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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lXQLlpR62CU?t=2328

 

 

202159일 주일예배

회복하시는 은혜 13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753~ 811)

 

[들어가는 말]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한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엄청난 비난을 받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요즘 인터넷 뉴스와 SNS가 발달하면서 더욱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잘못을 저질렀어도 스스로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억울하다.’ 하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너무 지나치게 비난과 공격을 퍼붓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또는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의도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몇 년 전 보수파에 속하는 정치인이 뭔가를 잘못해서 엄청난 공격을 받으니까 그쪽 편 사람들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진보적 인사가 잘못한 것이 드러나서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니까 또 그쪽 편 사람들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는 이 말씀을 인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보수이든 진보이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너무나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또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하는 말씀은 일종의 자기합리화를 위해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이 과연 자기를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데나 쓰이는 그런 뜻입니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오늘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다시 가르치시는 예수님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특히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과 만났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도 과거에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변화되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된 두 명의 여인이 있습니다. 한 명은 이전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사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었던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이고(4), 다른 한 명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입니다. 둘 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옴으로 엄청난 수치와 모멸을 겪었습니다. 한낮에 물을 길러 나왔던 사마리아 여인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엄청난 고통을 당했고, 심지어 죽음의 위기 앞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753절부터 811절을 보면 괄호가 쳐져 있는 것을 발견하실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주가 달려 있습니다. ‘가장 오래 된 사본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이 원래 요한복음에는 없었던 내용이라는 것이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 책들을 보면 이 부분을 아예 빼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대다수 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추가된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7장과 8장 사이에 끼어 있는데 그 배경은 여전히 유대인의 큰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입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성전에서 치러졌던 두 가지 중요한 의식, 즉 물을 길어 나르는 의식과 빛을 비추는 의식을 통해서 내가 생명의 물(성령)을 준다.’라고 하셨고, 8장 뒷부분에 보시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지난 유월절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표적을 보면서 이분은 정말 선지자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다.’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하는 것을 우리가 다 아는데 갈릴리 출신의 목수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갈릴리 출신은 메시야가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원래 대제사장들은 사두개파이고 바리새파와 앙숙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때 바리새파와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랫사람들에게 잡아오라고 시켰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감동되어 돌아오자 그들을 야단 쳤습니다. 그때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며 율법대로 하지 않으면서 정죄부터 하면 안 된다.’라고 하고 종교지도자들이 또 반박을 하는 등, 긴장감이 가득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이 본문 앞에 나오는 7장의 내용인데, 해가 저물자 사람들이 모두 다 숙소로 돌아가는데 예수님만은 숙소로 가지 않으시고 예루살렘 근처의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7:53-8:1)

 

감람산은 예루살렘과 붙어 있는 높은 언덕입니다. 이곳에 우리가 잘 아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마지막으로 성찬식과 세족식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그때만 기도하신 게 아니고, 평소에도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여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도 넓은데 소위 마가의 다락방’, 즉 예수님이 세족식도 하시고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던 바로 그 장소를 제공한 집안이 마가복음을 쓴 마가 요한 집안이었습니다. 그곳이 그 어머니 마리아의 소유였습니다. 그 마리아가 겟세마네 동산 내의 어떤 장소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교회 전승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감람산의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때마다 거기에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팽팽한 긴장이 이어지는 동안 예수님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확인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신 것입니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2)

 

그러니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를 하시고 아침이 되자 예수님은 또다시 죽음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는 성전으로 가십니다. 지금 상황이 급박하기 때문에 철야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을 믿으셨기 때문에 다시 성전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곳은 성전 중에서도 바깥뜰이었을 것이고, 서기관(율법학자)들도 종종 그곳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모세의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몰려든 사람들에게 또 무언가를 앉아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2.   종교지도자들의 교활한 음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예수님을 그냥 잡았다가는 백성들이 막 들고 일어나고 소요가 일어나고 잘못하면 로마 군인들이 와서 개입할 시 큰일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3)

 

이것을 보면 오래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있었던 끔찍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때 뉴스에 나왔는데, 큰 축구장 같은 데서 수많은 남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도르를 쓴 어떤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군인이 긴 총을 머리에 대고 있다가 그대로 쏘아서 여자가 넘어지는 처형 장면이었습니다. 정말 너무 끔찍했습니다.

 

그와 굉장히 비슷한 장면입니다. 본문의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잡혀서 변명의 여지도 없이 사람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이 여자는 지금 돌로 쳐 죽이려고 자기를 둘러싸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 순간 수치를 느꼈을 것이고, 그보다 훨씬 큰 엄청난 공포와 절망으로 벌벌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가만히 보면 분명히 교활한 음모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음행 중에 잡힌 여자라는 표현이 굉장히 이상합니다. 여자가 음행 현장에서 잡혔다는 것을 보면, 어떤 남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만한 장소에서 간음을 하겠습니까?

 

특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현장을 덮쳐서 이 여인을 잡아끌고 왔다는 것 자체가 벌써 계획적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간음하다 잡혔는데 남자는 없고 여자만 있다는 것도 정말 이상합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4-5)

 

여기서 말하는 모세의 율법은 레위기 20장과 신명기 22장을 말합니다. 신명기 22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22:22)

 

유부녀가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죽여서 악을 제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이라고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냥 사형시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도 보십시오.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22:23-24)

 

여기서 정혼이라는 것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은 것과 같습니다. 보통 남녀가 1년 동안 정혼을 하는데, 약혼을 훨씬 넘어서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상태입니다. 이미 부부가 된 겁니다. 그런데 아직 결혼식을 하고 같이 살지는 않는,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정혼입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간음을 저지르면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죽여서 악을 제하라고 합니다. 사형선고를 내리고 집행하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20:10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음행한 여자가 유부녀이면 돌로 쳐 죽이는 것 외에도 다른 사형 방법이 있다는 말이 되고, 처녀인데 어느 남자와 정혼한 여자이면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왔는데 모세의 율법에서는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여자는 유부녀보다는 정혼한 여자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혼하는 나이는 많이 봐줘야 14-15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린 소녀입니다.

 

어린 소녀가 음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성폭행을 당했다고 보는 쪽이 더 맞습니다. 그래놓고는 남자는 싹 도망가고 덫을 놓고 있다가 여자만 잡아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황상 정혼한 어린 소녀였다기보다는 유부녀였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남자는 잡지 않고 여자만 잡아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의도적으로 이 여자에게 한 남자가 접근하게 해서 그 현장을 덮치고 잡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고, 더더욱 가능성이 높은 것은 둘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강제로 성폭행을 하면서 남자만 싹 빠지고 여자만 잡아왔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도 이런 것이 많은데 옛날에는 어땠겠습니까? 남자 위주의 사회에서 이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완전히 올가미에 걸려든 겁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고 붙잡으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소녀(정혼한 처녀)였든지 누구의 아내였든지 상관없이, 이 여자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예수님을 고소할 거리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한 여인의 인생은 전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한 인생을 무참히 짓밟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 종류의 죄를 발견합니다.

 

첫째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저지른 죄입니다. 정말 둘이 좋아서 그랬는지 성폭행을 당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여자가 저지른 죄가 분명히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신 것을 보면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드러나 보이는 죄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죄까지 다 포함합니다. 이 여자가 왜 이런 죄를 지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여러 가능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생계를 위해 매춘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아주 가난했을 것이고, 가난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아무 힘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이 여인은 분명히 간음죄를 저질렀고, 사람들에게 들켰습니다.

 

이 여인만 죄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들키느냐 안 들키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우리도 남들 모르게 죄를 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들키지만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다 드러납니다.

 

만약 내가 뭔가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면, 그때 정말 자신 있을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요즘 몰카’(몰래 카메라)가 유행인데, 누군가가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내가 사는 곳을 몰래 촬영한다면 자신 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둘째로, 이 여인을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즉 종교지도자들의 죄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해서,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연약한 여인을 이용합니다. 그 여인의 인생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비참한지 어떤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다른 사람의 인격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들의 악한 목적을 이루려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법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도 종종 나타납니다. 정말 교활하고 악랄한 일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종교적으로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여인을 심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면서 스스로 죄를 지었습니다.

 

세 번째로, 간음한 여인에게 온갖 비난과 욕설을 퍼부으면서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의 죄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정의의 사도라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자기들은 심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간음하는 여자는 죽여서 없애 버려야 사회가 깨끗해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해보십시오. 이때 여인이 있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돌을 들고 서 있는데, 그들의 표정이 어땠겠습니까? 천사와 같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험악한 얼굴, 살기등등한 모습, 분노와 핏발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일 뿐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곧 보여주십니다.

 

 

3.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6)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지, 얼마나 떨고 있는지 다 아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교활한 마음도 아시고, 마치 자기들이 무슨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흥분하여 돌을 잡고 있는 군중들도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촉즉발의 이런 상황 속에서 아무 말씀도 없이 그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고 계십니다. 지금 아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머리를 숙여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고 계시니까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간음한 여인을 잡아 분노하는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고 못마땅하여 다그칩니다. 빨리 대답하라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제 예수가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여자를 놓아주라고 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라고 하고 율법모독죄로 정죄하면 됩니다. 반면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평소에 자기가 가르치던 사랑의 용서와는 전혀 다른 위선자라고 비난하며 예수님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걸렸다.’ 하고 생각할 만한 그 상황에 예수님이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8)

 

이때 예수님이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요?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굉장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실제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고 쓰셨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에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 모여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죄목을 죽 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뭘 쓰셨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결코 이 여인에게 죄가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분명히 용서해주는 분이시지만, 결코 죄를 가볍게 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과 죄를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또 예수님은 결코 모세의 율법이 틀렸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죄를 지은 것과 모세의 율법이 옳다는 것을 부정하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듯, 갑자기 조용해집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슬슬 피해 떠나게 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서 먼저가 중요한 말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돌로 쳐 죽이게 율법에 되어 있을 때 가장 먼저 돌을 던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증인입니다. 목격자입니다. 직접 본 사람이 먼저 돌로 치면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는 증인이 아니더라도 증인이 먼저 치니까 돌을 던져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율법에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을 때,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너희 중에 진짜 증인이 먼저 돌로 치라.’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에 증인이 없는 것을 아셨습니다. 증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꾸며서 온 겁니다. 마구 덮어 씌워서 온 겁니다. 그것을 아시니까 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잘못에 대해 공격할 때 자기를 합리화하고 변호하기 위해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는 차원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해하고 잘못 사용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9)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또 그들의 사주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흥분하고 분노하는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고 말씀하시니까 모두 양심에 걸려서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거기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쓰시고 그 옆에 그들의 죄목을 쭉 쓰셨을 수도 있지만,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들 중 증인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진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죽이겠다고 온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옭아매겠다고 온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증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꾸며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이 여인만 그 자리에 남게 됩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의 권위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그대로 물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순간, 자신을 위장하고 있던 교활한 종교지도자들과 군중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슬그머니 도망을 칩니다.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 하는 것만 부각시키면서 증인이 먼저 돌로 치는 것이다.’ 하는 말씀은 잊어버리고 있다가 자기들이 증인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권위에 자신들의 실체를 깨닫게 된 겁니다. ‘, 내가 증인이 아닌데. 돌로 칠 자격이 없는데.’ 그리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가는 자기 죄가 드러나게 생겼습니다.

 

우리가 자꾸 말씀을 피하게 되고 심각한 나눔을 못하게 되면, 자기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서 창피를 당할까봐 그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막 비판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기를 좋아할수록 그런 경향을 보이는데, 말씀 앞에 정말 서게 되면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을 자꾸 회피합니다. 자꾸 말을 돌립니다. 그러나 말씀에 직면해서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도록 할 때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를 통해서 엄청난 권위를 느꼈습니다. 영적 권위를 가진 사람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두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지닌 한마디 말씀에 여인의 위기가 벗어집니다. 분노와 고발과 정죄와 심판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뀝니다.

 

그래서 <경건의 삶> 훈련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중 고백의 훈련을 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내어놓을 사람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개인주의로 자라왔기 때문에 돈을 내고서라도 전문상담자 카운슬러를 찾아가서 자기 이야기를 하며 그것을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럽습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은 유교 문화 아래서 자랐기 때문에, 전문 상담가를 찾아가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런데 안 그런 척 또 안 그런데 그런 척을 많이 했기 때문에 속을 드러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아예 피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영적 자유함을 못 느낄수록 더 많이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장에서 솔직하게 나술수록 자기에게 치유가 일어납니다. 창피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치유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용서를 구하고 서로 세워주고 서로 기도해주며 회복시켜주고 서로에게 힘을 주도록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그런 것을 하지 않으면 교회의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그럴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고 되는 겁니다.

 

자신을 오픈할 수 있는 사람은 사나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오픈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해도 용서할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숨기고 꽉 닫고 사니까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 앞에서도 고백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서로 죄를 고백하라.’ 하고 야고보서에서도 권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듯 하라는 게 아니라, 솔직한 마음을 나눔으로써 치유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법을 배울 때 용서하는 법을 배웁니다.

 

천주교에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부님에게 가서 얼굴이 안 보이는 데에서 자기 잘못이나 죄를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에서는 고해성사 같은 것이 없고 고백이 점점 약해지다 보니까 무엇이 강해졌습니까? 고백이 약해지니까 고발이 강해졌습니다. 자꾸 남을 고발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자신의 고백을 해야 하는데 남을 자꾸 고발합니다.

 

간음한 여인을 잡아온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마음은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그런데 안 그런 척, 또 안 그런데 그런 척하며 이중적인 삶, 위선자의 삶을 살다 보니까 이 여인을 죽이겠다고 하고 예수님을 옭아매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도망을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거기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을 가는 겁니다.

 

 

4.   용서하시는 예수님

 

이제 살벌하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바뀌고 평정을 되찾습니다. 어둠과 저주와 죽음이 떠나고 안식과 평안의 빛이 임합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0)

 

여기에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 “너를 정죄한 자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원래 뜻이 고발하는 자, 정죄하는 자, 참소하는 자입니다. 마귀는 자꾸 우리를 고소하고 고발하고 정죄합니다.

 

네가 이렇게 살면서 무슨 하나님의 자녀냐? 죄를 짓고서도 어떻게 뻔뻔스럽게 살고 있느냐? 차라리 자살해 버려라. 너는 살 가치도 없다. 너는 무가치하다. 너는 이 땅에 필요도 없다.’ 이런 정죄 의식, 죄책감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고소하고 고발하고 정죄하는 것은 마귀의 특기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11)

 

이때 이 여자가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있었겠습니까?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엄청난 공포 속에 부들부들 떨면서 이젠 다 틀렸다.’ 하며 죽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땅에 엎드려 있던 이 여인이 예수님 말씀에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놀랍게도 거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고 말씀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정죄하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습니까? 죽음의 세력이 떠나가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던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내가 너를 용서하고 회복시킨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고 심판이 없다.’ 하고 선언해주셨습니다.

 

뒤 이어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십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혹 해서 여기에 걸려든 겁니다. 그래서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라.’라고 하십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은 이 잡혀온 여자가 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은 다음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는 이 말씀은, 비록 지금은 용서를 해주지만 다시 죄를 지으면 말짱 헛것이 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 용서의 선언은 이것과도 비슷합니다. 자녀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나 사랑해?”

그럼 엄마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럼, 당연히 사랑하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 다시 묻습니다. “왜 사랑하는데?” 그럼 뭐라고 대답합니까? ‘네가 예뻐서.’ ‘네가 공부를 잘해서.’ ‘네가 건강해서.’ ‘네가 말을 잘 들어서.’ 그럴 때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너니까 사랑하지. 너는 내 딸(아들)이니까 사랑하지.” 그 다음에는 이제 이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넌 내 아들()이야. 사랑해. 그러니까 공부 열심히 해.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열심히 살아. 알겠지?” 공부를 잘하니까, 착하니까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이 말씀은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고 사랑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준엄한 율법적 요구가 아니라 따뜻한 요청입니다. 정죄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율법을 잘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정죄함이 없는 은혜로의 초청입니다. 진정한 회복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또 지었더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며 다시 일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 회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주님의 선언입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삶을 우리가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죄를 지은 여인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품으셨습니다. 죄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죄는 미워하시지만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 여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정죄 받고 돌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셨습니다. 소망과 자유를 주시며 사랑과 은혜로 회복되어서 새로운 삶을 살라고 인도해주셨습니다.

 

이후에 이 여인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운이 좋다고 여기면서 또 남자들을 만나고 돌아다니며 계속 죄를 짓는 삶을 살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예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충격과 감동과 환희와 기쁨과 자유를 경험했을 것이고, 그 후 분명히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과 같이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까 부른 찬송의 가사와 같이 만일 나를 거부하셨다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나를 맞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계속해서 남들을 고발하고 정죄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은혜에 보답하고 사랑을 베푸는 그런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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