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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7일 수요예배

분노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는 길 9

세례 요한의 분노: 진리를 위한 분노는 크리스천의 임무다

(마태복음 31~12)

 

[들어가는 말]

 

가스의 폭발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강한 폭발력을 이용해 화력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밸브로 잘 조절하지 않으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난 2008926일 친교실 공사 중 일어난 가스 폭발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본당에 들어오는 저 문짝들이 떨어지고 유아실과 방송실 큰 유리까지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천정 타일들이 다 떨어지고 저쪽 교실 벽들도 다 터지고 무너졌습니다. 그때 사진을 보면 정말 처참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 처참하고 끔찍한 폭발의 결과가 바로 분노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분노는 폭발력이 엄청납니다. 잘 조절하지 않으면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분노를 조절하는 밸브가 고장 난 것을 우리는 분노조절장애라고 부릅니다.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는 분노 밸브가 고장 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가정과 일터와 사회가 위험하고, 각종 폭력과 테러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분노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노에 사로잡히면 매우 위험하다고 가르치는 동시에, 마땅히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고도 가르칩니다. 세례 요한은 마땅히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한 담대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세례 요한의 분노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긍휼과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분노

 

세례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 동시에,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는 그가 분노했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전후 맥락이나 그의 말을 보면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세례 요한은 왜 그렇게 화가 난 것입니까?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1-2)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교롭게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도 똑같았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4:17)

 

회개란 무엇입니까? 가던 길을 돌이킨다는 의미입니다. <생명의 삶>에서 배우는 것처럼 회개는 하나님과 동의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이것은 죄다. 너는 죄인이다.’라고 하시면 , 그렇습니다.’ 하면서 , 그리로 가는 건 틀렸다.’라고 하실 때 , 그렇습니다. 제가 틀렸네요. 바꾸겠습니다.’ 하며 방향을 바꾸어 유턴하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반복해서 그렇게 회개하라고 외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길이 잘못되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이 잘못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때문입니다. 셋째, 잘못된 길로 이끄는 사람들과 잘못 가는 줄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사춘기 자녀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세례 요한의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춘기 자녀는 가라는 길은 안 가고 가지 말라는 길만 골라서 갑니다.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부정하고 봅니다. 그럴 때 부모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자녀가 고집부리는 그 길이 잘못됐다는 믿음 때문에 안타깝고, 잘못된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안타까우며, 또한 그런 길로 이끄는 자녀의 친구들에게 화가 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말에는 긍휼과 분노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천국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로는 갈 수 없고 그 길을 반대로 돌이켜야 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에서 이 발언은 대단히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믿고 있었고, 계속 그렇게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은 그들이 천국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됩니다. 세례 요한이 그 뜻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친 것은 그만큼 그의 마음에 긍휼과 분노가 차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3-4)

 

요한이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하니까 건강식만 먹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웰빙이 중요한 이 시대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요한은 에세네파 사람이었다고 추정되는데, 에세네파는 도시 생활과 거리가 먼 동굴 생활을 하면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때우는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메뚜기와 석청은 건강식이 아니라 매우 검소한 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5-6)

 

놀랍게도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세례 요한에게 나와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부정하는 그의 메시지에 동의했다는 것이고, 또한 그 단순한 메시지를 듣고 그들이 자신의 삶을 돌이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메시지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것 하나로 충분합니다. 구원이란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구원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던 길을 열심히 가기 위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거꾸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7)

 

세례 요한은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자기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오는 것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당시 유대의 대표적 종파들로서, 유대교의 종교 시스템을 떠받치는 양대 산맥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문가로, 성전과 제사 제도를 유지하고 장려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아왔는데, 그것을 본 요한은 대뜸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하고 욕을 합니다. 이것은 당시로서 그 어떤 비난의 말보다도 더 심한 욕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런 욕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은 평소에 그런 험한 말을 마구 쏟아내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그렇게 심한 말을 퍼부었다는 것은, 그가 평소에 그들에게 얼마나 분노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3)

 

놀랍게도 예수님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똑같은 욕을 하며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23장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연속으로 외치시는 가운데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분노와 예수님의 분노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용감한 분노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왜 그들에게 분노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영혼을 빼앗아 가는 도둑이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다칠 때는 병원에 가서 치료하면 됩니다. 물건을 도둑맞으면 변상을 받거나 다시 구입하면 됩니다. 하지만 영혼을 도둑맞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고, 영원히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혼을 빼앗긴다는 것은 살아도 죽은 목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조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말을 믿고 따라가면 정말 위험합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분노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길로 백성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8-9, 새번역)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도 가장 혈통이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요즘 말로 금 수저내지 다이아몬드 수저인 이들에게 요한은 너희는 주제넘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여기 지천에 깔린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라고 합니다. 아마도 세례 요한의 이 독설을 들은 그들은 큰 충격을 받고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 이 독사의 자식아, 네가 설교할 수 있으면 이 돌들도 설교할 거다.’라고 한다면 제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겠습니까?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이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는데 ,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교회에 다닌다고 주제넘게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 돌들도 일어나서 교회에 갈 수 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그들을 향해 그렇게 엄청난 분노를 표출하며 독설을 쏟아냈습니다.

 

사실 우리는 보통 내 윗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것도 사람 봐 가면서 내야지 아무한테나 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후환이 두려운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화를 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결코 그런 계산을 하고 말을 한 게 아닙니다. 그는 그 정도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며 계속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0, 12)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가 오시면 알곡이 누구이고 쭉정이가 누구인지 분명히 드러날 것인데, 너희는 쭉정이니까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종교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정도의 말을 하게 되면 결코 안전할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이런 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요한은 자신을 뭐라고 소개합니까?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1)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주 잘 알았습니다.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평생 거침없는 행보를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율법학자, 바리새인, 사두개인에게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더니, 나중에 헤롯 왕에게도 역시 누구도 하지 못하던 바른 말을 합니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신의 아내로 맞는 불륜을 저질렀을 때, 세례 요한은 그것을 눈감지 않고 직접 문제 삼았다가 옥에 갇히고, 결국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결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갔고, 심지어 자기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께로 가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자 남아 있던 제자들이 억울하다는 듯이 사람들이 다 예수라는 사람에게 가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3:29-30, 새번역)

 

세례 요한은 종교지도자이든 왕이든 지위와 상관없이, 나중에 돌아올 후환도 계산하지 않고 죄악에 대해 분노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조차 자기를 떠나 버렸지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구원 받겠다고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썰물 빠지듯이 예수님께로 싹 떠나버린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그 예수님 때문에 너무 기쁘다고 말합니다.

 

 

3.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분노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시기심이나 질투심이나 탐욕으로 인해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는 분노했습니다. 우리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화를 냅니다. 그러나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는 침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세례 요한은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군지 잘 알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러한 올바른 지식이 그로 하여금 분노해야 할 때와 분노하지 말아야 할 때를 분별할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비유하면서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신부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신랑이 신부를 취하기 위해 오는 것을 기뻐하는 친구라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그러면서 그는 영원히 잊힐 수 없는 말을 남깁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러한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평가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11:11a)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그는 잘되고 나는 안 되어야 한다.” 신앙의 본질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예배 때 제가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게 진짜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찬양을 잘하고, 기타를 잘 치고, 피아노를 잘 치고, 성가대가 노래를 잘하고, 대표기도를 하는 분이 은혜롭게 기도를 잘할 때 우리의 관심이 , 그 사람, 그거 참 잘하데.’라고 가면 안 되는 겁니다. 예배의 초점은 하나님께 맞춰져야지 사람에게 맞춰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마음속으로 저분이 참 은혜롭게 기도했네.’라고 하는 것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참 감사하다. 하나님이 저분을 저렇게 사용하시니 감사하다.’라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며 나아가야지, 사람이 잘한다, 못한다에 초점을 맞추면 예배의 본질이 흐려집니다. 신앙의 본질, 예배의 본질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지고 자기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알았고 또한 자기는 그분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이라는 자신의 사명을 정확히 알고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하실 만하지 않습니까?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도 중세 교회가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을 현혹하여 그 영혼을 도둑질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분노할 일이 무엇인지 세례 요한에게서, 또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누군가에 의해 피폐해질 때, 미혹당할 때, 그것을 보면 분노해야 합니다. 그 영혼을 도둑질한 사람으로부터 그들을 다시 되찾아오기 위해서 분노해야 합니다.

 

이 분노는 우리 마음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에서 비롯된 분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의로운 분노입니다. 그리고 이 분노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바라볼 때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긍휼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에게서 비롯된 확신을 가지고 나를 위해 분노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해치는 독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 안타까운 마음으로 분노할 때 그것은 피폐해지고 미혹당한 영혼을 살리는 분노가 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분노를 조심스럽게 분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가 분노하고 있다면, 먼저 세례 요한처럼 나 자신이 누구이고 또 예수님은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득할 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빚어낸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때 비로소 그들이 박해 받는 것에 대해 진정으로 분노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진정한 분노, 의로운 분노, 거룩한 분노만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비롯하여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요한과 같이 바로 그런 올바른 분노, 의로운 분노를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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