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3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6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사도행전 1512~29)

 

[들어가는 말]

 

몇 년 전 나온 책 중에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있었고, <지성과 영성의 만남>이라는 책도 있었습니다. 바른 영성은 반드시 바른 지성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영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습니다만 외치는 것이 바른 영성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따져보고 이해가 되어야만 믿는 것이 바른 지성도 아닙니다.

 

영성과 지성이 두 수레바퀴처럼 함께 갈 때 우리의 신앙은 날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성, 예수님이 이야기하시는 지성은 세상의 학력이나 학위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건강한 상식입니다. 바른 영성의 출발점은 세상의 학력이나 학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건강한 상식입니다.

 

어떤 젊은 가정주부 자매가 어느 목사님에게 상담편지를 쓰면서 이런 내용으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두 아들을 키우는 지극히 평범한 교인입니다. 제가 이렇게 목사님께 신앙 상담을 요청 드리는 이유는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어서입니다. 저는 딸만 둘인 집안의 장녀인데, 제 동생은 어려서부터 저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려는 노력을 많이 하던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늘 신앙적으로 저의 게으름과 부족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전에는 동생이 하는 얘기가 듣기는 싫었지만 틀리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해하며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몇 해 전부터 이상한 책을 읽고 이상한 교회에 다니면서부터 더 영적인 것만 찾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에 요술, 마녀, 괴물, 인형 등이 나오면 영적으로 악하다고 합니다. 산타 할아버지는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는 사탄의 계략이라고 합니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분별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알려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산타 할아버지도 어린 시절만 가질 수 있는 추억이니까 굳이 제가 그것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제가 영적으로 너무 둔감하여 그렇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제가 둔감한 건 맞는데, 정말 동생이 말하는 게 영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 남편은 전도사입니다. 얼마 전에 초등부 목회를 하던 남편이 행정부서로 발령이 났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 진행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동생은 그런 부서는 형부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속히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도 사모의 영적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 가운데 남편을 그 부서로 옮기셨고, 앞으로 어디로 가든 그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그런 제가 영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목사님, 제 동생은 정말 영적인 건가요? 그 교회를 계속 다니게 그냥 놔두어도 되는 걸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이분의 동생이 정말 영적입니까? 만약 영적이 아니라고 느끼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담 편지를 받았다면 뭐라고 대답해주시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상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동생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전혀 영적이지 않습니다.”

 

바른 영성이 건강한 상식을 지녀야 하는데, 그것이 왜 중요하겠습니까? 건강한 상식에서 벗어나거나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방금 들은 것처럼 한 피를 나눈 가족이며 형제자매라 하더라도 감동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불신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건강한 상식을 지니는 것은 세상과 접촉점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삶으로써, 세상으로 우리의 영성, 복음,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상식에 머물지 않고 상식을 뛰어넘는 삶을 삶으로써 세상의 신뢰를 받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른 영성과 건강한 상식의 관계는 이렇듯 밀접하고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볼 때 소위 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것만이 영적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계속 나옵니다.

 

 

1.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

 

초대 교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모세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아주 심각했기 때문에 논쟁을 넘어 다툼이 되었고,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몇 사람이 안디옥에서부터 사도들과 장로들이 있는 예루살렘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을 믿지만 내가 뭔가를 좀 더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율법이나 선행이나 금식 등을 행함으로써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냐 하는 논쟁이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을 때, 유대인들 중에도 특히 바리새파였다고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주의자들이 반론을 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당연하지만,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도 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도들과 장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사이에서 논쟁이 거듭되자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참된 구원은 어떤 율법의 행위를 더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 후에 안디옥에서 온 바나바와 바울이 일어나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통하여 하신 일들을 간증합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2)

 

원래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될 때는 순서가 바나바와 사울이었다가 구브로 섬을 지나면서 사울이 헬라식 이름인 바울로 바꾼 다음에 그 순서도 바울과 바나바로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시 바나바와 바울입니다. 성경에는 순서에 의미가 있습니다. 바나바가 먼저 나오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가 굉장히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예루살렘 교회, 특히 유대주의자들 가운데에는 바울이 이전에 워낙 교회를 강하게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아직 의심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여기서는 앞에 서고 있습니다. 이방인 사역을 위해서는 바울이 앞에 섰고, 유대인들을 대하는 데에서는 바나바가 먼저 앞에 섰습니다. 이 얼마나 환상의 호흡입니까?

 

지난번 1차 선교여행(구브로, 더베,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과 안디옥 교회 목회를 통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깨달은 것은, 할례를 받지 않았어도, 율법의 전통과 의를 행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도 찾아와주셨고 예수님은 그들의 구원이 되셨으며 성령님의 역사와 기적들이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며,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방인들에게도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관심을 가지실 수 있는가? 모세의 율법과 전통을 지키지 않았고 할례를 행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역사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지켜온 전통과 신앙적인 배경으로 볼 때 그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사실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통해 일어났던 이 모든 역사를 간증하고 보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모든 열방과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제사도 예배도 율법도 모르는, 심지어 우상을 숭배했던 이방인들에게도 역사하셔서 그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경향입니다. 자기가 아는 한에서 하나님을 자꾸 제한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같은 분인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저처럼 예수님을 오래 믿어 온 사람들, 어릴 때부터, 태어날 때부터 교회 다닌 사람들 가운데 그런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방법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경험, 자기 지식, 자기 방법 안에 자꾸 하나님을 가두어두려고 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벗어나는 역사에 대해서는 부인하며 저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믿고, 특히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과 경험을 넘어서 계시는 하나님, 저 위대하신 하나님, 한이 없으신 하나님을 자꾸 자기 생각 속으로 제한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경험과 전통과 생각 안으로 가두려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실수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한하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게 아니면 잘못됐다고 하는 경향입니다. 물론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우리 교회는 장로교인데, 장로교가 아니라 예를 들어 초교파나 순복음이나 우리와 스타일이 다른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내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저건 잘못됐다고 하는 실수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모른다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나님도 잘못됐고 이상한 분이라고 하거나, 내가 모른다고 성경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엄청난 교만입니다. 정말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시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하여 정통신학이나 여러 좋은 책들을 통해 정말 연구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노력은 하나도 안 하면서 그냥 보기에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교만이고 엄청난 실수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시고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기적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내가 모른다고 하나님이 잘못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위에 계신 분입니다.

 

 

2.   야고보의 발언

 

1)  베드로의 말에 동의함

 

바나바와 바울이 간증을 하고 난 후, 이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공의회 의장인 야고보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결론을 짓습니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3)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자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입니다. 열두 제자(사도) 중 하나인 야고보는 사도행전에서 전에 살펴본 것처럼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야고보일 수 없고, 야고보서를 기록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는 바울이 그를 가리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9)라고 표현할 정도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 중심인물, 요즘 말로 하면 담임목사였습니다.

 

그런 야고보가 일어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라고 했을 때에는 자기 개인의 사사로운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유대주의자에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정통 유대인이고 본토 출신이고 히브리파로 히브리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개인의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논쟁과 토론과 변증의 과정을 거치고 이제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까지 듣고 난 다음, 야고보는 의장으로서 교회에 결론을 이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4)

 

먼저 야고보는 시므온, 즉 시몬의 히브리식 표기로 베드로를 언급하면서, 먼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조금 전 이미 말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방인들, 율법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할례도 행하지 않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기적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신 일이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구약 시대에는 없었고 오순절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처음 있는 일이기에 구약 전통을 믿고 있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원래 본토 유대인, 히브리파, 유대주의자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핵심 사도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이 일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환상을 보여주시고, 그를 고넬료의 집으로 인도하셔서 그와 그 가족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후 세례를 받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본토 유대인 사도 베드로가 체험하게 해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조금 전 그 모든 사실을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으로 볼 때,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사건은 사람들이 조작하거나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약의 예언과 약속의 응답과 성취로서 진짜로 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함

 

둘째로, 하나님이 하신 이 일은 예고 없이 무작정 된 일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이미 알려진바 되었고 그 예언이 이제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5)


베드로가 말한 것은 사실 자기 개인에게 일어난 경험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말한 것도 그들이 다니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간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신앙적인 결론을 내릴 때 개인의 체험이나 환상에 의해서만 결정하거나 결론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체험과 환상은 반드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언과 일치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바로 이것을 분명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뒤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적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환상을 보는 체험을 했다면, ‘저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경험한 적도 없기 때문에 잘못됐다.’ 하고 쉽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모른다고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체험과 환상이 성경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치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단이 대부분 그런 식으로 나왔습니다. 극단적으로 나가거나 잘못되기 쉽습니다.

 

우리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간증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성경과 일치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구약의 메시지와 당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서로 연결시킨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증거로서 구약의 한 부분을 인용하는데, 그것이 아모스 911-12절입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6-18)

 

하나님이 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시고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시겠습니까? 왜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아주 간단합니다.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시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예루살렘과 유대의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만 좋아서 택하신 게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다른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로 나오도록 제사장 민족의 역할을 하게 부르신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 사실을 오래 전 이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 약 750년 전에 미리 선포했던 것입니다. 아모스 9장을 읽어보면 여기 사도행전 본문과 몇 가지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아모스 시대와 1세기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약간 다른 데서 온 표현상의 차이입니다. 또 아모스는 구약이니까 히브리어로 쓰였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구절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인용했기 때문에 약간 다른 것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찾으신다는 메시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셨습니다. ‘너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 그래서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입니다. 그 아모스의 메시지가 지금 베드로가 말한 메시지,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에게 일어난 일들과 일치한다는 것이 야고보의 결론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응답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신 역시 유대주의자였던 야고보는 이런 일들을 들으면서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을 열심히 공부했던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의 회심은 인간이 계획하고 만든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행하신 그분의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였다고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아모스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고 야고보는 그것을 주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3)  야고보의 결론

 

이 말씀에 근거해서 야고보는 이제 교회를 대하여 의장으로 두 가지 일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19-21)

 

19절의 결정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던 율법의 규례나 할례를 강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야고보의 말은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결정을 뜻하는 선포였습니다. 여기 한국말로는 19절에서 내 의견에는이라거 해서 마치 개인 의견으로 말하는 것처럼 번역되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이 말은 단순히 개인의 의견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의장으로서 강력한 선포를 하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꾸 유대인이 먼저 되고 나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유대인의 규례나 전통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저처럼 날 때부터 교회에 다니거나 어릴 때부터 다니거나 평생을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이제 막 믿어보려고 하는 분들이나 막 믿고 들어오는 분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괴롭힐 수 있고 또 예수 처음 믿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는 겁니다. 자기는 괴롭힌다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겁니다. 정작 예수님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를 않고 자꾸 어떤 규례나 전통만을 강요함으로써 잘못된 신앙을 심어주는 실수를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식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이방인 신자들의 목에 메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됩니다.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의 반론에 대해서 야고보의 결론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렇게 괴롭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은혜 받는다’, ‘믿음생활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실은 나의 편견과 나의 고집이 깨지는 것입니다. 내 자아와 에고가 무너지는 것이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주장이 틀렸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할 때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 내 주장보다 더 크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실수를 하고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생업에서나, 교회에서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나, 우리가 잘못하고 실수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다 실수를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잘못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은 다음에도 두 종류입니다. 깨닫고 시치미 떼는 사람이 있고, 깨달았으면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깨닫는 사람도 많지 않고, 깨달은 다음에도 정말 인정하며 자기 실수를 고백하며 사과하는 사람은 정말 소수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도, 야고보도 사실은 정반대로 생각하던 사람들인데, 자기들의 생각이 틀렸고 잘못되었으며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임을 정말로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인정하고 고백하고 사과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의 위기 가운데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사람들을 속박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꾸 율법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가르치기 전에 무엇을 먼저 가르칩니까? 교회생활 하는 방법이나 노하우를 먼저 가르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과 기쁨과 자유와 평화를 가르치기 전에 율법적인 것을 먼저 가르칩니다. 교회에서는 이러면 안 되고 저러면 안 된다는 것을 먼저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흔한 예가 이런 것입니다. ‘교회에는 반바지 입고 오면 안 된다. 슬리퍼 신고 오면 안 된다. 모자 쓰면 안 된다. 더럽게 오면 안 된다. 불경한 모습으로 오면 안 된다.’와 같은 것들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말하면 좋겠는데, 뭘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먼저 가르치려고 합니다.

 

또 교회당을 가리켜 교회에 오래 다닌 분들이 보통 뭐라고 부릅니까?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미국 사람들 중에 교회를 가리켜 ‘Temple’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못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자꾸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와야 한다.’고 하면서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요것도 안 되고...’라고 하며,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자꾸 먼저 가르칩니다.

 

아마도 유교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독 한국 교회에는 도덕적인 가르침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꾸 사람들에게 율법적인 것을 계속 강요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잘못했다고 회개하며 돌아오겠습니까?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됩니다. 믿던 아이들도 무신론자가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나중에는 오히려 하나님을 안 믿는 길로 가게 됩니다.

 

저도 목사라서 조심스럽지만, 부모가 목사이거나 신앙이 몇 대가 되는 가문에서 자랐더라도, 단지 기독교를 부인하지만 않을 뿐이지 하나님을 안 믿고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릴 때부터 이미 너무 질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진정한 복음을 들려주었더라면,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 같은 것을 먼저 가르쳐주었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이거 하면 안 돼. 저거 하면 안 돼.’ 하고 윤리도덕만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런 문제가 우리뿐 아니라 초대 교회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그들 중 다수가 이전에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장로교회에 다녔었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단이 생긴 책임이 사실은 기존 교회에 많습니다. 복음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가르쳐주면 좋았는데, 예수님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서, 그들이 나름대로 영적인 것을 찾다가 이단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구원을 선포하고 예수님을 가르치며 예수 믿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자꾸 알려주기 위해 삶 공부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공부를 함으로 말씀에서 정말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런 것을 배우지 못하고 그냥 다니기만 하니까 이단에 넘어가는 것입니다교회에 다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기성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한 번도 느껴본 일이 없다. 그냥 교회에 다녔을 뿐이다.’ 교회가 이런 말을 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도 가르쳐야 하지만, 사랑과 공의는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을 제대로 가르치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전통이나 율법만을 강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야고보가 내린 결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꾸 이건 안 되고 저건 안 되고 그런 것을 자꾸 먼저 가르치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내린 두 번째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런 식으로 뭔가를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받은 사람다운 생활이 있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20절에서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자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아마 술 담배를 아직 못 끊고 아직 하고 있는 분들이 계실 텐데, 술 담배를 하면 구원을 못 받습니까? 보통 분들은 그런가 하고 계시고, 술 담배 하는 분들은 절대 그러면 안 되지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술 담배를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술 담배를 끊어야만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난 아직도 담배 피우는데, 나는 술 마시는데, 나는 도박 하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구원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뭔가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윤리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몇 분들이 약간 안도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런 술 담배 문제가 믿음과 아예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술 담배를 끊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렇게 내게 좋지 않은 것은 끊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에 집중하다 보면 나에게 해로운 것들은 뒤로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끊어야지, 끊어야지, 끊어야지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방식대로 살다 보면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적으로 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동을 바꿨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고 보니까 , 구원받은 사람다운 삶,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다운 삶이 있구나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것을 다루는 과정이 새로운 삶입니다. '생명의 삶'을 하고 나서 오랫동안 공부를 안 하고 있는 분들은 꼭 새로운 삶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거지로 살 때는 거지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왕자가 되었을 때는 왕자의 생활이 있습니다. 도둑으로 살 때는 도둑의 문화가 있고, 사기꾼으로 살 때는 사기꾼의 문화가 있고, 깡패로 살 때는 깡패의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고 보니까 더 이상 그렇게 계속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천국 백성답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크리스천답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러한 내용을 야고보서에 잘 설명해놓았습니다. 이 야고보서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는데, AD 48~49년경에 쓰였다는 것과 AD 60년경에 쓰였다고 보는 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AD 50년에 열린 예루살렘 공의회 전에 쓰였다고 보는 게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큰 상관은 없습니다.

 

당시 야고보가 많은 것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쓴 것인데, ‘아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야고보의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정말로 믿은 사람이라면 그 후에 믿는 사람다운 행동이 따라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로 믿었다면 행함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야고보의 메시지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야고보서의 메시지이고, 그렇게 야고보서를 쓰고 난 후 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선포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화가 달라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문화가 있고 이방인에게는 이빙인의 문화가 있는데,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인 사람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인 사람이 공통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유할 문화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에 대해 야고보는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네 가지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에 사용되었던 제물이나 음식이나 물건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사람마다 전부 우상을 섬깁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든 다른 종교든 간에 모두 자신의 우상을 가지고 있는데, 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상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문화, 과거에 하나님 없이 우상을 가지고 살면서 가지고 있던 그 문화를, 이제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더 이상 그 문화로 살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지만, 계속 그런 문화 속에서 살게 되면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유혹을 받아 넘어지기가 너무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크리스천이 되었는데도 그 기쁨을 누릴 수 없고, 평생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염려만 하다가 인생이 끝나고 맙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둘째로, 음행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우상숭배에 필수적으로 붙어 다니는 것이 바로 음행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전에 신전창기들이 있어서 버젓이 성적 음행을 행하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구약시대부터 그런 것들이 있었고 로마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의 갈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제사의 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음행은 마귀가 쓰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겠습니다. 그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목매어 죽인 것, 넷째는 피를 멀리하라는 것인데, 이 두 가지가 사실은 같은 겁니다. 목매어 죽이면 피가 몸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에게 상당히 해당되는 말인데, 보신탕 좋아하시는 분들은 그 고기가 목매어 죽이는 것이고 또 선지국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꼭 율법적인 것이라기보다, 건강에 상당히 좋지 않은 것들입니다. 목매어 죽이고 피를 먹는 것은 구약에서도 금하는 행위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영적인 방법대로 살라는 지침입니다.

 

 

3.   사도들의 편지를 들고 안디옥으로 돌아가다

 

이제 야고보의 말이 끝나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는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의 내용을 담은 편지도 함께 보냅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2-23)

 

그들은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뽑습니다. 이 유다는 이전에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맛디아를 뽑았을 때 맛디아와 함께 후보로 나왔던 바사바라 하는 요셉’(1:23)의 형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사람고 또 실라(나중에 바울과 2차 전도여행을 함께 가는)를 보냅니다. 그리고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모든 이방인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문안하게 됩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4-26)

 

그러면 편지 내용이 무엇입니까? 앞에서 야고보가 말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27절에 보면, 편지 내용을 전하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은 말로도 전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7)

 

그들이 편지로도 전하고 말로도 전한 메시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나눈 대로, 첫 번째는 무거운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메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할례를 받아야 한다거나 율법을 행해야 한다는 말로 이방인들에게 짐을 지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을 숭배하던 때의 문화와 음행 등을 버리고 식생활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28-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지금 굉장한 논쟁이 벌어진 상황입니다. 변론이 있고 반론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증언했고, 바나바와 바울도 간증과 보고를 했습니다. 그 후에 의장인 야고보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행위나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므로 할례나 율법의 행위를 강요하지 말라. 그러나 동시에 예수 믿는 사람은 크리스천다운 생활방식이 있다. 그것을 지키며 살아라.’ 이것이 결론입니다.

 

이것은 야고보가 내린 결론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내렸습니까? 아닙니다. 그곳에 모인 사림들이 만장일치나 다수결로 결정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말에 바로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했는데 성령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서 나아가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가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무엇인가를 결정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신앙적인 것이든지 생활이나 가정의 일이었든지 뭔가 결정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이 성령님의 의견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의 의견입니까? 성령과 여러분이 같이 결정한 것이었기를 바랍니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하다가 그만둘 때, 하나님이 그만두라고 하실 때는 대개 다른 것을 하라고 하실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둔 것입니까, 아니면 상황이 어려워지거나 내가 힘들거나 귀찮아서 그만둔 것입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의 결정이냐, 성령님의 결정이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뭔가를 결정할 때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합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눈감아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 가운데 합니까?

 

사도들을 비롯하여 본문에 나오는 초대 교회 성도들은 분명히 자기들끼리 논쟁하고 변론하고 증언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결론을 내릴 때 어떻게 했습니까? 성령님과 함께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나가는 말]

 

오늘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인 야고보는 자신이 쓴 편지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갈 수 있는 크리스천의 귀한 원칙을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저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1:19-22, )

 

여러분, 우리에게 고민이 생겼을 때 우리는 당연히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조언을 구할 때 어떤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기도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많이 읽고 개인적으로 묵상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일수록, 목회자일수록, 사실은 기도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사역이 어떻게 되는가를 판가름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새벽기도가 어떠한가가 그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를 결정합니다. 진정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역과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고 말씀의 사람이 없다면 모래알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바로 그러한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님이 원하시는 일만 감당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