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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28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67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사도행전 2017~27)

 

[들어가는 말]

 

여러분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 매일 살아가는 그 일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나는 지금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

 

가족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까? 돈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명예를 위해 삽니까? 성공을 위해 삽니까? 출세를 위해서 삽니까? 또는 학생이면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서? 또 그 후에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서? 큰 사업체를 위해서?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내 생명을 내던지고 바쳐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생명을 걸 만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돈을 벌기 위해 생명을 바친다면,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다면, 그래도 죽었는데 그 돈을 누가 쓰는 겁니까? 성공을 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라 목숨을 내던져 성공하고 죽었다면, 죽었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내 생명을 바쳐서 내 자녀가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잡고 돈 많이 벌고 성공하게 해준다면, 내가 죽은 후에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됩니까? 별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끼는 것을 위해 생명을 줄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내 목숨을 내던질 수 없는 것을 위해 살고 있다면, 헛것을 위해 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삶의 목적이고 또 사명입니다. 물론 사명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더라도, 즉 생명을 내어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목숨을 내어주더라도 그것이 소용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살아갈 수 있는 그 소중한 가치와 목적과 사명을 위해 살아갈 때,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커다란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상을 주십니다. 그냥 힘들게 고생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목숨을 던지지도 못할 만한 시시한 것을 위해서 살지 말고, 목숨도 아깝지 않은 것을 위해 살다가 최고의 상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상을 받는 길로 걸어가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비밀을 깨닫고 그 길로 끝까지 달려간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40마일에 이르는 먼 길을 혼자 걸어갔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며 나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고독한 길을 통해, 비록 앞으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3차 전도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앗소에서 일행과 다시 합류한 바울이 배를 타고 미둘레네(미틸리니), 기오(키오스), 사모(사모스)를 거쳐 밀레도로 갔습니다. 사모에서 에베소가 바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바울은 3년이나 목회했던 정든 에베소를 그냥 지나쳐서 남쪽에 있는 밀레도로 내려갔습니다. 예루살렘 행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한 이상, 조금이라도 지체하지 않고 오순절 전에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이 일행과 함께 도착한 밀레도는 에베소 남쪽 30마일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밀레도가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상 아시아 주, 즉 오늘의 터키 서부 지역을 일컫는 아시아에서 에베소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밀레도에는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잘 발굴되어 있는 야외극장이 그 당시 소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도시 전체가 처음부터 바둑판 모양으로 계획, 설계, 건축된 아주 훌륭한 도시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을 설계한 천재 물리학자 이시도루스(Isidorus)라는 사람도 바로 이 밀레도 출신이었습니다.

 

또 밀레도는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막대기 하나로 거대한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하고 수학의 기초를 닦은 탈레스(Thales)를 배출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탈레스 하면 생각나는 게, 아주 오래 전 대학교 1학년 때 고대철학을 배웠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철학자가 바로 이 탈레스입니다. 탈레스가 한 말이 유명했는데 모든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이 기억납니다. “왜 물이라고 했는가? 그가 물가에 살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그 말이 30년이 넘었는데도 기억납니다. 실제로 물가인 밀레도에 살았기 때문에 탈레스는 모든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당시 상업과 철학뿐 아니라 예술의 도시로 명성을 날리던 밀레도에서 여러 곳을 가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 때문에 간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들로 소문난 훌륭한 도시였지만, 바울은 밀레도에서도 전혀 다른 데로 한눈을 팔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17)

 

바울은 밀레도에 도착해서 에베소에 사람을 보냅니다. 30마일 북쪽으로 떨어진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게 합니다. 자기가 가지 않고 장로들을 오게 합니다. 에베소에 직접 들르게 되면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고, 3년이나 정들었던 교인 한 사람 한 사람과 교제하며 다시 작별 인사를 나누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자신이 있는 밀레도로 불러 그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게 되면 시간이 덜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이 아시아를 떠나면, 앞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에베소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책임져줄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에베소의 장로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장로는 지금의 장로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오히려 목회자에 더 가까운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은 그 장로들에게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잘 보살펴달라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당부하기 위해서 그들을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소위 바울의 고별 설교라고 불립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남긴, 사도행전 속의 마지막 유언인 셈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도행전 전체에서 바울이 믿는 자들에게 말씀을 전한 내용으로서 유일합니다. 다른 설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한 내용이었지만, 오늘 본문은 바울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2.   에베소 사역 회상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18)

 

바울이 요청해서 급히 달려온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이 에베소가 속해 있는 아시아(터키)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러분도 아는 바니라고 고별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19)

 

본문의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유대인들의 온갖 모함으로 인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님을 섬긴 것이 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머무는 동안, 특별히 제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 3년 동안이나 머물렀는데, 온갖 시련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종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를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겸손과 눈물로 인내하며 섬겼던 것입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0)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공개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거리낌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거리낌 없이 전하여 가르쳤다는 것은, ‘내가 혹시 이 말을 했다가 뭔가 손해를 보지 않을까,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하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전했다는 겁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과 아데미 신전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환락과 여러 파티와 광란의 도시였던 동시에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2의 로마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그런 에베소에서 바울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하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을 철이나 은이나 금이나 돌 같은 것의 노예로 살도록, 그런 헛된 것을 섬기며 죽어가도록 방치해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움으로 선포했지만, 우상의 도시 에베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쉽습니까? 생명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일로 인하여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폭동이 일어나서 심한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에베소 사람들을 살리는 데 꼭 필요한 메시지라는 것을 확신했고 또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개의치 않고 말씀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에베소 장로들 앞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1)

 

바울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하면서 선민의식에 젖어 있고,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개다. 지옥 불에서 뗄 감으로나 쓸 것들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에게 회개하고 자신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자살행위였습니다. 예수를 죽였는데 바울 자신을 왜 못 죽이겠습니까?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하고 죽이려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자기도 유대인이면서도 우리 유대교를 부정하는 저런 바울 같은 놈은 죽여야 한다.’라고 하며 사악한 배교자 정도로밖에는 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헬라(그리스)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많은 신들을 믿고 섬기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헛된 신들을 많이 만들어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수많은 신들이 제각각 영역을 나누어 통치하는 신들의 세상이었는데, 사람과 아주 비슷한 신들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렇게 온갖 신들을 숭배하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어라.’ 하고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것은 너희의 신앙이 틀렸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믿는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선뜻 누가 따르겠습니까?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누가 와서 그건 틀렸소!’라고 하면 기분이 나쁘지, 누가 바로 알겠습니다.’ 하겠습니까?

 

바울이 가는 곳마다 바울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헬라 사람들이 동조한 것이 그런 이유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회개하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라고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 설교의 첫 문장을 다시 보십시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십니다.”라고 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가 앞에 나오기 때문에, 바울이 아시아를 방문한 시기와 기간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바울의 고별설교의 이 시작 부분이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내가 여러분 가운데서 항상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고별설교 첫 문장에서부터 강조하려던 것은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희들’, 다시 말해 에베소의 장로들인 여러분도 다 알고 있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온갖 시련과 도전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종으로서 중심을 잃지 않고 오직 주님을 섬기며 복음을 전한 것, 에베소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까지 거리낌 없이 전하여 가르친 것,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회개하여 돌아서라고 선포한 것은, 다 사람의 입맛에 맞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자기가 해를 당할 수도 있는데 바울이 그렇게 한 것은, 그것이 주님의 구원과 부르심을 받은 사도이자 그리스도인이자 예수님의 제자의 당연한 책임이었기 때문이고, 또 그가 만난 그 사람들을 진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기가 그들을 정말 사랑하지 않았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음으로써 지옥 불에 떨어지게 두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전하는 겁니다.

 

우리도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들자고 하는데, 뭐 하러 힘든 걸 합니까? 그냥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안 믿는 분들을 위해서 자꾸 기도하고 초청하고 섬기고 자꾸 그러자고 합니까? 그분들도 우리와 같이 천국에 가야 된다는 그 마음 때문입니다. 빚진 자로서의 마음, 그분들을 위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바울도 비록 자기를 해치려 하고 반대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도 천국에 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있어서 육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지만 조롱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네?”라고 웃으며 조롱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듭니까? 몸의 고통도 힘들지만 그런 조롱은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그때 그냥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그런 자들을 다 쓸어버리신 다음 다시 십자가에 달리셔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면 되는데, 왜 그들을 멸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으셨는데도 그냥 두셨습니까? 그들도 구원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 쓸어버리면 원수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도 구원하셔야 했기 때문에, 그들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로마 사람들도 자신을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구원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셨습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다닐 때 무슨 건강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의 평균 수명으로 볼 때 이미 50대 중반에 접어들어 노년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매도 많이 맞고 파선도 여러 번 하면서 몸이 정상이 아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가가 계속 따라다닌 이유 중 하나는 의사로서 바울을 돌봐주려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많은 나이도, 바울을 괴롭히던 육체의 병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데는 장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몸이 노쇠하고 병약했기 때문에 더더욱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내가 이렇게 약한데도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보니까, 이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능력이다.’라는 것을 매일 체험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아갔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그 바울과 3년 동안 같이 지낸 사람들입니다. 같이 지내다가 바울이 교회의 리더로서 세우고 떠났던 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같이 지내면서 삶을 통해 온갖 시련과 박해와 도전 속에서도 바울이 주님을 어떻게 섬겼는지, 바울이 자기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또 주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들고 어떻게 나가서 전했는지, 직접 보고 겪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러분은 다 아십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나를 보고 겪어서 아는 대로 바울이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치지 말고, 여러분도 복음의 증인으로서 그렇게 사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지금 여기서 전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셨든 그 삶을 본받아 살았던 자기처럼 그들도 복음을 위해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2차 전도여행 중에 그리스 남부 고린도에서 16개월 동안 머물렀던 바울은, 그곳에서도 주님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내가 주님을 본받아 사는 것을 보고 겪어서 아는 대로,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자기 개인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열심히 주님을 본받은 것을 본받아 열심히 주님을 따라 살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멋진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힘듭니다.

 

자녀들이 사실 무서운(?) 존재입니다. 같이 살면 아이들이 내 약점을 잘 압니다. 아무리 말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고 좋은 말을 많이 해줘도, 내가 한 번 뭘 잘못하면 그게 진짜인 겁니다. 그것을 보면서 , 진짜는 저거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자녀에게 기도하고 자라. 말씀을 봐라.’라고 해도 자기는 말씀보다 드라마에 빠져 드라마만 보고 있으면, 아이가 보는 것은 말씀을 좋아하는 아빠엄마가 아니라 드라마를 좋아하는 아빠엄마일 뿐입니다. 아이들의 눈에는 삶이 보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중요하고 섬김이 중요하다 해도, 그와 반대로 자기 것만 챙기고 뒤에서 슬슬 속이면, 아이들의 눈에는 그것이 진짜인 겁니다.

 

결국 우리 삶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숨길 수도 없습니다. 삶에서 나옵니다. 특히 바울 같은 사람은 자기의 삶이 다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내가 산 것을 여러분은 아시죠? 여러분도 그렇게 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신앙인입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산대로 너도 이렇게 살아라.’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로 이게 우리의 도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직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금방 예수 믿은 분들,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분들, 또는 젊은 분들에게, 교회에서 직분이라는 것은 모범섬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섬기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이렇게 섬기십시오.’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직분자입니다. 매년 공동의회를 통해 직분자들을 세우지만,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진짜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우리 자녀에게도 또 믿음의 후배들에게도, ‘나를 보라. 나를 보고 따르라. 내가 산대로 살아라.’ 하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인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장차 받을 고난에도 끝까지 다하는 사명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2)

 

원래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잠시 들러서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와 남부 아가야의 교회들이 모은 사랑의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주고, 자기가 원래 파송 받았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 머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종목적지가 안디옥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성령님이 가르쳐주시니까 목적지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간다.’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는 원래 안디옥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성령께서는 거게 아니라 예루살렘이라고 가르쳐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밝힙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23절을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자기 영광이나 편안함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촉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를 출발하여 마게도냐의 각 성을 죽 거치면서(아테네, 베뢰아, 데살로니가, 빌립보), 성령님이 바울에게 계속하여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말씀해주신 것이라면, 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바울은 그 길에서 반드시 투옥과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서도 자신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4)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바울의 신앙고백이자 사명고백입니다. 바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길을 내가 달려갈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이 반드시 가야 할 인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왜 그 길을 가야 하는지 그 이유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 위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복음 증거의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선포합니다. 이 복음을 전하다 죽어도 괜찮다는 것,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말 사명 아니겠습니까? 이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길인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고 불러주셨는데, 이처럼 은혜를 주시고 종으로 삼아주셨는데, 바울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또 수시로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친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인도하고 계신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오히려 바울은 이때 기대감으로 충만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 이제 예루살렘에 가면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시지만,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주님, 거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하고 기도하며 갔을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즘 말하는 무뇌 인간처럼 뇌가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나 무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뜻보다 훨씬 귀하고 훌륭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내려놓은 그리스도인은,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의지를 다하여 결단할 뿐 아니라 실천하게 됩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을 아무렇게나 취급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시련과 도전도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르는 자신의 거룩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반드시 주님의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 하는 귀한 결단과 헌신입니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앞에 두고,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갈 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지만, 자신은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직접 남기는 마지막 유언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은 알아서 사십시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길로 가십시오. 같이 갑시다.’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개척자들에 의해서 사회와 역사와 미래와 교회가 새로워집니다.

 

당시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당시의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고, 환락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모든 것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여기저기서 아데미 신전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북적대고 관광객이 항상 많았습니다. 요즘 웬만큼 인기 있는 관광지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습니다.

 

우상과 돈과 향락과 쾌락과 유행과 패션과 온갖 볼거리와 흥밋거리와 서커스와 쇼 같은 것들로 가득한 그 에베소에서, 주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거룩한 백성을 부르시고 당신의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이런 우상과 맘몬과 향락과 타락의 도시인 에베소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교회가 섰고, 그들은 주님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부름 받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사실 편안한 길이 아니라 온갖 시련과 도전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그들에게 힘들고 생명을 거는 순간이 오더라도 이 길을 포기하지 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길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그 길로 인도해내신 주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주님께서 불러내신 이상 반드시 함께해주실 테니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라. 두려움 없이 생명을 걸라.’ 하고 강하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결코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early retire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적입니까? 그런데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물질을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그것이 정말 내 생명을 걸 만큼 가치 있고 소중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부자유스럽고 속박당하고 구속받는 삶,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염려가 끊이지 않는 삶이 되고 맙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친 광야와도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생명수의 길을 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여기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4.   맡겨주신 사명을 끝까지 이루는 주님의 종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5)

 

여기서 보라는 말이 진짜로 무엇을 보라는 말이 아니라, 헬라어 원어로는 자신의 말을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영어의 ‘behold’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22절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동안 바울이 각 성을 거쳐 올 때마다 성령님께서 그의 예루살렘행이 결박과 환난의 길임을 계속 예고해 주셨지만, 바울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에베소 장로들에게 밝히면서, ‘보라하고 말합니다. 자신의 굳은 결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의를 집중시키는 표현입니다.

 

25절에서는 보라라고만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를 보면 그리고 이제, 보라하는 말입니다. 자기가 24절에서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라고 한 다음에 , 보십시오.’라고 하며 뭔가 중요한 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한글 성경과는 순서가 다릅니다. 헬라어에는 내가 알고 있다는 말이 먼저 나와 있습니다. 독일어에는 동사에 따라서 1인칭인지 2인칭인지 3인칭인지, 또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구분됩니다. 헬라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사만 쓰면 누가 하는 말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인칭 단수동사를 쓰면 바울이 내가 이렇게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려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라는 단어를 또 붙입니다. 그러니까 , , , 내가 알고 있다라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무엇을 압니까? ‘여러분이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을 내가 알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지면 다시는 못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작별, 즉 죽음으로 가는 길을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에 얼굴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다 얼굴이 있습니다. 얼굴이 없으면 우리는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종교적인 이유로 얼굴을 뒤집어쓰고 가는 여자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고서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까, 그러면 다 똑같이 생기기 때문에 구분이 안 되므로 벗고 찍으라고 합니다. 얼굴이 안 보이면 구분이 안 갑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얼굴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준이 됩니다.

 

그런데 한국말로 원래 얼굴이 뭔지 아십니까? ‘얼굴은 원래 얼꼴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 정신)’(모습, 상태)이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상태가 얼굴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어?’라고 하거나 오늘은 왜 이렇게 얼굴이 환해?’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데가 얼굴이라는 말입니다. 마음 상태가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를 대표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면서, 다시는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을 의미하며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할 것으로 말한 것은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작별이 반드시 있습니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그것을 깊이 느끼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다시 만날 희망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국으로 이사를 간다면 나중에 한국 가면 봐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분 앞에서는 나중에 무덤에서 봐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믿는 분이 돌아가시면 천국에서 다시 봐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이웃 교회 목사님이 돌아가셨는데, 감사하게도 돌아가시기 전날에 가서 방문하여 기도해드리며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천국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기도할 때 말씀을 못하셨지만 중간 중간 , 라고 하셨습니다. 혼수상태였는데도 분명히 들으신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다시 뵙겠다고 인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다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슬픈 겁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갈라놓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여러분이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고 그토록 강조한 것은, 바울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은 그 순간만큼은 바울이 금방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당사자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죽어서 장례를 치른 사람의 얼굴을 실물로 다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돌아가시는 그 순간 얼굴이 바뀝니다. 생명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으니까, 그 사람의 얼굴을 이루었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다시 들을 수 없고, 그 귀에 말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또한 그 눈앞에서 다시는 웃어 줄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애타게 그리워도, 죽은 사람의 얼굴을 산 사람은 다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는 살아 있고 다른 사람이 죽었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은 그 반대가 됩니다. 호흡이 멎는다고 당장 내 몸에서 나의 얼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호흡이 멎어도 내게는 여전히 얼굴이 있습니다. 내 몸이 관 속에 뉘어지고 관 뚜껑이 닫혀도, 내 얼굴엔 입과 귀 그리고 눈이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호흡이 멎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시체또는 시신으로 부릅니다. 그것은, 내 얼굴에 있는 입과 귀와 눈과 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얼굴의 그 작동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정지시켜 버립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여러분이 나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유언을 통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의 마음에 새겨주기 원했던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는 보지 못할 내 얼굴을 똑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분도 앞으로 내 얼굴과 같은 얼굴로 살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6)

 

바울은 오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그냥 오늘이 아니라 그 오늘이라는 날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오늘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자신의 얼굴을 다시는 못 볼 것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여 주는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7)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모든 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전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에스겔에 나오는 말씀을 바울이 자기에게 적용하여 말한 것입니다.

 

에스겔 33(33:2-6)을 보면, 파수꾼이 있는데, 파수꾼이 나팔을 불며 경고를 했는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무시하여 적군이 들이닥쳐서 죽게 되면 무시한 그 사람들의 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수꾼이 적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들이 죽게 된다면 그 죽음의 책임을 파수꾼에게 묻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옛날에는 성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파수꾼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산이 거의 없는 중동에서는 저 멀리 지평선에서 모래바람이 일며 군대가 쳐들어옵니다. 그것을 발견한 후에도 한참이 걸려야 성까지 오게 됩니다. 며칠씩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적을 발견한 파수꾼이 즉시 나팔을 불어대면, 성안에 있는 군인들과 백성들은 맞서 싸울 준비를 하거나 도망을 할 여유를 갖게 됩니다.

 

나팔을 불었는데도 군인들과 백성들이 도망가지 않고 그냥 있다가 다 죽었다면, 그것은 파수꾼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군이 몰려오는 것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망한다면 그 책임을 파수꾼에게 묻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때 한 사람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말씀을 맡겨주신 것은, 그 사람을 말씀의 파수꾼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신 말씀을 전해야 할 책임이 선지자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복음이 있고 자기가 그 복음을 맡은 사람인데, 복음을 전했어도 듣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간다면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가 전하지 않아서 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갔다면 자기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여기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다 복음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는데, 내가 전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가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내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전했는데도 듣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면 내 책임은 아닙니다. 우리의 할 일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처럼 가서 작은 소리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망한대.’라고 하면 안 되고, 크게 잘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을 생각하며 바울은 자신이 책임을 다했다는 것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로 이런 복음의 파수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잘 생겼느냐 못 생겼느냐가 아닙니다. 파수꾼의 얼굴입니다. 나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살리고 세우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는 지금 어떤 얼굴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세상의 욕망과 욕심에 짓눌려서 어그러진 얼의 꼴(얼굴)입니까? 아니면 정말로 내 영혼이 복음에 사로잡힌 얼굴,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입니까?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떤 얼굴로 기억하겠습니까? 또 어떤 얼굴로 기억해주기를 원하십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의 순간은 지금 우리에게 11초 다가오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의 파수꾼으로 오신 주님, 그 주님 안에서 또 우리를 그 복음의 파수꾼으로 부르신 그 얼굴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코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 후회 없는 얼굴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고, 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잘했다 칭찬받는 주님의 종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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