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317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52

세상을 뒤집어놓은 사람들

(사도행전 171~9)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금요일마다 청소년 목장을 할 때 제가 함께 했습니다. 겨울에 날씨가 추운 날 모일 때 보면 고등학교 남학생들 중에 그렇게 추운데도 반바지를 입고 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얇은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돌아다녀서 제가 걱정이 되어 말했습니다. “, 안 춥냐?” “안 추워요.” “그러다 감기 걸린다. 조심해라.” “Don’t worry. I’m okay.” 그날은 금요일이고 주일이 되어서 보니까 그 아이가 안 왔습니다. 그래서 아빠 엄마에게 물어봅니다. “왜 안 왔습니까?” “감기에 걸려 누워 있습니다.”

 

겨울에도 그렇지만, 특히 요즘 같은 환절기에는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감기기침, 콧물, 오한, 두통 등이 함께 생기는, 전염하는 호흡기 병’, 또는 주로 바이러스로 인해 일어나는 호흡기 질환. 코가 막히고 머리가 아프며 기침이 나고 열이 오름. 고뿔이라고도 함.’ 사실 이런 정의는 감기의 현상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아주 탁월한 해석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감기가 한자로 느낄 감()’ 자에 기운 기()’ 자니까 감기는 기를 느끼는 것이라는 겁니다. 갑자기 목 뒷덜미나 가슴 혹은 아랫도리에 평소와는 다른 써늘한 기운이 스치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감기가 찾아온다는 예고라는 뜻입니다. 그때 미리 감기약을 먹거나 몸을 따뜻하게 하면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목 뒷덜미가 서늘하거나 다리가 서늘함을 느끼면 어김없이 감기에 걸리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감기라는 단어는 단순히 감기에 걸리는 현상을 설명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 전에 감기의 예방을 일깨워주는 지혜의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보통 감사라고 하면 뭔가 고마운 일이 생겨서 고마워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고마움의 대상을 찾아가 인사하거나 선물을 전달하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이처럼 감사를 행위로만 생각하면 감사는 형식적인 겉치레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감사는 한자로 느낄 감()’사례할 사()’ 자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감사라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고마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진짜 느끼지 않고 말로만 또는 행동으로만 감사하다고 하면 진짜 감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 역시 감사하는 행동 이전에, 하나님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는 과정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가 형식적인 겉치레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 받으시는 참된 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에 그냥 참석했기 때문에 예배를 잘 드린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정말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 하나님께 정말로 내 마음을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은 다음에 그것이 행동으로 나올 때 참된 예배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느끼려면, 평소에 하나님께 왜 감사한지, 무엇이 감사한지 구체적인 내용을 생각하면서 먼저 감사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이 감사의 행동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한 행동이 감사함에서 나오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 특히 사도들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다해 영혼 구원하여 제자를 만드는 일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1.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

 

1)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71절은 그들이라고 시작하는데, 그들은 원래 바울 일행 4명 중에 빌립보에 남은 누가를 제외한 세 명, 즉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말합니다. 바울과 실라만 감옥에 갇혔었다가, 풀려난 후 누가만 두고 세 명이 이동을 했습니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1)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암비볼리로 갔습니다. 거기서 다시 서남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아볼로니아로 갑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과 실라가 어떤 몸 상태였습니까? 굉장히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 전날 맨 살 위에 매질을 당해서 상처투성이에 찢기고 고름이 나오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치료와 휴식을 선택하는 대신, 그런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를 거쳐 아볼로니아로 간 겁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런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걸어도, 빌립보에서 아볼로니아까지는 나흘 길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 그곳에서 서쪽으로 35마일 떨어진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걸어서 이틀 길이었습니다. 빌립보에서부터 따지자면 데살로니가가 100마일이 넘는 거리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에 유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아볼로니아에서 데살로니가로 가기 위해서는 늪지대를 통과해야 하는데 거기는 말라리아가 도는 곳입니다. 늪에 모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게다가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가쁜 숨을 내몰아 쉬면서 그 언덕 위에 서면 그 앞에 데살로니가 만이 펼쳐져 바다가 보이고, 정면으로는 저 멀리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큰 산,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해발 2,917미터의 올림포스 산(Mt. Olympus)이 보입니다. 2000년 전 올림포스 산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고, 최고신인 제우스의 왕좌도 그 산속에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이 실제로 올림포스 산속에 산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헬라 지역이었던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당시 지중해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모국어로 구사했던 바울도 그리스 신화와 올림포스 산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 살던 바울이 유럽 대륙의 마게도냐에 있는 올림포스 산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데살로니가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는 올림포스 산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며 또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저 아름다운 산, 그러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신의 거주지로 믿고 숭상하는 저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들을 생각하면서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 언덕 아래 펼쳐져 있는 큰 도시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향하여 강한 복음의 사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도 아프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당시 마게도냐의 행정수도였던 데살로니가는 인구 20만 명의 대도시였습니다. BC 316년경 마게도냐의 빌립 2(Philip II,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의 사위였던 카산더(Cassander)가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 이름이었습니다. 지금은 데살로니키(Thessaloniki)입니다. 실제로 아테네 올림픽 때 한국 축구 팀이 경기를 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1). 빌립보에는 없었는데 데살로니가에는 회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보면 회당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the)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데살로니가에는 회당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회당은 유대인 남자 10명이 있으면 세울 수 있는데, 회당이 여러 개 있었다는 말은 이 데살로니가 도시에 빌립보와는 달리 유대인들이 꽤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회당에서 선포한 복음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2)

 

바울은 그동안 전도 여행을 하면서 어디를 가든 유대인 회당이 있으면 회당부터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그곳의 유대인들을 가장 손쉽게 단체로 만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경건한 이방인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해서도 평소의 습관대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갔고, 또 세 안식일에 걸쳐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 동안 강론한 핵심이 무엇입니까?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3)

 

여기서 뜻을 풀어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가 활짝 열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옛날 구약성경은 양피지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회당에서는 회당을 관리하고 모임 때마다 사회를 보는 회당장이 있었는데, 회당장은 매주 안식일마다 정해진 구약성경 본문을 읽고 회중에게 누가 이 말씀을 잘 강론해서 우리 모두에게 도움을 주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중 누가 나와서 두루마리를 읽고 강론하기도 하고 회당장이 읽고 다른 사람이 강론하기도 했는데, 그때 바울이 자원하며 나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를 활짝 펼친 후에 그 말씀을 토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구원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원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데 시대가 지나면서 구원자로 의미가 굳어졌습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말이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입니다. 하나는 히브리어이고 하나는 헬라어입니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며 기다리던 메시아(그리스도)는 로마 황제를 능히 제압하고 유대인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다윗과 같이 강력한 왕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보잘것없는 빈민 출신이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자기들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체포되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왕이 되려는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라고 소리쳐서 죽게 했고, 그 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습니다. 해를 받았다는 것은 고난당하고 죽었다는 말입니다.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왜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구원자라면 강력하게 적들을 물리치며 나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이 죄의 형벌을 죽음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인은 죽음의 형벌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한 진정한 구원자시라면, 그분은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당신 자신이 반드시 죽음의 형벌을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그리스도로서 대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다시 사셔야 했습니까? 주님께서 아무리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돌아가셨더라도, 그분이 그냥 죽고 끝나 버렸다면 우리가 아무리 그분을 믿는다 해도 우리의 끝도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분이 그리스도시라면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셔야만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날 수 있는가? 기독교는 엉터리다. 성경은 엉터리다.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고 있는 것 중에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믿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보다 더 엉터리 같은 것도 사람들은 많이 믿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부활은 못 믿겠다고 합니다. 어느 것이 더 합리적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하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셔야만 한다는 것을 증언한 다음에, 자신이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은 언래 히브리어 이름으로 두 개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두 책 제목과 같습니다. ‘여호수아호세아인데 같은 이름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 예수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심입니다. 아람어로는 예슈아라고 부릅니다. 모두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 당시에 스스로 구원자임을 자처하는 가짜 예수들이 이미 많았습니다. 1차 전도여행 때 처음 들른 곳이 구브로(키프로스)였는데, 거기서 만난 박수무당의 이름이 바예수였습니다. 그 뜻은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자기 아버지 이름이 예수였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가짜 예수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에 출신 지역을 덧붙여 나사렛 예수라 표기하기도 했고, 바울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가짜 예수들과 구별하여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증언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예수도 아닌, 인간을 위해 반드시 죽으셔야 했고 또 인간을 위해 죽음에서 반드시 다시 사셔야 했던 이 예수만이 그리스도이시며, 이 예수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르게 하시는 유일한 구원자(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전한 말씀의 핵심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많은 성경의 내용은, 십자가에서 반드시 죽으셔야 했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던 이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이 한마디 속에 모두 압축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러 주시기 위해 반드시 죽으셔야 했고, 또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던 그 예수님이 아니고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리스도, 다시 말해 메시아인 구원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전도의 결과

 

이렇게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는 유대인들만 있던 것이 아니고 이방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4)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라고 했는데, 즉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 사람들도 있었고, 아직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예배하는 경건한 이방인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력한 정치지도자들의 부인으로 상류층에 속한 그 귀부인들도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한 이방인으로 거기에 참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며, 그들은 지체 없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인간 바울과 실라의 추종자나 팬클럽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바울과 실라가 사는 삶에 이들도 동참하고 함께하며 그런 삶을 살겠다고 결단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바울과 실라의 삶에 자신들의 삶을 일치시켜서, 자신들도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을 따르듯이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이런 귀부인들,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이 이전까지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며, 특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미신도 섬기던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우상을 버리고, 손해가 오더라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로마제국의 속주 마케도니아의 행정수도였는데, 행정수도였다는 것은 그 도시에 로마 총독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에 로마 총독이 머물던 곳은 가이사랴였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에서는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로마 총독이 있다는 것은 지배 계층이 그 도시에 몰려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데살로니가는 로마제국의 주된 세금을 면제 받는 자유도시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이 면제되는 도시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은 세금이 없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2000년 전 데살로니가에도 더 많은 돈을 벌려는 상인들이 각지에서 데살로니가로 몰려든 겁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는 정치적으로도 유력한 도시였고 경제적으로는 부요가 넘치는, 마게도냐 최고의 도시였습니다.

 

빌립보는 첫 성으로 가장 유력한 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직할시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독립적이고 자부심이 강한 도시였고,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에 속한 도시로는 최고의 도시였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부유함이 얼마나 컸던지, 로마제국의 키케로는 발칸반도의 데살로니가를 가리켜 우리 영토의 심장이다.”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부유하고도 거대한 도시 데살로니가에 바울 일행(바울, 실라, 디모데)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모습이 어땠겠습니까? 수리아 안디옥에서 떠난 지 한참 되고 중간중간 아무리 빨아 입었다고 해도 그 옷이 얼마나 초라하고 더러웠겠습니까? 게다가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맨몸으로 심한 태형을 당했기 때문에 살이 터지고 찢어지고 형편없는 상처투성이의 몰골이었습니다. 그런 몸으로 빌립보에서부터 여기까지 100마일이나 넘는 길을 며칠에 걸쳐 걸어왔으니까 그들의 몸이 얼마나 지쳤겠습니까? 아픈 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픈 몸으로 초라한 행색의 바울이 부유하고 우아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을 믿기만 하면 복을 받아서 돈 많이 벌고 장수하고 더 크게 출세하고, 당신도 잘되고 당신의 자녀도 잘되고 자녀의 자녀도 잘되고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는 것이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인간을 위해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고, 또 인간을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던 그 예수만이 그리스도(구원자)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이 받아야 할 고난이 있다면 기꺼이 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후에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살전 2:1-2, )

 

이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들을 함께 읽으면 이해가 더 잘 됩니다. 그냥 읽으면 그런가 보다 하지만, 그런 배경을 생각하며 읽으면 마음에 더욱 와 닿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잡혀 심한 매질을 당하고 중죄인들이나 갇히는 지하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와서도 모든 사람이 바울 일행을 환영한 것이 아니고 바울 일행을 해치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쓴 것처럼 빌립보에서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했다.’라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직접 밝혔던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일어난 소동

 

1)  유대인들의 시기와 선동

 

그리스 신화가 판을 치는 우상의 도시 데살로니가에서 그러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은 정말로 기적입니다. 이것은 함께 축하하고 기뻐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5)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생명의 역사를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을 시기합니다. 잘 보십시오. 바울이 전한 설교 내용에 그들이 시비를 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통해 일어난 결과를 보고 바울을 시기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소동을 일으킨 유대인들은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 회당의 지도자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강론을 했을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역사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들어온 떠돌이 여행자 바울을 통해, 자기들은 멋진 옷을 입고 설교했는데 형편없는 모습과 아파서 쩔쩔 매는 바울을 통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마음에 큰 변화를 받았다는 사실에 하나님을 찬양한 게 아니라 시기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시기한 것입니다.

 

바울을 시기한 그들이 떠돌이 바울보다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능력과 지식을 얼마나 과장하며 이야기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안 통하는 겁니다. 바울은 됐는데 자기들이 해보려니까 안 되는 겁니다. 이들이 바울을 시기했다는 것은 바울과 자신들을 비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만은 열등감의 다른 표현입니다. 자기보다 못한 것 같은 사람 앞에서는 교만해지고, 자기보다 잘난 것 같은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는 겁니다. 교만과 열등감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형편없는 모습으로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이니까 교만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시기입니다. 시기를 하니까 화를 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심지어 불량배까지 동원해서 시끄럽게 소동을 일으키며 바울 일행을 끌어내기 위해 바울 일행이 묵고 있던 야손의 집을 덮칩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6-7)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은 불량배들과 같이 야손의 집을 급습했는데, 그 시간에 바울 일행이 없으니까 집주인인 야손과 마침 그 집에 있던 몇몇 믿음의 형제들을 붙잡아서 그 도시의 통치자들 앞으로 개를 끌고 가듯 심하게 끌고 가서 거짓 모함으로 고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이 거짓 모함으로 바울 일행을 고소한 말 자체는 진리입니다. 말 자체는 맞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왔다.” 이 말은 바울 일행이 이전에 했던 일들을 이 사람들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 사회 내에서 바울이라는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하고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의 원문을 직역하면 세상을 거꾸로 뒤엎어놓은 사람들’(Those who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입니다. 정말 맞습니다. 바울과 또 그와 함께 한 동역자들은 이 세상을 뒤집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복음으로 세상을 뒤집어놓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외치는 다른 임금이 있다. 예수라는 이가 있다.”라는 것은 사실 반역죄에 해당하는 엄청난 고소입니다. 황제 외에 다른 왕이 있다는 말입니다. 임금이라는 단어는 황제에게만 쓰이던 바실레우스(Basileus)’라는 단어인데, 황제가 아닌 예수에게 쓰였다면 반역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큰 죄목을 가지고 고소를 한 것이지만, 사실 그것은 맞습니다. 이 사람들은 천하를 뒤집어놓은 사람들이고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들은 고소를 했지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런데 여기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왜 갔습니까? 영어 이름으로는 Jason입니다. 야손은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인 사람입니다. 바울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붙잡아 끌어내기 위해 야손의 집을 덮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바울은 유럽 사람이 아니라 아시아 사람입니다. 아시아 대륙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거기서 성장하여 살던 사람이고 나중에 예루살렘 유학한 아시아 사람입니다. 그 바울이 아시아에서 에게 해를 넘어 유럽 대륙으로 진출한 것은 그의 계획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 빌립보로 간 것입니다그래서 거기서 복음을 전한 다음,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마게도냐의 행정수도인 데살로니가를 찾아왔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갔기 때문에, 유럽 대륙에서 바울 일행은 마치 떠돌이와 같았습니다. 진 에드워즈(Gene Edwards)가 쓴 <실라의 일기>, <디도의 일기>, <디모데의 일기>를 읽어보면 비록 소설이지만 굉장히 이런 내용을 굉장히 실감나게 썼습니다. 며칠씩 걸어야 하는 여행 중에 길이나 숲속에서 노숙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강도가 오지 않을까, 짐승이 오지 않을까, 뱀이 오지 않을까 떨면서 잤습니다. 또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누군가가 호의를 베풀어주지 않으면, 여행비가 늘 부족했던 바울 일행은 편한 여관의 잠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빌립보의 루디아에 이어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준 것입니다. 본문은 야손은 나이가 몇 살인지, 직업이 뭔지, 가족이나 출신 배경이 무엇인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손도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말로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영접하다’, ‘환대하다라는 의미니까, 야손이 건성이나 형식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손님으로 기꺼이 맞아들였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으니까,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최소한 3주간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수개월 (최대 8개월) 동안 머물렀던 것으로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 장정 세 명이 몇 주에서 몇 개월 동안 자기 집에서 먹고 자고 같이 산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지금도 쉽지 않습니다. 사실 부모님, 형제자매, 친척, 친한 친구가 와서 몇 달씩 같이 산다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손은 바울 일행을 위해 기꺼이 자기 집을 제공한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2천 년 전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 바나바, 마가, 베드로, 요한, 그 외의 사도들 같이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개인적 능력으로만 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야손처럼, 또 빌립보의 루디아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사도들을 도와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힘을 보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분들은 생각해보십시오. 또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분들도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와서 앉아 있기까지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사실 바울과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주님을 알지도 못하던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그러기 위해서 그 과정 속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보내주셨습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 분들을 보면, 한 번 딱 해서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많은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며 사랑으로 섬긴 것들이 다 있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런 경우입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도록 하나님이 역사해주신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 분들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는 결코 이렇게 예배하는 모습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른 분들에게 그런 손길이 되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쓰며 나아가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안 되더라도 또 하고 또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VIP 분들을 위해 기도하며 섬겨야 하는 이유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땅 끝까지 나아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과 협력하여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야손은 분명히 유대인이었고 이렇게 아름다운 섬김을 베풀었지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해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불순한 인물이라고 하며 그런 사람들을 맞아들였다는 거짓 모함으로 야손과 데살로니가의 믿음의 성도들을 고발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일어난 일들을 보면 시기심에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5)까지 동원합니다. 이 불량배들이란,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당시 데살로니가의 광장과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조직폭력배들이었습니다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동원한 조폭들과 함께 도시를 누비며 소동을 일으킵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누구도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막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조폭들과 같이 야손의 집을 덮쳤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상황입니까? 그런데 야손이 자기 집을 바울 일행의 유숙지로 제공했으니까 덮쳤는데 거기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처럼 폭력배까지 동원하는 것은 2천 년 전의 일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것은, 교회나 교단 총회에서도 경호원들을 부르는데 거의 폭력배 수준의 사람들을 부르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떻게 사람들이 하는 일이 그렇게 비슷합니까?

 

결국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시기하게 되면 우리 역시 주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불의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인데도 이런 불의한 방법을 썼습니다. 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혹시 지금 누군가를 시기하고 있다면,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여기 나오는 유대인들과 근본적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겁니다.

 

시기의 반대 개념은 사랑입니다. 또 사랑은 겸손과 같은 말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겸손하게 인정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가 나보다 잘났으면 잘난 것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상대의 능력이 나보다 뛰어나거나 업적이 뛰어나면 그것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상대방에게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존경을 진심으로 돌려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2)  소동의 결과

 

유대인들이 조폭들까지 동원하여 바울 일행을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반역 죄인으로 고발했다면, 그 반역 죄인들에게 자기 집을 제공해 준 야손과 그 집에 있던 형제들과 가족들 역시 무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8-9)

 

유대인들의 거짓 모함에 데살로니가 시민들과 통치자들 사이에 일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제국을 전복하려는 대역 죄인들이 지금 데살로니가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은 어느 통치자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빌립보에서 그러했듯이, 데살로니가의 시민들과 통치자들도 이런 모함에 아주 간단하게 선동당하고 말았습니다.

 

데살로니가의 통치자들은 떠돌이 여행자인 바울 일행의 소재를 파악할 수가 없으니까, 더 이상 바울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합니다. 즉 바울 일행에게 자기 집을 제공해주었던 야손과 그의 집에 있던 몇 형제들로부터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풀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석금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가 반드시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보석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서약서혹은 각서의 의미가 더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죄인인 바울과는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고, 만약 바울이 다시 나타나면 즉각 신고하겠으며, 만약 이 약속을 어길 경우 어떤 형벌도 달게 받겠다.’라는 내용으로 된 서약서(각서)를 쓰고 풀려난 겁니다.

 

조폭들을 동원한 정치꾼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통치자들 앞으로 끌려가 거짓 모함으로 고발당한 야손과 믿음의 형제들은 이제 금방 예수님을 믿은 초신자들이 아닙니까? 그들은 갑자기 닥친 정치적 모함을 스스로 이겨낼 믿음이 아직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통치자들이 불러 주는 대로 일단 서약서를 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떠난 뒤에도 정치꾼 유대인들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괴롭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데살로니가를 다시 방문하고 싶었지만, 데살로니가전서 218절에 보면 사탄이 나를 막았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은 야손과 믿음의 형제들에게 서약서를 쓰게 한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가면 각서를 쓴 야손과 형제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데살로니가로 갈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대신 데살로니가전서 32절에 보면, 바울은 아덴에서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보냅니다. 자기를 대신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북돋아주게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씩이나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믿음을 격려해주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고린도까지 갔을 때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고 바로 이어 후서를 쓴 겁니다. 그러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을 지켰고 북쪽 마게도냐와 남쪽 아가야 지역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본이 되었다고 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로마서 1621절을 보면 바울이 나중에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라고 씁니다. 즉 바울과 함께 로마의 교인들에게 문안하는 사람 가운데 바울의 친척 야손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친척이라는 말이 헬라어에는 동족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족 유대인을 뜻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야손의 이름을 언급하면서도 그 야손이 데살로니가의 야손이라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다시 보냈던 디모데의 이름과 함께 붙여서 야손의 이름을 쓴 것을 보면, 그 야손이 데살로니가의 야손이라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나가는 말]

 

오랫동안 믿음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 어떠십니까? ‘믿음생활은 마라톤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꾸준히 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 그러니까 슬슬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은 적당히 슬슬 하는 것이 좋다. 마라톤처럼 오래 가야 하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 말을 마라톤 선수들이 들으면 마라톤을 모독한다고 할 것입니다. 마라톤 선수들이 뛰는 것을 보셨습니까? 슬슬 뛰는 마라톤 선수를 보셨습니까? 엄청나게 빨리 뜁니다. 우승하는 선수를 보면 100미터를 17초 정도로 뛰는 페이스로 42.195 km를 뜁니다. 그게 슬슬 뛰는 겁니까? 엄청나게 빨리 뛰는 겁니다. 전력을 다해서 42 km가 넘게 뛰는 게 마라톤이니 슬슬 뛰는 게 마라톤이 아닙니다. 저처럼 느린 사람이 전력을 다해 뛰는 것보다 더 빠르게 선수들은 두 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뜁니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그들은 평소에도 상당한 거리를 반복하여 달리며 훈련합니다. 마라톤은 평소에 그렇게 훈련이 되고 습관이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도 평생 지속하는 것의 의미에서는 마라톤과 같습니다. 그런데 믿음생활도 평소에 훈련되고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묵상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이 우리의 거룩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해 우리 눈을 맞추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신앙이 거룩한 습관이 우리 삶에 굳어져야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이 화석화가 되어 버리면 우리 자신도 망가지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내 가족도 내가 망가뜨리고 주변 사람들까지 망가뜨리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거룩한 습관이 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워지고 새로운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믿음이 습관이 된 사람만이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고 지혜로운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크리스천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