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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youtu.be/6wIwsL9GKAg?t=1673

 

 

20211117일 수요예배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12

분노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1)

 

그 동안 다루던 <왜 분노하는가?> 책을 마무리하면서 맨 뒤에 분노에 대한 질문들이 나오는데, 부록 같은 부분이지만 상당히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많아서 그것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12개의 질문들이 있는데, 시간관계상 두 번에 걸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그가 하나님께 섭섭하다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3)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4:5-8)

 

만약 가인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분노를 표출했으면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가 분노할 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미리 경고하셨는데, 그때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말씀드렸으면 살인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 보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못했고, 그렇다고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뭐라고 하기는 두려우니까, 가장 만만한 동생 아벨에게 화풀이를 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또 비겁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분노를 표출하고 따지는 것을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하십니다. 예언서를 보면 하나님이 나와 변론하자고 먼저 토론을 제안하셨습니다. 요즘 큐티 본문인 욥기를 보면 욥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자신의 고난에 대해 왜 이러느냐고 따지며 항의하는데, 불경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정을 표출했기 때문에 가인과 같은 죄의 길로 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분노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분노를 표출하고 따져야 합니다. 그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이며, 그래야 치유될 수 있습니다.

 

 

2.  동일한 사건에도 어떤 사람은 분노하고 어떤 사람은 분노하지 않는데 왜 그런가?

 

분노는 외부적인 요인이라기보다 내 안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바뀌지 않으면 분노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노의 가장 큰 원인은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기분이 나쁘니까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도 자존심이 꺾이지 않아서입니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서든, 누구를 사랑하기 위해서든, 자존심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자존심은 어떻게 무너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질 때 자존심이 무너집니다. 내가 예수님의 목숨 값으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게 되면 어떤 시험이 오더라도 나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자존심이 무너집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 예수님의 사랑이 믿어지고 자존심도 무너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상상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두 팔 벌리고 죽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겁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 사랑을 알면 자존심이 산산조각 나고 분노가 씻겨 나가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20, 새번역)

 

더 소중한 것을 붙들 때 덜 소중한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나를 붙들고 있으면 절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붙들면 나를 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나를 붙든 채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건 참 신앙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3.  내 안의 쓴 뿌리가 육아 중에 분노로 불쑥불쑥 나올 때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이 쓴 뿌리를 끊을 수 있을까?

 

그냥 끊어버리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모든 상황에 선한 목적이 있다고 믿게 되면,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이런 힘든 상황을 허락하신 것에도 분명히 선한 목적이 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배우자를 주셨습니까?’ ‘왜 나에게 이런 아이를 주셨습니까?’라고 하기보다, 여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겠습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상황이 아닐지라도, 비록 내 뜻과 다른 기도 응답을 받았더라도, 거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이 끝나면 그동안 자기를 힘들게 했던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서로 안아 주면서 그 동안 미워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슬림들도 그렇게 하는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이런 것이 더욱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한 번 안아주며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감정이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꾸 입 밖으로 쓴 뿌리를 끌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회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절대 말하지 않으면 쓴 뿌리는 속에서 더 곪아 썩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또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12:14-15, 새번역)

 

그런데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말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합니다. 이것은 갈등을 다루는 방법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내 감정을 드러내야 하고, 또 회복을 목표로 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복하기 위해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에 솔직해야 신앙생활도 건강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닌 척하고 감추기만 하면 외식(위선)하는 자가 되어 교활해질 뿐입니다. 분노를 컨트롤하는 능력도 자기감정에 솔직할 때 가능합니다.

 

 

4.  결혼 문제로 믿지 않으시는 아버지와 자꾸 부딪친다. 아버지와 잘 지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합니다. 아버지가 화를 내면 와락 끌어안고 사랑합니다.” 하고 말하면 됩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 사랑 받고 자라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한국전쟁 중이나 직후에 태어났거나 자란 세대는 끔찍한 가난을 경험하다보니 정서적으로도 가난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그 세대는 관계 맺기에 서툽니다.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어른이지만 자식이 먼저 껴안아드리는 겁니다. 아버지에게는 자녀를 먼저 끌어안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능력이 부족하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먼저 만난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그 사랑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먼저 용납하고 안아주고 위로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자식의 사랑합니다라는 한마디로도 울컥해서 눈물을 쏟습니다. 그 한마디로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냥 사랑하고, 아버지와 논쟁하지 마십시오. 어느 아들이 <아버지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하기 위해 아버지를 안아드리며 사랑합니다.”라고 했더니 갑자기 아버지가 꺽꺽 우시더라는 겁니다.

 

또 어떤 아버지는 아들이 어렸을 때 너무 많이 자주 매를 들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것이 회개가 되어 어느 날 무릎을 꿇고 울면서 아들에게 미안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들끓던 아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도 울 수 있다니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먼저 끌어안게 됩니다. 먼저 화해하고 먼저 용서를 빌게 됩니다. 아버지 세대는 웬만해선 참고 견디고 사느라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꺼 버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자식이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면 꺼져 버린 감정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일본에서도 선교사들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녹아버리는 겁니다. 십자가를 볼 때 예수님께서 나에게 사랑한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들리는 것, 즉 십자가가 사랑임을 믿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3:16, 새번역)

 

이 말씀이 믿어질 때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며, 전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더 이상 분노에 사로잡힌 인생이 아니라 사랑에 사로잡힌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미워하고 싶어도 더 이상 미워할 수 없게 됩니다. 먼저 사랑하므로 끌어안고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5.  요즘 뉴스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 화가 난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점점 두려운데, 분노한 사람은 피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도하며 끝까지 전도해야 하는가?

 

정말 사랑한다면 포기하지 못합니다. 자녀가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부모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믿으라고 강요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랑하러 오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전도하려니까 사람이 두려운 겁니다. 사람이 사랑스러우면 아무 이유 없이 그 사람한테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랑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자녀도 전도의 대상이기 전에 사랑의 대상입니다. 부모가 오로지 사랑으로 보살피고 대하면 굳이 교회 오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오게 됩니다. 굳이 말씀을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말씀을 찾아 공부하게 됩니다.

 

요즘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사라진 교회가 많다고 합니다. 충분히 사랑해주지는 않으면서 먼저 가르치기만 해서 그렇습니다. 사랑은 안 해주면서 주일 성수해라’, ‘옷 똑바로 입고 다녀라’, ‘그런 옷을 입으면 안 된다’, ‘헌금 제대로 해라’, ‘예배 시간 제대로 지켜라하며 명령부터 하니까 자녀들이 못 견디고 교회를 떠나는 겁니다. 부모가 집착하며 체면으로 사랑하는지 희생으로 사랑하는지 자녀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전주 콩나물해장국집의 욕쟁이 할머니가 있는데, 누구한테든 욕을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욕을 들으면서도 다른 집이 아니라 그 집에 콩나물해장국을 먹으러 갑니다. 왜 그럴까요? 할머니가 욕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표현은 거칠어도 사랑이 있는 사람이 있고, 말이나 표정이 부드러워도 교활한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만 경건하고 그 속에 사랑이 없는 것 때문에 이 시대에 기독교가 욕을 먹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6, 18)

 

그리스도인은 작은 예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품은 사람은 예수님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걱정하지 말고, 먼저 사랑을 베풀고 나누며 품으면 됩니다. 어떤 종교적 활동보다도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6.  요셉 같이 분노를 참고 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요셉도 아들에게 므낫세(잊혀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외롭고 힘들었던 게 아닐까?

 

성경 어디에도 요셉이 분노했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표현이 없다고 해서 요셉이 분노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을 엎을 만큼 분노하셨는데 요셉이 어떻게 화가 없었겠습니까? 용서했다고 해서 상처 받은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요셉은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다른 일에 몰두하고 전념했습니다. 화가 나고 속상한 것을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일에 더 묶이게 됩니다. 요셉처럼 그 일과 상관없는 좋은 일에 몰두하고 도전할 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분노를 쏟아 놓아야 합니다. 분노는 어떻게든 처리해야 쓴 뿌리가 되지 않는데, 하나님이 아닌 사람한테 처리하면 일이 더 복잡하고 더 큰 분노를 불러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다 쏟아놓아서 분노를 처리할 수 있기 바랍니다.

 

몇 주 전 시편 109편에서 살펴보았듯이 다윗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분노를 일으키는 대적들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09:7-13)

 

이 얼마나 끔찍한 내용의 기도입니까? 도대체 믿음의 사람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의 신앙이 끝까지 건강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분노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느끼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 인간의 이빨을 부러뜨리시든지,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시든지, 아예 죽여주십시오. 저런 악한 인간에게 벌을 내리시는 게 공의로운 것이 아닙니까?’ 하고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상당히 불경하다고 하시겠습니까? 오히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거룩한 척하며 기도하는 게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합니다. 분노는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은 채로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분노를 바르게 처리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귀한 믿음의 사람들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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