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24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3

말씀에 대해서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사도행전 1710~15)

 

[들어가는 말]

 

오래 전 영어권 목회를 하고 있을 때 어느 교회 영어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설교자는 설교를 잘하기로 소문난 젊은 목회자였고, 실제로 나중에 아주 훌륭하게 사역을 잘하게 된, 굉장히 좋은 목회자였습니다. 그날도 설교가 너무 감동적이었고,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영어권 젊은이들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설교를 듣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예배 후에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큰 감동을 받았고 은혜가 되었다고 기뻐하며 나누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날 설교는 실제로 큰 감동이 있었고, 그 목사님이 아주 열정적이면서도 마음을 터치하는 설교를 너무 잘했습니다. 회중을 울렸다 웃겼다 하면서 아주 재미있고 열정적이면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다 듣고 나서 뭔가 제 마음에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도 좋고, 감동적인 스토리들을 많이 들려주었고, 설교의 전달도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열정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오죽하면 20년도 넘은 설교인데도,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설교 중 한 스토리가 기억납니다. 그 목사님이 대학을 갔는데 집에서 조금 떨어진 대학을 갔기 때문에 종종 부모님이 방문을 오실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부모님이 저 멀리서 오시는데 서로 보고 반가워서 아들아!”라고 하시며 부모님이 뛰어오셨습니다. 아들도 부모님이 반가워서 아빠, 엄마!” 하며 갔더니, 서로 만나자마자 포옹하며 잘 있었냐?’라고 한 게 아니라 부모님이 아들을 확 밀치면서 됐고, 화장실은 어디냐?”라고 하셨다는 것이 아직도 기억날 정도로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그날 너무 재미있고도 감동적인 내용이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날 성경 본문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었고, 성경 구절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채 온갖 스토리들로만 가득 찼던 것입니다. 물론 그 목사님도 그때는 목회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명강연이나 명연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엄격한 의미에서의 설교라고 보기가 힘듭니다. 설교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날 설교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이야기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는 사람도 조심해야 하지만, 설교를 듣는 사람도 말씀 중심으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작년에 한국에서 기독교 서적 올해의 책으로 몇 권이 뽑혔는데 그 중 하나가 <설교, 어떻게 들을 것인가?>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쓴 책인데, 설교자도 잘 전해야 하지만, 설교를 듣는 사람도 잘 듣고 말씀을 잘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쓴 좋은 책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간절한 마음과 더불어, 본문이 정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등을 잘 생각하며 들을 때 큰 유익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우리가 따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오늘 그것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베뢰아에서 일어난 일

 

1)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일으킨 소동으로 어려움을 당한 바울 일행은 그곳을 떠나 근처의 다른 도시로 가게 됩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0)

 

밤이 되기까지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를 떠나지 않고 데살로니가 도시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바울을 시기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바울 일행을 붙잡기 위해 조직폭력배까지 동원해서 나서니까,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고 바울 일행을 어딘가로 피신시켰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밤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피신시켰습니다. ‘밤에이라는 두 단어는 그때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었는지 실감이 나게 해줍니다. 그날 낮에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붙잡기 위해 조폭들까지 동원하여 도시를 누비고 다녔으니, 그 밤에 피신을 시키는 사람들이나 피신하는 사람이나 모두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피신한 곳은 베뢰아인데,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유대 땅에도 비슷한 이름의 베레아가 있었습니다. 여기는 B로 시작하는 베뢰아이고, 이스라엘 땅은 P로 시작하는 베레아입니다. 본문의 베뢰아는 그리스 북부의 항구도시였던 데살로니가에서 서남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걸어가면 사흘 정도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베뢰아는 주요 도로인 비아 에그나티아, 즉 빌립보 근처의 네압볼리에서 시작하여 이탈리아를 바라보는 아드리아 해 앞까지 죽 뻗은 길로부터 남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던 키케로(Cicero)는 베뢰아를 가리켜 도로에서 떨어진 성읍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비아 에그나티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바울은 주요 도로를 따라서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주로 도시들을 다녔는데, 바울이 이런 외딴 곳에 위치해 있는 베뢰아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급하게 그의 일행을 이곳으로 보냈고, 그 외에는 당장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계획하고 간 것이 아니라 급히 피신하느라 그리로 간 것입니다.

 

비록 어쩔 수 없이 급하게 데살로니가를 떠나 사흘 길인 베뢰아로 피신한 바울은, 베뢰아에 도착해서도 다른 데와 마찬가지로 유대인 회당부터 찾았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것도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게 아닌가 하며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아 평소 습관대로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말씀에 대해 바른 태도를 가진 베뢰아 사람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1)

 

놀랍게도 바울이 만난 베뢰아 사람들(유대인 회당 안에 있던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 여기서 너그럽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고결하다, 고상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베뢰아 유대인 회당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때만 그런 게 아니라 평소에 고결하고 고상한 성품을 가졌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아주 교양이 있고, 거칠지 않으며, 부드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편견이 없었습니다. ‘한 번 들어보자했는데, 그것도 건성으로 듣거나 졸면서 들은 게 아니라, 굉장히 훌륭한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그렇게 자발적인 열성을 가지고 들을 정도로 고결하며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들을 때 바로 이런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수면 보충 시간으로 삼아야 되겠다.’라든지, ‘언제 끝나나?’ 하며 시계만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즉 이 말이 진짜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가 전한 내용이 과연 성경 내용에 비추어 맞는지, 혹시 다른 것은 아닌지, 자신들이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읽고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안식일에만 모여서 바울을 만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날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기도 하고, 또 기회가 되는 대로 매일 바울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말씀을 공부했다는 말입니다.

 

상고(詳考)하다라는 말은 상세하게 고찰하다라는 의미인데, 뭔가를 자세하면서도 깊이 생각하며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로만 달달 외우거나 대충 읽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세하게 이것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고 연구한 것입니다. 그들이 상고한 성경은, 당시는 신약성경이 쓰이기 전이었으므로 물론 구약성경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설교 내용은 여기 나오지 않지만, 방금 전에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전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을 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예수님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고 또 인간을 영원히 살리려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다시 살아나야만했다는 그 나사렛 예수를 전한 것입니다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그 예수가 과연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야인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 메시아인가 확인하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던 것입니다. 예수에게서 이루어진 그 모든 예언들이 정말인가, 구약 말씀이 정말 예수에게서 다 이루어졌는가 열심히 공부하고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무관심하게 듣거나 빨리 설교 시간이 끝나기만 바라며 들을 게 아니라, 이 내용이 정말 성경에 있는 건가, 이것이 정말 그 뜻이 맞는가를 잘 생각하며 상고해야 합니다.

 

다른 데서 이사를 와서 우리 교회로 정한 분들이 계십니다. 또 여기서 다른 데로 이사를 가시게 되면 분명히 교회를 정하실 텐데 몇 교회를 다녀보고 정하실 것 아닙니까? 그때 단순히 설교가 좋거나 프로그램이 화려하거나 건물이 좋은 교회도 좋지만, 그것을 우선순위로 하지 마시고 정말 성경 중심으로 설교하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 그리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교회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무비판적으로 그냥 듣는 자세보다는 상고하면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이건 뭐가 잘못됐고, 저건 뭐가 잘못됐고하면서 무조건 비판하기 위한 자세로 들으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성경대로 잘 전하고 있는지를 살피며 들으라는 것입니다.

 

조금 전 언급했던 <설교, 어떻게 들을 것인가?> 책을 보면, 설교를 듣는 기본자세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최악의 설교라도, 아무리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거기에는 하나님이 내게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찾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에 여호와의 증인과 토론을 벌이는 기회가 있었는데, 마치 운동경기를 구경하듯이 토론자들 두 명이 대표로 앞에 나와 있고 십여 명이 저쪽에 앉아 관중처럼 구경을 하는데 그들을 관심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관심자들 중 대부분이 장로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마음에 열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장로교회를 그냥 다닌 거지, 제대로 말씀을 공부하지 않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안 하니까 이단이 와서 설명할 때 혹 하고 넘어간 겁니다.

 

저도 목사라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설교들이 많은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마침 제가 몇 주 전에 했던 설교와 같은 본문이었습니다(사도행전 16:25-34).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 내용은 감동이 있었고 무난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떻게든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오히려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본문이 전해주는 것이 정말 예수 잘 믿으십시오. 기도 많이 하십시오.’라는 겁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게 아닌데,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배경은 전혀 없이 그냥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만 따서 그것을 중심으로 은혜로운 내용을 전하는 전형적인 주제설교였습니다.

 

주제설교가 다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주제설교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제설교라도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본문이 과연 무엇을 말씀하는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본문을 통해 뭘 하라고 하시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설교자들이 본문 하나를 잡고서 거기 나오는 말 한두 개를 인용하며 전혀 본문에서 말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내용을 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래 전 시애틀에 있는 University Presbyterian Church에서 목회하셨고 지금은 원로목사인 얼 파머(Earl Palmer) 목사님이 계십니다. 제가 참석했던 영어권 목회자 컨퍼런스에 그분이 오셔서 설교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는데 그때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강해설교가 아닌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 없다.” 본문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거나 단어 한두 개 잡아서 하는 그런 설교를 하지 말고, 본문 중심으로 설교하라는 도전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다 잘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특히 제가 감사한 것은,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부터 제가 다니던 교회는 목사님이 강해설교를 하시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강해설교를 접했고 그렇게 하고자 노력을 하는 중입니다. 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분별력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절로 길러지지 않습니다. 훈련을 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며,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 하면서 날마다말씀을 상고할 때 그런 분별력이 길러집니다. 열심히 QT하고 성경통독도 하고 삶 공부도 들으며 열심히 말씀을 상고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도 건성으로만 아멘, 아멘하며 내용은 하나도 남는 게 없고, 오늘 말씀이 뭐였는지, 심지어 예배당을 나가면서 제목이 뭔지도 잊어버리는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씀을 열심히 붙들고 나아가야 하나님께서 오늘 주고자 하시는 그 진리가 다가올 것이고, 그 말씀대로 내가 정말 살겠습니다.’ 하는 열정과 헌신이 우리 마음속에서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복음 전도의 열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2)

 

바울의 설교를 듣고 주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평소 모두 다 유대인 회당에 모이던 베뢰아의 유대인들만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처럼 베뢰아에서도 주님을 영접한 사람 가운데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과 경건한 이방인들, 그리고 귀부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않았으면 모를까, 바울의 설교를 듣고 성경을 깊이 상고하면 할수록 그들은 바울이 전한 저 예수가 틀림없이 구약성경이 말하는 메시야가 맞고, 그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주신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 믿게 된 사람들 중에 부로(Pyrrhus)의 아들 소바더(Sopater)가 있습니다. 204절을 보면 그는 이때로부터 약 7년 후에 베뢰아 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자격으로 바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까지 같이 간 사람입니다. 학자들은 이 소바더가 로마서 1621절에 나오는 소시바더(Sosipater)와 동일인물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소시바더를 가리켜 나의 친척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진짜 친척이 아니라 같은 골육, 같은 민족즉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소바더는 베뢰아에 살던 유대인이었는데, 그날 회당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들이 여기서 일어났습니다.

 

 

2.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의 훼방으로 인해 생긴 일

 

1)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성

 

그런데 베뢰아에서도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3)

 

바울이 베뢰아에 나타나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이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의 옆 동네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에서 50마일 정도 떨어진 거리로 차로 가도 시간이 꽤 걸리는데, 그 길은 평지도 아니고 그 당시 포장되지 않은 안 좋은 길을 걸어서 약 사흘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전화나 인터넷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사흘 길이나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베뢰아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겠습니까? 베뢰아에 있는 유대인들 중 누군가가, 사흘 길이나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을 직접 찾아가 그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울을 시기했고 그래서 그를 해치려고 조폭까지 동원한 사람들입니다. 바울 일행이 로마제국을 뒤집어엎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며 황제 외에 다른 왕을 주장하는 반역자라고 모함하면서, 바울 일행에게 집을 제공해준 야손과 그의 집에 있던 믿음의 형제들을 끌고 가서 고발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베뢰아에 머무는 동안 그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 때문에 거기서 막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 즉 데살로니가 교회가 상당한 고난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살전 1:6, 2:14, 3:3).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난 후 얼마 안 되어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썼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한마디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즉 그리스 북부와 남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을 정도로 아주 훌륭한 교회,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살전 1:7). 온갖 핍박이 있었지만 그런 고난이 그들의 헌신을 꺾지 못했고, 오히려 복음 증거를 그치지 않음으로 믿음의 소문이 온 사방에 퍼지는 결과를 가져올 정도가 되었습니다(살전 1:8).

 

그런데 교회의 싹을 완전히 잘라버리고 제거하려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있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다시 시기심과 분노가 올라옵니다. 그래서 50마일(사흘 길)이나 떨어진 베뢰아를 단숨에 찾아가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했던 것처럼, 바울이 로마제국을 전복시키려는 정치적 불순분자이며 반역자라고 모함하면서 베뢰아 시민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바울을 해치려고 하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베뢰아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러 갔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열심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걸 알려주러 사흘 길을 갔습니다. 또 바울이 베뢰아에서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도 사흘 길을 걸어 베뢰아를 즉시 찾아갔으니까, 이것도 또 얼마나 큰 열심입니까?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도 힘든데, 이들은 오직 바울을 해치기 위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굉장한 열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열심입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들은 베뢰아 사람들과는 달리,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감정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유대인 즉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라는 사람들인데, 자신들이 믿고 섬긴다고 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무지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다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어릴 때부터 엄격한 유대교 율법의 훈련과 전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지난주에 언급한 것처럼 이들은 그냥 유대인도 아니고 유대종교지도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훈련과 전통에 대한 열성은 이 세상 어느 민족도 따라갈 수 없는 열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로부터 똑같은 설교를 듣고도,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저 예수가 누구인지 구약을 대조해가면서 예수가 정말 메시야가 맞는지 열심히 찾고 들었던 것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들이 전할 때는 사람들이 안 변했는데 바울이 전할 때는 변했다는 것에 대해 시기심으로 불이 타서, 오직 바울을 해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행위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2)  바울이 아덴으로 가게 된 이유

 

그들이 바울을 해치기 위해 베뢰아 시민들을 선동한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4)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해치려고 이미 데살로니가에서 시민들을 선동한 경험이 있습니다. 선동의 경험이 있어서 잘합니다. 어떻게 하면 대중을 손쉽게 선동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도 그리스 제 2의 도시이고, 당시에도 마게도냐의 행정수도였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 도시입니다. 그러나 베뢰아는 시골입니다. 그래서 시골 사람들이 순박하니까 그들의 선동에 금방 넘어가는 겁니다.

 

그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했던지 바울로부터 주님을 영접한 베뢰아의 형제들은 급히 바울을 바다로 내보냅니다. 여기서 바다라는 말은 항구라는 말입니다. 조금 내륙에 있는 베뢰아에서 바다 쪽에 있는 외항(外港)을 말합니다. 이제 막 믿은 베뢰아 성도들은 이 지역에서 소동이 가라앉을 때까지 바울을 마케도니아에서 떠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베뢰아 성도들은 바울을 해안으로 데리고 가는데, 바다까지(14) 간 걸 보면 거기서 배를 타고 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아덴(아테네)300마일이 넘는 길입니다. 물론 육로로는 200여 마일이지만, 배를 타고 가면 뱃길이 300마일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때 베뢰아의 형제들이 바울을 급히 항구로 보냈다고 해서 바울 혼자 가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15)

 

베뢰아의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몇 명이 바울을 바닷가 항구로 인도해갔을 뿐 아니라, 항구에서 바울을 배 태워 바이바이 한 게 아니고 바울과 함께 그 배를 타고 아덴까지 직접 동행했습니다. 베뢰아에서 아덴은 300마일 넘는 거리라고 했습니다. 베뢰아를 덮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살기등등했던지, 바울을 데리고 나간 베뢰아의 형제들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마침 아덴으로 떠나기 직전인 배에 함께 타고 300마일이나 떨어진 아가야의 아덴까지 바울을 직접 데려다준 것입니다.

 

베뢰아와 아덴 사이, 즉 북부 마게도냐와 남부 아가야 사이에는 테살리(Thessaly) 지방이 있습니다. 하지만 테살리도 바울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들은 바울을 아덴까지 호위하여 같이 갔고 그때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으며 계속 동행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바울을 사랑했고 아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만나 교제한 게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닌데도,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울을 보호해주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디모데와 실라가 자기와 빨리 합류하게 하라는 바울의 지시를 받고 베뢰아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이상하게도 실라와 디모데는 같이 가지 않고 그대로 베뢰아에 남아 있게 합니다. 누가는 이미 빌립보에 남겨두고 세 명이 떠났고, 이제는 실라와 디모데까지 베뢰아에 남겨두고 자기 혼자 아덴으로 간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바울이 쓴 편지들과 함께 읽으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2절을 보면, 아덴으로 오라고 한 바울의 소식을 들은 실라와 디모데가 아덴에 있는 바울에게로 옵니다. 베뢰아에 있던 두 사람이 오니까 이번에는 그 중 디모데만 급히 도망 나왔던 데살로니가로 되돌려 보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5절을 보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내려가 바울과 다시 합류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도 마게도냐의 빌립보 아니면 베뢰아로 다시 보낸 것입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실라는 빌립보나 베뢰아로 다시 보냈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급히 떠나면서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그대로 머물게 한 것은 자기가 떠난 다음에 마게도냐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뢰아에서 아덴은 300마일 거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배로는 대략 나흘 걸리는 먼 길이었습니다. 바울이 믿음의 지체들과 베뢰아에서 아덴까지 가는 데 나흘, 그리고 베뢰아의 지체들이 아덴으로 왔다가 베뢰아로 돌아가는 데 나흘, 또 바울의 소식을 전해들은 실라와 디모데가 베뢰아에서 아덴까지 바울을 찾아가는 데 다시 나흘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아덴에 도착한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 8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처음 찾아간 아덴에서, 익히 아덴에 대한 명성은 많이 들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혼자 숙식을 해결해야 하고 여러 가지 혼자 지내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감수하면서 마게도냐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특히 베뢰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두고 혼자 떠났던 것입니다.

 

바울을 해치려 한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바울을 해치려고 베뢰아까지 들이닥쳤다가 그곳에서도 바울을 놓치고 빈손으로 데살로니가에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믿은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해치지 못하니까 바울을 통해 믿게 된 성도들을 향한 적개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냥 있으면 그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하여 이제 막 주님을 영접한 데살로니가 초신자들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데살로니가 전에 갔던 빌립보나 데살로니가 후에 갔던 베뢰아의 초신자들 역시 안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나마 빌립보는 누가를 남겨두고 갔으니까 괜찮지만, 베뢰아는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라와 디모데를 두고 떠난 것입니다.

 

그 모든 상황을 실라와 디모데로부터 전해들은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18절를 보면 두 번씩이나 자기가 직접 데살로니가를 재방문할 생각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자기가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면 어떻게 됩니까? 야손을 비롯한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을 만나지도 않을 것이며, 바울이 오면 신고할 것이다.’라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는데, 바울이 거기 갔다가 혹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목격하게 되면 야손과 믿음의 형제들이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실라와 디모데가 아덴으로 왔을 때, 바울은 자기 대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다시 보냈고 실라는 베뢰아 또는 빌립보로 다시 보낸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자기가 잘되고 자기가 안전한 것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주님 안에서 설 수 있는가만 항상 생각했습니다. 참 귀한 분입니다.

 

물론 실라로 하여금 두 도시(베뢰아, 빌립보)를 모두 다시 방문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게도냐 초신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 주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가야 땅의 아덴으로 건너간 이상, 이미 떠나온 마게도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바울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된 마게도냐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 것 역시 마게도냐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라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영혼들이 살아나고 제자들이 만들어지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3)  박해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때 바울이 마게도냐(그리스 북부) 땅을 넘어서 원래 자신의 계획에는 없던 저 남쪽 아가야 땅까지 건너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베뢰아의 형제들이 바울을 항구까지 인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함께 배를 타고 아덴까지 동행했다는 것은, 그때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었는지, 바울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 항구에 온 그들은 한가하게 여행객처럼 어느 배를 탈까 하고 따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급한 일은 항구에서 제일 빨리 떠나는 배를 찾아 타는 것입니다. 그래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뒤에서 쫓아올지 모르니까 가장 먼저 떠나는 배를 타야 하는데, 마침 타고 보니까 그 배가 아덴으로 가는 배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배들은 정기적인 스케줄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차면 떠나곤 하며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정해진 출발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베뢰아의 형제들이 바울을 데리고 급하게 항구로 와서 보니 한 배가 떠나려 하는데,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탔더니 마침 로마제국의 속주 아가야의 아덴으로 향하는 배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계획하고 아덴으로 가는 배를 탄 게 아닙니다. 그래서 더 놀랍습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아시아의 바울이 에게 해를 건너 유럽 대륙을 찾아간 것은, 아시아 대륙의 드로아에서 본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 때문이었습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그 환상을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한 바울은, 자기 일행과 함께 지체 없이 로마제국의 속주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그 마게도냐가 유럽 대륙으로 간 바울의 첫 번째 방문지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중에 방문했던, 지금의 터키 대륙의 여러 도시들을 재방문하고 다른 곳들도 다닌 그 다음이었습니다. 원래 소아시아 쪽에서만 하려고 했는데 유럽까지 가게 하신 겁니다. 일단 마게도냐로 왔으니까 거기서 전도를 마치면 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원래 파송지인 아시아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베뢰아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흘 길을 달려 베뢰아를 급습한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의 악한 행위와 핍박 때문에, 바울은 생각지도 않았던 남부 아가야의 아덴으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빌립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어려움도, 어떤 고난도, 어떤 핍박을 통해서도 반드시 선을 이루는 분이시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원래 아시아에서만 복음을 전하려던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가게 하신 하나님은, 거기서 루디아의 가족들을 만나게 하시고, 또 간수와 가족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빌립보를 떠난 바울은 마게도냐의 행정수도 데살로니가를 찾아갔고,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기 위해 조폭들까지 동원하니까, 믿음의 형제들이 한밤중에 바울을 급히 베뢰아로 피신시켰습니다. 그 덕분에 베뢰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려고 베뢰아를 덮치니까 바울은 뜻하지 않게 마게도냐 땅을 넘어 아가야 땅의 그 유명한 아덴으로 갔고, 바울이 아덴으로 갔기에 거기서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아가야 땅인 아덴으로 갔기 때문에 그는 아가야의 또 다른 주요 도시(행정수도)인 고린도로 갈 수 있었고, 바울이 고린도를 찾아갔기에 그 이후에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와 후서가 지금까지 성경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갔기 때문에 그의 심장 속에서 로마제국의 심장인 수도 로마에 대한 전도의 사명감이 싹틀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겐그레아 항구에서 서원하며 기도를 올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계속되는 박해와 모함과 여러 고난 속에서도 이 땅에 주님의 진리의 빛을 전하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무슨 악을 행하거나 불의한 사람이어서 늘 박해당하고 모함 받고 고난을 겪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오직 주님께 자기의 인생을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주님이 뭘 원하시는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애쓰며 거기에 전적으로 헌신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모두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 한 번도 주님, 제가 주님께 제 삶을 드린 결과가 고작 이것입니까? 주님께 드렸더니 이렇게 제가 핍박 받고, 고난 받고, 매를 맞고, 죽을 지경까지 갔는데, 고작 이것 밖에 안 됩니까?’ 하면서 주님을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상고하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그 모든 상황을 통해 주님께서는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백성을 정확하게 구원해내시고, 이 땅의 역사 속에 주님의 뜻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바울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깨달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진 박해와, 어처구니없는 모함과, 뼈를 깎는 고난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베뢰아 사람들도 그렇게 말씀을 상고하는 자세로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받고 그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잘 감당함으로써,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