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2일 주일예배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9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의 증거

(창세기 91~17)

 

[들어가는 말]

 

20세기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영국의 어느 천문기상대에서 지구가 한 혜성과 충돌하여 인류가 멸망하게 될 것 같다.’라는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발표가 나온 후에 영국 사회가 발칵 뒤집히고 혼란 그 자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자들은 매일 울부짖으며 지냈고, 남자들은 날마다 술을 마시며 지구 멸망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 혜성이 지구를 살짝 비켜가는 바람에 그 발표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는데, 혜성과 지구가 약간 부딪치기는 했지만 그 핵과 충돌한 것이 아니라 가스층으로 되어 있는 긴 꼬리가 살짝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에 지구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한 달 후, 아니 당장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지금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울고불고 하면서 미친 사람들처럼 돌아다니거나, 나가서 돈을 마구 쓰며 이것저것 사재기를 해대거나, 냉장고에 있는 것을 다 꺼내 먹고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지구의 종말이 내일 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사업을 하겠습니까? 회사를 다니겠습니까? 공부를 하겠습니까? 지금 당장 모든 것이 끝나는데 돈이 뭐가 필요 있고, 학위가 무슨 필요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그 무서운 홍수는 끝났습니다. 그러나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한 가지를 깨달았는데, 그것은 이 세상이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홍수는 단지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에 생긴 단순한 홍수가 아니라, 창조질서의 파괴였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질서의 중단이었습니다.

 

홍수 때 세상이 완전히 미쳐 버린 것 같이 보였습니다. 하늘이 마구 요동치며 물이란 물을 다 쏟아지는 모습, 땅이 막 꺼지며 움직이는 모습, 그리고 바다는 육지 위로 올라오는 모습을 볼 때,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며 노아는 이 세상이 안전한 곳이 아니며, 언제든지 또 그렇게 미친 것 같은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연법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얼마든지 비정상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하루하루 염려 없이 가정에서 일터에서 또 교회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학교에 결석할 때도, 내일도 다음 주도 수업이 또 있으니까 만회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괜찮지, 오늘로 모든 수업이 다 끝이라고 한다면 아파도 기를 쓰고 나갈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관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이번 주에 빠져도 다음 주가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오늘 교회에 안 나오면 영원히 천국으로 가는 문이 닫히고 앞으로 전혀 기회가 없다고 한다면 교회에 빠지겠습니까? 실제로 내 인생이 이번 주에 끝난다는 것을 안다면 오늘 예배는 내 인생의 마지막 예배입니다. 마지막 예배라면 우리가 그 예배를 어떤 마음으로 드리겠습니까? 얼마나 간절해지겠습니까? 졸거나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이 있으니까 오늘 좀 실수를 해도 내일 만회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오늘 한 말과 행동으로 영원이 결정된다면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아무렇게나 행동하겠습니까? 남을 해코지하고 해를 끼치고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죽고 살 일이 아닌데, 빨리 풀고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처럼 내일이 또 오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인데, ‘1년마다 오니까 또 오나 보다할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사는 것이 은혜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구나.’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감사하고 깨달은 사람만이 정말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홍수는 끝났지만 자연의 분노가 아직 식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노아는 느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노아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주십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자연 질서가 이런 식으로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물론 홍수나 가뭄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이 계속 일어나긴 하겠지만, 다시는 이렇게 창조 질서가 중단될 정도로 인류가 몰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창조의 질서는 보존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복과 명령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1)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육하는 것, 번성하는 것, 땅에 충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을 때 저주 받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불행하고 괴롭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처음 만드셨을 때,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고, 또한 서로 인간끼리 교제하고 사랑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게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복을 받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복을 누리지 않으면 잘못입니다. 물론 그 복이 어떤 복인가가 중요합니다. 심지어 많은 교회들도 세상의 복을 그냥 이야기합니다. 요즘 <일터의 삶> 공부에서 다룬 것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 복이 있고, 세상에서 누리는 세상의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복만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세상의 복도 누리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복은 누리지만 세상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악의 경우는 하나님의 복은 누리지는 못하는데 세상의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둘 다 누리지 못하는 것보다 사실은 하나님의 복을 못 누리고 세상 복만 누리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복 받은 사람인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많은 경우 그것을 따라갑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것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복과 인정을 못 받더라도, 영적으로 잘하지 못하더라도, 세상의 여러 복을 누리면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과 세상에서 복을 누리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좇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복인데, 실제로 하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28에 보면 인간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복을 받으라고 하셨는데,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의 복으로 대체하고는, 그것이 우상인데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91절의 말씀은 1장에서 하신 약속을 다시 확인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약속을 다시 하시는 이유는, 이 땅이 심판을 받아 노아와 가족들 8명만 남았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창조 때의 복을 잊지 않고 그 말씀 그대로 주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심판 받고 다 폐허가 되었으니까 그 복이 끝난 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내 약속은 신실하고 변함이 없다. 안심하고 나를 신뢰하라.’ 하시는 뜻입니다. 인간은 마귀의 유혹을 받아 타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셨던 복과 9장에서 노아에게 말씀하신 복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2)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창세기 1장의 말씀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짐승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인간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동물들과 인간들 사이에 긴장 관계가 생긴 것입니다. 동물이 함부로 인간을 해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는 하나님과 인간과 동물 사이에 이런 긴장 관계가 없었습니다. 죽이거나 싸우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죄가 온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가족이었고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다음에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졌습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동산에서 아담아!”라고 부르시는데 죄를 짓고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죄가 들어오니까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오니까 사람과 자연도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환경을 파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가끔 민주적 집회를 하거나 좋은 의미의 모임들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끝나고 나면 대부분 그 좋은 취지를 하고 난 후의 모습이 쓰레기장입니다. 국립공원 같은 데도 사람이 가기도 힘든 곳에 쓰레기를 버리고 갑니다. 유럽의 유명 관광지에 한국말, 중국말로 낙서를 하면 안 되는 데에 낙서가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환경을 파괴하는 존재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2절에서 발견하는 것은, 짐승들이 인간을 해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짐승들이 인간을 해치지 못하도록 인간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시고 인간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사실 사람이 사자, 호랑이 등의 맹수와 바다의 상처 같은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들이 우리를 더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인간을 보호해주시는 것이 보호 장치라는 복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자연스럽고 미완성인 복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처음 주셨던 복은 완전한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받은 복은 불완전한 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완성됩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주신 복은 기다리는 복입니다. 언젠가는 그날이 옵니다. 그래서 이사야 11장에 보면 인간과 짐승이 안전하게 사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이가 독사 구멍에 손을 넣어도 안전한 모습입니다. 언젠가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것이 실현될 날이 옵니다.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3-4)

 

창조 때의 복을 회복시켜주시고 동물들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이제 육식을 허용하십니다. 이 부분이 고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아주 좋아하시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육식을 함으로 인간이 건강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3절을 자세히 보면 채소 같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홍수 전에는 채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과 동물의 양식은 채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아도 천국에서의 주식은 과일입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는 왜 육식을 안 했는가? 채식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죽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육식을 하려면 동물을 죽여야 됩니다. 그런데 죄가 없었을 때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인간과 동물은 주로 채소와 과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물을 죽여서 고기를 먹는 것은 홍수 이후에 생긴 일입니다.

 

지금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음식은 채소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암을 고치는 성분을 보면 식물성으로 풀에서 뽑습니다. 풀을 연구하면 인간의 건강을 찾을 수 있는 요소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육식을 허락하십니다. 전에는 채소만으로 인간의 식사가 충분히 가능했지만, 이 땅이 저주를 받음으로 곡식만으로는 식사가 불가능해졌고, 그래서 육식을 제한적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육식이 허락된 다음부터 인간은 폭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채소나 과일을 폭식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육식이 허락된 다음부터 폭식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잔인해지고 음식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 맛있는 것을 계속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저번에 했고 새해에 3주를 하려고 하는 다니엘 금식기도가 필요합니다. 음식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음식을 컨트롤하며 하나님께 집중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하셨지만 제한을 두셨습니다. 그것은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를 좋아하는 분들이 안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선지국 같은 것을 먹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목사님이 나는 피째 먹는 선지국을 안 먹는다.”라고 하니까 선지국을 좋아하는 다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무슨 소리야? 선지자가 선지국을 먹어야지!”

 

피만 먹는 사람이 있는데, 피 안에 의학적으로도 안 좋은 박테리아 같은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피를 먹으면 사람이 잔인해집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빼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육식을 해도 좋고 채식을 해도 좋은데 음식의 노예가 되어 미친 듯이 먹지 말고 잘 컨트롤하며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핵심은, 먹기 위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사는 게 아닙니다. 음식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미식가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너무 따지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특히 음식을 검소하게 먹을 필요가 있습니다. 맛을 위해 먹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쾌락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음식은 건강을 위해서 먹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은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 먹을 만큼만 덜어서 먹어야 합니다. 버페(buffet) 같은 데 가보면 너무 많이 가져와 남기는 경우가 있는데, 지나치게 먹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먹을 만큼만 먹어야 합니다.

 

혹시 어쩌다 다른 사람에게서 비싼 음식을 대접받을 때 부담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한 접시에 $100이 넘어가는 것 같은 식사를 할 때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검소하게 할 필요가 있고, 적게 먹은 후 남은 것을 헌금하는 겁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건강을 책임져주십니다. 이것저것 찾아다녀서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건강을 책임져주셔야 건강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면 마음의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인간이 지켜야 할 또 다른 중요한 법칙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5-7)

 

살인은 절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됩니다. 그래서 살인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라고 율법에도 나와 있습니다.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함부로 거둔다는 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교만이 됩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에 이미 죄와 살인이 들어와 있습니다. 동물과 동물 사이에 피를 흘렸다는 말은 짐승이 다른 짐승을 잡아먹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 짐승도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악시대에는 사형제도가 있었습니다. 지금 민주화 시대에 사형제도를 없애는 나라들이 많고 미국에서도 여러 주들이 사형을 실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살인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치로 자기를 끌어올리는 것을 막으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남을 푹 찔러 죽이거나 총 쏴서 죽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야고보서에서도 말씀합니다. 말과 혀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받았던 가장 큰 상처를 떠올려 보십시오. 누군가에게 얻어맞아서 마음에 상처가 생긴 게 아니라, 누군가가 뭐라고 한 말이 콱 비수로 박혀서 가장 큰 상처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말로 서로를 얼마나 죽이는지 모릅니다. 물론 여기서는 진짜 살인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지만, 말로도 살인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서로 세워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노아와 세우신 언약

 

1)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

 

이제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계약을 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8-11)

 

이 본문에 언약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일곱 번이 나옵니다. 그만큼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복을 주시면서 언약을 주십니다. 언약(covenant)’이라는 말이 요즘 말로 하면 계약(contract)’이라는 말입니다. 9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내 언약을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지 않고 일을 이루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고 또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것을 신실하다(faithful)고 말합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한 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킨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어서 안 지키는 경우도 있고, 능력이 안 되어 못 지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킬 마음도 있으시고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래서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말씀하신 것이 지금도 유효하며,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성경도 구약’, ‘신약이라고 하는데 그 자가 언약’, ‘계약’, ‘약속을 말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한마디로 약속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기록된 책입니다. 하나님의 계약서입니다. 여기 쓰여 있는 대로 다 해주시겠다는 계약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왔다 갔다 할 게 아니라, 이 계약서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약이 뭡니까? 쌍방이 하는 것 아닙니까? 사업체를 산다든지 집을 살 때 항상 쌍방계약입니다. 아파트 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약은 항상 쌍방계약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하십니다. 사람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계약은 아주 문제가 많습니다. 그것은 강제로 하는 것입니다. 사인하는 쪽이 다 손해 보는 계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계약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다른 계약을 할까봐 일방적으로 가장 좋은 계약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창조주의 권위로 사랑과 은혜와 복된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장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입니다. 받았으니까 주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받고 주는 게 부담스러우니까 아예 안 받겠다고 합니다. 그런 게 인간의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7:12). 이것을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give and take가 아닙니다. 서로 그런 마음으로 살면 사회가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하나님은 사실 내가 드리는 것이 없어도, 내가 아무 사랑 받을 가치가 없어도,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도,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십니다. 무조건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계약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주님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해주신 겁니다. 선물을 주시면서 받으라고 하신 겁니다. 그럴 때 제게 주시는 선물이군요? 감사합니다.’ 하면서 탁 받는 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2:8-9)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하나님을 위해 찬양을 한다. 봉사도 한다. 헌금도 한다. 여러 가지 일을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내가 그렇게 해봐야 하나님께 그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온 우주만물을 다 가지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대단한 액수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놀랍게도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 먼저 엄청난 일을 이루셨습니다. 아니, 창조 전에 벌써 나를 택하시고,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내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고 복이며 계약입니다. 이런 계약을 우리와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계약인데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계약을 맺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계약을 노아에게 다시 확인해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너희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이다. 이제 육식도 허락하며, 동물들이 너희를 해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서로 죽이고 살인하지 못하게 막아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와 새로운 특별한 계약을 만들어줄 것이다. 이 계약은 네가 요청해서 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 때문에, 나의 은혜 때문에 일방적으로 너의 유익을 위해서 내가 주는 축복의 계약이다.’라고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노아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그는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조건 없이 노아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보호해주기로 결정하시고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노아가 맺은 계약의 내용이 뭡니까? 11절을 다시 보시면, 결코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하지 않을 것이며, 이런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에 있다가 가족들과 짐승들과 같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이 처음 나오자마자 보게 된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아주 자연경관이 뛰어난 국립공원 같은 데가 아니라, 완전히 폐허입니다. 집과 논과 밭과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처참하고 상상할 수 없는 폐허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조금 싹이 막 나는 정도의 상태였습니다.

 

그때 노아와 가족들이 그런 현실을 보고 뭘 느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집을 짓고 엄청난 도시를 세우겠다. 농사를 짓겠다. 먹을 것을 많이 얻겠다.’라는 미래에 대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냥 좌절, 실망, 더 나아가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폐허 위에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막막하고 답답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다시 할 수 있다. 내가 네게 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라. 동물들이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너에게 육식을 허락하겠다. 살인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두려워하는 노아에게서 두려움을 가져가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걱정하고 계십니까? 대부분이 먹는 것과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없애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 공부에서 견고한 진을 살펴볼 때 몇 가지 리스트에서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을 표시하여 무기명으로 내도록 합니다. 지금까지 13기를 해오는 동안 항상 1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두려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암에 걸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직장 일이 잘 안 되거나,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자라지 않을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배우자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게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는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지만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아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데, 어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과 좌절감으로 하루하루 보냅니다. 돈이 있다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을수록 걱정이 더 많습니다. 권력이 있다고 안전하지 않습니다. 언제 누가 와서 자기를 총 쏴 죽일지 몰라 벌벌 떱니다. 그런 것들이 평안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노아가 이때 가졌던 감정이 뭐였겠습니까? 파괴된 세상을 보면서 그가 가졌던 감정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오셔서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 두려움을 가져가 주십니다안심시켜주십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너는 나만 따라오면 된다. 나만 신뢰하며 나만 따라오면 된다.’ 그것이 바로 1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결국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는 사람의 결국은 무엇이겠습니까? 평안입니다. 안심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복은 죽음과 미래에 대해서 안심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고 벌벌 떠는 게 아니라, ‘나는 천국에 들어가지하면서 안심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병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잘 치료되어 나으면 좋지만, 혹시 치료되지 않아 죽게 되더라도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살게 되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특권은 안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심하고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노아에게 필요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미래의 세계를 향해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지금 필요합니다. 지금 혹시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사실 크고 작은 두려움은 다 있습니다. 나를 걱정하게 만드는 것, 근심하게 만드는 것,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래를 볼 때 자신 있게 나아가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신 있게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여러 가지로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거기 가 계십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밖에 모르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붙들고 따라가면 됩니다.

 

사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공이나 실패나 건강이나 질병에 따라 감정이 얼마나 요동치는지 모릅니다. 잘될 때는 너무 기분이 좋고, 안 될 때는 기분이 그대로 다운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정말 믿고 붙들며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미래를 책임져주시기 때문에, 약간의 요동은 있지만 완전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안심이 되는 겁니다. 뭔가 다른 것을 믿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라기보다는 두려움입니다. 염려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들의 두려움을 치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뿐 아니라, 성경을 보면 이런 말씀을 너무 많이 해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죽고 이스라엘의 리더가 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마음을 강하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에서도 두려워 말라”, 예수님도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14:27) , 너무 많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게 아니라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약점, 견고한 진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통해 자꾸 우리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기게 만듭니다. 특히 감정을 가지고 장난을 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 4:18)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용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아가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마귀가 틈탑니다. 기도하고, 말씀 붙들고, 예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일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2)  언약의 증거로 주신 무지개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2-13)

 

그 증거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무지개를 증거로 삼으셨는데,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무지개를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4-15)

 

우리는 구름 끼고 비가 오다가 그치면서 햇빛이 비치며 무지개가 뜰 때 참 아름답고 좋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노아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시커먼 먹구름이 끼고 비가 오면 가슴이 철렁해지는 겁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무지개를 보이시면서 그게 아니라는 증거로 삼아주셨습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6)

 

계속 영원한 언약이라고 반복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시면서 약속을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시듯 노아에게 계속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한 번만 말씀하셔도 알 것 같은데 계속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17)

 

또 이르시되”. 하나님이 이야기하시고 또 이야기하십니다. “언약의 증거를 또 이야기하십니다. 노아가 두려워하니까 계속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미래를 이미 붙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던 노아는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언약을 받았습니다.

 

 

[나가는 말]

 

1842년에 펜실베이니아 주에 사는 의사들과 학자들이 모여서 거창한 결정을 하나 했는데, 그것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류마티스와 폐렴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이상한 결정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펜실베이니아 주 일대와 그 주변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무려 3년 동안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수년 후에 뒤집어졌습니다. 다수가 틀렸던 것입니다.

 

1903년에 그 유명한 라이트(Wright) 형제는 기계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형제들이 미쳤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생각이 아주 망상적이고 만화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경험에 의하면 저 쇳덩이는 당연히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는 기계도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지금은 기계가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한 바로 그 사람들의 자손들도 다 기계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그때도 다수가 틀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수의 길이 진리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노아는 그 당시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따랐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과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만 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수가 아닌, 하나님을 따랐던 노아가 옳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도 다수의 의견을 따르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하는 순간이 자주 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는 문제가 없지만, 그 둘이 다를 때는 무엇을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변의 압력이 있고,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며, 내 유익이 뭔가를 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노아는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길, 그러나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좁은 길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을 받았고, 언약을 받았고,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 믿음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그래서 노아처럼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