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특별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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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16일 수요예배

우리는 왜 일하는가 1

왜 이렇게 일이 많은가?

(창세기 126~28)

 

[들어가는 말]

 

<일터의 삶> 1기를 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그 후에는 신청하는 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따로 삶 공부를 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일과 영성에 관한 주제로 수요예배 때 함께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발견한 책이 한국 베이직교회 조정민 목사님의 <왜 일하는가?>입니다.

 

조정민 목사님은 원래 MBC 기자 출신에 사장까지 하셨던 분이고, 나중에 온누리교회 장로가 되셨으며, 기독교 방송인 CGN-TV 사장도 지내신 분입니다. 그러다 소명을 받으시고 목사가 되셨는데, 직장생활 경험을 많이 하고 목사가 되신 분이라 일과 영성에 있어 전문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분의 책 <왜 일하는가?>를 가지고 몇 주 동안 일과 영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수많은 사람의 얼굴에 피곤이 묻어납니다. 다들 지친 얼굴이고 기쁨이 사라진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가장 흔한 인사는 안녕하세요?’ 하고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바쁘시지요?” 이것이 요즘 우리의 인사입니다. 그러면 , 일이 끝도 없네요.”라고 대답합니다. 사실입니다. 정말 일이 끝도 없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한 가지 일을 마쳤나 싶으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립니다.

 

어느 때는 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일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일이 산더미 같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다 보면 일이 끝이 없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터마다 비명이 가득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 때문에 일하는지를 잊어버리거나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결단이 없으면 일에 끌려가게 됩니다. 거대한 조직사회에서 마치 노예처럼 살게 되고, 마침내 쏟아지는 일의 급류를 따라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일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입니까? 성경은 일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우리는 왜 일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는 여정을 통해 우리 모두 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목적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어쩌다 우리는 일벌레가 되었을까

 

“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26-28, 새번역)

 

성경은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직접 만드셨습니다. 그 일을 창조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에 관한 기록입니다.

 

세상은 진화론에 물들어서 창조 이야기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이 진화진화론을 혼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진화는 과학으로 검증된 현상으로서, 실제로 진화의 증거는 넘쳐납니다. 하지만 진화론무신론적 진화주의로서, 하나의 신념이나 철학내지 종교입니다. 이것은 과학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헷갈리지 말아야겠습니다.

 

성경은 무에서 유가 되는 상황을 조성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유에서 유로의 변화를 일으킬 뿐입니다. 무에서 유로 넘어가는 과정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무에서 유를 만드십니다. 그게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둠과 빛을 나누고, 밤과 낮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천지에 만물을 차례로 채우셨습니다.

 

천지창조의 클라이맥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당신의 모양대로 만드셨습니다. 또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왜 인간을 만드셨습니까? 이 땅에 존재하는 생물들을 다스리고 만물을 관리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일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피조 세계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이 사람의 사명입니다. 온 세상을 관리할 책임을 인간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관리자는 주인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 나라의 대사는 본국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파송된 사람이듯, 자기 뜻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 대통령과 정부의 뜻에 따라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지으시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니까 인생이 망가지고 주변도 망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땅과 하늘과 바다를 지키고 다스리는 것이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1차 임무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일이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26, 28). 이 다스림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이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이며, 이 다스림을 통해 하늘과 땅이 연결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자신을 피조물과 연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권을 위임하셨습니다. 관리와 위탁의 일을 주실 때 그 표시로 아담에게 모든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창조에 버금가는 중요한 일입니다. 존재는 이름과 함께 있으며, 이름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많은 이름을 제각각 특성에 맞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첫 주거지로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지만, 한 가지를 제한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게 아니라,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그 일을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속아 기어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선악을 알게 되자 경험한 첫 사건이 바로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인식하자마자 갖게 된 첫 판단은 자기 존재에 대한 열등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느낀 첫 감정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행동은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 만들었고, 하나님이 아담아, 어디 있느냐하고 부르실 때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시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배워서 아는 게 아닙니다.

 

이 사건은 인간에게 엄청난 비극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추방 명령을 내리시고 동산을 막으셨습니다. 그들은 동쪽으로 옮겨 가면서 점점 더 복잡한 일에 휘말립니다. 그 첫 번째가 두 아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벌어진 살인 사건입니다. 죄가 인간을 점령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살인자 가인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 성을 쌓고, 그 후손 라멕은 또 다른 살인을 저지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5)

 

인간은 정신없이 먹고 마시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데, 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이 악할 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만드셨는데 예배하기는커녕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않고 살기에 악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에덴을 떠나 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 외의 일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탄이 일의 원래 목적을 훼손하고 그 대상을 바꿔 놓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죄가 들어오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다스리고 착취하면서 일은 눈덩이처럼 불었습니다. 죄인들은 끝없이 일을 만들고,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깁니다.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을 착취하며 조종하여 자기를 위한 일을 시키려 합니다.

 

인간은 왜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까?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무언가 부족하면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났으니 엄청난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의 뿌리는 결핍, 즉 부족함에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결핍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나니까 불안을 느끼게 되었고,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 성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징표이자 죄인들이 살아가는 패턴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들 위에 군림하며 남들을 시켜서 자기 성을 쌓은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불안하면 스스로 안전을 확보하고자 몸부림칩니다. 평생 먹고 남을 만큼 많은 돈이 있는데도 왜 돈을 더 벌려고 애씁니까? 부족감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 자녀, 자녀의 자녀, 자녀의 자녀의 자녀 세대까지 먹고살기에는 부족하다.’

 

중남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사업가 대부분이 비슷한 고충을 털어놓는다고 합니다. 근로자들이 월급을 받고 나면 그다음 날부터 좀처럼 출근하지 않고, 그러다 한두 주 정도 지나서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하러 나온다는 겁니다. 돈이 생기면 놀고, 돈이 떨어지면 일하는데,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먹을 게 있는데 왜 일해야 하며, 돈이 있는데 왜 계속 벌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는 겁니다.

 

이탈리아의 작은 섬으로 휴가를 떠난 독일인 관광객이 어부에게 하루에 고기를 얼마나 잡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부가 대답했습니다. “먹고살 만큼 잡아요.” “왜 더 많이 잡지 않으세요?” “뭐 하러 많이 잡아요?” “그래야 돈을 모을 것이 아닙니까?” “돈을 왜 모아요?” “그래야 나처럼 일을 쉬고 휴가를 떠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이것 좀 보세요, 선생님. 내가 지금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게 안 보입니까? 당신이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 휴가를 온 이 섬에서 나는 쉬엄쉬엄 일하며 즐겁게 살고 있잖아요.”

 

 

2.   일중독자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

 

인간의 분주함은 노아의 홍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 하는 일이 모두 악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래서 홍수를 내리셨고, 홍수 이후 노아 가족 8명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아의 후손도 아담의 후손과 동일한 삶의 길을 걸었습니다.

 

홍수로 심판받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들을 끊임없이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에 닿기까지 탑을 쌓았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능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어를 흩으심으로 커뮤니케이션을 불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언어가 혼잡해졌고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되니까, 그 결과 온 땅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소통할 수 없으니 같이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소통이 안 되는 것이야말로 생각보다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의 일하는 습관을 새롭게 하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에 사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번성했던 도시로서, 지금의 뉴욕이나 서울이나 도쿄나 베이징 같은 대도시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바쁘게 살지만 기쁨을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일터에서 고민하던 한 사람, 바로 아브람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팔던 장사꾼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큰 아버지라는 뜻인데, 하나님은 나중에 그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 주십니다. 한 가문의 아버지에서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에 그 믿음의 보상으로 이름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무슨 일을 잘하거나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의 삶의 자리에 불쑥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12:1-3)

 

인생에 대해 철저히 고민하며 모든 일에서 돌아서고 싶다는 간절함을 가진 그의 중심을 하나님이 보시고 그를 찾아가시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아브람은 75년을 별 의미 없이 일하며 살아왔고, 왜 일해야 하는지 늘 고민해 왔습니다.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이 하나도 없기에 일하고 집에 돌아가도 아무 기쁨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머릿속에 늘 죽음을 떠올리고 죽음 이후를 생각하던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와 엄청난 제안을 하십니다. 서로 죽이고 빼앗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를 찾아오셔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는 자기 스스로 안전을 확보해야 했고, 자기 성을 쌓으며 열쇠를 겹겹이 채운 금고를 숨겨 두어야 하는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곳에 살던 아브람에게 오셔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죄인의 방식이 아닌 의인의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의심과 불신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일에 짓눌려 살아가면서 왜 그렇게 일을 많이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마음 한구석에 끊임없이 갈등하는 삶의 방식을 통째로 바꿔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쉴 새 없이 일하는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시다가 갑자기 물으십니다. ‘내가 오늘 밤 너를 데려가면, 네가 열심히 하는 모든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많은 돈을 쌓아놓기 위해 초강력 금고를 집에 들여놓는 부자에게도 물으십니다. ‘내가 오늘 밤 너를 불러 가면, 그 돈은 누가 다 가지게 되겠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늘 이 문제를 건드리십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는 지금 왜 그 일을 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일단 우리가 하는 일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셔서 그 일의 동기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게 하십니다. 지금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하는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일가친척들과 함께 살던 삶의 근거지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이 시대의 이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결단입니다. 중동에서는 지금도 가족을 떠난다는 것을 죽음과도 같이 여깁니다. 생활 근거가 되는 경계를 벗어나는 것은 목숨을 건 결정에 속합니다. 쌓아왔던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단 떠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자기의 많은 일을 두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떠난다고 해서 별일이 있었습니까?? 휴가차 일터를 비우고 집을 떠난다고 해서 대단한 일이 벌어집니까? 한국을 가느라 미국을 떠난다고 큰일이 생깁니까? 우리가 떠나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산더미 같은 일이라도 내가 없으면 누군가가 그 일을 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찾으십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숨자 아담을 찾으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이 아벨을 죽이자 아벨을 찾으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을 찾고 더 많은 일거리를 만들어 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되찾는 일에만 관심 있으십니다. 일에 빠져 하나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 문을 늘 두드리십니다.

 

 

3.   일하는 인간에게 구원이란

 

가끔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과로사로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은 얼마나 열심히 살았겠습니까? 일터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얼마나 염려와 초조함 속에 회사 일에 매달렸겠습니까? 숱한 일을 밤낮없이 처리하느라 얼마나 바쁘게 살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휴가를 마음 놓고 다녀왔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먼저 물으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느냐?’

 

아브람은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상 사업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갈 바를 모른 채 일단 떠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이 긴 이야기의 제목은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일하는 인간에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훗날 돌이켜보면 별로 쓸모없음을 알게 될 오늘의 바쁜 삶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왜 일합니까? 왜 죽도록 일합니까? 왜 이토록 일이 많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토록 바쁘고 피곤하게 살고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내게도 말씀하신다면 나는 어떤 결단을 하겠습니까?

 

자기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을 가지려 하고,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주 작은 권력만 주어져도 그걸 쥐고 흔들어서 누군가를 피곤하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얽히고설킨 관계 때문에 우리 삶이 너무 팍팍하고 힘듭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저버리고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리게 하셨고, 인간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권력을 추구하고, 탐욕스러운 인간들은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며 그들을 끊임없이 착취하고 조종하고 통제하며 자기 성을 쌓는 데 혈안이 되어 삽니다. 자기 성이 위험에 처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것을 지키려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일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낸 일들과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들 때문에 어렵고 힘든 시스템을 만들고 그것을 유지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런 시스템은 곧 피라미드 시스템이며, 자기가 꼭대기에 서서 남들을 지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지, 또한 어떤 일에서 진정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추구할 것인지 고민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일의 영성이란, 일의 우선순위를 정확히 판단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먼저 우리는 일에 관한 영성을 배워야 하는데, 성경에 그 답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바른 노동관, 바른 직업관,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이유와 부르신 목적과 보내시기를 원하시는 곳을 깨달아 간다면 바쁜 삶 속에서도 여유 있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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