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7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5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선포하다

(사도행전 1722~34)

 

[들어가는 말]

 

20세기가 끝나기 직전에 많은 미래학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지난 100년 동안 즉 1900년대(20세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변화들이 2000년에서 2010년 사이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실제로 21세기에 들어서서 그렇게 된 것을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지금까지 10년 동안 그 이전의 10년보다 발전 속도가 더 빠른 것을 봅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새로운 것들이 나온 게 정말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와 혼동의 시대에 기술과 과학의 발전에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찾아 헤매게 됩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이 더 공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더 눈을 돌리게 되고, 영적인 것을 찾기 위해 경주하게 됩니다. 뭔가를 찾기는 찾는데 어떤 영성을 추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점점 더 영적이 되고 종교적이 되어가는 것은 사실인데, 크리스천이 되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는 하나님에 대해 일치된 견해가 없고, 각 사람이 나름대로의 신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들 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제각각인 것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우주의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라고 하면 산타할아버지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흰 수염을 휘날리며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 보는 산타할아버지 같이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외출 중인 집 주인 정도로 생각합니다. 또 나를 구원해주셨지만 그 후에는 내가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21세기가 된지 어느덧 20년째인 지금, 온갖 혼란하고 불확실한 것들로 더 가득합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2000년 전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던 아테네 사람들도 이 시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 혼동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참 신이신 하나님에 대해 아덴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바울의 선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오늘 함께 살펴보면서, 특별히 그 동안 내가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발견하고 그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아덴 사람들과의 접촉점을 통한 설교의 시작

 

지난주 본문에서, 바울이 예수와 몸의 부활에 대해 전하니까(18) 아덴 사람들은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울이 전하는 것이 아덴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를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가서 이 새 도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구합니다(19-20).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아덴 사람들과 그곳에 있는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에만 시간을 썼기 때문입니다(21). 이제 바울은 그들과의 접촉점을 찾아서 아레오바고 법정에서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2)

 

제가 바로 이렇게 바울이 아덴 사람들아라고 외친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서서 저도 아덴 사람들아!” 하려다가 주변 사람들이 많아서 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행한 설교의 첫마디는 너희를 보니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보니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더욱 종교적이다.’라는 말입니다. ‘더욱 종교적즉 비교급으로 쓴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덴은 온 도시가 크고 작은 신전들과 신상들과 제단들로 가득 찬, 그 어떤 도시보다 더 심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것은 아덴 사람들이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 종교심이 더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바울이 그들에게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다른 데보다 더 종교적이다라고 말한 것은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더 종교적이고 다른 사람에 비하여 종교심이 더 크다고 해서, 그 종교심이 그 사람을 더 세워주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사실 어떤 종교를 믿든지 사람은 종교심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자신이 믿는 대상에 대해서 조금 더 열심을 다하고자 하는 인간의 종교적인 마음은 다 똑같습니다.

 

물 하나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며 지극 정성으로 비는 분들, 미신이나 다른 종교나 샤머니즘 쪽에서 비는 분들의 태도가 사실 우리 크리스천들의 태도보다 훨씬 더 정성스럽습니다. 만약 그런 분들이 우리가 여기 와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가끔 졸기도 하고, 딴 짓 하고 있고, 딴 생각 하며 멍하니 있기도 한 모습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예배를 드리나?’ 하며 충격을 받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물 떠놓고 막 비는 분들은 정말 지극정성을 다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훌륭한 것입니까?

 

종교의 참됨 여부는 인간의 종교심, 즉 얼마나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해 열심을 다하느냐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경배하는 대상에 의해서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하더라도 그것이 가짜라면, 가짜에 정성을 다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덴 사람들은 그 어느 도시 사람들보다 더 종교적이고 종교심이 더 커서 그들이 살고 있는 온 도시를 신전들과 신상들과 제단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경배 대상은 사실 고작 나뭇조각, 쇳조각, 돌조각에 불과한 우상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덴 사람들이 더욱 종교적이라는 바울의 말은 사실 그들이 그 어느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 더 미신적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참 종교심이 많다는 말을 들은 아덴 사람들은 기분이 괜찮아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았던 사람이 자기들을 인정해주는 것 같으니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만약 바울이 , 이 우상숭배자들아! 이 헛것을 믿는 잘못된 것들아!’라는 식으로 소리쳤다면 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전도를 할 때도 부드러운 자세와 상대방을 인정하는 태도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진리를 선포하더라도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전혀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접촉점을 찾아서 바울은 가장 미신적인 아덴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위해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3)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an unknown god)”. 사도 바울은 지나가다가 발견하게 된 이름 모를 신을 위한 제단을 언급하면서 아테네 사람들과의 접촉점으로 삼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들이 그 당시 꽤 있었습니다. 고대 문헌에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BC 6세기에 전염병이 아테네를 휩쓸었을 때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의 요청을 받은 구레네(리비야) 사람 에피메니데스가 전염병으로부터 아테네를 지켜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를 구해준 신들에게 감사하기 위해 그는 아테네에 세워져 있는 모든 신상들에게 제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자기가 몰라서 빠뜨리고 제사하지 못한 신이 있을까 봐, 그러면 그 신으로부터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별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그 제단에 흰 양과 검은 양을 제물로 바쳐 제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600년 후, 오늘 본문 속에서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그 제단이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이후 125년 정도 지난 AD 175년경 당시 그리스의 지리학자였던 파우사니아스(Pausanias)라는 사람이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서 <그리스 여행(Tour of Greece)>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나라의 영광과 역사와 신화에 대해 아주 감탄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가 아테네에서 여정을 시작했는데, 지금도 아테네의 주요 항구이며 아테네 서남쪽으로 5마일 지점에 있는 피레이우스(Piraeus) 항에 상륙했습니다. 지금도 피레이우스 항에는 지중해 크루즈 같은 큰 배들이 그리로 들어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그 항구 근처에서 수많은 신전들과 더불어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신들의 제단들을 발견했습니다. 바울보다 한참 뒤였던 그때도 아테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제단에 제사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어떤 도시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많은 신상들을 만들었는데, 혹시 자기들이 생각을 못해서 만들지 못한 신이 있을까 두려워하면서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까지 만들었다면, 그 제단이야말로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미신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그 핵심은 자기가 벌 받을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실 우상숭배의 핵심에는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심이 있는 것입니다. 벌 받기 싫어서 만들었으니, 얼마나 미신적이고 이기적입니까?

 

바울이 전하는 예수와 부활에 대하여 조금 더 상세하게 듣기 위해 바울을 아레오바고까지 데리고 온 사람들은 시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쟁쟁한 사람들, 당시 아테네 최고 지성인이었던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들에게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언급하면서 너희가 지성인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정상이냐?’라고 지적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그렇게 지성적으로 살고 내가 예수와 부활을 전하니까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렇게 허황된 것을 믿고 있느냐?’라고 지적하는 게 마땅할 것 같은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 예수와 부활을 전하는 바울의 설교를 들은 철학자들 중에 바울을 무슨 의미인지 알지도 못하고 떠드는 저급한 말쟁이로 경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들도 바울을 가리켜 말쟁이라고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상식과 이성에서 벗어난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한 예수와 부활이 그동안 그들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쩌면 제우스와 헤라 부부처럼 예수스와 아나스타시스’(예수와 부활)가 새로운 부부 신이라고 생각하고 새것에 대해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호기심과 영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바울로부터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원했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도 놀랍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새 것만 추구했는데 예수와 부활이 새 것이라고 들렸기 때문에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부족함과 약점과 잘못된 것을 통해서도 역사하셔서 선을 이루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사람들을 앞에 두고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과 같습니다. ‘지금 나를 경멸하고 비웃는 여러분은 정작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경멸하고 비웃는 내가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알게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에피메니데스가 전염병 당시 제단을 만들고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하기까지 약 600년 동안 아테네 사람들이 그 제단에서 제사할 때 결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위한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제단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위한 제단이었고, 그 앞에서 드려진 모든 제사는 우상을 위한 제사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그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접촉점을 가지고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계시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천지의 주재이며 참 신이신 하나님이 계시다. 그분을 내가 설명해주겠다.’라는 것입니다.

 

 

2.   우상들로 가득한 아덴에서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

 

여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해 말하면서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도 나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바랍니다.

 

1)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4)

 

그리스 신화에 굉장히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당시, 그 도시에는 약 3만 개의 크고 작은 신들과 신상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들이거나 빚어진 우상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보십시오. 굉장히 사람 같습니다. 태어나고, 결혼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살인도 하고... 신들이 꼭 사람들 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은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3만 개 이상의 가짜 신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인간도 창조하시고 또 인간이 그렇게 우상을 만드는 데 사용한 온갖 재료들, 즉 돌과 쇠와 나무를 다 창조하신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을 가리켜 여기서 천지의 주재라고 부릅니다. ‘주재주인’(Lord)을 뜻합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던 그 신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이 천지의 주인이시다.’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인이시라는 것은 온 우주 만물을 소유하고 계시고 또 다스리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인이시라는 바울의 선포는, 아테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들과 신상들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 많아도, 그것들은 결코 천지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로 창조주시라는 것을 믿는다면, 창세기 1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를 정말 믿는다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온 우주만물을 간단히 말씀으로 창조하신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시라면, 다른 것을 못하시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서 부활했다는 것도, 사실 온 우주만물의 창조에 비하면 부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못 하시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나머지는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하신 것의 창조주이시자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성전, 건물)에 하나님이 사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주보다 더 크신,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어찌 인간이 만든 건물 속에 갇혀 계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선포하는 바울의 말이 굉장히 놀라운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바울이 서 있는 아레오바고인데, 거기 서서 남동쪽으로 올려다 보면 저 위에 아크로폴리스가 있습니다. 그 위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입구에 해당하는 프로필라이아(Propylaia)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아테나니케(나이키/Athena Nike) 신전이 있고, 그 뒤로 거대하고 웅장한 세계 보물 제1호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왼쪽 뒤편으로는 아테나 제단과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이 있습니다.

 

그 모든 신전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 하고 압도당하며 기가 꺾일 정도입니다. 누가 봐도 정말 웅장하고 너무 멋집니다. 제가 봤을 때도 너무 멋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웅장한 아크로폴리스가 올려다 보이는 아레오바고에서 그런 건물들에 압도당하기는커녕, 도리어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다!”라고 당당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웅장한데, 그 당시 아크로폴리스와 그 위의 파르테논 신전이 얼마나 웅장했겠습니까? 또 그 안의 아테나 여신상은 금빛이 번쩍거리며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들이 아무리 거대하고 웅장하다고 해도,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먼지보다도 못한 하찮은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저런 신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이것이 하나님과 우상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단 한 장소에만 국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의 특징이 그것입니다. 한 장소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예배당 안에만 계시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진짜 그렇게 믿으면 하나님을 우상숭배 식으로 믿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여기에도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집안에도, 차안에도, 학교에도, 직장에도, 사업체에도, 방 안에도, 심지어 화장실 안에도 같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곳이 어디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장소는 모두가 다 거룩한 곳입니다.

 

가끔 어릴 때 뭔가를 할 때 부모님이 봐주셨으면 했는데 안 오실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이건 절대로 남들이 보면 안 돼.’라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꼭 와서 봐주셨으면할 때도 거기에 함께 계시고, ‘이건 절대 아무도 보면 안 돼.’라고 해도 거기에도 함께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혼내려고 함께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려고 함께해주십니다.

 

일주일 동안 우리가 세상에 살다가 주일에 교회 와서 예배드린다고 보통 말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일주일 내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기도할 때 일주일 동안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죄를 많이 지었으니, 하나님, 용서해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전에 나와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라고 하면 그 말 자체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만약 그 생각 속에 내가 세상 속에 나가 살 때, 즉 가정과 생업과 거리에서 살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시고 예배당 안에만 하나님이 계시니까, 내가 여기 와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밖에 나가면 내가 알아서 산다.’라는 생각이 있다면, 하나님을 우상숭배 식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회 생활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심지어 내가 쇼핑을 가서 무엇을 하나 살 때도 내 자녀가 무엇을 살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젊은 청년들이 남자 친구, 여자 친구를 사귀며 데이트할 때 어떻게 즐겁게 데이트를 할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6일 동안에는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살다가 주일에는 하나님이 계신 교회당에 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6일 동안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흩어진 교회로 살다가, 주일에는 모이는 교회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2)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5)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선을 행하거나 봉사를 하거나 헌금을 함으로 하나님을 자기가 도와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전혀 필요가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바울이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시고 그분이 지으신 인간에게 주신 생명을 계속 유지시키십니다. 사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기를 주시고 물을 주셔서 우리가 사는 것이지, 자기 능력으로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시키시는 그분 자신이 도움을 받으실 필요가 있고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시는 그분 자신이 우리의 공급을 필요로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많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내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손해를 보시고 내가 잘하면 하나님이 이득을 보신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짓든 신앙생활을 잘하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변함이 없으십니다. 물론 마음에는 슬퍼하십니다. 그러나 손해 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제대로 못 살면 하나님은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으신다.’라는 것 역시 완전한 착각입니다. 항상 사랑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것과 상관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하나님께 의존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잘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우리의 돈이 필요해서 헌금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함을 놓은 것은 미리 준비해 와서 하나님께 봉헌하자는 의미로 놓은 것인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것으로 막아 놓고 여기에 돈을 안 넣으면 못 들어온다고 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에게 헌신하고 사역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심해서 우리에게 예배하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 참석이나 헌금이나 봉사나 다른 좋은 일로 하나님을 돕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 대단한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하나도 필요 없으십니다. 정말 필요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왜 그런 것을 자꾸 하라고 하십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활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감사해서 봉사도 하고, 감사해서 예배도 하고, 감사해서 말씀도 읽고, 감사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며 헌금도 하는 것입니다. 모두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며 인류에게 필요한 것들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6)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만드셨습니다. , 한 사람 아담을 통해 만드시고 사람들이 온 땅에 거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사와 또 그 역사를 펼쳐나갈 수 있는 장을 제공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해 놓은 후에 인간을 멀리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그냥 놓아두셨고 떠나셨으며 이제는 우리가 알아서 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마치 시계를 만든 사람이 시계를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시계가 자동으로 가니까 그냥 놓고 간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 철학사상을 이신론(deism)’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7)

 

인간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하실 정도로,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이르지 못할 만큼 저 멀리 딴 세계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언제나 우리 삶의 현장 한가운데 계시며,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그래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분을 느끼고 그분을 뵈며 그분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온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창조주와 어떻게 매일 함께 합니까? 이게 바로 은혜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보십시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뭔가 구도를 하고, 고행을 하고, 어떤 경지에 올라가고, 해탈을 하고... 그렇게 열심히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해도, 신이 자신을 만나 줄지 아닐지 확신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인간이 지극정성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다 합니다. 그러나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 특히 독재자들을 보십시오. 신격화합니다. 옛날 고대 바벨론이나 고대세계의 왕들을 신격화해서 신으로 떠받들었습니다. 로마황제들도 죽으면 다 신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독재자들은 자기를 신격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언제나 인간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 어려움을 당하거나 문제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어보십시오. 더듬어 찾아보십시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결코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바로 내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불러보십시오.

 

 

4)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8)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 시인 두 명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28a)인데, ‘기동하다움직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은 BC 6세기 크레타의 크노소스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4행시 <크레티카(Cretica)>에 나오는 구절을 바울이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학식이 대단합니다. 이런 것이 그냥 나옵니다. 그 시 속에서 시인은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의 입을 빌려 제우스에게 다음과 같이 경의를 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살며 움직이고(기동하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우스 덕분에 인간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우스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의 이야기일 뿐임을 알았던 바울이었기에,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그 시구를 인용하여 오히려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설명한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인간을 먼저 찾아와주시고 늘 인간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인간이 의식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입니다. 어떤 시인이 그의 소생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29)

 

바울이 여기에서 인용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표현은, 먼저 인용한 에피메니데스의 시보다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더 잘 알려진 내용이었습니다. BC 3세기 길리기아 시인 아라투스(Aratus)의 시 <페노메나(Phaenomena)>, 제우스를 가리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역시 주전 3세기에 활동한 스토아학파 철학자이자 시인 클레안테스(Cleanthes)의 시 <제우스 찬가(Hymn to Zeus)>에 똑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후대 사람인 아라투스가 클레안테스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가지고 바울이 언급한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아는 시가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면서 자기가 이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여기서 떠올려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학식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우스는 만들어진 허구의 존재이기 때문에,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애송하는 그 시적인 표현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하나님의 자녀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 역사와 문화의 좁은 우물에 갇힌 편협한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 역사와 문화에도 정통한, 진정한 의미의 세계인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복음에 완전히 헌신해서 생명까지 내던졌으니, 그래서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온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우상숭배의 핵심입니다. 우상을 만들어놓고 사실은 자기 필요할 때만 가는 겁니다. 우상을 진짜 섬기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필요할 때만 가서 섬깁니다사람들이 부적을 붙이는 것도 귀신을 컨트롤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우리 크리스천들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샤머니즘의 영향 같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나 귀고리를 하지 않습니까? 은근히 마음속에 내가 오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나가니까 괜찮겠지. 재수가 좋겠지. 악으로부터 보호가 되겠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목걸이가 나를 지켜줍니까?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성경책이 부적 같이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니까? 뭔가 마음에 꺼림직 하거나 두려우면 전혀 읽지도 않는 성경책을 괜히 껴안습니다. 그것은 부적 같은 용도입니다. 안에 있는 이 말씀이 중요한 것이지 어떻게 책이 중요한 겁니까? 그런 데에 힘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나 내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5)  최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0)

 

아덴 사람들은 단에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문구를 새겨서 자기들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 찬란한 문화와 철학의 도시 아덴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최고 문화 시민이라고 자부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대해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무지함이 고쳐질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자연의 질서 안에 나타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죄로 인해 그의 진리를 못 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이 알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습니다. 그냥 봐주셨다기보다는 그들의 무지를 허물치 않으셨는데, 이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심판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1)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불변하는 세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세계 모든 구석에까지 다 미친다는 것입니다아무도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이 심판은 의로운 심판이 될 것입니다요즘 뉴스를 보십시오. 재판의 결과에 불복하고 항소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1심으로 끝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끝까지 가고 대법원까지 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세상에서 재판장이 혹시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는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이 사실은 정말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옳고 상대방도 옳은데, 누가 진짜 옳습니까? 사람마다 들어보면 자기 입장에서 다 옳습니다. 그럼 누가 옳습니까? 판단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판단해주실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자기가 더 이상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확한 증거를 다 드러내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다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변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이 심판은 모든 사람이 다 보게 임할 것입니다. 누구는 보고 누구는 못 보면 변명할 여지가 있지만, 심판은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게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한다고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3.   세 가지 반응

 

이제 바울의 설교가 끝나자 아테네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2)


크게 세 가지 반응입니다. 첫째,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생각하면서 다시 네 말을 들어보겠다.’라고 하는 중간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셋째,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33-34)

 

바울이 이곳을 떠나 숙소로 돌아가고, 그것으로 사역이 다 끝났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복음을 전한 다음에 몇 사람이 바울을 가까이하여 믿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두 사람의 이름이 밝혀져서 나오는데,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고 하는 여성입니다.

 

다른 데서는 이름이 안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빌립보의 간수나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여종의 이름도 나오지 않고, 데살로니가나 베뢰아에서 많은 귀부인들이 믿었다고 했는데 이름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여기 디오누시오와 더불어 다마리라는 여성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다마리가 당시 아덴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여성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 사역에 대해 그런 설교를 들은 적도 있고 책을 본 적도 있는데, ‘아테네에서 바울의 전도사역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믿은 사람이 몇 명 안 되고 교회가 섰다는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또 바울이 복음을 그대로 원색적으로 전하지 않고 철학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 내용은 짧게 요약한 것이지, 예수님을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사실은 바울의 아테네 전도가 실패했다고 하는 말이 오히려 틀린 말입니다. 믿은 사람이 몇 명 안 나왔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의 가치를 숫자로 판단하려는 비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까? 예수님도 겨우 열두 명의 제자를 훈련하시고 그 중 한 명은 배신까지 했습니다. 그럼 실패하신 겁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아테네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몇 명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었습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교회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바울이 여기까지 온 것은 전혀 자기가 계획해서 온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왜 여기까지 이렇게 인도를 하셨겠습니까? 이런 디오누시오나 다마리와 같은 사람, 또 몇 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바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소수만 믿었으니까 실패한 거라서 바울이 낙담하며 떠났겠는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한 영혼,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아테네에서조차 이런 믿는 영혼들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린도로 갔을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그 당시 고대 아테네처럼 21세기를 사는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뭔가 새로운 것, 뭔가 속된 말로 쌈빡한것을 찾고 있습니다. 뭔가 신선한 것, 뭔가 보통 것이 아닌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단의 소리에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람들이 공허한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대도시 사람들은 뭔가 특이한 것에 관심이 많고 얼마나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습니까?

 

그런데 다른 말로 하면,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게 이 세상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있었으면 진작 찾고 끝났지, 왜 계속 찾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그들의 공허함을 채워줄 것이 없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만이 그 공허함이 채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엄청난 존재는 아닐지 몰라도,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영원히 존귀한 하나님의 소생,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먼저 찾아와주시고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가치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며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열심히 했지만 믿는 사람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 교회가 열심히 했지만 믿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통해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그렇게 한 영혼,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면서 계속해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