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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Az1CZIukyA4?t=2089

 

 

2021725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23

우리가 따르기를 원하시는 삶

(요한복음 1220~26)

 

[들어가는 말]

 

아마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만한 이야기인데, 오래 전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왕이 있었는데 신하들에게 각각 화분 한 개씩과 함께 꽃씨를 나누어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화분과 꽃씨를 집에 가져가서 잘 가꾸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운 사람에게는 심사하여 큰 상을 주겠다.” 그래서 신하들은 모두 왕이 나누어준 화분과 꽃씨를 자기 집으로 가져가 정성을 다해서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한 신하가 있었는데 왕에게서 받은 꽃씨를 화분에 심고 최선을 다해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꽃은커녕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식을 들어보니까 다른 신하들의 화분에는 아름다운 꽃이 하나둘씩 피어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어쩐 일인지 자기 화분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 너무나 당황스러웠습니다.

 

드디어 왕 앞에서 심사를 받는 날이 오고야 말았고, 다른 신하들은 모두 예쁜 꽃이 핀 화분을 가져와서 왕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신하만은 아무 꽃도 피지 않고 흙만 담겨 있는 화분을 가져와서 내려놓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한 마음으로 서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가져온 아름다운 꽃들을 돌아본 왕은 별 감동을 받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마침내 아무 꽃도 피우지 못한 화분을 가져온 신하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합니다. “상은 자네의 것이네.” 그러자 그 신하뿐 아니라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의외의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렇게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었는데, 아무 꽃이 나오지 않은 저 사람에게 상을 주는가?’

 

그때 의아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왕이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준 씨는 삶아서 준 씨다. 죽은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죽은 씨로 꽃을 피우는 기적을 모두 일으켰구나. 그러나 정말 그러냐? 꽃이 안 나오니까 다른 꽃씨를 심었겠지. 그러나 이 사람만이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가져왔으니 그가 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냐?”

 

이 이야기를 할 때 보통 정직에 대해서 말할 때 사용됩니다. 하지만 오늘은 정직이 아니라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예화를 말씀드렸습니다. 씨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살아 있는 씨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죽은 씨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는 것이 아예 불가능합니다.

 

 

1.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0-22)

 

지금 이 시기는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입니다.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이때 예루살렘에 유대인들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에 예배하러 온 사람들 중에서 헬라인 즉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신화를 보면 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헬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다신교, 즉 여러 신들을 믿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찾던 중 유대인들은 유일신을 믿는데 그분이 참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 로마사회에는 경건한 이방인들이 많이 있어서 유대인 회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예루살렘까지 와서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보니까 예수라는 사람이 활동하며 하는 말과 행동을 보니까 이분은 뭔가 특별했습니다. 자기들이 찾던 지혜와 진리가 느껴졌습니다. 유대교도 마음에 완전히 만족이 안 되고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분이 말씀하는 것을 들어보니 뭔가 달랐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보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 가운데 왜 빌립에게 와서 부탁했겠습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이 안드레와 함께 헬라식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자기들과 조금 더 가깝다고 느껴지는 빌립에게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은 무엇으로 유명합니까? 지혜를 숭상하는 사람들로 유명합니다.

 

제가 대학 때 철학을 전공했는데, 한국에서 처음 과목을 들을 때 전공과목 중 가장 첫 번째 과목이 고대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대철학은 전부 헬라 철학이었습니다. 고대철학의 시초가 탈레스인데 그가 모든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마지막 3차 전도여행을 끝내면서 들렀던 밀레도 출신입니다. 밀레도는 그 앞이 전부 바다입니다. 그렇게 물이 많은 곳에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모든 것의 근원이 물이라고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다 헬라 철학자들 아닙니까?

 

사도 바울도 이렇게 진리를 구하고 지혜를 탐구하는 헬라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2)

 

그렇게 지혜를 숭상하는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놀랍게도 유대인인 예수가 헬라인인 자기들보다 훨씬 더 지혜를 가진 분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지혜를 배우러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유대는 로마제국에서 볼 때는 변방인데, 이 변방에 문화 중심지인 헬라에서 온 사람들이 배우겠다고 온 것입니다. 그리스는 당시 세계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아테네는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세계 문화의 중심지에서 온 사람들이 배우겠다니, 그러면 예수님은 내가 변방인 유대에 있었는데 이제는 여기를 버리고 중앙에 진출해서 지혜의 스승이 되어 보자.’ 하는 기회를 잡으신 것입니다. 이런 절호의 기회가 눈앞에 왔는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3-24)

 

24절에서 한 알의 밀이라고 되어 있는데, ‘밀알선교회밀알교회가 바로 여기서 나온 이름입니다. 한 알의 밀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 자신입니다.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고, ‘죽는다는 것은 물론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23절을 잘 보시면 예수님이 헬라 사람들이 온 것을 보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셨을 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열두 제자는 믿음이 신실해서 예수님을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가 그 다음 2인자가 되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서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라고 하시니까 드디어 저 로마를 물리치고 왕이 되실 때가 되었나보다.’ 한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직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런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면 당연히 저 로마 군인들을 때려눕히고 왕이 되실 수 있다.’라고 믿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헬라 사람들까지 오니 국제적인 인물로 부각되시고 유대인들의 왕이 되어 유대인들을 세계의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회복하실 때가 왔구나 하고 느낀 겁니다. 완전히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니까 인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왕이 되는 영광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영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국제적으로 지혜를 가르치고 로마제국의 중심지로 진출하심으로써가 아니라, 로마제국에서 운영하고 있던 가장 최악의 사형 방법인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고 바로 그것이 역설적으로 인자가 받으실 영광이라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예외 없이 누구나 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새들백교회(Saddleback Church)에 갈 때마다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이 항상 이 농담을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설교에서도 자주 이 농담을 하십니다. 어느 통계회사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인간의 사망률이 몇 퍼센트인가? 100퍼센트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100%입니다.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죽습니다. 그런데 다 죽지만 그 죽는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을 살릴 수 없다는 겁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사람의 죽음도 세상에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제가 죽는다고 세상에 생명을 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떠나시면 생명을 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죽음만이 세상에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돌아가신 십자가를 많이 언급하지만, 또 교회들이 십자가를 걸어놓지만, 십자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거기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로마제국뿐 아니라 그 전의 알렉산더 대왕 때도 십자가에서 처형시킨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수만 명이 넘을 겁니다. 로마제국의 기록에 의하면 십자가 사형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살아날 수가 없는 게 십자가입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가장 오래 당하다가 죽는 형벌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로마 시민을 저렇게 끔찍한 방법으로 사형을 하면 안 된다고 하며 오히려 목을 잘라 죽이는 참수형을 했습니다. 로마 시민은 절대로 십자가에 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 십자가입니다. 오히려 목을 잘라 죽이는 게 자비를 베푸는 것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아무리 많이 죽었어도 그들 중에 누구도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이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죽은 씨와 같고,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을 가진 살아 있는 씨이시기 때문입니다.

 

아까 이야기에서 왕이 신하들에게 삶아서 죽은 씨를 주었을 때 실제로 그 어떤 신하도 그것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오직 살아 있는 씨만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는 씨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구원과 생명의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것입니다.

 

 

2.   생명을 얻는 길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성경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땅에 떨어져 썩는 밀알이 되라고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원래 죽은 씨였던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 있는 씨가 되는 것입니다. 죽은 씨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생명이 없으면 아무리 땅에 떨어져 썩어도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생명이 없으면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한 노력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살아 있는 씨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요한복음에서 계속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20장에서 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믿고 구원을 받아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어야 살아 있는 씨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때 생명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데도 이것저것 열심히 하면 오히려 굉장히 위험해집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보시면서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3:15)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열심과 헌신은 대단했습니다. 좋은 말도 많이 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말은 듣지만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교인 한 사람을 얻으려고 여기저기 굉장한 열심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그들의 열정과 헌신은 결국 지옥으로 갈 사람들을 만들 뿐이었다는 겁니다. 희생과 헌신은 무서운 힘이 있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헌신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20세기 후반, 그러니까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공산주의 국가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희생과 헌신으로 수많은 나라들과 그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원래는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것이 공산주의인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 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망가뜨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처럼 생명 없는 희생과 헌신은 해를 끼치게 되고, 더 나아가 생명을 죽이게까지 됩니다.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열심과 헌신이 대단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열심은 그들의 열심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요즘도 교회 이메일에 이상한 게 와서 보면 여호와의증인이나 신천지에서 보낸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에까지 옵니다. 이단들의 열심은 우리의 열심을 훨씬 넘어갑니다.

 

우리가 그들의 열심은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독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결국 생명의 열매가 아니라 멸망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열심은 좋은데 올바른 열심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은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때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내용이 그것을 요약해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고 참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을 때 참 생명을 얻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저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세상에 나아가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원래는 우리가 죽은 씨라 전혀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살아 있는 씨로 변화되어 우리 안에도 생명이 있게 되고 또 생명의 열매를 맺는 일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뭔가 열심히 하고 희생하고 헌신하기 전에 먼저 생명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생명을 가져야 하는 것은 세상에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사실은 생명을 먼저 갖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먼저 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기를 원하십니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생명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하게 살고 성공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가 없도 자기가 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으셨습니까? 그리고 얻었다면 그것이 내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꼭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3.   생명을 받은 사람의 삶

 

1)  땅에 떨어지는 삶

 

참된 믿음으로 생명을 얻고 살아 있는 씨가 되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그 씨가 땅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26)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은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게 되고, 또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다 보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먼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아들(성자 하나님)이신데 그 영광의 하늘 보좌, 영원한 곳을 버리고 이 낮은 땅에 오셔서 수치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부요한 자리에서 가장 가난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병든 자, 거지, 창기, 죄인과 같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같이 어울리기만 하신 게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면서 하나님의 말씀, 즉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라 땅에 떨어지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생명을 모르는 사람들, 특히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사회적으로 정말 가난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 갈 곳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 결코 나 중심이 아니고 내가 편한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내게 편한 사람, 내 취향에 맞는 사람에게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하는 것인데 그것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만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기 힘든 곳, 대하기 힘든 사람, 까칠한 사람, 불편한 사람, 톡톡 쏘는 사람, 멀리 하고 싶은 사람에게 그래도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는 안 들지만 주님이 원하시니까 가는 겁니다. 왜 그런 곳에, 또 그런 사람들에게 가야 합니까? 그들에게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을 주실 때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제자를 만들라하시면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제자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왜 가야 합니까? 그들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야 합니다. 가서 초청을 하는 겁니다.

 

왜 가야 합니까? 생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서 그들에게 주님의 생명을 알려주고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보면, 바로 거기에 주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사랑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고통당하는 사람, 멸망으로 가는 사람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타들어 가고 어떻게든 저분들에게도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겠다. 저분들도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들고 전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멸망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이라고 믿으면서도 별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너무 관심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너무 바쁜 게 문제이고 그래서 너무 관심이 없습니다.

 

이전에도 그랬도 요즘도 아이들의 지능지수(IQ)를 많이 따집니다. 그런데 21세기가 되면서 지능지수보다 감성지수(EQ)가 더 중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IQ도 아니고 EQ도 아니고 CQ(Compassion Quotient, 연민지수)입니다.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 하나님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민지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되겠습니까? 어릴 때 놀리는 말로 아이큐가 두 자리 수다.’라고 농담할 때가 있었는데, 우리의 연민지수는 두 자리도 아니고 한 자리 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너무 관심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정말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가끔 그로서리 스토어에 갔을 때 보면 팔에 문신을 엄청나게 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자기 몸에 멋있지도 않은데 자기는 멋있는 줄 생각하고 저렇게 했나 보다. 한심하다.’라는 마음이 들다가 갑자기 저 사람은 천국에 갈까, 지옥에 갈까? , 내가 너무 관심이 없구나.’ 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우리의 연민지수를 따져보면 굉장히 낮을 겁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 다니고 만나서 교제하는 것도 가만히 보면 나에게 유익이 되니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주거나 그들이 잘되게 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나의 유익을 위해서 삽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생명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마음에 품고 먼저 기도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사랑하며 섬길 때, 예수님을 따라서 이 땅에 떨어지는 한 알의 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죽는 삶

 

살아 있는 씨가 되어 땅에 떨어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썩어서 죽어야 합니다. 그 씨가 아무리 생명력이 있고 땅에 떨어졌더라도 썩어서 죽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꽃이 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대접만 받고 이제 헬라 사람들이 왔을 때 , 내가 이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때가 왔구나.’라고 하시면서 아테네에 가서 지혜의 선생이 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겠습니까? 예수님이 구주가 되셨던 것은 지혜를 가르치셨기 때문이 아니라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죽을 때 세상에 생명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믿으면 죽어야 한다는데, 더 이상 믿으면 안 되겠다.’ 하고 오해하실 수 있는데, 물론 진짜 죽는 것도 포함되겠지만 우리 삶 속에서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주며 희생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것일 수도 있지만,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생명을 정말로 받은 사람이라면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가족 밖에 모르고 자기 아이 밖에 모른다면, 정말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심각하게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해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찔러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할 게 없는지, 갈 데가 없는지 두리번두리번 찾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특히 주님을 모르고 생명이 없는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 애틋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섬기는 삶이 바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자기만을 위해 살고 있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여전히 주인으로 사는 것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자기 고집만 내세운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게 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자기의 가장 귀한 생명을 내놓는다는 것인데, 그래서 진정한 희생은 나의 가장 귀한 것까지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되겠습니까? 매일 꾸준히 조금씩 해나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예수님이 가신 길을 더 가깝게 따라가는 겁니다.

 

가끔 하는 말 중에 죽으면 죽었지 이것만은 못하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어도 이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그래도 해보고, 또 죽어도 내놓기 싫지만 내놓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내놓기 싫은 것의 대표적인 것이 시간과 재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주님의 생명을 나누어주며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과 재물의 희생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너무 사치스럽고 호화롭게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뷔페를 가거나 특별한 잔치나 행사로 배불리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이 과식일 수는 없다는 겁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내가 무심코 먹기 싫어서 버린 그것이 없어 굶어 죽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실 물이 없어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생명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 거나 휙휙 버리고 낭비하고 사치하며 살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은 좋은 것을 사면 안 되고 여행도 다니면 안 되고 검소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주님의 생명을 받아서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이 주신 것으로 얼마든지 누리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 주변을 돌아보면서 저 사람들도 이런 것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을 품고 행동으로 나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몇 대 안 만드는 엄청나게 최고급 자동차를 살 수 있는 여력이 되더라도 몇 급을 낮추어서 사고(그래도 굉장히 좋은 차들입니다), 그 남는 돈을 다른 사람들 특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베푸는 겁니다.

 

또 엄청난 명품 가방을 메고 다닐 수도 있지만, 그보다 한 급을 낮추어 사고 남는 돈으로 엑스트라 헌금을 해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사용되게 하는 겁니다. 자기가 직접 할 수도 있고, 잘 모르면 교회에 헌금을 해서 교회가 잘 사용하게 하면 됩니다.

 

매일 최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가장 비싼 스테이크를 썰 수 있는 위치이지만, 조금 더 저렴한 곳에서 식사하고 거기서 남긴 돈을 선교지로 보내는 겁니다. 우리가 남으면 하고 안 남으면 안 하는 게 아니라, 남길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엄청난 걸 하자는 게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작은 것으로 하자는 겁니다. 실제로 잘하고 계십니다. 지난번 이갈렙 선교사님의 순교 때라든지, 이전에 재난이 생겼을 때 마음을 모은 것도 그렇고, 코로나 지원금을 위해서도 그렇고, 성도님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껴서 내십니다. 정말 잘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이 생명을 나누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남은 것으로 하거나 아니면 원래 내는 건데 명목만 바꿔서 내는 게 아니라, 내가 할 것을 줄이고 아껴서 함께 하는 것이 생명을 나누는 일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 인생이 얼마가 남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젊다고 많이 남은 게 아닙니다. 나이가 많다고 더 적게 남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이 세상인데, 사치하고 호화로운 데 시간 쓰며 돌아다닐 여유가 없습니다. 생명을 나누어주며 살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제가 목회자로 오래 전부터 책을 많이 샀는데, 2-3년 전에 책을 사다가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가만있어, 내가 죽을 때까지 이 책들을 다 읽지 못할 것 같다.’ 생명을 나누어주는 것을 하는 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뭐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갑자기 세상을 떠나신 분들 중에 자기가 몇 월, 며칠, 몇 시에 죽는다고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에 해야지. 기회가 되면 해야지.’라고 할 것이 아니라, 평소에 생명을 나누는 일에 힘을 써야 할 이유가 그것입니다.

 

평소에 내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혹시 나 밖에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니면 그래도 주변을 좀 돌아보며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생명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넉넉하고 편안하게 그저 잘 먹고 잘 살다 천국에 오기를 원하시는 게 아닌 것을 압니다. 주님의 생명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이 내 이웃을 사랑하셔서 나를 그 사람 옆에 붙여주셨고, 또 그에게 사랑을 베풀며 희생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또 고난과 죽임을 당하게 하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동시에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보내셔서 그들을 위해 희생하며 그들을 살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가진 물질과 편안과 안락을 희생하고 헌신할 때 놀라운 생명의 열매가 맺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그렇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5)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미워하는 것으로 표현하셨지만, 반드시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사실은 죽어야 산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 밖에 모르는 삶이고, ‘생명을 미워하는 것은 정말 미워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희생해가며 남을 살리는 데 힘쓰는 삶입니다.

 

자기만을 위한 삶이 좋은 것 같지만 결국 자기 생명을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것은 어렵지만, 결국은 자기가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베풀고 힘쓰다가 이러다 내가 병이 나면 어떡하지? 이러다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게 된다면, 오히려 그때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죽고 희생하고 헌신할 때, 먼저는 내가 삽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이웃이 살아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만 재미있고 즐거운 모임이 되면 교회는 죽고 맙니다. 아름답게 꾸미고 장식하는 것은 최대한 줄여서 최소한의 유지만 하고 밖으로 세상을 위해 섬기고 희생할 때, 오히려 교회가 살아납니다. 교회들이 자꾸 안으로만, 안으로만 들어가고 교회당을 멋지게 꾸미고 대형 건물을 짓는 데 힘을 쓰다가 사회에서 어떤 말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분명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교회의 유지가 힘들 정도로 섬기고 도울 때 생명이 전파되고 존경을 얻게 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전도도 잘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통해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정말 예수님을 구주와 주인으로 영접하여 생명을 얻었다면 살아 있는 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생명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살 차례입니다. 그런데 그게 결코 쉽지 않고 불편하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의 길이며 그것이 자기가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삶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영광의 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끔찍한 죽임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주변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짐 싸서 아프리카로 가라는 게 아니니까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우리의 눈을 밖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편안하게 지낼 때 혹시 편안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가 끊임없이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며 우리가 따르기를 원하시는 삶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주님이 원하시는 각 개인과 가정과 목장과 또 온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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