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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ZlXgYX19GLQ?t=3375

 

 

2020517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0

나는 네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1~7)

 

[들어가는 말]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몇 가지 걱정거리를 다 갖고 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작은 걱정거리나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심각하게 근심하고 좌절하고 낙심한 적이 있으십니까? 대개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해도 뭔가 희망이 보이면 괜찮습니다. 캄캄한 터널 안에 갇혀 있어도 저 끝에 빛이 한 줄기 들어온다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앞날에 대한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절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한국이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30개국 중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입니다. 또 자살률이 1위입니다. OECD 평균이 인구 10만 명당 11.3명인데, 한국은 25.8(2015)이니까, 두 배가 넘습니다. 그나마 2009~2011년에는 33명이 넘는 수치였는데 지금은 낮아진 겁니다. 그런데 2000년까지에 비하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그때는 열 몇 명 수준이었는데, 21세기에 들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했다든지, 불치병에 걸렸다든지... 지난주에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주민으로부터 폭행당하고 괴로워하던 아파트 경비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하고, 특히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의 자살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십여 년 전부터 대학생 생명지킴이 봉사단이 조직되어서 자살 예방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캠페인도 펼쳤습니다. 그 단체의 캠페인의 문구가 이랬습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예요.”

 

그런 정도로 극단적 선택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문제 때문에 침체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나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계속 어려워지고,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하게 됩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데도 왜 여전히 상황이 답답하고 미래가 잘 보이지 않습니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주님을 의지하는데도 왜 길이 자꾸 막힙니까? 그렇게 되면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서 좌절감을 느끼고 두려움까지 생깁니다. ‘이러다 내 인생이 실패하는 게 아닌가? 내 인생은 꽃피우지도 못하고 지는 게 아닌가?’ 젊은이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계속 믿어야 하나?’ 회의도 듭니다.

 

 

1.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아브람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이 사람이 탄탄대로만 걸은 게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12장에서 아브람은 기근 때문에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에 내려갔다가 아내를 빼앗기는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무사히 애굽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많은 재산과 종들까지 얻어서 가나안에 돌아옵니다.

 

그 후 재산이 많아진 조카 롯과 헤어지게 되고, 롯은 점점 이동하다가 그 유명한 소돔 성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리고 지도자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14장에 보면, 당시 근동의 패권자였던 엘람 왕 그돌라오멜 왕이 자기를 배신한 소돔과 고모라를 응징하러 쳐들어와 노략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일이 발생하고, 이때 아브람의 조카인 롯도 잡혀갑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자기가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을 데리고 쫓아가 그돌라오멜과 연합군을 물리치고 조카 롯과 포로로 잡혀간 소돔 사람들을 다 찾아오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브람은 더 이상 가나안의 방랑자나 이방인이 아니라 영웅이 됩니다. 그리고 누구도 함부로 무시하거나 넘볼 수 없는 강력한 인물로 떠오르게 됩니다.

 

남들이 겉으로 보면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고 또 물질적으로 엄청난 부를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아브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정말 큰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후사(아들)가 없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렇게 부자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땅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부르셔서 이곳까지 왔고 주님이 주신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왔지만, 여전히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의 고민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살아가고,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상황은 나아진 게 없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1)

 

이 구절을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그러니까 이때 아브람이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후에라는 말은, 아브람이 자기 용사들을 데리고 가서 그돌라오멜과 그 연합군을 격파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를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 아브람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왜 갑자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왜냐하면 이것이 지금 아브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말씀이 있기 전에 아브람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없다.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엄청난 민족을 이룬다는 약속을 이미 받았지만 그것은 헛것이고 허상이다. 이미 몇 년이 흘렀어도 계속 자녀가 없는 것을 보면, 그 약속이 가짜였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아브람도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낙심하며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아브람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에는 밥 많이 먹어라.’돈 많이 벌어라.’가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가장 필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이토록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바로 그 뒤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는 너의 방패로서 어느 누구에게서든 너를 지켜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또 내가 너에게 줄 상이 아주 크다. 염려하지 말라. 불안해하지 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나의 상황을 결코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정확히 아십니다. 그런데도 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계속 막혀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간은 원하는 것을 다 가지게 되면 오히려 망하게 됩니다. 다 가지면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아름답고 귀한 그릇으로 정말 귀하게 사용하시기 위해서 그런 그릇이 되도록 훈련시키시고 빚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순간 가장 필요한 말씀을 가지고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답답할수록 우리가 더욱 힘써야 할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그 순간 가장 정확한 말씀을 주십니다.

 

저도 큐티(QT)를 한지가 오래 되었는데, 기록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의 삶> 큐티매거진을 사용해서 하다 보면 3-4년에 한 번씩 같은 본문이 돌아갑니다. 지금은 큐티가 신명기 본문인데, 이것도 벌써 몇 년 전에 몇 번씩 한 본문입니다. 옛날에 했던 것이 다시 돌아온 겁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궁금해서 옛날에 똑같은 신명기 본문으로 큐티했던 내용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묵상했던 내용이 지금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같은 말씀이라도 그때 내가 처했던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고 똑같지만, 그 말씀에 대해 내가 느끼는 것과 묵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정확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듣지 않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가만히 들어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인도하시는 손길이 보입니다.

 

 

2.   아브람의 항의와 하나님의 응답

 

이제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한 번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일종의 항의를 합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2-3)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출신의 종인 엘리에셀 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그가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아브람에게 가장 답답한 일은 자신의 후사가 없다는 겁니다. 전 재산을 상속할 아들이 없다는 것, 무엇보다 믿음을 이어갈 아들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고 엄청난 약속이 있고 주님이 자신의 방패와 큰 상급이 되어 주겠다고 하셨어도, 그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되는 아들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대로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아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통해 후손이 나오고 또 후손이 나오고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녀가 생길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육신적으로는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는 나이가 되고 있습니다. 부르실 때도 75세였지만, 지금보다는 젊은 나이였을 것이나 점점 가능성이 사라지는 나이입니다. 게다가 동서남북에 보이는 모든 땅을 다 주겠다고 하셨지만 아직 땅이 한 평도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말씀을 정말 믿지 못하면 불안을 느끼게 되고, 불안이 오면 곧 찾아오는 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믿음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아브람이 지난 12장에서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믿음이 아니라 불안함에 사로잡히니까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겁니다. 자꾸 인간적인 방법을 찾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게 아니라, 불안함에 사로잡히면 자꾸 머리를 굴리면서 누군가 나를 도와줄 데 없나?’ 하며 자기를 도와줄 것 같은 데를 찾아다니게 됩니다.

 

아브람도 우리와 똑같았습니다. 그는 이제 양자라도 데려와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해놓고는 아직도 지키지 않으시니까, 이제는 내 집에 있는 다메섹 출신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사실 이것은 결코 아브람이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 오래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도 들어 있고, 더 이상 주님의 약속을 기다릴 수 없고 이제는 포기하겠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믿음의 사람다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아브람의 처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참 안 됐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의 삶을 보면 참 안 됐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부르셔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십 년 정도 지났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제는 주님이 주신 약속을 포기하고 그냥 엘리에셀로 하겠다고 하겠습니까?

 

아브람이 처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다음 이때까지 10년 정도 흘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약속이 전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동안 아들을 낳는 문제로 인해 너무 오래 시달려왔고, 이제는 자존심도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그가 엄청난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는 아들이 몇 명이냐가 성공의 척도가 되는 상황에서 아무도 없으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더 이상 이 문제로 괴로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하나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도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아무리 성경에서 풍성한 삶을 약속해주어도 그것이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느껴질 때, 그냥 확 관두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사실 성경에 약속의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괴롭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예배도 드리며 기도도 합니다. 이전보다 더 열심히 교회 활동에 참여하고 봉사도 하며 교제도 합니다. 성경도 매일 열심히 읽고 꾸준히 말씀묵상도 합니다. 은혜도 받고 이렇게 살아야겠다.’라고 결단도 합니다. 그런데 삶을 돌아보면 내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있습니다. 바뀔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그렇고, 진로 문제, 자녀 문제, 건강 문제, 신분 문제, 결혼 문제, 관계의 문제, 또 요즘의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등, 아무리 기도하고 아무리 열심히 말씀을 붙들어도 바뀌는 건 없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주님, 이제는 됐습니다. 제가 오래 해봤는데 안 되겠네요. 믿음으로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겠습니다.’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러면서 슬슬 교회에서 멀어지고, 그 시간에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데를 찾아다닙니다. 물론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라는 마음이 조금 들기도 하지만, 점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해봤자 별 소용이 없다.’라고 하면서 기도에 소홀해지고 또 말씀도 별로 읽거나 묵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 약속을 안 지켜주시니까 저는 엘리에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엘리에셀로 약속의 후사를 대체해버리는 겁니다. 상속자를 엘리에셀로 바꾸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뭔가 다른 길로 가버린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길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한다는 겁니다.

 

이전에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이제는 전혀 응답을 안 해주는 하나님에게 신물이 났어. 이 기독교는 나와는 안 맞는 모양이야. 바이바이!”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상황에도 결코 포기하면 안 됩니다. 포기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사실 그럴수록 더 기도하고 더 말씀을 붙들고 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아브람이 여기서 나는 다 포기하겠습니다.’ 하며 자기 배를 째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 아브람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에게 한 번 찔러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개역성경에는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2)라고 되어 있는데, 새번역 성경에는 내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없다는 말은 앞으로는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브람이 사실은 포기한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러 숲에 가서 하루 종일 도끼로 나무를 찍었지만 나무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음 날 다시 가서 똑같이 나무를 내려쳤지만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또 가서 찍지만 전혀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아홉 번이나 해도 안 쓰러지니까, 너무 지치고 힘이 들어서 안 되나 보다하고 결국 포기하고 갔습니다. 다음 날 다른 사람이 그곳에 와서 보니까 누군가가 나무를 찍다 만 흔적이 보였습니다. ‘, 누군가 찍다 말았네?’ 하면서 도끼를 휘둘러 한 번 쾅 찍으니까 나무가 그대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속담이 여기서 나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한 번만 더 찍었으면 넘어가는 건데,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는 바람에 결과를 얻지 못하고 그냥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유익이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버렸습니다. 그것도 자기는 아홉 번이나 내리쳤고 다른 사람은 한 번밖에 안 했는데도 그 사람에게 넘어갔으니까, 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기도 응답도 그렇습니다. “기도해도 안 되던데요.”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몇 번이나 기도하셨는데요?” 사실 몇 번 기도도 안 해보고 안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 주십시오.”라고 5, 10, 30분 정도 기도하고서, 기도해도 안 된다고 합니다. 30분 정도 기도한 후 하나님께서 내가 이제 응답을 주어야겠다.’라고 하시는데 , 시간이 다 됐네.’ 하면서 그냥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포기하고 이제는 엘리에셀로 해야겠다며 선택하고 행동에 옮기기 전에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외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약속을 주셨는데 그대로 안 되고 있습니까? 분명히 자녀에게 복을 약속하셨는데 왜 이렇습니까? 왜 안 주십니까? 그러면 제가 막 나가서 엘리에셀로 해도 되는 건가요? 제발 도와주십시오.’라고 외칠 필요가 있습니다. 더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이제는 그만 해야겠다.’라고 생각되는 때, 시간이 다 되어 가야겠다고 생각되는 때로부터 5분만 더 해보십시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아브람의 기도가 바로 그런 기도였습니다. 그러한 아브람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4)

 

하나님은 여기서 엘리에셀이 후사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날 아들이 상속자다.”라고 확실하게 확인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아브람이 조급해졌습니다. 자기와 사래의 몸은 점점 늙어가고 있고 아기를 낳을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는 상황이 되니까 마음이 급해지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빨리 이것을 해결해야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아브람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아브람의 시간표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는 남자 100, 여자 90세에 아이를 낳는 것이 너무 쉬운 일입니다. 그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토록 오래 기다리게 하십니까? 약속을 하셨으면 그 다음 해나 2년 후에 주시면 되는 게 아닙니까그냥 좀 빨리 주시지 왜 이렇게 애간장이 타게 만드시고 왜 그러십니까?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마다 놀라는 것은, 하나님은 정말로 불가능한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실 때가 참 많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러시는 것은 아닙니다. 금방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이렇게 귀하게 쓰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실 때가 많습니다.

 

저번에 요한복음에서 나사로가 죽은 사건을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고 예수님께 알려드렸더니 어떻게 하셨습니까? ‘내가 즉시 고쳐주겠다.’ 하며 가신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틀을 더 지체하시고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가셨습니다. 죽어서 이제는 인간적인 희망은 다 사라지고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을 때 가셨습니다. 그것과도 같습니다. 인간적인 희망이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실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아브람과 사래가 자기들의 힘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시간이 지나고 자기들은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되는 시간이 되도록 기다리시는 겁니다. 아기를 낳을 능력이 없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낳을 능력이 있을 때 낳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낳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못 낳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아들을 낳을 수 없게 될 때, 말씀으로 이삭을 낳게 해주십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확실히 깨닫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에 닥쳤을 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하나님께 맡길 일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큰일 났다는 마음이 들며 그 생각만 하면 혈압이 올라가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밥맛을 잃고 잠도 안 오고 의욕을 상실하게 되면, 이것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아주 애간장이 타서 녹아버릴 것 같은 상황, 아주 피가 마르는 상황이라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럴 때는 괜히 애쓰거나 쓸 데 없이 힘 빼지 말고, 그냥 하나님께 맡기면서 평안히 지내십시오. 그래야 건강에도 좋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이리저리 쫓아다니고 큰일 났다하면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바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무릎 꿇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게 아니라, 그럴 때는 정말 생명 걸고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 번을 생명 걸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하시면서 응답을 안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금식하며 기도할 때가 그럴 때입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정말 생명 건 기도로 나아갈 때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5)

 

이제 하나님은 아브람이 자기 힘을 다 빼고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엄청난 수의 별들을 보여주십니다.

 

아브람은 아들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 동안 심히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그러다 이제는 아예 그만 하겠다고 선언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상속자 문제에 너무 집착하다보니까 다른 게 안 보입니다. 오직 땅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때 하나님은 , 너는 그것 밖에 안 돼?’라고 막 야단치신 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격려하시기 위해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눈을 들어 하늘의 별을 보라고 하십니다. 전에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느냐고 하시면서 그렇게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3:14-17). 지금은 눈을 들어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을 보라고 하시면서, 저렇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들처럼 그의 자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질 것이라고 또 확인해주십니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문제, 나를 괴롭게 하는 문제가 있을 때, 그것만 계속 생각하며 그것만 주야로 묵상하고 있으면 다른 게 안 보입니다. 해결책도 안 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 문제에서 나와서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늘을 보면서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고 염려되고 낙심될 때, 실제로 이것을 해보십시오. 실제로 밤에 밖에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요즘은 코로나 사태 때문에 한국이나 중국에 자동차가 적어지고 공장도 안 돌아가니까 하늘이 아주 맑아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별도 잘 보입니다. 미국은 원래도 별이 잘 보이지만, 답답할수록 날씨 좋은 날 밤에 나가서 하늘을 보십시오. 별들을 보십시오. 아브람에게는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바로 그 별들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가 너에게 주는 약속이 저렇게 많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미신과 참 신앙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미신은 인간이 자기에게 있는 돈이나 능력 혹은 재주로 신(귀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 목적을 쟁취하려고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자기는 그대로 있으면서 재주껏 신의 마음을 살살 얼러 돌이키려고 하는 것이 미신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필요할 때에만 우상을 찾아가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미신의 특징입니다.

 

그에 비해 참 신앙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늘 변화시켜가는 것입니다. 어디나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여기도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면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참 신앙의 소유자들인 것입니다.

 

 

3.   아브람의 믿음과 하나님의 확인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6-7)

 

하나님께서 셀 수 없이 많은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니까 아브람은 주님을 믿습니다. 분명히 아브람이 믿음을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었습니다. 6절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백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4:18-22, )

 

이것이 바로 창세기 15:6을 바울이 풀어서 쓴 것입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아브람은 그것을 거부한 것처럼 보입니다(2-3). 그런데 4-5절에서 다시 하나님이 약속을 확인해주시니까 아브람은 믿음으로 반응합니다(6). 하지만 가만히 보면 1절과 4-5절의 내용이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아브람이 사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입니까? 아브람이 6절에서 믿음의 반응을 보이도록 만든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약속을 확인해주시니까 갑자기 자기 안에서 새로운 청춘의 힘이 다시 솟아오름을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장막에 들어가 보니까 사래가 갑자기 더 젊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새로운 믿음의 태도는 육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이제 자기 육신이 아니라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 젊어서 되는 게 아니구나. 내가 늙어도 되는 거구나.’ 자기가 볼 수 있는 현실을 의존하는 것을 그만두고, 보이지 않는 주님의 약속을 붙듭니다. 자꾸 머리 굴리는 것을 그만두고 그냥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듭니다. 바로 이것이 기적이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능력으로 아브람의 믿음을 회복시키셨고, 또 그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또 그의 믿음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회복시켜주십니다. 말씀으로 회복시켜주십니다.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나가는 말]

 

제가 오래 전에 좋아하던 베스트셀러 작가인 켄 가이어(Ken Gire)가 있는데, 그가 쓴 <묵상하는 삶>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피조물로서 인간 최대의 존엄성은 주도권이 아니라 반응에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듣는다. 그분이 두드리시면 우리는 연다. 그분이 씨를 뿌리시면 우리는 받는다. 씨를 뿌리는 것은 광야 같은 인간의 심령에 에덴을 복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시도이다. 씨를 받는 것은 그 일에 동참하는 우리의 몫이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거란 말입니다. 내가 뭘 만들어서 일을 이루어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실 때 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 마음 밭에 말씀의 씨를 뿌려주실 때 그것을 받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내 상황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온 우주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빚으시는 아름다운 내일이 내게 오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내일의 주인이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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