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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b1eICJLsL-g

 

 

20221113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38

압살롬의 파멸과 죽음

(사무엘하 181~18)

 

[들어가는 말]

 

이번에 한국에 가기 전에 상황이 바뀌어서 갑자기 처리할 일들이 생기는 바람에 바빴습니다. 그래서 주일 밤에 잠도 몇 시간 못 자고, 또 월요일에 엘에이에 가서도 여러 일들을 처리하고 계획을 바꾸느라 그날도 잠을 별로 못 잤습니다.

 

그렇게 한 후 비행기를 탔는데 이상하게 잠이 잘 안 오는 겁니다. 생각해보니까 한국에 도착하면 다음 날 저녁인데,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잠을 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비행기 안에서는 잠을 자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좋은 영화들이 많기에 무려 영화 네 편을 보며 잠을 거의 안 자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잠을 잘 자서 시차 적응을 완료(?)했습니다.

 

좋은 영화들 중 할리우드 영화, 한국 영화, 외국 영화가 많았는데, 그중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던 영화가 있습니다. <개와 나의 10가지 약속>(2008)이라는 일본 영화입니다. 귀여운 강아지가 나오기에 이건 뭔가 하고 봤는데 아주 잔잔하고 좋았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이 마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혀 상관없는 여기서 태어난 제 아들 같은 경우에도 한국과 일본이 축구를 할 때 일본에게는 꼭 이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런 마음이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런 영화를 보면,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웁니다. 요즘 한국 영화들은 아주 자극적인 것들이 많은데, 이 영화는 전혀 자극적이지 않고 감동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주인공 집안이 일본에서 드문 케이스인 가톨릭 신자인 것으로 나오고 마지막에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며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도 나옵니다.

 

주인공이 12살짜리 아카리라는 여학생인데, 그 집에 골든리트리버 강아지 한 마리가 갑자기 마당으로 들어옵니다. 도망갔다 다시 들어오곤 하면서 결국 키우게 됩니다. 그녀의 엄마가 갑자기 불치병에 걸려서 자기 생명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알고 자기 딸에게 개를 잘 돌봐주라고 하면서 개를 키우는 데 지켜야 할 십계명을 말해줍니다. 저희 집에도 개가 있지만 저는 이것을 처음 들었습니다.

 

1계명: 인내심을 가지고 내 말을 들어주세요.

2계명: 나를 믿어주세요. 나는 언제나 당신 편이에요.

3계명: 나랑 많이 놀아주세요.

4계명: 나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5계명: 싸우지 말아요. 마음만 먹으면 내가 더 강해요.

6계명: 내가 말을 안 들을 때는 다 이유가 있답니다.

7계명: 당신에게는 학교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어요.

8계명: 내가 나이가 들어도 친하게 지내주세요.

9계명: 나는 1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해요. 그러니까 함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10계명: 당신과 함께한 시간을 잊지 않을게요. 내가 죽을 때 부탁이 있어요. 곁에 있어 주세요.

 

이런 것들이 개를 키울 때 지켜야 할 내용입니다. 이것을 듣기만 해도 얼마나 마음이 잔잔해집니까? 뭔가 마음에 와닿는 게 있지 않습니까? 미국에는 개를 키우는 집들이 많고 이번에 보니까 한국에도 많은데, 이전에는 애완견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반려견이라고 합니다. 같이 사는 가족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개와 사람의 관계도 이렇게 아름답고 애틋한데, 이상하게 인간끼리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경우가 너무나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가족끼리도 서로 죽이려 합니다. 형제자매끼리도 그렇고,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려고 하는 끔찍한 일들도 벌어지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압살롬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는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으로 인생을 쓸쓸히 마감하게 됩니다.

 

 

1.   다윗 군대의 승리 (1~8)

 

1)  왕 다윗과 아버지 다윗의 갈등 (1-5)

 

우리가 17장 뒷부분은 살펴보지 않았는데, 거기에 보면 마하나임에 진을 치고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안식을 얻은 다윗은 전열을 정비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에 진을 친 압살롬 진영을 향해 나아갑니다.

 

지금 다윗이 진을 친 마하나임은 사울이 죽은 후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하여 다윗을 대적하던 본거지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로부터 한참 후에 이곳에 와서 진을 쳤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주변은 다윗에게 호의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다윗에게 적대적인 곳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진을 쳤고, 모든 것이 적대적인 그곳에 압살롬도 쫓아 와서 근처에 진을 쳤습니다.

 

“1 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찾아가서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들 위에 세우고 2 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1-2)

 

다윗은 전쟁하기 위해 먼저 군대조직을 정비합니다. 그는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운 후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고, 각각 요압과 그 동생인 아비새, 그리고 자기에게 충성한 가드 사람 잇대를 각 부대의 지도자로 세웁니다. 지금 다윗 군대는 압살롬 군대에 비해 수적으로는 큰 열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수가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 부대를 분산시켜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지략가인 장수로서의 면목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다윗이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친히 그 싸움에 나가겠다고 말할 만큼 원기를 회복했습니다. 사실 나중에 보면 이것은 자신이 직접 전쟁에 나아가서 압살롬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지만(5),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 백성의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은 결과로 이렇게까지 되었다는 것에 대해 다윗은 마음에 큰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의 신하들은 한결같이 다윗의 참전을 만류합니다.

 

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하니라” (3)

 

백성들은 다윗이 전쟁터에 함께 나가는 것을 강력히 반대합니다. 적들의 모든 공격이 다윗에게 집중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도망가도 오직 다윗만 추격해서 죽일 거라고 하고, 자기들의 절반이 죽어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다윗만 죽이기 위해 쫓아올 거라고 합니다. 자기들 만 명보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압살롬의 주목표는 다윗의 신하들이 아니라 바로 다윗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4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왕이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4-5)

 

다윗은 백성들이 말리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직접 전투에 나가는 것이 군인들에게 오히려 폐를 끼치고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투에 나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제 이전처럼 용맹스럽고 백전백승의 용사가 아닙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평범하지도 못하고 전투력이 가장 약한 수준의 군인일 뿐입니다. 비록 그가 이전에는 용사였지만, 지금 전쟁터에 나가게 되면 오히려 자기편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 될 것이고, 사기도 크게 저하시키는 일이 될 것을 알고 나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이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라고 부탁합니다.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반역을 일으키고 전쟁을 일으켜 쫓아온 압살롬에 대해 다윗이 이런 태도를 갖는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군대가 전쟁만 이기고 그의 아들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까?

 

그러나 압살롬이 죽지 않고는 결코 이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죽든지 압살롬이 죽든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전쟁이 끝납니다. 그래서 그가 빨리 제거될수록 그만큼 피를 흘리는 일이 줄어들고 자기도 빨리 예루살렘에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다윗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런 부탁을 합니까? 지금 다윗은 자기 군대에게 압살롬과의 전쟁에 져달라고 부탁하는 겁니까?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지금 굉장히 곤혹스러운 상황입니다. 가끔 보면 실제 상황에서도 그렇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그렇고,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가 직책상으로는 이 일을 해야 하는데, 가족으로서 특히 아버지나 어머니로서는 하기가 힘든 경우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갈등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대가가 이토록 혹독하게 다가올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우리가 죄에 넘어갈 때 보면, 그 죄의 결과를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죄가 엄청난 후폭풍과 혹독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생각할 수만 있으면 대부분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죄라는 것은 우리를 막 넘어뜨리려고 무섭게 다가오지 않고 아주 달콤하고 굉장히 좋아 보이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물리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끔찍한 결과를 잘 생각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까 죄에 넘어가고, 또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전쟁의 결과 (6-8)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6)

 

압살롬의 군대와 다윗 진영의 전쟁은 에브라임 수풀이라는 곳에서 벌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브라임 수풀이라고 하니까 헷갈릴 수 있는데, 에브라임은 요단강 서쪽에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있는 곳은 확실히 요단강 서쪽입니다. 지금 다윗과 압살롬은 현재 요단강 동편 길르앗과 마하나임에 각각 진을 치고 있는데(17:26-27), 굳이 거기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서 싸운다는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에브라임 수풀이라는 것은 고유명사로서 한 장소를 가리키는 겁니다. 사사시대 때 암몬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입다에게 에브라임 지파가 시비를 겁니다. 그전에도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며 왜 우리를 안 불렀느냐?’라고 했을 때, 기드온은 쩔쩔매면서 아닙니다. 당신들이 훨씬 훌륭합니다.’ 하고 띄워주었습니다.

 

아마 그 기억이 났는지 나중에 입다가 승리하고 오니까 또 에브라임 지파가 왜 우리를 안 불렀느냐?’ 하며 또 시비를 겁니다. 사실 다 불렀지만 자기들이 안 간 건데, 왜 안 불렀느냐고 하며 시비를 겁니다. 자기들이 영광을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그때 그들은 입다에게 크게 패합니다. 그래서 도망가다가 나루터 근처에서 쉽볼렛을 발음해보라고 했을 때 발음이 안 되어 십볼렛이라고 함으로 많이 죽었습니다(사사기 12). 바로 그 장소에서 압살롬 군대가 다윗 군대 앞에 크게 패한 겁니다. 그곳이 바로 에브라임 수풀이고, 거기서 압살롬 군대가 다윗 군대에게 패했습니다. 그래서 2만 명이나 죽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이들은 같은 동족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싸우며 서로 죽고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어떤 전쟁이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수의 지도자들의 욕망과 잘못된 판단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러시아에서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들은 멀쩡합니다. 그러나 일반 사병들, 게다가 훈련도 되지 않은 젊은이들을 막 끌어서 징집해다 전쟁터로 보내니까 어떻게 전투를 하겠습니까?

 

압살롬 군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즉 맨 북쪽에서 맨 남쪽까지 모든 지파에서 젊은이들을 군대로 모아 전쟁에 나온 것인데, 그들은 무슨 죄입니까? 가만히 잘살고 있는데 군대에 끌려와서 약간의 훈련을 받은 후 전쟁터에 나온 것인데 어떻게 잘 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고도로 훈련받은 다윗 군대에게 여지없이 패하는 겁니다.

 

죽은 사람 2만 명이 얼마나 안타까운 생명입니까? 다윗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평생 장애인이 되는 부상을 입게 됩니다. 더 나쁜 것은, 압살롬의 아버지에 대한 반역과 잘못된 야심 때문에 무려 2만 명의 젊은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리더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런 전쟁을 일으키는 리더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리더입니다. ‘나는 리더가 아닌데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사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다면 다 리더입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전부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고 또 해야 합니다.

 

그런데 리더 한 사람의 잘못으로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리더의 역할을 맡았을 때, 내가 조금만 잘못하면 수많은 다른 교우들이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해를 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책임감 있게 삶을 살며 사역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모두 리더입니다. 리더로서 내가 잘못된 본을 보이면 내 가족에게 또 수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저런 리더들처럼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리더들 특히 가정에서 부모이신 분들은 내가 보여주는 모습 때문에 자녀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기도를 안 하면서 아이를 키울 수 있겠습니까? 기도를 안 하는 분들을 보면 용기가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어떻게 기도를 안 하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기도를 안 할 때 이런 실수를 하게 됩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 끈이 끊어지면 자기가 알아서 살게 되고 그러면 이렇게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7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날 그 곳에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8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7-8)

 

소수의 다윗 군대가 다수의 압살롬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둡니다. 이것은 다윗 군대의 전술이 뛰어났고 또 장군들과 군인들이 용맹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나타난 결과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때도 전쟁을 벌일 때 우박이 마구 떨어져서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 많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성경, 특히 구약성경에 그런 표현이 나오면, 수풀이 험한 곳이고 나무들이 뾰족하게 나와 있어서 거기 푹 찔려서 죽은 경우가 실제로 많았겠지만, 환경 때문에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박이 내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로 죽임을 당한 사람보다 자연환경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뜻입니다.

 

결국 문제는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냐 적으냐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한국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뭐든지 많이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까? 좀 더 가지려고 특히 좋은 것을 더 가지기 위해서 애를 쓰고, 또 올라가기 위해서 애쓰지 않습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더 많이 가지고 높이 올라가는 데 있는 게 아니고, 어떻게 싸우느냐, 어떻게 사역하느냐, 어떻게 섬기느냐에 있습니다. ‘누가 제일 빨리 가느냐? 내가 최고로 빨리 가야겠다.’ 하며 마구 달려간다면, 저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데 그리 최고로 빨리 달려가 봐야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먼저 죽기밖에 더 합니까? 자기에게 해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빨리 가겠다, 높이 올라가겠다, 더 많이 갖겠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방향이 제대로 되어 있느냐입니다. 옳은 일을 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느냐가 인생의 승패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이기기를 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압살롬의 이런 패망과 몰락은 이미 여러 면에서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첫째, 압살롬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대적하여 스스로 왕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습니다.

 

둘째로, 압살롬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반역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사람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셋째로, 압살롬은 자신의 인기와 영광을 위해서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는 백성을 섬기기 위해서 왕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도 이전에 많이 그랬습니다.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복을 받았다고 하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게 다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무엇인지, 올라간 건 좋은데 과정이 옳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압살롬처럼 세상적인 방법과 악한 동기로 그런 삶을 추구해서 올라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조금 알아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을 악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과정으로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쁜 일을 옳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선한 일을 선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결과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십니다. 마음의 동기까지 살피십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편법을 사용하고 거짓말을 일삼으며 다른 사람들을 짓밟습니다. 그런 방법들이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행하며 양보하는 사람이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희생물이 되기가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고, 혹시라도 이 땅에서 그것이 갚아지지 않는다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분명히 다 갚아주십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을 다 살피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효율적이고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정직하고 의로운 자의 편에 서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정직하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는 사람이라면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완벽한 삶을 기대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한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가려고 애쓰는 것을 하나님은 좋게 봐주십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면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지 않을 때, 오히려 세상의 방법대로 살고 이기적으로 살아갈 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을 버리고 이기적인 방법, 악한 방법을 쓰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만족이 없습니다. 진짜 행복이 없습니다.

 

누군가 그럴지 모릅니다. “아니, 목사님,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그렇죠, 저는 올라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전도서를 보시면 세상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간 분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이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을 얻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보다 더 큰 것으로 가져다 채워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자신의 만족과 영광을 위해서 세상 높은 지위나 성공만 추구하며 이기적으로 살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마음과 태도를 다루시게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깎으시고 훈련시키시고 연단을 시키신 후에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 달려가고 있는지 매일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   압살롬의 비참한 최후 (9~18)

 

1)  압살롬의 죽음 (9-15)

 

압살롬 군대의 패배는 압살롬이 죽임을 당함으로 끝이 납니다. 그가 죽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는 어떻게 죽습니까?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9)

 

왜 하필 노새를 탔을까? 노새는 왕이 타는 짐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자기가 왕이라고 선포하며 전쟁에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전세가 어려워지면서 다윗의 군사들을 피해 도망가다가 상수리나무에 머리카락이 걸려서 그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됩니다.

 

압살롬의 머리카락은 어땠습니까? 굉장한 자랑거리였습니다. 머리가 풍성하다는 것은 당시 외모가 뛰어나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은 사실 그의 허영과 오만과 자랑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도 머리카락이 몹시 길어 무거워진 다음에야 머리를 깎았습니다(14:26). 그러나 그의 자랑거리였던 풍성한 머리카락과 왕의 상징인 노새 때문에 그는 허망하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 나뭇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 빠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생명이 위험한데, 자기가 머리카락이 걸렸으면 빨리 자기가 들고 있는 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도망갈 생각을 왜 하지 않습니까? 지금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빨리 자르고 도망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도 그걸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머리카락을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든 머리카락을 지키면서 빠져나가야지.’ 하고 낑낑거리고 있는 겁니다. 너무 어리석습니다. 지금 목숨보다 자기 머리카락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지금 여기서 자기가 죽으면 머리카락이 풍성한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금방 따 썩어 버릴 텐데 뭐가 소용이 있습니까?

 

인도네시아나 동남아에서 원숭이를 잡을 때 호리병에 쌀을 넣어놓고 원숭이들이 다니는 데에 두고 숨어 있으면, 숨어 있던 원숭이들이 쌀을 먹으려고 숲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원숭이가 쌀을 먹으려고 병에 손을 넣습니다. 그렇게 쌀을 쥐는 순간 손이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쥐니까 주먹 때문에 손이 못 나오는 겁니다. 그때 사냥꾼들이 나와서 잡으려고 하는데, 빨리 놓고 도망가면 되는데 이걸 놓지 못하고 계속 붙들고 있다가 잡혀 죽임을 당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압살롬이 지금 그 수준입니다. 빨리 머리카락을 자르고 도망가면 되는데, 그걸 못 자르고 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안타깝습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심판 날에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그토록 자랑스러워 했던 바로 그것 때문에 멸망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금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게 무엇입니까?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게 무엇입니까? ‘이건 내가 절대 빼앗길 수 없어. 내가 이건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해.’라고 하는 것, 바로 그게 오히려 나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자랑하고 무엇을 아끼는지를 잘 살펴야겠습니다.

 

“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11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10-11)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린 것을 본 한 군인은 그를 너그러이 대우하라는 다윗 왕의 말을 기억하고 압살롬의 몸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달려와 그 사실을 요압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21:23)라는 말씀처럼, 9절과 10절의 달리다라는 단어를 굳이 여기서 사용한 것은, 압살롬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성경이 의도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화려하고 굉장한 훈남이고 엄청난 외모의 소유자이고 또 이제 왕이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때 요압은 자기에게 그 사실을 보고한 군인에게 네가 그를 보았는데도, 왜 그를 당장에 쳐서 땅에 쓰러뜨리지 않았느냐?”라고 호통을 칩니다. 사실 압살롬을 살려주는 것은 다윗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기는 했지만, 국가적으로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압살롬이 살아있는 한 언제 다시 반역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압은 그를 죽여야 이 전쟁이 완전히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압이 주었을 것이라고 한 은 물질적 보상을 의미하고, ''는 군복에 화려하게 매는 줄로 명예로운 포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으로도 풍성해지고 명예도 얻는 것을 주었을 텐데 왜 안 했느냐는 겁니다. 요압은 지금도 이런 것들로 이 군인을 회유하려고 시도합니다. 하지만 군인의 대답을 보십시오. 그는 생각보다 현명하고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있습니다.

 

“12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3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12-13)

 

이 군인은 어떤 보상보다도 다윗의 뜻과 명령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지금 은 열 개가 아니라 은 천 개를 받더라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다윗의 말을 소홀하게 여긴 요압의 태도와 대비됩니다. 요압의 기회주의적이고 간교한 성격을 그는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압살롬을 죽인 것이 문제가 될 경우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13)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압은 그 모든 책임을 압살롬을 죽인 사람에게 전부 덮어씌우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이 군인은 파악하고 있고, 그것도 요압의 면전에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요압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지만 남들이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는 시간이 없으면 우리도 다 이렇게 됩니다. 요압처럼 이렇게 됩니다. 자기가 굉장히 멋져 보이고 잘난 사람인 것 같고 남들이 다 괜찮게 봐주는 것 같아도, 사실은 다 이렇게 파악하고 있는 겁니다.

 

“14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15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14-15)

 

이름도 안 나오는 이 군인이 너무 똑똑하게 대답하면서 나오니까 요압이 굉장히 당황합니다.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며 압살롬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이때 이 말은 사실 이런 뜻입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그리 잘 알아?’ 이 사람이 압살롬을 죽였다면 얘가 죽였어요.’라고 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귀신같이 내 마음을 읽네.’ 하며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라고 하며 둘려대고 압살롬에게 갑니다.

 

지금 이 군인이 자기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마음에 찔립니다. 그래서 빨리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이제 압살롬의 머리카락이 나무에 끼어서 달려 있는 곳으로 가서 무방비 상태에 있는 그의 심장을 찔러 죽여버립니다.

 

요압은 비열한 사람입니다. 먼저는 이 군인을 회유하려고 했는데 통하지 않으니까 일단 가서 심장을 찌르고, 그 다음에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쳐 죽이게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죽인 게 아니라 자기는 시작했고, 다른 열 명이 죽이도록 한 겁니다.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 그가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막대기를 말합니다. 진짜 창도 아니고 칼도 아니라 막대기입니다. 물론 막대기로도 세게 찌르면 사람의 몸을 관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이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막대기로 찔러서 전혀 도망을 못 가게 해놓고, 그다음에 다른 열 명이 와서 죽이게 한 겁니다. 요압은 끝까지 철저합니다. 끝까지 자기가 책임지지 않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을 향한 오만한 태도입니다. 그는 우리야를 죽인 다윗의 약점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군대 장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오만하게 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 요압에게는 압살롬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도 있었습니다. 이전에 압살롬이 자기 밭을 불살랐기 때문에 원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죽여버립니다.

 

 

2)  압살롬의 무덤 (16-18)

 

“16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17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16-17)

 

요압은 압살롬을 죽인 뒤에 더 이상 다른 군사들을 추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싸움을 중단하라는 의미로 나팔을 불어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립니다. 다윗의 군사들은 죽임당한 압살롬의 시신을 전장에 있는 큰 구멍에 넣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무덤을 만들고, 압살롬 군대는 각기 장막으로 도망갑니다.

 

압살롬은 그토록 높아지려고 했는데, 왕이 되려고 했는데, 그래서 암논도 죽이고 아버지를 대적하여 반역했으며 이제는 아버지를 죽이려고 나온 것인데, 너무나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됩니다. 숲속의 이름 모르고 장소도 모를 구덩이에 묻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기억할 수 없는 곳에 장사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왕자다운 또는 왕다운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장례였습니다. 어떻게 왕이 이렇게 장사될 수 있겠습니까? 진짜 왕자나 왕으로 취급되었다면 예루살렘으로 시신을 옮겨서 장사지내주어야 했는데, 요압은 그냥 거기에 구덩이를 파고 장사지내버립니다. 너무 비참합니다.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18)

 

이것은 압살롬이 살아서뿐 아니라 죽어서까지 자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길 목적으로 압살롬의 기념비라는 비석을 미리 세워두었는데, 아마도 자기가 죽은 다음에 그 옆에 자기 시신을 묻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여 그 비석 근처에도 못 가보고 에브라임 수풀의 한 돌무더기 아래 쓸쓸히 묻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압살롬은 세월이 지나면 아무도 누가 여기 묻혔는지 모르고 더 세월이 지나면 이곳이 무덤인지도 모르는 그런 곳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며 기름 부으신 자인 다윗을 죽이려 한 반역자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준다.

 

사울이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처럼(삼상 15:12), 자신의 명예를 중요시한 압살롬 또한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걸 보면 압살롬 또한 사울과 똑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 세운 기념비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비참한 끝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압살롬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어서 살아 있을 때 자기 비석을 준비하여 세웠다고 했는데, 그에게 정말 아들이 없었습니까? 사실 최소 세 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아, 모두 다 아버지인 압살롬보다 먼저 죽은 겁니다.

 

많은 한국 부모들이 자녀에 대해 실수하는 게 있습니다. 자녀라는 존재를 부모인 자기 인생의 연장선으로 보는 겁니다. 아무리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사랑하는 아들딸이라 할지라도 부모인 자기와는 분리되고 독립된 존재로 인정해줘야 잘 살아갈 수 있는데, 그걸 못하는 겁니다. 이미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아이고, 우리 애기!”라고 부르는 분들을 몇 명 봤습니다. 20세가 넘었는데도 아기라고 부릅니다. 놓지를 못합니다. 스스로 살게 두지 않고 자기가 다 해줘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혼자 못한다. 내가 다 해줘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녀가 잘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가 망가집니다. 자녀의 수준은 부모의 기대치에 늘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자녀에게 자기보다 더 훌륭한 인생을 살라고 요구하니까 그게 아이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는 겁니다.

 

빨리 부모인 자기로부터 분리하고 독립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 아이의 인생은 그 아이가 사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에 있어서도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고, 내 아들이나 딸도 하나님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아들들이 먼저 죽어서 이 땅에 자기 이름을 전하고 자기 존재를 이어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석을 하나 세워 놓고 압살롬의 기념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평생 그가 살면서 추구했던 삶의 방향이었고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으로 허망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 잘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나가는 말]

 

오늘 우리가 압살롬의 죽음을 통해 명료하게 붙들어야 할 중요한 결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가, 그리스도 없는 인생이 행복해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 같은 것이구나하는 진리입니다.

 

바벨탑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두 가지였습니다. 인간들이 흩어짐을 면하고, 또한 자기들의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습니다. 크고 높은 탑을 쌓아 거주하면 온 지면에 흩어지지 않게 되고, 다시 홍수가 일어나도 죽음을 면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쌓은 바벨탑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압살롬은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자기의 인기와 명예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자기중심적 인간형의 모델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심판하시는데, 사람들은 압살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자녀에게도 저런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게 정말 성공인 것처럼 보이고 행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인생에 굉장한 관심을 기울이고, 기자들도 많이 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기는 한순간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자마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은 다 흩어져서 누가 따랐는지 흔적도 없어집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 누리는 인기는 정말 바람과도 같습니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자기 이름을 내려고 했던 압살롬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것은, 자신만의 바벨탑을 쌓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이런 헛된 가치를 추구하다가 결국 비참하게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 철저히 붙어 있는 은혜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바로 그러한 은혜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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