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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26일 수요예배

나는 믿는다 사도신경 14

영생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1117~27)

 

1.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 그리고 영생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기적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이고, 그것도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을 다시 살렸다는 면에서 엄청난 기적입니다. 단지 아픈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죽어서 무덤까지 들어갔던 사람을 살렸으니까 다른 기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기적이 미친 파장이 엄청났습니다. 얼마나 강력했으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아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고(53),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까지 죽이자고 했겠습니까(12:10-11)?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 요인이 되는 기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기적 이야기에는 이런 외적인 것 말고도 신앙적으로 중요한 메시지가 많이 들어 있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예수님이 주려고 작정하신 메시지가 처음부터 아주 많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 죽음을 어떻게 이기는가?’ 하는 메시지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으니 믿음이 죽음을 이겼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사람들은 죽음에 계속 잡혀 있었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문과 죽은 나사로를 동여매고 있던 수의는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부터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랬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랬으며,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큰일 났다. 나사로가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은 죽어서 이제는 다 끝났다며 절망하고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은 계속해서 외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4)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1)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3)

 

예수님이 무조건 죽음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 혹은 잘못된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충격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면서 이미 죽었는데 안 죽었다고,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해 시신을 집에 두고 있다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뉴스에 나오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런 시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4-15)

 

14절에 분명히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셔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5)

 

이 구절은 영어로 “Jesus wept.”이며, 영어권에서 성경 퀴즈를 할 때 성경에서 가장 짧은 절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의 답(요한복음 11:35)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기적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강력하게 주고 싶으셨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죽음을 이긴다.’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앙인은 죽음을 이겨야 하며, 이길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기에 사람들은 그 기적에만 눈길을 주면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과 그분의 메시아 되심에 열광했지만, 이 일을 통해 주님이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신앙인은 죽음을 이겨야 하며 이길 수 있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5-26)

 

예수님은 여기서 헬라어 원어로 에고 에이미(ego eimi)’, 나는 OO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이라고 하신 것과 같은 신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신적인 표현까지 써 가시며 당신이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셨고, 그러니 당신을 믿는 사람(신앙인)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신앙인은 죽음을 이겨야 하고 이길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이러한 표현에는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신 후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닙니까?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으니까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인데, 주님을 믿는 자가 죽어도 산다는 것은 일단 죽은 다음에 살아난다는 말이므로 서로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잘못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영적인 것을 말하면서 믿음은 바로 그 죽음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코 논리적으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인은 죽음을 이길 수 있고, 또 이겨야 한다라는 것을 더 강력하게 강조하시기 위해서 두 번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인은 죽음을 반드시 이겨야 하고, 또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신앙 고백이 사도신경의 마지막 열두 번째 고백의 핵심 의미입니다.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중요한 영적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래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5:24, 새번역)

 

이 말씀 그대로 영생은 모든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귀한 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신자들이 영생을 나중에 죽은 후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산다라는 개념으로만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라는 이 귀하고 중요한 선물이 현실적으로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먼 훗날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4)

 

마르다에게 별명을 지어준다면 여자 베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때로는 자기 생각대로 열심을 내다가 심지어는 예수님을 책망하기도 한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 생각으로 넘어지기도 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무너지기도 하는 겁니다.

 

마르다의 말은 신앙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마지막 날 부활이 있을 것은 믿고, 그래서 나중에는 다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지금은 별로 소용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오랜 후에는 부활하고 살아나겠지만 지금은 다 끝났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먼 훗날 부활에 대한 소망을 주지만, 지금 당장 자기들에게 닥쳐온 이 죽음의 절망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다음 주님의 말씀에서 답답해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5-26, 새번역)

 

먼 훗날에 있을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순간 죽음을 이기는 믿음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는 마르다에 대하여 안타까워하시고 답답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영생은 미래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그런 막연하고 아득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관념적으로만 말하는 추상적인 이야기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말은 구원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분명 영생이 구원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나중에 받을 영적인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축복과 능력인 것처럼, 영생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구원에는 분명히 받은 구원’(), ‘받는 구원’(, 인격), ‘받을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받은 구원만 주로 생각하고, 그 결과로 나중에 받을 구원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받는 구원’, 즉 이 땅에서 주님을 따르며 천국을 누리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제 최대 관심사는 나중에만 누리는 영생이 아닙니다. 이 순간 누리는 영생이 중요합니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으로서의 영생말입니다. 지금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죽은 후에 영생을 누리겠습니까?

 

다시 말해,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행복과 평안을 누리며 천국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그렇게 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사는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매일 매 순간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으로 돌변하여 영원히 함께한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사도신경의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믿음의 아주 강력한 능력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나는 더 이상 죽음에 잡혀 있지 않음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이 열두 번째 고백은 사도신경 전체의 신앙 고백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싸움이 바로 죽음의 세력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2.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

 

영생의 믿음으로 사망을 이기는 것이 신앙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죽음은 한계입니다. 우리 인생을 가두어 두고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한계입니다. 열왕기하 6장에 나오는 아람의 벤하닷 왕에게 포위된 사마리아 성처럼, 심지어 굶주림 때문에 여인들이 돌아가며 자기 자식들을 잡아서 삶아 먹는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 갇힌 채 어떻게 할 수가 없고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모든 인생에게 고통을 주는 사망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이 죽음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게 해줍니다.

특히 죽음이 주는 두 가지의 올무를 벗어나게 합니다.

 

첫째, 믿음은 두려움이라는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죽음은 두려움이라는 올무로 사람들을 묶어 놓고 있습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더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두려움이라는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둘째, 믿음은 허무라는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죽음은 그냥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허무로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으면 다 끝난다고 하면서 삶의 가치? 의미? 다 소용없다. 죽으면 다 끝난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마구 살자.’라고 합니다. 죽음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있는 것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시에 나오는 말입니다.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라는 뜻으로, “현재를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어라.”의 부분 구절입니다. 인생이 짧으니까 미래에 너무 매이지 말고 현재를 마음껏 즐기고 살라는 뜻이 됩니다.

 

이 말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주인공 존 키팅(John Keating)이 자기의 수업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처럼 부모의 강요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그래서 마음껏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카르페 디엠죽음의 허무라는 한계에 붙잡혀 살아가는 안타까운 인생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훗날 존 키팅선생의 역할을 하면서 카르페 디엠을 소리 높여 외쳤던 배우 로빈 윌리엄스(Robin Williams)63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그의 사망이 실제로는 이 말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안타까움과 허무를 느끼게 합니다. ‘죽음의 한계에 붙잡힌 인생이라는 면에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죽음의 협박 앞에 두려움으로 떨지 않게 해줍니다. 물론 두려운 상황이 올 때가 있지만,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죽으면 죽으리라의 신앙, 영생의 그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또한 죽으면 끝이라는 허무 때문에 막 살지 않게 우리를 지켜줍니다. 지금 가는 이 길이 아무리 좁고 험해도, 욕망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해도, 너무나 빠르게 이 삶이 끝날 것 같은 허무함과 허탈함이 밀고 들어와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살게 될 것에 대한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는 좁은 길을 바르게 또한 아름답게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선교의 역사에 있어 감동적인 이야기를 남긴 짐 엘리엇’(Jim Eliot), 그는 일찍이 자기의 삶을 하나님에게 헌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학 2학년 때 선교사로 헌신한 그는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다른 네 명의 동료와 함께 남미 에콰도르의 아우카족에게 선교하러 갔다가 복음 한마디도 전하지 못한 채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라이프(Life)지에서 “What a Waste!”(이것이 무슨 낭비인가!)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냈을 때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Elizabeth Ellio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낭비라니요?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나의 남편은 어려서부터 이 순간을 위해서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짐 엘리엇이 대학생 때부터 기록했던 일기와 글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생의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죽음의 위협과 협박과 유혹이 통하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짐 엘리엇의 말을 거꾸로 보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한 것을 버리는 자는 정말로 어리석은 자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을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영생을 가졌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영원하지 않은 것, 이 세상에서 다 끝나버릴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한 것,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신앙 고백을 그대로 이어받아 동일하게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바르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것, 나는 죽음의 한계를 믿음으로 뛰어넘습니다. 나는 더 이상 죽음에 잡혀 있지 않습니다.’라는 이 고백이며, 그렇게 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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