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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12일 수요예배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3

학개(도전의 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학개 11~15)

 

1.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

 

학개서는 열두 권의 소선지서 가운데서 아주 드물게 배경과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책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학개가 말씀을 선포할 때의 상황이 매우 독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독특한 상황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정확한 말씀을 주십니다.

 

학개서는 11-11, 21-9, 210-19절 그리고 220-23, 이렇게 네 개의 메시지로 나눌 수 있고, 각 메시지에는 예언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학개를 통해 주신 말씀을 듣는 당신의 백성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특별한 상황에 있는 백성에게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속 말씀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향해 끌고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학개서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두 가지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더 이상 방치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일부러 날짜를 계속 언급하면서 예언하게 하십니다. 둘째로, 반드시 목적을 성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학개를 통해 이 네 가지 메시지가 선포됐을 때 유다 백성은 그 말씀에 반응하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까지 계속해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그만큼 집요하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반드시 이루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학개서의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이 어땠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력한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까? 바벨론을 정복하고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은 주전 538년 고레스 칙령을 발표합니다. 그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백성들이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신을 섬기며 살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그것은 각자 돌아가서 일하여 세금을 내라는 의도였는데,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에게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들도 마음껏 고향에 돌아가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할 수 있는 길도 열린 것입니다.

 

고레스 칙령이 발표된 다음 해인 주전 537년에 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포로 귀환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인 주전 536년에 드디어 성전 기초를 놓습니다. 그 당시의 감격은 에스라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3:10-13)

 

온 예루살렘이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섞인 환호성과 찬양으로 덮일 만큼 감격하는 가운데,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성전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전 건축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겁니다. 여러 가지 힘든 상황들도 있었지만 특히 영적 방해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방해가 지속되면서 결국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기다리다 지치기 시작했고, 성전 건축에 대한 열기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돌아온 유다 땅에서 먹고사는 문제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에 대한 마음은 자꾸만 뒤로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 주전 536년에 기초를 놓았는데 학개의 메시지가 주전 520년에 선포되었으니까 건축이 중단된 지 시간이 16년이나 지난 것입니다.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와서 성전을 지으려 했는데 방해공작에 의해 16년이나 중단되었습니다.

 

이렇듯 성전 건축의 불씨가 꺼져 버린 것 같은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으며 반드시 이 땅을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을 전달해주셨습니다.

 

 

2.   말씀을 제대로 적용하기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주어진 학개서의 말씀을 요즘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이 말씀을 교회 건축에 적용하고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교회 건축과 아예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말씀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건축과 관련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교회 건축이라는 좁은 영역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건축 지침서가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경에 나오는 성전 건축을 이 시대의 예배당 건축과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전은 일반적인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 같은 건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전체를 말하는 대표적인 상징 같은 것입니다.

 

요즘도 교회 건축을 하면서 성전 건축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건물이라는 뜻으로 성전이라고 한다면 맞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짓는 건물이라면 그렇습니다. ‘거룩이라는 것이 주님을 위해 따로 구별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로 성전이라고 하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은근히 옛날 예루살렘 성전과 대비하면서 교회가 성전이다.’라고 강조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성전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그리스도인 각자,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교회 건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세운다는 것이지, 어떤 건물을 짓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 건축에 대한 학개의 메시지를 교회당 짓는 것에 그대로 대입시켜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적용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때 말씀을 주신 대상이 누군인지를 봐야 합니다. 그들은 영적 침체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부와 기대와 비전을 가지고 기쁨과 감격에 겨워 멀리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올 때 얼마나 흥분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왔겠습니까? 그런데 와 보니까 완전히 상황이 다른 겁니다. 성전도 지으려다 중단되니 침체에 빠진 겁니다. 한때는 은혜 가운데 살았고 한때는 뜨거운 열정과 부흥의 순간을 맛보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게 된 겁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이전에 뭔가 은혜를 체험했고 뜨거운 열정과 부흥도 경험했습니다. 특히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은 1970년대와 80년대의 부흥을 경험하셨을 겁니다.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난 1990년대까지도 군대에서 군목들이 군인들에게 전부 세례를 주어 그들이 사회로 나갈 때 가족들에게 전도해서 기독교 인구가 90%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습니까? 요즘은 실제로 15%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교회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를 갑니다. 참 안타까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부흥도 있고 열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상황에서 해도 소용이 없구나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안타깝고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요즘 유행어가 라떼는 말이야...’인데 옛날 나 때는 말이야...’와 발음이 비슷해서 그렇게 씁니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 라떼는...’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왕년에 그랬다는 옛날 이야기만 있다면 슬픈 일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어야 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졌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신앙의 모습은 있지만 능력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학개서의 표현대로 하면, 성전 건축이 중단된 것과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싫고 마음도 안 생기는 상태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더 이상은 방치하지 않겠다.”

 

학개서를 잘못 해석하는 또 다른 경우가 있는데, 유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비난과 책망의 말씀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4, 새번역)

 

마치 하나님이 야단치시는 것처럼 해석하게 되면 굉장히 불편해집니다.

 

작년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후에 Home DepotLowe’s 같은 데가 굉장히 장사가 잘됐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회사를 안 가고 집에서 일하며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그런 데가 비즈니스가 잘됐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이 집에서 리모델링을 하시고 집을 예쁘게 꾸미시고 돈 들여 하신 분들은 성전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지금이 너희만 잘 꾸민 집에 살고 있을 때란 말이냐?” 하는 말씀을 읽을 때 마음이 찔릴 수 있습니다. 죄책감을 주면서 비난하는 말씀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앞 절보다도 더 심한 저주의 말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5-6)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죄책감이나 저주나 협박으로 헌신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너 헌신 안 하면 다 망하게 해버려.’라고 하는 하나님이 절대 아니십니다. 만약 누가 예언기도를 하면서 제대로 헌신하지 않으면 망할 겁니다.’라고 하면 가짜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영적 침체에 빠져 있는데 그나마 간신히 살아 있는 자들을 죽이셔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영혼을 살리는 것이지 결코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영적 침체에 빠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지, 짓밟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적용은 무엇이겠습니까? 놀랍게도 학개가 선포한 이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야단치고 무너뜨리는 말씀이 아니고 오히려 살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 앞에 절망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만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공사를 하였으니” (14)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감동입니다. 학개를 통해 주신 말씀은 그들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감동시켰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을 때, 그래서 그 말씀과 역사하심에 의해 우리가 반응하게 될 때, 우리가 보여야 할 중요한 반응은 바로 감동입니다. 그렇게 해야 바른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감동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거나 읽을 때도, 말씀을 들을 때도, 예배를 드릴 때도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기도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진짜 기도 응답은 감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더라도 우리 안에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그것은 진짜 기도 응답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의 거룩한 도전

 

그렇다면 학개가 언급하고 있는 감동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학개서의 감동을 다른 단어로 바꾸면 거룩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감동이라고 하면 초자연적인 것과 관련지어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동이라 하면 입신하고 쓰러지고 환상을 보는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은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도전을 받는 것을 감동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 도전을 받고 믿음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감동입니다.

 

학개가 선포한 메시지를 통하여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감동, 즉 거룩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은 거룩한 도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을 가지는 것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2-4)

 

판벽한 집이라는 말이 이해가 안 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 새번역으로 본 것입니다. ‘잘 꾸민 집이라는 뜻입니다. 성전을 짓는 것은 중단한 채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 자기 집만 돌보는 것을 보면서,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코로나 사태로 모이지도 않으니까 우리 집이나 잘 꾸미자고 하면 학개서에서 말씀하는 잘못된 일입니까?

 

물론 그것도 포함될 수 있지만, 성전은 우리 자신입니다. 건물을 돌보는 차원이 아니고, 나 자신이 영적으로 바로 서는 데 아무 관심이 없다면, 실제로 집을 꾸미는 것이나 외모를 꾸미는 것이나 다른 일만 한다면 그것이 여기 해당됩니다. 교회를 내팽개치고 자기 집만 돌보는 차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로 묶어주신 것이고, 교회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아닙니까? 이 공동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자기 일만 챙긴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너희는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했으며,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품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돈을 넣음이 되었다... 너희가 많이 거두기를 바랐으나 얼마 거두지 못했고, 너희가 집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내가 그것을 흩어 버렸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나의 집은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하늘은 이슬을 그치고, 땅은 소출을 그쳤다. 내가 땅 위에 가뭄을 들게 하였다. 산 위에도,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 위에도, 밭에서 나는 모든 것 위에도, 사람과 짐승 위에도, 너희가 애써서 기르는 온갖 것 위에도 가뭄이 들게 하였다.” (6, 9-11, )

 

유명한 말라기 말씀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아느냐? 내 것을 도둑질했기 때문이다. 십일조와 헌물을 말한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보라. 내가 복을 주는지 안 주는지 시험해보아라.”라고까지 하십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십일조에 포커스가 있는 게 아니라 자기 것만 돌보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학개서도 핵심이 무엇입니까? 자기 집을 돌보는 게 잘못입니까? 자기 집을 가꾸는 것이 잘못입니까? 그게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이기심, 자기밖에 모르는 마음을 말합니다. 지금 남들은 아프고 죽어 가는데 전혀 관심 없고, 내 집만 아름답게 꾸미고, 내 외모만 꾸미고, 내 가정만 꾸미고, 내 아이만 돌보는 등, 이기심으로 가득한 삶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말라기에서 말하는 십일조도 바로 이기심의 문제입니다. 십일조를 왜 하라고 했습니까? 레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기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주신 겁니다. 이런 시대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평하고 원망한 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방해에 부딪쳐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고 유다 백성은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자기 집을 잘 꾸미는 것에만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 학개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때때로 죄송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도전입니다. ‘내가 조금 더 잘해야 했는데 못했구나.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회개하며 돌이키는 마음이 있을 때 제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대로 살았던 시간들이 죄송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라 내 마음대로만 했던 것에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겁니다. 이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정말로 죄송함입니다. 이것은 파괴된 관계가 아니라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2)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

 

두 번째 거룩한 도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학개의 말씀을 듣고 백성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12)

 

이 두려움은 관계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의로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과 같은 그분의 성품을 생각할 때 느끼는 두려움이 바로 거룩한 도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서워서 벌벌 떠는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심, respect를 말합니다. 존중하는 경외심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살 수 없다고 결단하며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버릴 건 버리고 끊을 건 끊고 나아가는 모습이 바로 거룩한 도전입니다.

 

 

3)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

 

세 번째 거룩한 도전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도전의 가장 중요한 모습입니다.

 

그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하노라 하니라” (13)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이 한마디에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모든 백성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16년 동안 주저앉아 있다가 이 한마디에 그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 속에 힘을 불어넣은 말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이 말씀을 듣는 것이 거룩한 도전, 곧 감동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은 어떤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영적으로 체험해본 사람은 잘 압니다. 그래서 이것이 감동이 되고 도전이 되는 겁니다. 힘들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던 삶, 별다른 의욕 없이 살아가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 담대함을 얻어 일어설 수 있는 것이 바로 진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이런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능력을 못 받으면 자꾸 눈이 자기에게로만 향하여 자기밖에 모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감동이고 거룩한 도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 앞에서 거룩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도했다면 감동으로 응답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새로운 능력이 솟아올라,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인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교회를 안 돌보고 내팽개쳤다는 차원이 아니라, 나는 정말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여 어떻게 살아왔는가?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 주저앉아 있는 상태는 아닌가? 성전, 즉 나 자신이 주님 안에서 자라나고 세워지는 것을 중단하고 다른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을 돌아보면서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새로 일어나기 원합니다. 우리 삶이 날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드리며 쓰임 받는 우리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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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 증거궤: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생각 (출 25:10-22)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2 (6/23/21) admin_p 2021.06.24 871
303 성막: 삶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 (출 25:1-9)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1 (6/16/21) admin_p 2021.06.17 1144
302 말라기(언약의 기도):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라" (말 2:1-9)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5 (6/9/21) admin_p 2021.06.10 807
301 스가랴(은사의 기도):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슥 3:1-10)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4 (5/19/21) admin_p 2021.05.20 501
» 학개(도전의 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학 1:1-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3 (5/12/21) admin_p 2021.05.13 872
299 스바냐(공의의 기도):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간구하자" (습 1:7-1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2 (5/5/21) admin_p 2021.05.06 665
298 나훔(위로의 기도): "우리의 멍에를 깨뜨리고 결박을 끊으소서" (나 1:9-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1 (4/28/21) admin_p 2021.04.29 1079
297 미가(예언의 기도): "내가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리이까?" (미 6:6-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0 (4/21/21) admin_p 2021.04.22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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