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8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72 ✦

“예언대로 일어난 결박과 환난”

(사도행전 21장 27~40절)


[들어가는 말]


우리 각자가 돈을 어디에 가장 많이 쓰는가를 보면 우리가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쓸 수 있는 돈이 생길 때 주로 어디에 사용하십니까? 한국 뉴스를 보니까 휴가철이 되면 많은 젊은 직장 여성들이 휴가인데 어디로 놀러가는 대신 성형외과에서 시술을 받는다고 합니다. 1년 내내 힘들게 돈을 벌어서 아끼고 저축하는 이유가 성형수술을 해서 예뻐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외모지상주의가 가득한 사회의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거 봐라. 저렇게 휴가도 안 가고 성형수술 하는데 돈을 쓰고 그래서 되겠는가?’ 하며 비난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형수술만 아니다 뿐이지 다른 데 돈을 씁니다. 옷과 가방과 신발 등 명품에, 또 어떤 사람은 전자제품에, 또 어떤 이들은 오디오나 자동차에 아낌없이 돈을 씁니다.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라고 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주님의 일보다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내가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가를 보면 인생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말로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어디에 여러분은 남는 시간을 많이 사용하십니까? 골프나 낚시나 드라마나 영화 등 많이 있습니다. 또 게임이나 인터넷 샤핑도 있고, 한국 같은 경우는 맛집만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 특별히 성경은 조금 다릅니다. 페이지 수가 많다고 꼭 중요한 것은 아니고, 어떤 사건을 특히 많이 조명하는가를 보면 그 강조점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말씀의 삶> 공부도 하고 있지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솔로몬 이후에 나뉜 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여러 왕들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도 훌륭한 왕들이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 같은 사람은 나라를 엄청나게 부강하게 만들고 정치적, 외교적으로 뛰어났으며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아주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단 몇 절로 평가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람이나 사건인데도 성경은 아주 길게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4복음서나 사도행전을 보면 어디에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가? 복음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3년 정도 공적 사역을 하셨는데, 앞부분은 간략하게 쓰고 주로 마지막 일주일에 일어난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더 많이 할애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도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이야기처럼, 사도 바울이 고난당한 이야기를 꽤 길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시작점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28장 끝날 때까지 사도 바울이 어떻게 고난을 이기고 로마까지 가는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성전에서의 폭동과 바울의 환난


지난주 본문에서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권면에 따라,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특히 유대인으로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의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대인의 정결예식과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네 명의 나실인 서원을 한 사람들이 서원을 지키는 일에 바울이 돈을 대주도록 권면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그들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그들을 위해 돈을 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7절)


그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인들의 소동에 잡혀서 끌려 나갑니다. 이것은 물론 야고보가 언급한 사람들, 즉 율법에 열심을 가진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벌인 소동이 아니라, 27절에 나오는 것처럼 유대인들, 특히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아시아’는 지금의 아시아가 아니라 그 당시의 아시아 주인 소아시아, 즉 지금의 터키 지역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통 ‘아가야’는 그리스 남부의 고린도를 말하고, ‘아시아’는 에베소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까지 와서 바울을 보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를 붙잡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의 조언이 별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봅니다. 


공동체 지도자들은 교회를 위해 종종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우리 장로교회 같은 경우는 당회가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또 위원장들과 함께 모이는 확대회의인 연석회의에서도 중요한 일을 의논하고, 모든 제직들이 모이는 제직회를 통해서도 여러 일을 의논하며 나아갑니다.

 

23절에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고 했지만, 이것은 무조건 자기들 말을 따르라고 강요한 것은 아닙니다. 리더가 무조건 자기 말만 들으라고 강요해서는 곤란합니다. 교회 일이든 영적 조언이든, 충분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이것이라고 결론이 지어질 때 서로 함께 의논해서 합당한 결정과 조언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가 되어서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번에 선출되신 분들을 비롯하여 매년 선출되는 분들, 특히 안수직이 그런 결단과 헌신을 가지고 직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런 점을 이해해주시면서, 지도자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또 때로는 ‘왜 저런 결정을 하나?’ 할 때도 있음에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선교에 대해 보고하고 그들의 말을 존중하며 그들의 제안을 따른 모습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효과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결정이 내려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노골적으로 죄를 짓는 일이 아니라면, 지도자들의 최선을 다한 결정과 리더십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체포한 후,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뭐라고 소동을 일으킵니까?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8절)


그들이 선동한 내용을 보십시오. ‘이 사람(바울)은 곳곳에 다니며 우리 백성, 즉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들을 모욕하고 율법과 성전을 비방한 자’라고 합니다. 6장에서 교회 역사상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이 바로 이런 죄목으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과 똑같은 비난입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스데반을 죽이는 그 자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똑같은 죄목으로 고발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은 바울이 이방인들까지 성전에 데려 왔으니 이는 성전을 더럽힌 거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성전의 이방인 뜰이 있고 거기를 넘어가서는 안 됐습니다. 그래서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이 이 구역을 넘어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가 붙잡히면 누구라도 죽음을 당할 것이며, 그것은 그 자신의 책임이다.’라는 경고문을 헬라어와 로마의 라틴어로 돌에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고고학자들에 의해 1871년에 발굴되었고, 지금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규정, 즉 이방인 뜰을 넘어 성전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돌로 쳐 죽여도 좋다고 한 규정은 로마 사람들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로마 총독도 인정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그것을 어겼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그런 고발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 역시 ‘가짜뉴스’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29-30절)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왜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다고 생각합니까?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이 에베소 출신인 드로비모를 알고 그가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 드로비모가 지금 예루살렘까지 와서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자기들이 봤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약간 떨어진 저 아래 시내에서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지금 이 성전에도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나는 저기서 그 사람을 봤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여기도 있는 게 틀림없다.’ 이게 맞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저쪽 시내에 있던 사람이 당연히 여기도 왔을 것이라고 어떻게 자동으로 추정합니까? 그런데 너무 확신하고 있습니다. 틀림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성전 안에 이방인인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도 바울과 같이 있었다면 분명히 같이 잡아들였을 텐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드로비모는 거기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같이 온 게 아닙니다. 이처럼 증거도 없고 확인되지도 않은 모함으로 예루살렘에 소동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냅니다.


이때 이 폭력적인 사태에 당황한 성전 안의 자체 수비대가 성전 문을 잠근 것으로 보입니다. ‘문이 닫혔다‘(30)고 되어 있는데, 자동으로 닫힌 게 아니라 수비대가 닫은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는 소동이나 폭력이 일어나서 피를 흘리는 일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은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문지기 레위인들이 성전 문들을 닫아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유혈사태로부터 성전의 거룩함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전에 바울이 여러 성들, 특히 마게도냐의 여러 성들을 돌아다닐 때 여러 차례 성령님이 알려주시고 또 선지자들도 예언해준 것처럼, 사도 바울은 결국 결박되어 체포되고 끌려가는 환난을 정말로 당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이 알려주셨다’고 한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언은 성취되었고, 바울은 그 사실을 알고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처럼 그 길을 선택해서 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바울이 체포된 것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보와 오해와 미움과 증오로 인한 것이란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2천 년이 지나서 민주국가, 법치국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현대 사회가 되었습니다. 성숙한 법치사회가 되어서 그런 일이 안 벌어질 것 같은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세상은 똑같고 사람도  똑같다는 것을 요즘 많이 보지 않습니까?


2-3년 전쯤에 한국에서 이전 정권에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사건이 터졌고, 그 전 정권도 블랙리스트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지금 정권도 비슷한 의혹이 있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배우들을 침대 위에 벗고 있는 남녀 사진에 얼굴을 합성해서 슬쩍 흘리는 일을 정보기관이 하여 그들의 이미지를 떨어뜨려서 방송에 못 나가게 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너무 놀랄 일입니다. 지금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이방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시내에서 함께 있었으니까 당연히 성전에도 같이 왔다는 식으로 선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것이 사실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하면서 온 성이 소동하여 움직입니다. 그리고 비울이란 표적에 마치 벌 떼처럼 ‘백성이 몰려들어’ 공격합니다. 


요즘도 사람들이 조금만 선동하면 군중이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뉴스를 보십니까? 틀림없습니다. 어떤 뉴스가 탁 나오면, 내가 별로 동의하지 않고 듣기 싫은 소리면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 귀에 아주 좋은 내용이면 열심히 읽으면서 ‘이것 봐라. 현실이 이렇다.’ 하며 흥분하지 않습니까? 내가 듣기 좋은 것은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진짜 사실이라도 틀렸다고 하면서 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 미디어를 통해서 선동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특히 공영방송 TV의 힘이 아주 막강하고 주요 일간지의 힘이 엄청나기 때문에, 권력을 잡는 사람들마다 언론을 자기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특히 독재국가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개인별로 다 SNS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도 합니다.


지난 8월 중순부터는 한국에서 어떤 분이 장관후보자가 되어서 전부 그 사람 뉴스밖에 없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 한 사람을 놓고 언론이 힘겨루기를 하고, 국회도 그렇고, 온 나라가 나뉘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대학생들까지도 일어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성향의 소리에는 귀를 닫고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할 책임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흥미로운 것이 있습니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중간 입장에서 보면 너무 경이롭습니다. 분명히 똑같은 사건인데도 한쪽에서는 ‘모든 의혹이 이제 다 해결됐다.’라고 하고, 다른 쪽은 ‘하나도 해결된 게 없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똑같은 일을 그렇게 보는지 신기합니다. 또 다른 게 나오면 이것은 뭐가 잘못됐고 전달한 사람이 잘못됐다 하고, 저쪽은 사실이라고 철썩 같이 믿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어서는 안 되고, 이것이 정말 사실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함부로 옮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도 카톡 같은 것으로 많이 보내지 않습니까? 대부분 확인이 안 된 것들입니다. 가짜뉴스들이 너무 많습니다. 크리스천들이 그런 것을 전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확인을 해야 하고, 확인이 되었어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정도는 몰라도 남에게까지 퍼나르고 강요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Peter Parker)가 존경하고 따르던 삼촌 벤 파커가 강도에게 당해 죽어가며 한마디를 남깁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라는 유언적 대사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나는 장난인데 개구리 입장에서는 생명이 달린 일이라는 겁니다.


소위 요즘 가장 유명한 통신이 ‘카더라‘ 통신입니다. 유언비어뿐 아니라, 소위 공영방송이나 유명한 신문도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가는 일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요동을 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정말 신중할 필요가 있고, 특히 무슨 일이 나오면 악성댓글, 상처를 줄 만한 말들, 욕설들은 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저 멀리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거기에 연관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가 아닌 것을 퍼 나르다가 또는 그것을 주장하다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곡 기억해야겠습니다. 


정치적인 일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다 카더라. 그렇다 카더라.’ 하는 것을 우리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카더라’가 아니라 진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를 늘 생각하며 사는 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특히 확인되지 않은 일이나 그냥 소문만 가지고 편을 나누고 상대를 모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겠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성경적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극히 일부만, 내 눈앞의 보이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벌어진 일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과 마음의 중심까지 꿰뚫어보시고 의도까지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유일하게 하나님만이 심판을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2.로마군의 개입으로 보호되는 바울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1-32절)


성전 이방인의 뜰에는, 이방인들이 더 이상 성전 안으로 들어갈 경우 어떤 죽임을 당해도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돌판을 붙여 놓았다고 했습니다. 로마 당국도 그것을 허용해주었습니다.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유대인들은 정말 싫어했습니다. 이전에 성전 내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로마 군대 일부가 성전에 들어갔다가, 군인들이 돌을 맞고 도망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가 큰 군대를 출동해서 진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폭동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로마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린 겁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데리고 출동합니다. 이렇게 신속한 출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 당시 로마 군대가 성전 바깥뜰과 계단으로 연결된 안토니오 요새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가보았을 때 보니까, 안토니오 요새 터가 성전 터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천부장은 보병 760명과 기병 240명, 즉 천 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린 사람입니다. 로마에서는 군대 호민관과 같은 급의 고위 군사직, 즉 높은 사람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천부장은 나중에 나오는 23장 26절을 보면 그 이름이 글라우디오 루시아였습니다. 성전 주변에서 자주 발생하던 소요를 비롯한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하던 고위급 장교였습니다.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출동했는데(32), “백부장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휘하에 100명을 거느린 백부장이 두 명 이상이라는 말이니까, 최소 200명에서 수백 명의 군인들이 출동한 것입니다. 성전에는 유대인 자체의 경비대가 있었지만 동조를 한 것인지 통제를 못한 것인지, 수백 명의 로마 군대가 출동하니까 비로소 소동을 일으키던 사람들이 바울을 때리는 것을 멈추었다고 나와 있습니다(32).


그러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뭘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폭행을 한 겁니다. 노년기에 접어든 바울이 얼마나 많이 다쳤겠습니까? 굉장히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군대가 출동하니까 그때에야 멈췄습니다.


문제는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은 28-29절에 나온 것처럼 바울이 성전에 헬라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헛소문으로 인한 소동이었습니다. 진짜 문제 때문이 아니라 선동으로 인한 헛소문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사람과 시내를 다녔다는 것만 보고 그렇게 한 것이고, 바울이 평소에 가르친 것을 봐서는 틀림없이 같이 갔을 것이라고 추정한 데서 비롯된 오해였습니다. 추측으로 이렇게 된 겁니다. 추측만 하고 일을 벌이면 항상 이렇게 억울한 피해자들이 나옵니다. 바울이 지금 그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3-34절)


바울이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을 천부장이 보았으니까, 우선 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우선 바울을 잡아, 12장 6절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양쪽에 로마 군사 한 명씩 붙어 두 명에게 쇠사슬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결박했습니다. 12장에서 베드로가 잡힐 때도 그런 식으로 결박되었는데, 바울도 한 명씩 양쪽에 두 명의 군인들에게 쇠사슬로 연결되어 잡혀가게 됩니다. 


또 이 장면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쓴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 22장(52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셨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물론 성전 경비대장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 집으로 끌려갔던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그 차이점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로마군 경비대에 직접 체포되어 결박당해 끌려간다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경비대 호민관인 로마 천부장은 피의자를 우선 확보하고 보호한 후,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다음 단계로 그의 신원과 무슨 잘못을 했는지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확인도 안 하고 무조건 폭행을 했는데, 오히려 로마 천부장은 합리적으로 절차를 지켜가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흥분하면 막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안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회에서 질서대로 나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가 종종 있어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진상 파악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여기서는 이러고 저기서는 저러며 막 소리를 지릅니다. 히브리어로 소리치고 헬라어로 소리쳐서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진상 파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 수비대가 있던 안토니오 요새로 데려가라고 명합니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5-36절)


흥분한 사람들은 로마 군인들이 바울을 데리고 갈 때 따라가면서 옆으로 달려들어 바울을 뒤에서 또 옆에서 계속 때리며 갔다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 칼로 찌를 수도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합니다. 그래서 군사들이 아예 바울을 들고 보호하면서 갔습니다. 계단에서 들어메고 갔습니다. 바울은 정말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여기서 떠오릅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네가 그리스도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묻고, 23장을 보면 빌라도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습니다. 그때 무리들은 “없애버려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던 장면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바울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를 죽여라’ 하는 사람이었을 텐데, 지금은 ‘바울을 죽여라’ 하는 예수님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색의 선동에 의해 폭동이 일어났을 때, 에베소의 서기장이 폭동을 진정시켰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여러분이 이러면 좋지 않습니다. 당신들에게 손해가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무마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서도 완전히 근거 없는 누명을 쓰고 집단 폭행을 당했습니다. 아마 바울이 속으로 ‘아,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에베소에서는 에베소 서기장이, 지금 예루살렘에서는 로마군 예루살렘 수비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와 그의 군인들이 와서 보호해주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다 주님께서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까지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로마까지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제국의 땅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때로 결박과 환난과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보호의 손길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호의 손길이 같은 믿는 사람들일 때도 있지만, 이처럼 세상의 권력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굉장히 힘들었을 2차 전도여행 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18:10)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아가는 사람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상황에서 뭐가 내게 유리한가 하며 그리로 가는 게 아니라, 내게 불리하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좁은 길을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갈 때 분명히 고난이 있지만, 고난 속에서 지켜주시는 손길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으로 갈 때는 전혀 알지 못하던 놀라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큰 은혜와 놀라운 유익을 얻게 됩니다.



3.스스로 변호하는 바울


군사들이 바울을 둘러메고 계단을 지나 로마군 수비대 영내로 들어가기 전에 바울이 놀랍게도 천부장에게 말을 겁니다.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 이르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7-38절)


개역개정성경에는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냐?“라고 약간 건방지게 들릴 수 있는 투로 번역해놓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천부장은 지금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킨 것의 중심에 있고 유대인들이 폭행을 가하던 그 사람이 헬라어로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좋겠습니까?“ 하니까, 유대인이라 히브리어만 하는 줄 알았다가 헬라어를 유창하게 하니 깜짝 놀라서 “당신이 그리스 말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되물은 겁니다. 


로마의 장교인 천부장이 사용하던 언어는 당연히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였습니다. 그런데 헬레니즘 문화의 발생지인 그리스의 언어가 헬라어니까, 그 당시 세계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천부장은 이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어를 구시하는지 놀라면서 즉시 들었던 생각은 이전에 그리스어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객 4천 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들어간 애굽인이 생각났습니다. 이전에 자객 4천 명을 데리고 소동을 일으켰다가 메시아 운동을 위해 광야로 들어갔다고 하는 이집트 출신 유대인이 있었는데, ‘당신이 그 사람입니까?’라고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오해를 받아서 얻어맞을 뿐 아니라, 이제는 로마군대의 천부장에게까지 자객 4천 명을 거느리던 이집트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입니다. 여기 ‘자객’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terrorist’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카리’입니다. 식칼을 품고 다니던 사람들이어서 시카리입니다(?). 실제로 단도를 품고 있다 꺼내어 죽이는 자객이었습니다. 그런 극렬한 유대주의자들의 괴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전에 바울은 오히려 고린도에서 배 타고 오려다가 바로 그 시카리들을 고린도 유대인들이 고용하여 그들이 유대에서 와서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저 북쪽 마게도냐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냐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고, 아주 위험한 순간입니다.


비록 벨릭스 총독이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그 무리는 진압되었지만, 그 우두머리였던 이집트 출신 유대인은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저 난리를 치는 것을 보니까 혹시 이 사람들이 그 이집트 출신 유대인을 잡은 게 아닌가 추측한 겁니다. 이때 위험하기도 하고 바울이 화가 날 만도 한데, 그는 차분히 자신을 소개한 후 정중하게 한 기지 부탁을 합니다.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39-40절)


‘나는 결백합니다’ 하며 무죄를 주장하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때를 오히려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지금 굉장히 얻어맞고 폭행을 당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로마군대가 구출해주어 ‘아휴 나 살았다. 다행이다.’ 하고 갈 순간인데, 돌이켜 자기를 때리던 사람들에게 말을 좀 하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복음 증거입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이게 되겠습니까? 정말 바울은 복음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내 신변이 위험하고 천부장이 나를 오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정말 바울은 푹 찌르면 복음만 나올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했을 때 보통 뭐라고 합니까? 큰소리 치면서 “여기 책임자 누구야? 나오라고 해!”라고 하거나 “매니저 불러!”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이 상황조차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습니다. 바울은 생각이 정말 우리와 다른 사람입니다. 저 같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왔으니 너무 위험하다.’라고 할 텐데, 바울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려왔으니 너무 잘됐다. 복음을 전해야겠다.‘라고 합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정말 대단합니다. 매 맞고 끌려가는 순간에도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꼭 본받아야 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복음을 전하는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그 애굽 사람이 아니라고 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전에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유대인이고 동시에 길리기아 지역 대도시인 다소 시의 시민이다.‘라는 것을 밝힙니다. 아직까지는 로마시민인 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나중에 위기 때는 밝히지만 처음부터 신분의 힘을 이용해서 빠져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헬라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조용해진 겁니다. 그는 히브리 방언, 즉 아람어로 말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지만 로마의 속주였던 길리기아 지역 다소 시민이며, 아람어와 그리스어 등을 다 하는, 언어에 통달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세상 경력이나 신분이나 능력이 우리에게 자랑거리나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사용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것들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던 안토니오 요새로 끌려가는 순간에도 성전과 요새 사이를 연결한 통로 충계처럼 불편한 상황에서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와 복음을 그들에게 들려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못하지만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었든지 전해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자신부터가 상황이 좋든지 안 좋든지 어떻게든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왜 그렇게 애를 썼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이들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운 이 순간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헌신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에 바울과 같이 복음을 향하여 이러한 헌신과 결단으로 나아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했다고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