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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OBdOFi8bv3w?t=1537

 

 

2021627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19

주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의 죽음

(요한복음 111~16)

 

[들어가는 말]

 

성경을 죽 읽어보면 성경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계속 강조하는 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외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데도 삶에 어려움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현실의 고통 사이의 간격 때문에 갈등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해서 언제나 평안하게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안 믿는 분들이 볼 때 믿는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사고가 나거나, 불치병에 걸리면 믿어도 소용이 없네. 믿는다고 하는데 왜 이러냐?’라고 합니다. 예수 믿으면 좋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는데 어려움이 계속 생기면 속았다. 뭔가 이상하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 둘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현실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현실의 고통 사이의 갈등과 긴장 관계를 아주 잘 보여주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 사건입니다. 슬픔과 고통이라는 현실 속에서 우리를 붙들어주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거기서 나오는 생명의 소망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이 분명히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11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입니다일곱이라는 것이 성경적으로 완전수인데, 그것이 암시해주듯이 이것은 이전에 일어난 모든 표적의 절정이라는 것입니다.

 

여섯 개의 표적을 지금까지 죽 살펴보았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2:1-11)

2)  가버나움 왕의 신하의 아들을 멀리서 말씀으로 고쳐주신 사건(4:46-54)

3)  예루살렘 베데스다 못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5:1-9)

4)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6:1-15)

5)  배를 타고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물 위를 걸어서 오신 사건(6:16-21)

6)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사건(9)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가장 발전된 모습과 절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마지막 일곱 번째인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1.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1~6)

 

1)  나의 방식인지 예수님의 방식인지 점검하라

 

요한복음은 11장에서는 마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장소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새롭게 나옵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1-2)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 인터뷰를 하러 왔습니다. 2004년 가을이었는데 이 앞을 지나다 보니 교회 근처에 큰 쇼핑몰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보니까 거기에 나사로(Lazarus) 백화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부임하고 같은 곳을 지나면서 보니까 Macy’s로 바뀌어 있는 겁니다. 그 나사로(Lazarus) 이름이 바로 여기서 나온 이름입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세 남매가 베다니라는 곳에 사는데, 그 중 2절에서는 마리아를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느라 바쁘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 보면 마르다가 마리아보다 언니인 것으로 보입니다(10:38-39). 그런데도 여기서 마리아를 강조하는 것은, 그녀가 나중에 12장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아 드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11장과 12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12장에서 마리아가 한 일이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한 것이라는 칭찬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리아를 중심으로 그 가족이 소개되는 것은, 11장의 나사로 사건이 마리아가 12장에서 보여줄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거기서 예루살렘까지는 천천히 하룻길이고 사실 하루도 안 걸렸습니다. 베다니는 문자적으로 하면 가난한(고통당하는) 자들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 도시 주변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의료 보호소가 있었다는 역사적인 증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베다니라는 동네가 한 군데 더 나옵니다. 실제로는 베다니라는 동네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다니는 도시 이름이라기보다는, 각 도시에서 우리 식으로 달동네 같이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고 보입니다. 어쨌든 요한복음에서는 한 군데 더 베다니가 나옵니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1:28)

 

1장의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는 분명히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11장의 베다니와는 다른 곳입니다. 1040절을 보면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인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나사로 사건이 일어나 베다니에서 나사로가 병들었고 결국 죽었을 때, 거기서 조금 떨어진 요단강 동쪽의 다른 베다니에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베다니에 계실 때 또 다른 베다니에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3)

 

나사로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얼마나 오래 아팠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누이들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람을 통해 전한 말에는 직접적으로 낫게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것과, 둘째로 그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4장에 나온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처럼 자기 집에 와 달라고 직접 부탁하지 않았겠습니까? 유대 지역의 베다니에 살던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는 예수님이 바로 이 사건 직전에 유대에서 유대인들의 위협을 받고 돌에 맞을 뻔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자매들은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신 것처럼, 나사로를 위해서도 오시지 않고 그냥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시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보십시오.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사랑하시는이라는 말이 현재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를 지금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너무나 사랑하시니까 큰 능력으로 와서 고쳐주시든지 말씀으로 고쳐주시든지, 하여간에 낫게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왜 이것이 열쇠입니까? 우리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기대한 것과 비슷한 기대를 많이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내어주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성령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에 있어,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병을 낫게 해주실 것이라고 충분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생긴 문제, 이런 병과 같은 문제에서 병을 낫게 해주시는 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나사로를 사랑하십니까? 또 사랑하시니까 그를 당장 살려내십니까? 이때 예수님은 아주 애매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4)

 

이 말만 놓고 볼 때 가겠다고 하신 것인지, 안 가겠다고 하신 것인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에게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하고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맹인을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나사로를 늦지 않게 살리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게 되는 겁니까?

 

9장의 맹인 치유 사건에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단지 실력 있는 안과 의사와 같이 눈을 고쳐주시는 능력이 아니라, 영적인 어둠 가운데 있었던 그 사람에게 참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날 수 있도록, 예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도록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믿음의 자리로 초대해주신 바로 그 능력을 통해 영광이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눈이 고침 받은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단순히 병을 고치는 능력 정도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보아 온 것처럼 아버지의 영광또는 아들의 영광은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영광은 결국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성취됩니다그렇다면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을 통해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 때문에 실제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유대 땅으로 요단강을 건너가시고, 결국 십자가 죽음의 길 곧 영광의 길에 이르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결정을 내리시는 두 가지 동기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다른 사역들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때 예수님의 사역이 10장으로 거의 다 끝났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바로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것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여기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필요 때문에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때와 시간을 결정하시는 동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5)

 

여기 보면 마르다와 그 동생이라고 하니까 마리아가 동생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원어의 어느 사본을 따라 번역한 것인데, 영어로는 그냥 sister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 순서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첫 번째 동기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실 때 보면 다 사랑으로 행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사람들이 불쌍해서, 굶어 죽을까 봐 행하신 것입니다. 무슨 폼을 잡으면서 내가 이 정도다.’라고 보여주시기 위해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랑에 대한 신뢰 때문에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것처럼, 예수님도 사랑의 기초 위에서 모든 것을 진행하십니다. 특히 사랑하시더니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에 미완료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미완료라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들을 사랑하시는 것이 옛날에 한 번 사랑하셨다는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사랑하고 계신다는 지속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병든 나사로뿐만 아니라 두 자매도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이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늘 해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예수님 자신이 순종하여 참여하는 것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것임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때도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뜻과 같을 때도 있지만 다를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방식을 따라서 사랑하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방식을 따라서 우리를 사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도제목이 많습니다. 중보기도실에 중보기도 카드를 많이 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제목 중에 누군가가 특히 가족이 병들었을 때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직장을 구하면서 좋은 직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자녀의 앞길이 잘 풀리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와 내 자녀의 성공만을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즉시 들어주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십니다. 예를 들어,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당장 이 병이 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그와 다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즉시 낫게 해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시간에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갈등이 해결됩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6)

 

원어에는 접속사 그러므로’(therefore)가 있는데, 개역개정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새번역 성경에는 그런데로 의역을 했습니다. NIV에는 ‘so’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라는 말이 되는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으니까 즉시 가서 고쳐주시든지, 아니면 말로 나사로야, 병에서 놓임을 받아라.’라고 해야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가지 않으신 게 아닙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그를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을 더 유하셨다.’가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지 않으셨다.’라고 되는 겁니다. 얼마나 이상합니까? 우리의 상식과 얼마나 다릅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사랑하는 자의 고통에 하나님이 무관심하신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으시고, 우리의 고통에 눈을 감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것만 찾으면서 봐라. 하나님은 무정한 신이다. 이런 신을 왜 믿느냐?’라고 하는데 완전히 오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고 여러 군데에서 말씀하며 그것이 성경의 핵심이지만, 현실을 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게 맞나?’ 하고 의심할 만한 상황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내 눈에 보이는 것뿐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아주 지극히 일부만 봅니다. 내 앞에 있는 것만 볼 수 있지,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내가 다 아는 것처럼 생각을 하니까 왜 이렇게 안 되나? 하나님이 이상하시네.’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건 다 오해가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아주 일부입니다. 100중에 10이나 알겠습니까? 사실 1을 알까 말까 하는 정도인데도 내가 다 아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렇게 안 해주시니까 하나님이 틀렸다. 나는 하나님을 안 믿겠다.’라고 하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태도입니까? 나머지 99가 있는데 그걸 못 보면서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그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베다니라는 지명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그 비밀을 설명해줍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때 예수님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다른 베다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동쪽에 있는 베다니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동쪽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로 가지 않으시고 요단강 동편 베다니에 그냥 계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부재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무관심하시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 그것도 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지식과 상식과 경험과 계획에 가둘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내 손 안에 있는 분처럼 생각하니까 자꾸 오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주님이 안 계신 것 같은데 사실은 거기 계신 것이고, 하나님이 무관심하신 것 같은데 사실은 다 아시면서 내 인생에 엄청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가지 않으셨지만 사실은 가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절하신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에는 더 놀라운 차원의 응답을 해주시게 됩니다. 고통을 외면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랑하고 계시고, 질병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셨지만 결국은 그런 고통의 순간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역설입니다. 이 긴장과 갈등을 포기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같아도 결국 삶 속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번번이 외면하시는 주님이시라고 오해하게 되면 어떻게 끝까지 따를 수 있게 되겠습니까? ‘믿어봐야 소용이 없다. 열심히 해봐야 소용이 없다.’라고 오해를 하는데 어떻게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습니까?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뜻대로 움직이신 게 아닙니다. 당연히 그들은 예수님이 당장 오셔서 나사로를 고쳐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그러셨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이야기하셨을 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결국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으면서도 처음에는 어머니의 요구를 거절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시지만, 정작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사람들이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니까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뜻대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에게는 자유가 생깁니다. 이것을 확실히 깨달을 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진짜 뭔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 예수님의 결정의 둘째 동기입니다. 첫 번째 동기는 사랑이고, 두 번째 동기는 순종입니다. 우리도 사랑과 순종으로 나아가면 이 비밀을 알게 되고, 그럴 때 내가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난 세계가 그 위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되지 않을 때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때문이라면, 주님의 침묵과 지체하시는 것마저도 주님의 사랑의 대답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며, 그럴 때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점점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자라가는 신앙생활의 비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유대로 다시 가자 (7~10)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7)

 

여기서 예수님 말씀이 조금 이상합니다. ‘베다니로 가자라든지 나사로에게 가자라고 하지 않으시고 유대로 가자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예수님이 단순히 나사로의 병을 고쳐주러, 아니면 죽었는데 살려주러 가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는 사해 서쪽에 있는 지역 이름입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베다니가 다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 거기 가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사로를 살려주러 가시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길로 예루살렘까지 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더욱 세심히 하나님의 때를 구하면서 따라가십니다. 그런데 유대로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8)

 

맞는 말입니다. 돌로 쳐서 죽이려는 자들을 가까스로 피해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도망쳐 왔는데 다시 유대로 돌아가자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아직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줍니다. 아직도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 이제 곧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되실 텐데, 그러면 자기가 그 밑에서 한 자리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주님이 아니라 랍비여”(선생님)라고 합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나 메시아가 아니라 리더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해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9-10)

 

열두 시간이라고 하셨는데, 하루 온 종일을 의미합니다. 낮은 대개 여섯 시간인데, 열두 시간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것이 비유라는 것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온종일 해가 있는 낮에 살고 있다고 설명하십니다. 자기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계시는 동안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낮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낮에는 주님이 계셔서 안전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동안은 결코 넘어지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죽음을 뜻하지만, 더 나아가서 영적인 죽음도 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둘째 사망을 말합니다. 몸이 죽는 첫째 사망과 영까지 죽는 둘째 사망인데, 예수님과 함께 하면 그런 죽음을 겪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할 때 혹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생명을 잃게 되더라도, 목숨은 빼앗길지 몰라도 영생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다른 복음서에서 몸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밤에 다니는 사람, 빛이 그 안에 없는 사람, 즉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그분과 동행하지도 않는 사람은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세상 어떤 권력자이든지 부자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고 성공했지만, 결국 예수님을 모름으로 영생을 얻지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 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은 사람은 죽는 순간에 오히려 완성되는 겁니다. 생명의 완성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은 육신의 목숨은 보전할지 몰라도 영생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위험한데 왜 올라가려고 하시냐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빛이신 자기와 함께하는 동안은 제자들이 안전할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혀 돌아가시기 전에는 자기 양들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아버지와 아들의 손에서 양들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그들에게 믿음이 있어야 안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심어주고 싶어 하시는 것, 부활 이후에 가르침을 통해서 심어주고 싶어 하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현실의 어려움 사이에서 그 사이를 이어주는 믿음이 있어야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순종의 길을 꾸준히 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와 동행하실 때 안전합니다. 지금만 안전한 게 아니라,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도 믿음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안전할 것이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고 계속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이 그런 겁니다. 지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믿어도 실패할 수도 있고,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는 한 우리를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16)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

 

주님께는 죽음도 잠든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이단들은 이런 것을 보면서 진짜 잔다고 믿는데, 사실은 죽은 겁니다. 하지만 자는 것으로 표현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서는 죽음도 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가장 큰 대적인 죽음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우리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친구라는 헬라어 단어가 필로스인데, 3절에서 보듯 사랑하다’(필레오)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친구라는 말은 우리가 사랑하는 나사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니까 오셔서 고쳐달라는 뜻이 담긴 자매들의 요구에 예수님은 자기 방식대로 나의 친구’, ‘나의 사랑하는 나사로를 살려줄 것이라고 암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무엇입니까? 그 방식은 이 자매들이 기대하고 있던 방식이 아닙니다. 결국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실 것이지만,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진짜로 나사로를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뒤에 보면 나사로가 살아나는데, 이것은 사실 엄밀히 말해서 부활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살다가 죽었겠습니까, 안 죽었겠습니까? 당연히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번 죽은 사람입니다. 죽음을 두 번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살아나는 것이 진짜 부활이 아닙니다. 진짜 부활은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런데 나사로를 살려주시는 것을 통해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은, 진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냥 몸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죄에서 해방되고 정말 부활하고 진짜 영생을 얻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하신 것이 예수님이 유대로 올라가시는 목적인데, 제자들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늘 그래 왔듯이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입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2)

 

자고 있다면 깨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일어날 텐데, 왜 굳이 목숨이 위태로운 유대로 가려고 하시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이 참 어리석게 들렸을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시 한 번 제자들의 말속에 아이러니를 담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도 모르게 이중적인 의미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이들이 낫겠나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직역하면 구원받을 것이다’(will be saved)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면 나사로는 죽음 가운데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순히 몸만 살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짜 영원히 살게 해주시는 영생을 주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3-14)

 

오해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바로잡아 주십니다. 아무도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나중에(17) 보면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고 나옵니다. 사람들이 마리아와 마르다 집에서 떠나 예수님께로 올 때 그것이 하룻길인데, 오는 동안에 나사로가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오는 동안에 죽었고, 이틀을 더 계셨고, 또 하루가 걸려서 가셨으니까, 나흘 동안 무덤에 있던 것이 맞습니다.

 

아무도 그 소식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베다니에 안 계셨지만, 동시에 이미 그곳에 계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가족의 슬픔에 이미 참여하고 계셨습니다.

 

나중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시는데, 나사로의 무덤에 가시기 훨씬 전에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요단강 동편 베다니에서 유대 베다니에 있는 이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끝까지 왜 그런지 알지 못할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안 풀리고 해결이 안 되는 것들은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시거나 무능하시거나 무관심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중심 동기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못 보는 것뿐이지, 분명히 언젠가는 우리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5)

 

죽음기쁨은 사실 같이 쓸 수 없는 단어들 아니겠습니까? ‘죽었는데 기쁘다.’라고 하면 뭔가 이상합니다. 죽음으로 끝났다면 기뻐해서는 안 되겠지만, 죽음이 전부가 아니며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누릴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의 장례식을 장례예배라고도 하지만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릅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도 부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슬프지만 기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까 슬프지만, 이 땅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으니까 슬프지만, 그러나 고통도 눈물도 슬픔도 없는 저 천국에 가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을 불행으로만 보면 절망인데, 사람들이 그러고 있을 때 예수님은 다른 식으로 불행을 보셨습니다. 심지어 미리 기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유익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6)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이고,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둘 다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쌍둥이 도마는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유대로 올라가려고 하시니까 비장한 각오로 다른 제자들을 격려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어찌 우리 주님만 위태로우시게 할 수 있는가? 우리도 따라가서 죽자!”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굉장히 정치적인 발언입니다. 믿음의 발언이 아닙니다. ‘이제 드디어 혁명의 때가 왔다. 예수님이 드디어 왕이 되실 때가 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서 로마를 물리치고 예수님이 왕이 되신 후 우리도 자리를 차지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기하여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는 전쟁을 주도하실 것이다.’라고 기대한 겁니다.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시던 모습을 기억하며 저렇게 하실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라고 느낀 겁니다.

 

물론 그 일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이 나를 따르면 안전하다.” 하셨기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시겠구나.’ 하고 힘을 얻으며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무력하게 체포되시는 것을 보고 다 도망갑니다. 그들은 심각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도마의 말에서 놀랍게도 요한복음은 진리를 나타내 보여줍니다. 도마는 자기도 모르게 누가 예수님의 참 제자인가?’라는 것을 우리에게 점검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을 정말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러한 이중적 의미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이 코로나 사태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여기에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까?

 

플로리다에서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서 많이 실종되고 죽는 상황인데, 하나님은 이런 것을 즐기는 분이시라는 말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남의 이야기만 아니라 내 삶 속에서도 나는 정말 이렇게 되고 싶은데 왜 이렇게 길이 안 풀리는지, 내 자녀도 왜 그렇게 안 되는지, 하나님이 도대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인지 의심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침묵이 결코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고, 지체되는 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따를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나와 함께 가자.’ 하고 주님이 이야기하십니다.

 

바로 이 믿음의 비밀을 우리가 깨닫고 나아갈 때 놀랍게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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