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HOME > 설교와칼럼 > 수요예배/특별예배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0xhu5fG9uTs?t=2065

 

 

2021421일 수요예배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0

미가(예언의 기도): “내가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리이까

(미가 66~8)

 

[들어가는 말 예언서에 대하여]

 

예언서에 대해 우리가 기억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언이라고 할 때 이 예언’(預言, 맡길 예/말씀 언)이란 예언(豫言, 미리 예/말씀 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이란 앞날을 말하는 것’(豫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섭리와 계획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預言)입니다. 예언은 미래에 대한 것도 물론 있지만,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또는 선견자라는 단어는 앞날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보통은 예언자라는 말과 함께 선지자라는 단어도 사용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분명한 의미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지금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심심풀이로라도 점이나 사주나 궁합이나 타로점 같은 것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점을 본다는 것은 미래가 궁금하다는 것이고, 그 말은 곧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알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은 점이 아니라 별자리를 보기도 하는데, 그런 것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우리의 미래에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와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계획과 예비해놓으신 복이 우리 것이 되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면, 그 모든 것이 오히려 고통과 저주로 바뀌어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들어가는 안타까운 삶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미 다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동양철학에서는 미래를 바꾸는 길이 있다고 하면서 부적을 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허황된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그런 종이조각을 믿으려고 합니까?

 

예언서에 대해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예언서란 어떤 새로운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 즉 모세오경의 율법을 상황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언자들은 그야말로 종교개혁자들과 통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외침도 결국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의 이런 외침이 성경에 열일곱 번이나 나옵니다(예언서 17). 그런데 누군가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언서 전체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대다수의 학자들이 동의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인 미가 66-8절 말씀입니다.

 

사실 미가는 그렇게까지 유명한 선지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미가서 자체도 그렇게까지 엄청나게 비중 있는 책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가서의 말씀이 예언서를 대표하는 핵심 말씀으로 뽑힐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아주 분명하고도 강력합니다. 미가서의 말씀이 예언자들의 모든 외침을 핵심적으로 말해주는,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그리고 모세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1.   기도의 수준을 높이는 예언자적 기도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6-8)

 

이 말씀은 수사적 질문 기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 이것은 대답을 얻으려고 하는 질문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수사적 질문은 대개 질문으로 끝나는데, 이 말씀에는 대답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은 누가 하는 겁니까?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누가 정말로 있어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한 사람이 혼자서 역할극을 하듯이 자기 속에 있는 영적 깨달음의 측면에서 대답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둘째, 말 그대로 천사가 대답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이 견해는 가브리엘 같은 메신저 천사가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주었다고 봅니다. 셋째,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셨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맞는가 하며 따지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대답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속에 있는 영적 깨달음에서 왔든, 아니면 정말 천사가 대답을 전해준 것이든, 아니면 하나님이 직접 대답해주신 것이든, 결론적으로는 세 경우 모두 하나님이 대답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답을 주셨다는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로 인하여 미가 66-8절은 다른 형태로 볼 때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예언자적 기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목회자들의 설교는 정말 예언자적인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저도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려드리고자 노력하며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하게 들리더라도, 성경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논리와 세상의 이론이나 철학을 전하는 것들은 설교가 아닙니다. 성경 본문을 한 번도 안 살펴보면서도 사람들이 웃게 하고 또 울게 하는 설교가 가능한 것을 이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섭리와 계획을 드러내면서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 가운데서 나오는 설교,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설교가 진짜 예언자적 설교입니다. 그러니 성경에 근거한 모든 설교는 예언자적 설교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적이라는 말은 설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도 적용됩니다. 예언자적 설교가 있다면 예언자적 기도도 있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인데, 찬양, 회개, 감사, 간구, 중보 등의 요소가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간구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는 결국 간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간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그 기도가 참된 기도인지 아닌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기도 자체가 잘못될 수는 없지만, 간구하는 내용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기도가 되고 맙니다. 또한 간구하는 내용이 전부 다 이 땅에 관한 것이라면 그 기도의 수준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현실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건강, 진로, 직장, 사업, 자녀의 앞길 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거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문제입니다. 그것은 땅에 속한 수준 낮은 기도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참된 기도가 되려면, 이 땅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것을 뛰어넘어 저 위까지, 무한대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주님의 사랑이 무한대라는 것을 정말로 깨달으면 기도도 무한대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4:18-19, )

 

주님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고 무한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기도 역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무한대라는 것을 께닫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영적 축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납니다. 바로 그런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들어가서 하는 기도가 바로 예언자적 기도입니다.

 

 

2.   예언자적 기도를 위한 세 가지 질문

 

기도의 큰 부분은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이나 성공이나 건강만 구한다면 낮은 기도, 곧 땅의 기도입니다. 나쁜 기도는 아니지만 수준이 낮은 기도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답을 구하는 기도는 수준이 높은 기도이고 예언자적 기도입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한 영적 비밀, 곧 대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미가 선지자도 그렇게 하는 가운데, 특별히 세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질문이 우리가 예언자적 기도를 하기 위해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1)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6-7, 새번역)

 

이 말씀에 가득히 담긴 정서가 무엇입니까? 어떤 정서가 느껴지십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것은 날마다 고민해야 하는, 날마다 물어야 하는, 날마다 몸부림쳐야 하는 질문입니다.

 

흑인영가 중에 <나는 비록 약하나>라는 찬양곡이 있습니다. 이 곡의 후렴을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나를 허락하시어 주 가까이하도록 날마다 더 가까이 나를 이끌어 주소서.” 이들은 노예시절 정말 힘든 상황 속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 그들은 자유나 해방이나 투쟁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지를 노래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하며 드리는 기도가 예언자적 기도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응답받는 것이 진짜 기도의 응답입니다.

 

온전한 기도에는 반드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계획을 펼쳐 놓고 하나님의 결재만을 구하는 것은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기도 가운데 가장 많은 회개가 일어날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자신 안에서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부분을 발견할 때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는 장해물을 발견할 때 진정한 회개가 나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예언자적 기도를 위해서 너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질문하면서 해보십시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까?’ 그것이 진짜 영성이고 진짜 믿음입니다. 비록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면, 그로 인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축복과 비밀은 바로 거기서 나옵니다.

 

 

2)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미 자기가 다 결정해놓고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아버지, 이걸 주세요.’라고 말하기 전에 반드시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내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이 당연한 일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는 기도가 참된 기도이고 예언자적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내 뜻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미가를 보십시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8a, )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를 예언자적 기도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여쭤보십시오. 뻔히 아는 것이라고 생각되더라도 먼저 물으십시오. 이미 응답받았어도 또 물으십시오. 영적인 세계는 너무나 민감하고 오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고 해도 바로 그 다음 순간 우리는 그 뜻에서 빗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번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붙들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멘하며 붙들겠다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번에는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왜 붙들라고 하셨다가 금방 놓으라고 하시는가? 붙들라는 건가, 놓으라는 건가?’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그렇게 상반되는 두 가지 응답을 묵상하다가 곧 깨달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신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자기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붙들다 보니 자신이 갑자기 독해지기 시작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놓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덕스러우셔서 끊임없이 바뀌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연약해서 수시로 마음이 바뀌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도 수시로 바뀐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3)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두 번째 질문과 많은 부분 일맥상통합니다. 그런데 그것과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은 개인적이고 상황적일 수 있지만, 옳은 것은 객관적인 진리와 통한다는 면에서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끝없이 물어야 할 또 하나의 질문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냐는 것입니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8b, )

 

우리는 기도하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을 받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언자적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것을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답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바르지 못할 때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예언자적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것들이 많습니다. 악한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잘되는 것 같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안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또 두려워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힘든 상황도 있고, 앞날에 소망이 보이지 않아서 답답해할 때도 있고, 마치 캄캄한 곳을 걸어가는 것처럼 더듬으며 천천히 갈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 가지 지침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질문하며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안 되는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가? 악인이 잘되니까 나도 저 사람이 쓰는 방법 좀 살살 써서 성공해야겠다고 하는 게 옳은가?’ 이 질문을 안 하면 우리도 그런 유혹에 휩쓸려 가게 됩니다.

 

 

[나가는 말]

 

우리는 기도뿐 아니라 말씀, 예배,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업 생활 등 삶의 모든 면에서 예언자적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모든 면에서 이 세 가지 질문을 하면서 나아시기 바랍니다. , 혼자 있든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든지, 집에 있든지 일터에 있든지, 기도를 하거나 말씀을 묵상하거나 또 예배를 드리거나 이 세 가지 질문을 해보십시오.

 

먼저,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직접 여쭈어보십시오. ‘하나님, 내일도 아니고 모레도 아니고 1년 후도 아니고, 지금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까?’

 

둘째,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셋째,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이 질문들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예언자적 말씀을 가지고 예언자적 예배를 드리면서 예언자적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예언자적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아름다운 삶입니다. 바로 그렇게 아름답고 풍성한 예언자적 삶을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15 모세의 분노: 하나님을 사랑하면 죄에 분노한다 (민 20:6-13)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4 (9/8/21) admin_p 2021.09.09 524
314 요셉의 분노: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분노를 용서로 바꾼다 (창 45:1-8)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3 (9/2/21) admin_p 2021.09.02 614
313 사라의 분노: 사랑이 없으면 가족도 원수가 된다 (창 16:1-6)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2 (8/25/21) admin_p 2021.08.26 396
312 가인의 분노: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면 분노한다 (창 4:1-7) -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 (8/18/21) admin_p 2021.08.19 829
311 번제단과 물두멍: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의 회복 (출 38:1-8) admin_p 2021.08.12 730
310 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의 자리 (출 38:9-20)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8 (8/4/21) admin_p 2021.08.05 369
309 널판: 거룩함과 성결함으로 세우는 예배자의 삶 (출 26:15-30)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7 (7/28/21) admin_p 2021.07.29 330
308 휘장: 삶을 뒤덮는 영광의 자락 (출 26:1-14)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6 admin_p 2021.07.22 304
307 분향단: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기도 (출 30:1-10)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5 (7/14/21) admin_p 2021.07.15 733
306 등잔대: 영혼을 밝히는 은혜의 빛 (출 37:17-24)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4 (07/07/2021) file admin_p 2021.07.08 884
305 상: 하나님이 차려주신 영혼의 식탁 (출 37:10-16)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3 (6/30/21) admin_p 2021.07.01 337
304 증거궤: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생각 (출 25:10-22)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2 (6/23/21) admin_p 2021.06.24 869
303 성막: 삶으로 드리는 거룩한 예배 (출 25:1-9) - 성막에서 배우는 예배 1 (6/16/21) admin_p 2021.06.17 1143
302 말라기(언약의 기도):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라" (말 2:1-9)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5 (6/9/21) admin_p 2021.06.10 806
301 스가랴(은사의 기도):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슥 3:1-10)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4 (5/19/21) admin_p 2021.05.20 501
300 학개(도전의 기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학 1:1-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3 (5/12/21) admin_p 2021.05.13 871
299 스바냐(공의의 기도): "우리가 여호와의 날을 간구하자" (습 1:7-1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2 (5/5/21) admin_p 2021.05.06 665
298 나훔(위로의 기도): "우리의 멍에를 깨뜨리고 결박을 끊으소서" (나 1:9-15)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1 (4/28/21) admin_p 2021.04.29 1078
» 미가(예언의 기도): "내가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리이까?" (미 6:6-8)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20 (4/21/21) admin_p 2021.04.22 914
296 요나(의탁의 기도):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욘 2:1-10) - 삶의 문제를 기도로 헤쳐나간 사람들 19 (4/7/21) admin_p 2021.04.08 1611


9480 S. Old State Rd, Lewis Center, OH 43035 / Tel: (614) 433-7155 / E-mail: kpccoh@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