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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2tw9T3Nweyg?t=1707

 

 

2021630일 수요예배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3

: 하나님이 차려주신 영혼의 식탁

(출애굽기 3710~16)

 

[들어가는 말]

 

교회에서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예배는 모든 것이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이 말이 전적으로 옳은 까닭은 두 가지 면에서입니다.

 

첫째, 예배는 우리 신앙인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유명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만 봐도 이것은 명확합니다. 17세기 중반(1643-1649) 영국이 청교도 혁명을 성공한 후 나라를 복음주의 신앙으로 온전히 세우기 위해 신학자 121명과 장로 30(상원의원 10, 하원의원 20) 등 총 151명이 6년 동안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핵심 교리를 요약 정리해서 만든 것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요긴한 원리를 107개의 문답 형식으로 만든 것이 <소요리 문답>(Short Catechism)입니다. <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가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이며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는 우리가 삶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우리가 예배당에서 드리는 공 예배만 말하는 게 아니라 개인 예배도 포함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입니다.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지장이 없지만, 어떤 것들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그것을 예배를 통해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는 모든 것이 됩니다.

 

예배를 통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는다.’라는 말은 삶을 제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관심이 가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바르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성소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1.   성소에 담긴 메시지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와 뜰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구조가 영과 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 것과 아주 유사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오리지널 디자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과 혼과 육 중에서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입니다. 영이 기본입니다.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부분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해, ‘은 너무 깊은 차원이며, 그리 쉽게 드러나거나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다 드러나 있고 누구나 볼 수 있는 은 결코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육이 더 중요하다면, 사실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적인 것입니다. 육체를 강조할수록 동물적인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보십시오. 영과 혼과 육 중에 사람들이 무엇을 가꾸는 데에 신경을 가장 많이 쓰며 돈과 시간과 정성을 쏟습니까? 육입니다. 운동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건강식품이나 비타민에 돈을 씁니다. ‘얼짱’, ‘몸짱이라고 하면서 근육을 키우고 몸매를 아름답게 가꾸고 또 얼굴도 성형까지 해가면서 아름답게 되기를 추구합니다. 전부 육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점점 동물적이 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육체를 가꾸는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 육체만 가꾸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내가 주로 어디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혹시 육신을 가꾸는 데에만 시간을 쓰고, 영과 혼을 가꾸는 데는 시간을 쓰지 않고 있다면 신앙인으로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가장 직접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입니다. ‘이 그 사람의 인생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것은 혼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에 달려 있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혼입니다.

 

이라고 하면 감이 잘 안 잡힐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격(지정의)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담긴 인격과 성품이 바로 인간 그 자체와 그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주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소는 성막의 세 부분 중 하나이지만, ‘성소가 성막을 대표합니다. 중요도로 본다면 지성소가 가장 중요하지만, 성막의 대표는 성소입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지만, 성막은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성막과 성전을 다른 말로 성소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소가 그런 위치와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성소에 담긴 예배의 메시지는 곧 예배 중에 우리의 영혼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예배의 약속, 곧 예배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내용은 성소에 들어 있는 세 가지 기구를 통해서 메시지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성막은 공간과 장소이기는 한데, 그 안에 있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장소, 공간, 건물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지성소가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있는 증거궤와 그 증거궤의 뚜껑에 있는 속죄소 때문입니다. 그처럼 성소도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세 가지 물건, , 등잔대, 분향단때문에 성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상과 등잔대와 분향단은 단순한 기구가 아닙니다. 그 하나하나가 아주 중요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배의 메시지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성소에서 일어나는 예배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자인 우리의 혼(지정의/인격) 가운데 있는 예배의 역사가 되고,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 순서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성경에 나오는 순서대로 오늘은 먼저 에 대해 살펴보고, 나중에 등잔대분향단에 대해 체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는 곳인 상

 

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는 곳입니다.

 

그가 또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너비가 한 규빗, 높이가 한 규빗 반이며” (10)

 

여기서 은 아무리 성소 안에 있는 거룩한 것이라고 해도, 결국 그 위에 음식을 올려놓는 밥상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밥상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밥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라도 하나님을 위한 밥상이 아닙니다.

 

한국의 전통 제사를 할 때 보면 음식을 죽 차려놓습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배를 좋아하셨으니까 배를 차려놓습니다. 할아버지의 영이 와서 그것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통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한국식으로 생각해서 하나님이 오셔서 음식을 드시나보다 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실제로 귀신이 무슨 음식을 먹겠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음식을 먹어야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이 상은 일반 제사상하고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 상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메시지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은혜의 메시지입니다. , 성소 안의 상은 하나님이 드실 하나님의 밥상이 아니라,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위해 차려진 하나님의 식탁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이 있습니다. 이것을 큰 상처로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상처는 아니더라도 인간은 다 굶주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굶주림이 생긴 겁니다.

 

그 굶주림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 굶주림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삶의 허무와 무의미와 무력함과 분노와 싫증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삶을 열심히 사는데 뭔가를 이룬 순간 허무함을 느끼거나,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해서 뭐 하나?’ 하는 무의미를 느끼거나, 무기력을 느끼거나, 하기 싫다는 싫증을 느끼거나, 분노를 느낀다면 내 안에 굶주림이 있는 겁니다.

 

또한 그 굶주림을 잘못된 것으로 채우려고 잘못된 노력을 하니까 각종 탈선과 비행과 고통과 중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굶주림이 바르게 채워지지 않으면 결코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그 굶주림을 채워야 하는 것이 답입니다. 굶주림을 채우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습니다. 채워야 해결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인간의 근본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인간의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속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음으로 채워보겠다고 하고, 뭔가를 성취함으로 채워보겠다고 하고, 또는 어떤 물건을 사거나 돈을 벌어서 채워보겠다고 하니까 안 채워짐으로 인생이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 중에 가끔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이라는 것은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대부분은 뒤로 이상한 짓을 합니다. 안 드러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굶주림의 문제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굶주림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채워질 수도 있는데, 그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거나 뛰어난 사랑의 소유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을 통해 흘러 올 때 채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배만 드리는 게 아니라, 같이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같이 예배드리고, 같이 교제하고, 같이 사랑을 나누고, 같이 사역하며 봉사하고, 같이 선교와 전도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 교회를 허락해주셨습니까? 바로 이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기서 함께 공유하고 함께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서로 나눕니다. 목장에서도 서로 그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실천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사랑을 베풀려고 합니다.

 

굶주림의 문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마음의 굶주림을 채우는 곳이 바로 예배입니다. 공 예배만 아니라 개인 예배도 그렇습니다. 혼자 기도하다가, 말씀을 묵상하다가, 찬양을 부르다가 갑자기 마음에 와 닿아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굶주림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뜰의 예배가 아니라 성소의 예배를 드릴 때, 영과 진리로 참된 예배를 드릴 때, 우리 마음의 굶주림이 채워집니다. 다른 것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한 번 해보십시오. 절대 채워지지 않습니다.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 시편 63편을 지었는데, 아까 우리가 처음 부른 찬양곡 가사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3:1-5)

 

이 시편에서 다윗은 참된 예배를 드렸던 사람으로서, 예배를 통해 자신의 굶주림이 채움을 받고 만족을 누렸던 그 체험을 아주 실감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굶주림을 채우는 하늘의 식탁이며 하늘의 식사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나면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특별하게 달라진 것이 없더라도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마음이 너무나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영혼의 만족은 예배의 당연한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큐티나 기도도 좋고 이런 공 예배도 좋고, 내가 예배를 제대로 드렸는지, 내가 참 예배자가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예배 후의 나를 보면 됩니다. 예배를 마치고 기쁨과 만족이 있으면 잘 드린 겁니다. 그러나 만약 예배를 드렸는데도 그러한 기쁨과 만족이 없다면 뭔가 예배를 잘못 드린 겁니다.

 

이것을 또한 너무나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 4장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배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유명한 예배의 정의가 나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4:23-24)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예배의 정의를 말씀하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햇볕이 뜨거운 낮 12시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온 한 여인, 이전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자는 남편이 아닌, 그런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결국 그녀의 진정한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이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것으로 채워보려 했어도, 아무리 남자를 여섯 번이나 갈아치우며 채워보려고 했어도 채워지지 않았던 겁니다. 그것을 정확히 아셨던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시작된 대화의 결론으로서 바로 이 엄청난 예배의 정의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가장 강력한 역사는 영적인 굶주림이 채워지고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는 역사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소에 상을 만들어두게 하신 성막의 비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의 굶주림과 갈증은 구체적으로 어떤 은혜를 받아야 채워질 수 있습니까? 이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기가 막힌 단서가 출애굽기 25장에 나와 있습니다.

 

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 (25:30)

 

상은 다른 여러 그릇을 놓기도 하지만, 결국 진설병이라는 빵을 놓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설병에는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진설병제사의 방식에 따라 상 위에 차려 놓은 떡이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로는 그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히브리어로 진설병이 레헴 파님인데, ‘레헴베들레헴’(빵집)에서 보듯이 을 말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파님인데, 실제로 진설병레헴 파님이라고 길게 부르지 않고 그냥 파님이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그럼 파님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얼굴입니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고 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고 하면서 그곳 이름을 브니엘’(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진설병 즉 레헴 파님의 정확한 의미는 얼굴의 빵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파님얼굴은 누구의 얼굴을 말합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러므로 진설병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 두어서 보시게 하는 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굶주린 내면과 목마른 심령을 채우는 역사가 예배라면, 그 채움은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얼굴의 역사를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 앞으로 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빵은 단순히 먹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여 계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해 계시는 그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상과 진설병이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축복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소위 아론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많은 교회들은 예배의 마지막 축도를 한국 교회에서 주로 하는 고린도후서 1313절로 하지 않고, 민수기 6장의 아론의 축복으로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대제사장 아론에게 당신의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알려주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6:23-27)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너에게서 돌려지고 가려지고 외면하시는 삶이 아니라, 그 얼굴이 너를 향해 계시고 하나님이 그렇게 너를 대면해서 보시는 바로 그런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은혜를 받는 삶이다. 그리고 최고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최고의 축복을 받는 것이다.’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며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서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진설병이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여 뭔가 말을 하시는 겁니다.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얘야, 내가 너 때문에 내가 너무 행복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이 예배하는 나를 보시면서 얘야, 내가 너 때문에 너무 행복하구나.’ 하고 계시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실제로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스바냐 317절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3:17)

 

민수기의 축복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시는 것하나님의 얼굴을 우리를 향해 드시는 것의 의미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요즘 말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눈에서 하트가 뿅뿅이라는 말입니다. 그림이나 만화에서 눈에 하트가 뿅뿅 나오게 그리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하트가 뿅뿅 나오는 모습이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실 얼마나 형편없습니까? 제대로 일주일 동안 살지도 못하고, 예배에 와서도 가끔 졸고 딴 생각을 하고 딴 짓을 하고... 그러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오는 그런 모습이 바로 진설병이 보여주는 것이고 상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겨지십니까? 나를 보시면서 그렇게 내가 너 때문에 행복하다.’ 하시다니? 우리가 너무 부족하지만 네가 이렇게 나를 예배하러 왔구나! 다른 형제자매와 마음을 모아 나를 예배하러 왔구나! 비록 조금 부족하고, 졸기도 하고, 딴 생각도 하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네가 시간을 내고 정성을 다해서 나와 예배하니 나는 너무 행복하다.’라고 하시는 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만약 예배를 드릴 때 조금이라도 네 꼴을 봐라. 이게 뭐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사탄에게 속는 겁니다. 그건 사탄의 음성이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그 얼굴을 뵙는 순간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굶주림과 목마름과 외로움과 갈급함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모든 것입니다. 예배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소에서 예배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역사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배 때마다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고 나서 정말 행복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 속에서도 제대로 예배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고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시면서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오는 하나님의 그 모습을 느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그런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어떻게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이 비밀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하고, 예배가 짐이나 부담이 아니라 축복임을 제대로 깨닫고 예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런 참된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어떤 자리이든지, 예배가 시작되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그 얼굴을 뵙기 원합니다. 우리를 보시며 너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말 체험하기 원합니다.

 

아니, 이런 공 예배뿐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얼굴 앞에 머무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을 참된 예배자로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어디에 있든지 성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진정한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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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성막: 삶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 (출 25:1-9)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1 (6/16/21) admin_p 2021.06.1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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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스가랴(은사의 기도):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슥 3:1-10)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4 (5/19/21) admin_p 2021.05.20 501
300 학개(도전의 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학 1:1-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3 (5/12/21) admin_p 2021.05.13 875
299 스바냐(공의의 기도):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간구하자" (습 1:7-1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2 (5/5/21) admin_p 2021.05.06 665
298 나훔(위로의 기도): "우리의 멍에를 깨뜨리고 결박을 끊으소서" (나 1:9-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1 (4/28/21) admin_p 2021.04.29 1079
297 미가(예언의 기도): "내가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리이까?" (미 6:6-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0 (4/21/21) admin_p 2021.04.22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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