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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4PXmmbwnLb8?t=2210

 

 

202181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24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요한복음 131~11)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로맨스? 희생? 헌신? 따뜻함? 부드러움? 눈물?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도 많고 노래도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아마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랑이 좋기는 좋은데 눈물을 흘리게도 합니다.

 

사랑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성경을 봐도 그렇고 우리 삶을 봐도 그렇습니다. 친구의 사랑이 있고 남녀의 사랑도 있고 부모님의 사랑도 있고 하나님의 사랑도 있습니다. 헬라어로 필레오’, ‘에로스’, ‘아가페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믿음사랑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사랑도 자랍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비워지고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이 커집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데 믿지는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또 저 사람을 믿는데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닙니다. 정말 누군가를 믿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또 사랑하면 믿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도 그렇지만 특히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그렇습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그분의 사랑을 더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은 누군가를 향한 믿음이 자랄수록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커지지만,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도 더 믿으면 믿을수록 내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도 있지만,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가 21장인데, 신약학자들은 요한복음 1~12장을 소위 표적의 책’(Book of signs)이라고 부르고, 13~21장은 영광의 책’(Book of glory)이라고 부릅니다. 앞부분은 주로 표적을 통해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고, 뒷부분은 주로 제자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2장까지가 누구나 향한 공적인 가르침이었다면, 이제 13장부터는 제자들을 향한 사적인 가르침이며 제자훈련입니다. 장차 제자들에게 맡길 세상 선교를 위해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3~17장에는 세상’(cosmos)이라는 말이 40번 이상 나옵니다.

 

그런데 선교는 곧 예수님이 보여 주실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해외 선교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형편이 어떻든 상관없이 나는 예수님의 복음만 외치면 된다는 식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람을 향해 사랑의 섬김을 하고 가장 귀한 복음을 나눠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1.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과 배신하는 유다

 

1절은 영광의 책13~21장 전체의 도입이자 서론이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고, 또 자신도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라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

 

이 말씀이 읽을 때마다 참 은혜가 됩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단락 즉 영광의 책이 시작된다는 점을 세 가지 방식으로 보여 줍니다.

 

첫째로, 시간적 배경으로 유월절이 언급되었습니다. 점점 예수님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른 때 보면 예수님이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하시며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지 않으셨는데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둘째로,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라고 나옵니다. ‘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제는 결정적인 시기가 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셋째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기서부터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집중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떠나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만히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패배가 아니라 예수님이 모든 사명을 다 마치시고 마치 장군이 개선 행진을 하는 것처럼 승리와 영광의 길을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자신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사셨습니다. 이제는 그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때를 사시는 예수님의 걸음을 한마디로 사랑의 걸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은 직역하면 세상에 있는 자기 것들인데, 이미 111절에 나온 표현입니다(“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택해 자기에게 맡기신 자들’(6:37)이고, 자기 양들’(10:27)로 표현한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한 사람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책임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들즉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져주십니다. 그것을 끝까지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류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만 사랑하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고,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나의 소중한 것을 내어주기까지, 즉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자라는 것은 사실 사랑이 자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도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가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범위가 굉장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 자기 것, 특히 자기 가족 정도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바로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배우며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기는 하는데 하다가 그만둡니다. 조금 하다가 중단합니다. 끝까지 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하기 싫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까지도, 또 별로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실 때 그들이 예뻐서 끝까지 사랑하셨겠습니까? 그들은 예뻐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자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이며, 그들을 끝까지 책임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족식은 단지 주인이 종의 발을 씻어주는 것과 같이 겸손한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인데, 그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2절이 잘 보여줍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2)

 

이 시점은 유월절 전날 저녁입니다. 유월절은 가장 큰 절기이고 유대인의 달력으로는 115일입니다. 금요일 해질 때 유월절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이날은 목요일 저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밤입니다. 이때는 이미 가룟 유다가 예수는 자기가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니고 더 이상 그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서 돈을 받고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주기로 약속한 시점입니다.

 

분명히 유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유다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거기까지였습니다. 수많은 경우에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긴 하는데 끝까지 하지 못하고 거기까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을 죽여서 남을 살리는 사랑이었던 반면에, 가룟 유다의 사랑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가 먼저 받기 전에는 주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만 아는 사랑이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은 가룟 유다 본인이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마귀가 그런 유다의 마음에 배반의 생각을 넣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에 대한 실망과 그를 따른 3년 반 동안의 삶에 대한 후회, 내일에 대한 염려, 또 예수에 대한 불신이 자라고 있었고, 마귀가 바로 그것을 보고서 배반의 생각을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은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는 것을 보시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죄가 네 문 앞에 와 있는데 잘 다스려라.’ 그 말은 자기가 거기에 넘어갈 수도 있고 안 넘어갈 수도 있고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굳게 하고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넘어갔습니다.

 

가룟 유다도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마귀가 와서 강제적으로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은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마귀가 옆에서 부추겼고 그 유혹에 자기가 스스로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로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절할지는 그의 몫이었는데 그는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수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오늘 이렇게 교회에 예배하러 오셨지만, 예배하러 오기 전에도 마귀가 속삭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예배를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냥 온라인으로 할까? 불편하게 뭘 가? 그냥 인터넷으로 하지.’라는 생각도 있고 아니야, 그래도 이왕이면 가야지. 지금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가야지.’라는 마음도 있어 서로 싸웁니다.

 

그때 마귀가 부추깁니다. ‘가기는 뭘 가? 그냥 하던 대로 해. 아직도 위험해. 델타 변이까지 돌고 있는데 가기는 어딜 가?’ 사실 다른 데는 다 가는데 교회는 가지 말라고 부추깁니다. 그때 그것을 받아들일까 거절할까가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믿음의 선택을 해야겠습니다.

 

물론 무조건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선택할 때 옳은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한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마귀는 분명히 우리를 유혹하지만 결국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해놓고는 마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마귀 탓을 합니다. 마귀는 유혹을 하지만, 그것을 받느냐 안 받느냐는 내 책임입니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굳이 여기서 마귀를 언급하는 것은, 이 싸움이 영적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저 인간적인 일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세족식은 앞으로 있을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알려줍니다. 세족식은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심어준 생각과 정반대의 생각을 품을 때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그렇게 섬김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처음에 유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땠겠습니까? 굉장히 좋았습니다.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로마에 빌붙거나 힘 있는 자들 편에 서서 자기 이익만을 챙깁니다. 특히 제사장들을 보니까 성전세를 비롯해서 그 외의 많은 것으로 장사를 해가면서 돈을 긁어모읍니다. 이게 종교지도자인지 사업가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는 백성들 곁에서 함께 하시면서 같이 울어주시고, 약한 자들을 돌봐주시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병을 낫게 해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 살리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엄청난 인기를 끄셨음에도 좀처럼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사람들이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해산시키신 후 혼자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도망치신 겁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형님, 좀 유명해지려면 예루살렘에 가서 기적을 일으키세요.’라고 조언을 하는데도 때가 되지 않았다.’라며 거절하시고 나중에 조용히 혼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또 사람들이 조금 모인다 싶으면 엉뚱한 요구를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아니, 부자들이 와야 하는데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니 말이 됩니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해야 하는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라고 엉뚱한 말을 하시니까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유다가 계속 실망하게 된 겁니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니까 가룟 유다는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왕국)’와 자신이 꿈꾸는 왕국이 다르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세 번이나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까 결정적으로 마음을 접게 된 겁니다. 예수님에게서 혁명가의 모습이 전혀 안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하시는 동안,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스스로 죽음에 넘겨주었다는 단어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다는 단어가 같습니다. 요한이 그렇게 일부러 대조하며 쓴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분명히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꿈꾸며 원하는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 사랑하긴 사랑했는데,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다가 결국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과 기대에 맞을 때에만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자기 기대에 맞지 않으니까 버렸습니다. 자기가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보장이 있을 때에만 사랑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안 될 것 같으니까 예수님을 포기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가 사실상 자기 욕망을 이루어줄 우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끝까지 사랑하지는 않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똑같을 수 있습니다. 내가 꿈꾸는 인생, 내가 꿈꾸는 가정, 내가 꿈꾸는 사회를 위해서 예수님을 내 방식대로, 내 입맛대로 사랑한다면 바로 가룟 유다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가룟 유다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2.   섬김 이상의 의미

 

사실 세족식이 있었던 최후의 만찬의 날까지도 가룟 유다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 서로 누가 더 높은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눈치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최후의 만찬을 하는 목요일 저녁, 세숫대야도 있고 물도 있었지만 제자들이 서로 발을 닦아주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낮아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하고 불편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손수 그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써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 세족식이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는 것만이 목적이겠습니까? 다시 말해,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높아질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섬기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라는 의미로 발을 닦아주셨느냐는 겁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 중 우리가 거의 유일하게 예수님을 그대로 따라서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걷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는 것 등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족식은 우리가 따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마다 세족식을 합니다. 우리도 <경건의 삶> 공부에서 섬김의 훈련을 할 때 세족식을 실습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교회들이 임직자의 훈련 프로그램에서, 목자 임명식에서, 또는 학생부나 청년부 수련회 마지막 밤 같은 때 세족식을 합니다. 가장 많이 하는 때는 부부 세미나인데, 부부끼리 서로의 발을 씻겨주게 합니다. 세족식을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섬김의 삶을 살리라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맞습니다. 세족식의 핵심은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기셨듯이, 우리도 섬김을 배우기 위해서 세족식을 행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서로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섬김은 정말 중요한 일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섬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

 

세족식은 우리가 생생하게 바로 이 섬김을 배울 수 있는 기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세족식이 거행된 때는 최후의 만찬 시간이었는데, 그때 식사 중에 갑자기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3-5)

 

최후의 만찬을 하시며 세족식을 하신 이때는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불과 몇 시간 전입니다. 그 밤을 지나고 캄캄한 새벽에 체포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 날인 목요일 저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을 영어로 Good Friday라고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을 드신 목요일은 Maundy Thursday라고 부릅니다. “Maundy”란 말은 라틴어 ‘mandatum’에서 온 단어인데, ‘계명(commandment)’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새 계명을 주신 것에서 나온 이름입니다(34).

 

이때 예수님의 마음은 몇 시간 후에 달리실 십자가로 가득하지 않았겠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의 사명을 다 이루어서 하나님이 주신 계획을 온전히 완성하는 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고 계시는 예수님과 달리 제자들은 완전히 엉뚱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이 내일 왕이 되셔서 권력을 잡으시면 누가 가장 그 밑의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누가 그분의 오른팔(2인자)이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평소에 누가 크냐?’ 하고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식사 자리에서는 대체로 발을 씻기는 의식이 행해집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대도시 밀라노에 가면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습니다. 너무 유명해서 들어갈 때 먼지를 제거하고 들어가 잠시 보고 나오게 될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인류의 보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때문에 우리가 최후의 만찬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긴 테이블이 있고 모두가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예수님이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신발을 벗고 왼팔로 기대어 비스듬히 누운 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그림은 다르게 그린 겁니다.

 

그때 예수님은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다음, 대야에 물을 담아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상태였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발을 씻어야 한다면 누가 누구를 씻어야 마땅합니까? 그 집의 종들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닦아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신분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낮거나 가장 어린 사람이 예수님과 다른 선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때 모두 발을 씻는 일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이가 가장 많은 편이었던 베드로 같은 사람은 내가 그래도 제일 촉망 받는 수제자인데 이것들이 내 발을 안 씻겨주네.’ 하고 있었을 것이고, 요한을 쳐다보며 저 어린 녀석이 발을 안 씻어주네.’라고 했을 것입니다. 요한 입장에서는 베드로를 보면서 아니, 내가 가장 나이가 어리다고 나를 저렇게 쳐다보나? 우리 집에서 배를 빌려서 어부를 하는 주제에 감히 주인집 도련님의 발을 안 씻어?’라고 했을 겁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자기가 나서서 발을 닦게 되면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낮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왕이 되신 다음에도 가장 낮아지니까 나설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십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며 발을 씻는 데 나서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발을 예수님이 손수 씻어주십니다. 제자들은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을 것이고 깜짝 놀랐을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놀라면서 거절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6)

 

그런데 베드로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굉장히 이상합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7)

 

이 일의 뜻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무엇을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베드로가 아무리 정식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어부 출신이라고 해도, 발을 씻어주는 것이 섬김의 본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고, 사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세족식을 보면서 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섬김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것을 따라하면서 우리도 남들을 섬기는 삶을 살자고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당연히 그것은 틀린 게 아니며,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거기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세족식에 어떤 숨겨진 의도가 들어 있는 것입니까?

 

나라마다 풍습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전에 신발걸이 나무가 있는 지역들이 있었습니다. 마을과 마을의 경계에 있었던 나무인데, 나그네들이 길을 가다가 경계를 넘어갈 때 자기가 신고 있던 신을 벗어서 그 나무에 걸고, 거기에 있는 새 신을 신고 새로운 마을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지금도 티베트에는 그런 풍습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신발을 나무에 걸어 놓은 이유는 각 마을을 지키는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이전 마을의 신이 관할하는 곳에서 신었던 신발을 벗어버린 다음에 새 신발을 신고 새로운 마을로 들어가는 겁니다. 옛 신발을 신고 들어가면 새로운 마을을 지배하는 신이 자기를 괴롭힌다고 옛날 사람들이 믿었던 겁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같은 이유로 새로운 마을에 들어설 때 이전에 신었던 짚신을 버리고 새 짚신을 신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신발하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200812월에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네 번째로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방문했습니다. 그때부시 대통령이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와 회담을 한 다음 기자회견에서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보호와 이라크의 안정과 세계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하면서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기자석에 있던 한 남자가 이 전쟁은 끝났다!” 하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면서 갑자기 신발을 벗어서 신발 두 짝을 부시 대통령을 향해 던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재빨리 피해서 맞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던진 그 기자는 경호요원들에 의해 기자회견장 밖으로 끌려 나갔고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는 이집트 카이로에 소재한 이라크인 소유 -바그다디야라는 텔레비전 방송국의 기자인 알-자이디로 확인됐습니다. 그는 끌려 나가면서도 아랍어로 부시 대통령을 향해 라고 욕하며 외치기도 했습니다. -자이디가 끌려 나간 후 부시 대통령은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신발 사이즈가 10이라는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수습하며 곧바로 기자회견을 계속했습니다.

 

그때 그 이라크 기자가 왜 신발을 벗어 던진 겁니까? 그것 밖에 던질 게 없어서였습니까? 그 당시 기술 수준에 맞게 무거운 금속 케이스의 노트북 컴퓨터도 있었고, 카메라도 있었고, 날카로운 펜도 손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는 이것저것 마구 집어 던지며 부시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신발을 벗어 던졌습니다. 구두이니까 맞으면 아팠을 것이지만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습니다.

 

저도 그때 TV 뉴스로 그 장면을 봤는데, 그것만 보면 마치 아이들 장난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신발로는 큰 타격을 입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랍 문화권에서 신발을 사람에게 던진다는 것은 아주 큰 모욕 행위를 뜻합니다. 2003년 미군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 동상을 쓰러뜨렸을 때 이라크 사람들이 와서 그 동상을 신발로 마구 때렸던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게 중동 지역에서는 신발에 특별한 의미가 있고, 주종 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대할 때, 종이 주인을 대할 때, 신하가 왕을 대할 때 신발을 벗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복종을 뜻하며, 높은 상대방 앞에서 나를 감추고 죽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따르겠다.’라고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하셨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인도를 받겠다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그 후에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만 평생 믿으며 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은 모세는 어떤 하나님을 믿은 겁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40년 걸려서 가야 하는 길을 2주 만에 갈 수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삶 속에 임하기를 기대합니다. 남들은 다 안 되어도 나는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무한한 능력으로 자신의 삶에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능력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 남들은 오래 걸리지만 나는 짧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모세가 믿은 하나님은 그와 정반대이셨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그런 하나님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2주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를 40년이나 걸려서 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것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전혀 없는 삭막한 광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런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신뢰하며 따랐습니다.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끝까지 순종하며 따르겠다는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순종하며 따르겠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아니, 믿고 싶어 합니까? 당신의 뜻대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런 분이면 안 믿겠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에 못 믿겠다고 합니다.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신을 벗으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2주면 갈 수 있는 너의 인생길을 내가 40년 동안 광야의 길로 인도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너는 나를 신뢰하며 따라오겠느냐?’ 이것을 물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서 , 하나님,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래도 따르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쉬운데 실제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실 2주면 갈 수 있는 길을 40년 걸려서 가게 하신 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2주 밖에 걸리지 않고 이집트에서 모세가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그대로 들어갔으면 금방 망했을 것입니다. 아무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전투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40년 동안 엄청난 훈련을 시키시고 준비를 시켜주신 것입니다. 40년이 꼭 필요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40년이 걸려서 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2주 만에 가고 싶어 합니다. 40년 걸려서 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요즘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계획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따랐습니다. 순종했습니다. 뭐라고 하시든지 따라갔습니다. 심지어 너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여기서 죽어야 한다.”라고 하셨을 때도 순종했습니다.

 

아니, 그런 삶을 살면 그게 바보가 아닙니까? ,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바보처럼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신을 벗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 앞에서 신을 벗었는가?

 

 

3.   예수님과의 관계를 세우는 데 집중하라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신 의미가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베드로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8)

 

절대로 못 씻기십니다.”라고 합니다. 당연히 어떻게 제자가 감히 발 씻김을 받겠습니까? 그런데 씻겨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니까 깜짝 놀라 다시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9-10)

 

베드로는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다 씻어달라고 호들갑을 떠는 베드로에게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가 갑자기 안 됩니다.’라고 하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니까 다 씻겨주십시오.’라고 합니까? 왜냐하면 2인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안 된다고 한 것이 자기 나름대로는 예수님을 향해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니까 큰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2인자가 되는 계획이 물거품이 됩니다. 그러니까 호들갑을 떨면서 다 씻겨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 이 말은 정말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자기 발을 씻기시도록 내어드릴 때 그것이 정말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것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순종의 표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내 발을 내어드릴 때 주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든지 그 길을 가겠습니다.’라는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네가 내게 발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 즉 계속 네 뜻대로 살겠다고 주장한다면 나의 뜻이 너의 삶 가운데 이루어질 수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 21장에 가면 네가 젊을 때는 스스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릴 것이다. 남들이 띠를 띠울 것이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라고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을 미리 이야기해주셨습니다(2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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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사랑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신 끝까지의 사랑’,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다가 사랑하기를 포기한 가룟 유다의 사랑,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인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때에만 주님을 따를 것인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다가 주님이 내 말을 잘 안 들어주시면 그냥 관둘 것인가?

 

아니면 상관없이 어떠한 길로 인도하시든 분명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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