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15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3

바울의 회심 및 사명 간증

(사도행전 221~21)

 

[들어가는 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좋은 대학교 중 하나인 옥스퍼드(Oxford)에서 수년 동안 신학을 기르친 그리스 정교회 주교 칼리스토스 웨어(Kallistos Ware)라는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웨어 주교는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그의 원래 이름은 티모시(Timothy)입니다. 영국사람인데, 자라면서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에게 해에 있는 외딴 섬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피정을 가고는 했는데, 거기에는 곧바로 모든 것을 즉시 떠나서 금식과 기도와 명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도원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햇볕에 잔뜩 그을려 매우 그리스 정교회 신자답게 보이는, 즉 아주 그리스 사람답게 보이는 모습으로 수도원에 조용히 앉아 있던 웨어 주교에게 한 미국인 방문객이 다가왔습니다. 이 방문객이 한두 가지 질문을 하는데, 웨어 주교는 당연히 완벽한 옥스퍼드 영어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미국인 방문객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 정말 영어를 잘하시네요!” “여기저기서 주워 듣다보니까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주교가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무리에게서 바울을 떼어내어 심문하기 위해 진영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던 로마군대 천부장이 받은 충격은 그보다 더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맞고 매질을 당한 죄수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학식 있는 세련된 헬라어로 그에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할 말이 있는데 해도 되겠습니까?” 천부장이 깜짝 놀랍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어를 아네? 게다가 이렇게 세련된 헬라어를 하다니!’

 

그는 바울이 어느 오지에서 온 건달 같은 사람이거나 사고뭉치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쩌면 최근에 반란을 일으켰던 그 이집트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대다수 또는 많은 이집트 사람들이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유창하게 했고, 유대나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천부장이 생각한 그 이집트 사람은 야만스럽고 무식한 사람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는 일을 포함하여 자기가 예언자인 것처럼 행사하다가 사라졌는데, 이제 그가 다시 나타나서 성난 유대인 무리에게 성전에서 잡혀 매를 맞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게 아니라고 대답하고 자신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밝힙니다. 먼저, 그는 그 이집트인이 아니라 유대인입니다. 그것도 길리기아 다소의 시민인데, 다소는 결코 중요히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전성기 때는 주민이 50만 명이나 살았고, 좋은 교육 전통이 있어서 좋은 대학 도시였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도시였습니다. 물론 주민 모두가 시민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바울은 엘리트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천부장에게 이런 사실을 다 말한 것은 그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기가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막 폭도에게 얻어맞아서 말을 할 만한 신체적 상태가 아니었을 텐데, 피가 나고 여기저기 맞아 부어 있는 상태였지만, 이것은 그가 다른 많은 곳에서 한 일을 예루살렘에서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민족에게 오해를 받기는 했지만, 지금 사랑하는 동족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1.   바울의 자기소개

 

지난주 본문에서 바울이 그렇게 한 다음에 이제 말을 시작합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1-2)

 

바울이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려고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그가 현지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자, 사람들은 그에게 적어도 해명할 기회는 주기로 합니다. 2140절에 이어 본문 222절도 바울이 히브리말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용하던 셈족어 계통인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 전에 아람즉 시리아에 정복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특히 북쪽 갈릴리 지역 같은 곳은 아람(시리아)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고대 히브리어는 보통 사람들이 쓰기 어려웠고 아람어가 히브리어와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구어체로는 주로 아람어를 당시에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때 아람어로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해외파이고, 헬라인과 이방인들을 상대로 사역했고, 이스라엘과 성전과 율법을 무시한다는 잘못된 소문(가짜뉴스)을 듣고 흥분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했는데, 자기들이 쓰는 히브리 방언인 아람어로 말을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주목한 것입니다. 헬라어로 했으면 계속 소란스러웠을 텐데 자기들이 쓰는 말을 해서 그랬습니다. 여기서 영어로만 하는데 갑자기 한국말이 들리면 당연히 주목해서 듣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이스라엘이 아닌 길리기아(지금의 터키 중남부) 지역 다소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우리 식으로 하면 소위 해외 이민 2세대 또는 3세대이지만, 히브리어와 또 아람어까지 구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도 마음껏 증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 등의 언어에 정통한 아주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3-4)

 

바울은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립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선가 비난의 말만 주워듣고는 그를 해외에서 온 반 유대, 반 성전, 반 유대교, 반 율법주의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제대로 교육받은 정통 유대인이라는 것부터 먼저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울이 왜 오해를 받았는가 하면, 자기는 유대인이지만 저쪽 길리기아 지역 다소에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오해를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지난주 본문인 2139절에서 천부장에게 밝혔던 내용이지만, 소동을 벌이는 유대인 군중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들 앞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자기가 이방 헬라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민 2세대(또는 3세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지만, 자신은 이 성'(3)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자기가 자랐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유대인 남자 아이들이 성인식을 하는 12살 정도에 예루살렘으로 옮겨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의 집안이 돈이 있는 집안이고 아버지가 유대교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해서 바울을 본토로 유학 보낸 겁니다. 여기서 나고 자란 우리 2세 자녀를 한국으로 유학 보낸 것과 굉장히 비슷합니다. 한국 문화에 정통하라고 한국의 경상도 안동으로 한국식, 유교식 교육을 받게 보낸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바울은 해외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린 나이에 유대 본토의 예루살렘으로 가서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은 그 당시 유대인 랍비 중에서 최고의 랍비였습니다. 당시 유대교가 크게 두 학파가 있어서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가 있었는데, 가말리엘은 조금 더 개방적인 힐렐 학파의 수장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대학 총장 같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 밑에서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은 바리새파라는 것입니다. 사두개파도 있고 바리새파도 있었는데, 바울은 가말리엘 밑에서 율법 교육을 철저히 받은 바리새인이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114절을 보면, 자기가 조상의 전통에 대해 아주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물이다. 우리 율법을 대적하고 모세 율법을 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라며 잘못된 고발을 했지만, 바울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거기에 바울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시끄럽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겁니다.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만히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으로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몰랐던 때 유대교를 향한 특심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향해 특별한 열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잘못된 열심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바울은 자기가 이 도를 믿는 사람들,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말합니다. 남녀노소 다 결박해서 감옥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사실 이것은 아주 숨기고 싶은 과거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전에 잘못해서 숨기고 싶은 게 있고 지금 기준으로 볼 때 내가 이전에 너무 잘못 살았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몇 백 명, 몇 천 명이 있는 앞에서 내가 과거에 그런 일을 하던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게 쉽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의 잘못을 솔직하게 밝히며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의 모든 잘못을 인정한 데서 옵니다. 4절에 나온 것처럼, 남녀를 모두 결박하여 투옥시킨 것을 인정합니다.

 

사실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한 걸 알면서도 선뜻 인정을 안 하는데, 사람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용기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2절을 보면, 그것은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고 나와 있는데, 오늘 본문 4절에서는 이 도즉 예수 믿는 신앙의 길을 박해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한 것입니다.

 

그 속에 깔려 있던 마음은, 그가 갈라디아서 113절에서 표현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열심으로 말미임아 하나님의 교회를 아예 다 없애버리려고 했던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잘못을 진실로 참회하는 심정 때문에,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방 지역에 가서도 항상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동족에게, 그리고 유대교로 개종하거나 개종하려고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거부하니까 그 다음으로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자신의 죄악은 사실 내가 율법을 모독했다고 고발하는 당신들 유대교의 우두머리들과 협의하고 그들의 지시를 받아서 한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5)

 

그때 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일을 바울은 숨기지 않고 참회의 심정으로 하나도 숨기지 않고 다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모든 일을 뒤에서 지시하고 조종했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고 합니다. 요즘 우리 국회와 같은 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의 공회원들이 자신의 뒤에 있던 배후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증언은 본문 뒷부분인 19-20절에도 다시 나옵니다.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19-20)

 

이것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순교의 장면을 회상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때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거기서 스데반이 죽는 것에 찬성했을 뿐 아니라 돌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는 것, 즉 자기가 거기서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지시를 받아서 그 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가장 큰 실제적 책임이 자기에게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중 이전에 잘못을 하나도 안 한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 나는 우리 가족에게도 너무 훌륭한 남편이자 아빠다.’라는 분들이 있을 때, 그 아내를 인터뷰하고 자녀들을 인터뷰해보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게 죄인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과거의 잘못 때문에 지금 쓰임을 받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율법을 받았고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어 가나안 땅 직전까지 인도한 모세, 가장 위대한 왕이며 메시야이신 예수님도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리던 다윗 같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도 다 일종의 범죄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였고, 모세도 살인자였고, 다윗도 간음과 살인 등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이전에 잘못했지만 지금도 그냥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에 뭔가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진실한 참회와 회개가 있었습니다. 회복이 있었습니다. 정말 잘못하고 엄청난 죄도 지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말 참회하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고 회복되어 계속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와 그 열매를 보여준 변화의 삶 때문에 그들은 쓰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개하고 변화된 죄인을 사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의 경우와는 달리 바울이 행한 일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적 확신, 종교적 신념 때문에 행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볼 때 기독교인들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불렀는데, 그 나사렛 도당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신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겼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라고 자신의 종교적 의로 남을 심판하고 하나님을 위한 충성심 때문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자기는 정말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종종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막거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잘못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뭔가 하면, 바울처럼 열심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은 자기의 문제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나의 신념이나 확신이나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열심인지, 아니면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셔서 그 일에 내가 전심으로 순종하는 것인지를 잘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원래 의도하지 않았는데, 바울이 이전에 행한 것처럼 잘못된 길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맹인이면서도 자기는 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해 요한복음 9장에서 잘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는 자기 눈이 먼 것도 모른 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그런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은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깨달아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그 말씀 뒤에 14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모든 구속에서 자유롭게 해줍니다.

 

많은 분들이 잘못 생각합니다. ‘적당히 믿어. 거기 너무 빠지지 마.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고, 교회도 적당히 다녀. 거기 빠지면 손해 본다. 뭔가 구속되고 속박을 당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착각입니다. 예수님께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유를 누립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구속되고 자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종교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나의 신념이나 철학이나 주장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나를 속박해버립니다.

 

나처럼 뒤끝이 없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십시오. 내 신념대로 다 해보십시오. 자유롭습니까? ‘나는 자유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 거기서 끝난다. 나는 뒤끝이 없다.’라고 하는데, 자기가 한 그 말들 때문에 관계가 다 망쳐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를 피합니다. 왜냐하면 아무 말이나 막 하니까 그렇습니다. 요즘 전문용어(?)막말이라고 하는데, 막말을 마구 해보십시오.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고,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하고, 정말 자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더욱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심지어 내가 가진 어떤 잘못된 종교적 열심으로부터도 자유를 주십니다. 현실을 보면 일반적으로 교회에 많은 교인들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냥 종교인입니다. 겉으로 종교생활만 합니다. 그 중 오직 소수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소수입니다. 왜 그런가? 예수님도 이 세상에 다시 올 때 내가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왜 종교인이 많고 정말 그리스도인은 적은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인데, 그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드물어서 그렇습니다.

 

종교인으로서 교회에 왔다가 잠깐 있다 가는 것만 합니다.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다 함께 주님을 만나려는 것입니다. 각자 흩어졌을 때는 자기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여기 모여서는 종교적인 행위에 참여하는 종교인이지만, 여기서 나가서는 전혀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모르는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일요일에 교회에 오는 것인데, 그것도 자기 일이 있거나 바쁘면 빠지곤 하니 거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인은 많은데 참된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적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눈이 먼 상태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열심히 살아가기 때문에 더 모릅니다. 바울이 이전에 히브리식 사울로 살아갈 때 그랬던 것과 굉장히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무슨 고행을 하고 수행을 하고 도를 닦아서 만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렇다고 여기 주일에 나오는 것이 종교인으로서 행동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와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오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자체가 공동체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항상 공동체입니다. 혼자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없습니다. 혼자 도 닦는 것은 없습니다. 함께 모여서 함께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왔다는 자체가 사실은 아주 귀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시는데, 거기에 반응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모여 함께 사랑을 나누고 삶을 나눌 때 주님께서 그 자리에 함께 하시는데, 주님 안에서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는 것이 그렇게 모임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먼저 나를 찾아오신 주님 앞에 내가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는 일입니다. 바로 그런 일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늘 만날 수 있고, 종교인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2.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의 회심 간증

 

본문 5절과 19-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이 그의 인생의 전과 후를, 정말 BC(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AD(Anno Domini, 주님의 해 이후)로 나누어 버렸습니다.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6절 이후에서 죽 설명합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6-8)

 

이 사건은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9장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그 사건에 대해 듣고 기록한 것이고, 여기 22장은 바울이 바로 그 사건에 대해 유대인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누가가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9장은 객관적으로 기록했고, 22장은 바울의 말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표현이 조금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틀린 게 아닙니다. 약간 다를 뿐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와서 말씀하시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어두컴컴한 데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정즉 정오인 낮 열두 시를 말합니다. 해가 가장 밝을 때 일어난 사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너는 왜 기독교를 핍박하느냐? 너는 왜 그리스도인들, 내 제자들을 핍박하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핍박하고 있다.’라고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바울을 먼저 찾아와서 만나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도 이때 바울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그냥 가버렸으면 주님이 기회를 주셨어도 안 되는 것인데, 이 기회를 그는 붙들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길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9)

 

여기에는 같이 가던 사람들도 빛은 다 봤는데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를 못 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기록한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이 부분이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지는 못하면서 소리는 들었다’(9:7)고 나와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본 거냐, 못 본 거냐? 소리를 들은 거냐, 못 들은 거냐? 9장과 22장이 왜 이렇게 다른가? 나중에 26장에서는 이방인 지도자들 앞에서 또 바울이 똑같은 간증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같은 사건이 세 번 나오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본 거냐, 못 본 거냐? 소리를 들은 거냐, 못 들은 거냐? 그런데 이것이 다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같은 것을 이야기할 때도 지금 말하는 것과 한참 뒤에 같은 사건을 이야기할 때 똑같은 일이지만 약간 다르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여기 사람들이 분명히 보기는 보았습니다. 특별한 빛을 보았습니다. 보았는데, 9장에서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고 22장에서는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소리가 나는 것을 아예 못 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빛도 보았고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했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뭔가 소리가 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같이 있던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빛도 보았고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만 유일하게 빛을 보고도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잠시 3일 동안 눈이 멀었습니다. 왜 바울만 눈을 못 보게 되었는가? 왜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바울만 그랬는가? 이것은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기 위한 특별한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 채 자기 확신과 자기 신념대로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잠시 눈을 먼 것과 같은 고통의 순간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잠시 고난 후에 눈을 뜨게 하셔서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 그리고 바울은 거기에 큰 충격을 받고 이제 주님의 길을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10-11)

 

다메섹이 지금도 같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한 단계씩만 알려주십니다. 앞을 확 보여주시면 좋겠는데 한 단계입니다. 다음 단계에 순종하면 또 다음 단계를 보여주십니다.

 

마치 밤이 캄캄할 때 전등을 들고 가면서 비추는데, 저 먼 앞을 비추어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손전등은 걸려 넘어지지 않게 바로 앞을 비추기 위한 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만큼을 비추는데, 여기서 조만큼을 가면 어떻게 됩니까? 거기서 또 그만큼을 비추어줍니다. 거기를 가면 또 그만큼을 비추어줍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대부분 인도하십니다. 그냥 확 보여주지 않으시고, 순종할 때 그 다음을 보여주시고, 순종할 때 또 그 다음을 보여주십니다. 바울에게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12-13)

 

위대한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를 도왔던 사람은 그보다 더 유명한 베드로 같은 사람이나, 예수님의 동생이자 초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인 아나니아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히브리식 표기로는 하나냐입니다. 이것은 흔한 이름으로서, 나중에 보면 대제사장의 이름도 아나니아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의 명성 때문에, 능력이 있고 유명하기 때문에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하나님의 일에는 어떻게 보면 이렇게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냥 평범한 게 아니고, 평범하지만 순종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 지식으로는 저 사울에게 가면 큰일 납니다. 자기들을 잡으러 온 사람인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가라는 겁니다. 그는 순종했습니다. 평범하지만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즐겨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의 특징 중 하나는 율법을 따라 살고 경건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삶이 올바르면 다른 사람들,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들었겠습니까? 자기는 유대인이지만 크리스천인데, 예수님을 안 믿는 보통 유대인들조차도 인정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올바른 삶을 살던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주님의 일에 쓰임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같이 하며 봉사해야 하지만, 교회에서만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인 동시에 세상에서도 안 믿는 분들에게조차 인정받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될 때 귀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는 아나니아가 성경에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의 구원의 도구로 한 번 쓰임 받고 사라진 것이 사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어디를 가도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특히 바울이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사도가 되었을 때, 아나니아가 멀리서 그런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뿌듯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가서 전하고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 저렇게 위대한 사도가 되었구나!’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14)

 

바울의 구원을 설명할 때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란 말과 예수님을 그 의인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의인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구약 때부터 기다려오던 메시야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의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유대교와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이 주님을 만날 때 돕던 아나니아를 묘사하는 표현도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한 말이지만, 현재 사도 바울이 자신을 반 유대적이고 유대교를 반대하는 자라고 공격하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데,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래서 우리는 완전히 독립된 어떤 것이 아니라 유대교와의 연장선상에 있다.’라는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세심하게 선택한 용어들로 보입니다.

 

눈이 잠시 감긴 바울에게 중요했던 것은 메시아(구주)이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시내산에서 듣고 백성에게 토라(율법)를 전했던 것처럼,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음성을 들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여기서 보여줍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15)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여러 명이 같이 있었지만 오직 바울만 눈이 멀고,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어도 바울에게만 들린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소명(부르심)이고 또 이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편안하게 그저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것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다른 게 아닙니다. 사실 전도라기보다는 간증이라는 말이 더 맞습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그냥 증언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역사를 해주셨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우리가 매주 목장에서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삶의 나눔이 간증입니다. 지난주 동안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이런 일을 해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이 증인의 삶입니다.

 

구원의 부르심(소명)은 새로 주시는 사명과 따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우리가 소명과 사명을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소명은 부르심(calling)이고 사명은 미션(mission), 즉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주십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에서 하나님이 너는 이렇게 하며 살아라하신 그 사명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 그 사명을 따라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부르셔서 이것을 하며 살라고 하셨는데 엉뚱하게 다른 일만 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까? 나를 만나주시고 찾아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주신 사명대로 사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2)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16)

 

예수님의 세례가 죄인의 죄를 씻는 세례와는 달리,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그리스도)로서의 임직식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바울의 세례는 복음 사역을 통해 이방인들을 주님께 올려드릴 제사장의 일을 감당하도록 깨끗하게 하는 정결례(유대교식으로 말하면)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자기가 이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식입니다. 세례는 단순히 구원 받은 것에 대한 표시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도록 이 세상의 제사장으로 임직시키는 중요한 의식입니다. 그래서 혹시 세례를 안 받으신 분들이 계시면, 안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믿으면 그냥 받으시면 됩니다.

 

 

3.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명 간증

 

그리고 그 제사장적 직무를 위해서 바울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나아가며 순종해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7-18)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 소명, 그리고 사명을 받은 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 이방 땅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아나니아를 통해 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전에 가서 기도할 때, 그것이 비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는 것을 다시 확증 받습니다. 자기가 그 동안 믿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니라 같은 분이신데 자기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사명을 받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 그런 확증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환상 중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명을 재확인하여 주셨습니다. 이 일이 황홀한 중에일어났다고 나와 있는데, 그러니까 환상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비전을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보낸다고 하신 것에 대해 다시 확증을 받았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3년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던 중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후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21)

 

이제 그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이제 그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새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일은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내가 편안한 곳을 떠날 때 구원을 위해 사용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나아가는 사명을 확인받았고 순종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 와서 주님으로부터 또 나가라는 말씀도 받았습니다. 이곳이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루살렘 성전은 어디인가? 내가 편안하게 머물고 있는 곳, 내가 더 이상 넘어가려 하지 않는 나의 영역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은혜 받고 신앙생활하면서 편안하게 지내던 어떤 영역이 아닌가, 우리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내가 그 동안 해오던 것보다 더 나아가서 하라는 말씀을 받으면, 나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믿음이고 신뢰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라는 데로 간다고 해서 저 어느 오지에 가서 선교하라는 것만은 아닙니다. 한걸음, 한걸음 보여주시는 것에 순종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걱정할 게 없는 것은,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하고 이미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험한 곳입니다. 쉬운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1:8)이라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며 과연 나는 지금까지 종교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냥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과의 진짜 만남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종교생활이 아닌가?’ 돌아보기 원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주님을 정말로 만나기 원합니다.

 

주님을 이미 만났다면 주님이 보여주시는 사명에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사명자로 행하기 원합니다. 그러면 적은 일에 충성할 때 더 큰 일로 사용하시는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