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4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사도행전 1419~28)

 

[들어가는 말]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는 거창고등학교에 대해서 들어본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되어 운영되는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거창고등학교에는 교육목표가 이름 그대로 아주 '거창'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해 고귀한 인격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 인간의 존재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다.

* 이 세상에는 만큼 귀한 가 살고 있다.

* 라는 존재는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나의 소중한 이웃이다.

 

어떤 학교가 이런 교육목표를 갖고 있습니까? 참 놀라운 일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가 직업을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할지를 일러 주는 <직업 선택의 십계명>입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전부 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관들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입니다. 학생들을 잘 지도할 책임이 있는 학교가 어떻게 자기 학생들, 제자들을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되는 곳, 부모와 배우자가 결사반대하는 곳, 심지어는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 즉 죽는 곳으로 가라고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까? 누가 보아도 그렇게 살면 인생을 망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그런데 놀랍게도, 과격하게 들릴 수 있는 이런 말 뒤에는 남들이 안 가는 길,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좁은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믿음의 사람이라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길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길, 즉 좁은 길의 가치를 알고 믿음으로 좁은 문에 들어가 좁은 길을 걷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창고등학교는 그 학교를 찾은 학생들에게 세상의 길이 아니라 세상의 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믿음의 길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렇게 세상이 추구하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믿음으로 묵묵히 걸어갈 때 오히려 아주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그 믿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의 편지들과 사도행전을 통해 그런 <직업선택 십계명>이나 교육목표가 나온 게 아닌가 보입니다.

 

 

1.   죽음에서 일어나다

 

1)  선동당하여 바울을 돌로 친 루스드라 사람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19)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했는데, 그 무리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믿어 제사 지내려던 바로 그 루스드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의 여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땅으로 간 바울과 바나바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비시디아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교 지도자 무리가 바울을 시기하여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결국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100마일 이상 떨어진 이고니온(지금의 코니아)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관리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치려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을 떠나 서남쪽으로 약 3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루스드라로 갔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부터 거리를 따지면 루스드라는 약 140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지금 자동차로 가도 프리웨이를 70마일로 달려서 꼬박 2시간을 가는 거리인데, 바울이 루스드라에 나타나 선천적으로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루스드라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진 이고니온에 전해졌고, 또 루스드라에서 14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전해졌습니다.

 

그 소문으로 인해서 바울에 대한 시기심과 증오심에 다시 사로잡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서로 모의하여 함께 루스드라로 습격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세기 당시 교통 여건을 감안할 때 소식이 들려오고 그리고 가기까지 아무리 짧아도 최소한 2주 정도가 걸립니다.

 

그 두 주 동안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제사 지내려 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사도들에 대한 루스드라 사람들의 존경심은 더 커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를 찾아와서 무리를 충동한다고 해도 그다지 큰 영향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19절은 우리의 예상을 뒤집는 내용을 보여줍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선동을 당한 루스드라 사람들 무리가 바울을 돌로 쳤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죽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심하게 돌로 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을 신으로 믿고 제사를 하려 할 정도로 바울을 신봉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이었는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충동하니까, 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죽일 마음으로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헬라인)이었습니다. 루스드라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을 정도로 유대인 거주자가 적었기 때문에, 루스드라 사람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평소 별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루스드라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유대인들의 충동에 자신들이 존경하며 떠받들던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돌을 들어 쳤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어떻게 선동을 했기에,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모시고 제사까지 지내려 했던 루스드라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돌로 칠 정도로 된 것입니까?

 

당시 루스드라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를 믿고 있었고, 그리스 신화 속의 열두 신들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치유하니까 곧장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하면서 믿을 정도로 그들은 그리스 신화에 깊이 심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과 함께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할 정도였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 정도로 그리스 신화에 심취하여 신들을 숭배했다면, 신화 속의 열두 신들을 내세워서 그와 관련된 사업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로마가 바울이 편지를 쓰던 시대까지는 황제숭배가 별로 강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있었지만 막 박해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1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우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나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한 것만이 아닙니다. 왜 황제숭배 사상을 그토록 전파하고 황제 신전을 세우며 황제에게 제사하게 했는가? 핵심은 돈입니다. 황제 신전을 세워놓고 황제숭배를 강요하면 거기서 돈이 많이 걷힙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제우스 신당 외에도 나머지 열한 신들을 위한 열한 개의 신당들이 있는데, 각 신당마다 제사장 사제들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뿐 아닙니다. 그 신전들에 제물과 제물을 장식할 꽃들을 담당하는 사업가들이 당연히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당을 짓고 보수하는 건축업자들도 당연히 있습니다. 게다가 열두 신들의 신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려서 팔며 장사하는 사람들, 또 열두 신들과 관련된 각종 기념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사람들, 나가서 파는 판매원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지금도 유명한 유적지나 역사적인 곳들에 가보면 전부 그런 것들을 팔며 장사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 가족들의 제사를 위해서 신전들에 찾아와 지출하는 금액을 다 합치면 어마어마한 액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루스드라 사람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그리스 신화 속의 열두 신들과 다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살던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이 무엇이라고 설교했습니까?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 눈에 보이는 것을 숭배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런 일을 버려라.’ 하고 설교했습니다.

 

만약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눈에 보이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같은 신상을 더 이상 섬기지 않는다면, 그리스 신화의 열두 신들과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루스드라 사람들,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루스드라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킨 사도 바울의 영적 파워에 압도되었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또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래서 조금 힘들기는 해도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며 반대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럴 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의 이득 문제를 건드린 것입니다. 만약 바울의 말을 따를 경우에 헬라 열두 신들의 이름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계가 다 끊어질 것이라고 부추긴 겁니다. 바울은 그들의 삶을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파괴하려고 온 흉악자라는 식으로 바울을 모함하고 매도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속의 이득을 망치고 손해를 보게 만드는 바울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선동한 것입니다.

 

선동을 당하는 경우를 보면 모든 경우에 다 사실이 아닌 것에 넘어갑니다. 그러면 사실이 아닌데도 왜 넘어갑니까? 바로 거기에서 인간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드러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고 원하는 것만 듣는 것이 확증편향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이 평소에 있는데 그것을 건드려주니까 거기에 확 넘어가는 겁니다. 여기도 똑같습니다. 유대인들의 선동에 넘어간 루스드라 사람들은 현실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과 함께 바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조금 후 16장에도 나오지만 빌립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바울이 어느 여종에게 있는 귀신을 쫓아냄으로 귀신에 들려 점을 치며 돈을 벌던 것이 끊어진 것을 본 주인들이 바울을 고소해서 때려 가두게 합니다. 에베소에서도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신상을 만들어 팔다가, 바울과 복음 때문에 자기 밥줄이 끊기게 되니까 소요를 일으키며 바울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핵심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 앞에 장사 없다는 말도 있는데 정말 맞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돈과 연결되면 정말 신앙을 지킬까요? 평소에 교회 나와서 예배하면 한 번 예배하러 올 때마다 $100씩 내서 나라가 걷어 한다고 하면 조금은 나올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한 번 나올 때마다 $1,000씩 내야 한다면 굉장히 줄어들 겁니다. 한 번 나올 때마다 $10,000씩 내야 한다면 아마 나올 사람이 거의 없을 겁니다. 우리의 이권이나 이해관계와 얽힌다면 신앙을 지킬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현실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꼬임에 넘어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고, 돈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려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거부한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2)  다시 일어난 바울

 

루스드라 사람들을 선동한 것은 헬라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과 같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종교의 율법은 성 안에서 사람을 돌로 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죽일 때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 죽이지 않고 밖으로 끌어내어 밖에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바울이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 바로 거기서 진두지휘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여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들이 그토록 신봉하며 따르는 율법을 어기고 성 안에서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랬다면, 그들은 이방인들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분명히 사람을 성 안에서 돌로 치면 안 됩니다. 그런데도 그냥 돌로 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지키는 것보다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사악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한다고 하면서도 악한 방법으로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바울의 시체를 질질 끌고 나가 성 밖에 내버렸습니다.

 

만약 바울의 인생이 여기서 이처럼 허무하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면, 좁은 길을 스스로 걸어간 바울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정말 바울이야말로 영광이 아니라 단두대로 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유대종교로 볼 때 굉장히 뛰어난 학자였고, 앞길이 탄탄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자기는 그런 것들을 다 버렸다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생명, 그 복음 때문에 다 버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값어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냥 끝나면 바울이 얼마나 미련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바울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련해 보이는 그 길을 간 것은, 그가 정말 미련해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사명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은 것은 결코 바울 인생의 끝일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0)

 

제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제일 의아스럽고 놀라는 장면이 바로 여깁니다. 별 설명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바울이 일어났다고 간단히 기록합니다. 누가 봐도 시체인데 어떻게 벌떡 일어납니까?

 

이때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갓 영접한 루스드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돌로 쳐 죽인 사람들이 바울의 시체를 끌어다가 성 밖으로 내버리니까 바울의 시체로 다가간 것입니다. 그들도 바울이 죽었다고 여기고 그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며 장사 지낼 것인지 의논하기 위해서 모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모든 사람이 죽은 시체라고 여겼던 바울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말 일어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가 일어나다는 의미와 일으켜 세우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단어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의 막바지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겠지만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20:18-19). 그때 살아나다란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인 아니스테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돌에 맞아 쓰러진 바울이 정말 심하게 맞아서 거의 가사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돌에 맞은 바울이 실제로 죽었던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실신했다가 일어난 것이든지, 혹은 정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든지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사람들이 죽었다고 판단할 정도의 시체와 같은 상태였던 바울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일어난 게 아닙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회당에서 행한 설교 중에(13:32-34),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음을 두 번이나 강조했는데, 일으키셨다는 단어가 두 번 모두 여기와 같은 동사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켜 세울 때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령했는데, 일어서라고 명령할 때 사용한 단어도 같은 단어입니다.

 

돌에 맞아 죽었다가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난 바울은 루스드라의 동쪽으로 약 90마일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더베로 이동하는데, 그 당일이 아니라 이튿날 갔습니다. 먼저 그는 일어나자마자 무엇을 했습니까? “그 성에도로 들어갔습니다. ‘그 성이 무슨 성입니까? 바로 루스드라입니다. 방금 자기가 돌에 맞아 죽은 바로 거기, 바울을 돌로 쳐 죽였던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바로 거기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원정을 온 유대인들이 아직 거기에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온통 깨지고 피가 막 흐르며 보기에 너무 처참한 상처투성이의 바울은 제대로 걸을 수도 가눌 수도 없는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면서, 조금 전에 돌을 맞아 시체로 끌려 나온 그 끔찍한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도 성경을 읽다가 경악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왜 바울은 그렇듯 무모하면서도 미련한 짓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루스드라 성 안에는 자신을 돌로 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신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본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아직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루스드라에 있는 동안에 자신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도 아직 거기에 많았습니다. 더구나 선천적으로 다리를 못 쓰던 그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된 것은 루스드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온 루스드라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돌에 맞아서 시체로 질질 끌려가 성 밖에 내팽개쳐진 바울이 상처투성이의 몸, 피가 흐르며 처참한 그 몸을 이끌고 다시 루스드라 성으로 탁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겠습니까? 사람들은 다 기절했을지도 모릅니다. 방금 전에 자기들이 돌로 쳐 죽였는데, 방금 전에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자기들이 봤는데, 그 사람이 다시 들어와서 자기들 앞에 딱 서 있으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니까 얼마 전에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킨 것이 가짜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더 이상 루스드라 사람들이 감히 바울에게 손을 댔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특히 무엇보다 루스드라에서 새로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감격스러운 장면이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2.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

 

1)  방문했던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는 바울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1)

 

다음 날 더베를 찾아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은, 다시 루스드라로 돌아오고 거기서 다시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갑니다. 이고니온의 유대인들 역시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도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해서 바울을 박해하고 내쫓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도 위험하기 때문에 바울이 되돌아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새로 믿은 제자들의 믿음을 북돋아주주고 위로해주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서 일어나 루스드라 성 안으로 다시 들어갔던 바울은 그 다음 날 더베로 갔다고 했습니다. 더베는 루스드라 동쪽 90마일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90마일이라면 걸어서 5일 정도나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상처투성이인 바울에게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더베에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덕분에 더베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바울을 죽이려고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부터 와서 루스드라를 습격했던 유대인들이 더베로는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험한 산길인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거쳐 더베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더베에서는 유일하게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더베에서 동쪽으로 약 120마일 정도만 더 가면, 그러니까 일주일 정도만 더 걸어가면 자신의 고향인 다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지중해 세계 전도를 위해 수리아의 안디옥에서부터 전도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전도지인 더베에 이르기까지 바울의 여정을 이해하기 쉽게 어떤 분이 둥근 시계의 시간으로 설명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의 출발지였던 수리아(시리아) 안디옥은 3시에 해당합니다. 그의 첫 번째 전도지였던 구브로 섬은 6시이고, 구브로 섬에서 다시 배를 타고 찾아간 밤빌리아의 버가는 9시입니다. 또 버가에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서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그리고 루스드라를 거쳐 도착한 마지막 전도지 더베는 12시 정도입니다. 그리고 더베 동쪽의 다소는 2시 정도입니다.

 

원래 떠난 데가 3시 정도이고 자기 고향은 2시 정도니까 얼마나 가깝습니까? 그러니까 12시의 더베에서 3시의 수리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2시 방향의 다소로 가면 되지, 거꾸로 돌아서 갈 이유가 없는 겁니다. 특히 2시 지점의 다소에서는 배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더베에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기에 다소는 경유지 중 가장 좋은 장소였습니다.

 

더베에서 다소로 가기 위해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타우루스 산맥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동서로 활처럼 휘어져 있기 때문에, 더베에서 바울이 동쪽이나 서쪽 중 어느 쪽 길을 선택하든 타우루스 산맥을 반드시 넘어야 함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이 다소로 가야 할 또 다른 이유는, 그가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그동안 거쳐 온 성읍들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거꾸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거리상의 문제나 신변 안전 문제를 두고서라도, 바울에게는 다소를 가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자신의 고향이었기 때문이고, 자기 가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의 바울이라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고향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버가에 도착해서 풍토병에 걸렸고, 그 병에 시달리는 병약한 몸으로 목숨을 걸고 험한 산길인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또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하며 죽이려고 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서 죽었든지 죽을 뻔했습니다. 몸이 아주 심하게 상했습니다. 그 상한 몸을 겨우 이끌고 90마일이나 떨어진 더베로 와서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지치고 힘든 상황이라면, 고향이 바로 저기 앞인데 다른 생각할 것 없이 곧장 고향 다소로 가서 가족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몸을 회복하고 지친 마음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거기서 조금 쉬다가 그 길로 가면 원래 떠나왔던 자기 교회가 있는 안디옥까지 최단 코스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고향을 바로 앞에 두고도 고향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향이 있는 동쪽으로 가지 않고 거꾸로 서쪽을 향해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간 것입니다(21). 바울이 그 길을 선택한 것은 무엇인가 잘못 계산했거나 착각했거나 바보여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 박해가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줄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철저히 자기 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2)  다시 방문한 목적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2)

 

비시디아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선동당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의 박해 속에 쫓겨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이고니온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는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특히 루스드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진짜로 돌에 맞아 죽어서 시체가 되어 질질 끌려 나가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바울이 다시 일어난 것을 보았다 해도, 그 다음 날 바로 떠났기 때문에 루스드라의 제자들은 그 이후에 바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언제 만날지 기약도 없이 떠났던 바울이 다시 금방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거기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복음을 위해서, 자기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바울이 자기들을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울을 보는 순간, 흔들리던 그들의 마음이 더 강해지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은 그들에게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하고 권했습니다. 믿음을 한번 맛보거나 그저 체험해 보라고 말하지 않고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머물러 있다는 말은 계속 거한다는 것입니다. 한두 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냥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 않고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이 믿음마음을 굳세게 하는 믿음’, ‘마음을 더 강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잘 믿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건강하고 장수를 누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정말 믿는다면, 그 결과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으려면 고난을 받아야 한다거나 고난을 안 받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정말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면 고난은 반드시 온다는 말입니다.

 

이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고 함께 금식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님께 그들을 위탁하고 떠납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3-25)

 

각 교회가 바로 갈라디아 교회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인들 가운데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면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께 그들을 위탁합니다. 그가 택한 장로들로 하여금 기도하면서 자신을 주님께 위탁하게 함으로써, 나머지 교인들도 그들을 본받아서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타우루스 산맥을 다시 넘어 처음 도착했던 버가로 되돌아갑니다. 버가는 본문의 시점에서 최소한 1년 이상 전에 바울이 찾아간 곳이었지만, 아주 큰 도시였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바울이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에 복음을 하나도 전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던 곳입니다. 그곳을 다시 찾은 바울은,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없이 전했습니다(25).

 

버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바울은 앗달리아로 내려갔습니다. 지금 안탈리아라고 불리는 이곳은, 버가에서 약간 서쪽으로 떨어진 버가의 외항입니다. 사도행전 1313절을 보면, 바울이 처음 버가에 왔을 때 구브로 섬에서 배를 타고 버가에 도착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 여행을 모두 마친 바울은 버가에서 배를 타지 않고 앗달리아까지 가서, 그곳에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바울은 버가에 도착할 때와는 달리, 버가가 아니라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처음 출발했던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되돌아갑니다.

 

 

3.   1차 전도여행을 마치다

 

바울의 연대기를 계산하면, 주후 45년 봄 지중해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했던 바울과 바나바가 본문에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가기까지는 최소한 1년 이상에서 최대 2년이 소요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던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대하여 뭐라고 말합니까?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6)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할 때 그들을 하나님께 다 맡겼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기도하며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은 대로, 바울과 바나바가 가서 복음을 전했던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지도자를 세울 때 똑같이 했습니다. 자기들이 계속 같이 있어줄 수가 없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맡기고 왔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지중해 세계 전도를 위한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그들을 하나님께 위탁했습니다. 맡겼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한,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그 시대의 역사 속에 이루실 것을 확신하면서 기도하고 보낸 것입니다. 이제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되돌아간 바울과 바나바는 무엇을 합니까?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27-28)


안디옥에 도착하는 즉시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 즉 성도들을 모았습니다. 특별 선교 보고 집회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 선교 여행 중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행하신 모든 일들, 특히 이방인들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것 등을 보고하는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습니다.

 

오래 함께 했습니다. 이처럼 함께 하는 교회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는 것도 목사가 주는 게 아니라 교회가 주는 것입니다. 전도도, 선교도, 목장도 다 교회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하거나 무슨 사조직을 만들어서 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하는 교회이며, 교회가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서 함께 주님께서 주신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