 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잘하더라도 칭찬과 격려를 항상 받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오해받을 수 있고,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창피와 모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고 할 정도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 은혜를 안다면 멈출 수 없는 겁니다. 그 사랑과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며 사셨습니다. 사도들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남을 살리는 은혜의 통로가 되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멋진 삶입니까? 그런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삶입니다. 가 하는 사랑이 진짜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진실성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증명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증명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잘되고 행복해지기를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복을 저 사람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어줄까를 생각하며 자기의 것을 내어주고 포기도 하며 희생도 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별로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에 별로 기쁨이나 평안이 없습니까? 왜 그렇겠습니까?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자기희생이 없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편한 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자기 스케줄에 맞을 때는 하고 안 맞으면 안 하고, 그렇게만 하니까 신앙이 자라지 않고 기쁨도 없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살면 신앙생활이 짐이 됩니다. 하기 싫은데 안 하면 벌 받을 것 같아서 하니까 얼마나 불행한 신앙생활입니까?

 

그런데 반대로 다른 형제자매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자기 시간도 쓰고 돈도 써 가면서 섬길 때 어떻습니까? 분명히 손해 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쁨이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옵니다. 마음이 참 좋습니다. 이런 것을 경험한 분들이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 것을 내어줄 때,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며 섬길 때, 몸은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이상하게 거기에 기쁨이 있고 마음이 참 좋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그것이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이 아주 높고 고상한 차원에서부터,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큰 것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자꾸 큰 것만 생각하니까 자꾸 다음에 하지.’ 하며 미루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매일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 모든 것이 자기에게 집중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때 그 기쁨은 정말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과 함께 아주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굉장히 비싼 음식을 주문해서 먹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그렇게 충분히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지만, 아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거기서 조금 줄여보는 겁니다. 수준을 조금 낮추어서 그만큼 세이브하여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는 겁니다. 그럴 때, 내가 혼자 배부르게 엄청난 것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 밀려옵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선교헌금을 하지만,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거 다 하고 나서 남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요즘 물가가 얼마나 올랐습니까? 인플레이션에 따라 헌금도 올리고 계십니까? 물가는 많이 올랐는데 헌금은 10, 20년 전과 똑같은 건 아닙니까?

 

예를 들어, $20짜리 음식을 사 먹을 것을 아껴서 $15짜리로 먹고 $5을 모아두는 겁니다. 그렇게 몇 번 쌓아놓은 것을 모아서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해보십시오.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목장에서도 집을 오픈하는 것은, 굳이 음식을 꼭 먹겠다는 게 아니라 섬김입니다. 힘들기는 하지만 기쁨이 있습니다. 친교 점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다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섬김을 베풀어보는 겁니다. 몸을 움직여 섬겨보십시오. 힘들기는 하지만 기쁨이 있습니다. 내 것을 희생하며 섬길 때 진정한 신앙생활이 되고, 기쁨이 있으며 또 내 신앙이 성장하게 되는 겁니다. 이론적인 것으로는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을 보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희생하셨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최고의 사랑을 경험한 것인데, 이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할 때입니다.

 

일단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그러다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느껴질 때 바로 행동으로 옮겨보는 겁니다. 특히 뭔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내 눈에 발견될 때 다음에 하지. 누군가 하겠지.’가 아니라 내가 해보는 겁니다. 어떤 필요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 누군가 하겠지.’가 아니라 내가 하겠다고 자원하는 겁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베푸셨으니까 내놓으라고 하셨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벌써 끝났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의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지 다른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 번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나는 얼마나 사랑이 있는가?’ 0부터 10까지 내 사랑은 어느 정도 되겠습니까? IQ는 많이 따지는데 LQ(=Love Quotient) 즉 사랑지수로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사랑이 얼마나 되는가? 사랑이 없습니까? 고갈되었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먼저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겠다고 결단하며, 또 삶 속에서 실제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놀라운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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