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일 주일예배

21세기를 위한 고대사회의 교훈 3

홍수 심판의 결정적 원인

(창세기 61~12)

 

[들어가는 말]

 

세계에는 민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민족에게나 공통적으로 있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홍수 사건입니다. ‘오래 전에 아주 큰 홍수가 나서 세상을 휩쓸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다. 그런데 딱 우리 부족만 살아남았다.’ 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거의 모든 민족들에 다 전해져내려 옵니다. 심지어 저 아프리카에서 물이 없는 내륙 지방에 있는 민족들에게도 그런 설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노아의 홍수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경 앞부분에 등장하는 이 노아의 홍수 사건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고, 교회에서 어린이 주일학교 시절부터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교회에서 자란 분들은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류를 멸망시킨 그 홍수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그 시대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맙니다. 물론 맞습니다. 타락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정도로 심하게 타락했기에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다 멸망시키실 정도의 홍수가 났겠습니까? 사실 지금은 옛날보다 더 타락했을 것인데, 아직 그런 멸망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 홍수의 심판은 이 다음에 올 불의 심판을 예표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후의 소돔과 고모라 때보다 더 음란하고 방탕해서 타락한 것입니까? 물론 성적 타락도 있었을 것이지만, 정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는 것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원인은 성적 타락이나 방탕한 삶보다 더 무서운 차원의 타락이었습니다.

 

 

1.   심판을 받게 된 시대적 배경 


오늘 본문을 보면 특이한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1-2)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1:26-28). 그러니까 자손을 많이 낳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가 굉장히 걱정됩니다. 최저출산율을 매년 갱신하고 있습니다. 요즘 결혼도 안 하는데다가, 결혼을 해도 아기를 낳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10, 20, 30년이면 정말 큰 사회적 문제가 일어납니다. 여기 신혼부부들이나 앞으로 결혼할 청년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 결혼해서 아기를 많이많이 출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복하라는 것은 다른 생물들 위에서 착취하고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라 돌보라(care)’는 뜻입니다. 이것을 소위 하나님의 문화 명령이라고 합니다. 본문 1절에서 그러한 복이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땅 위에 인간이 많아지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기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결혼하는 것은 죄로 인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는 죄를 지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 열매를)보았다, (먹음직해서) 좋아했다, 취했다라는 순서로 했습니다. 그 순서로 죄를 지었던 것처럼, 여기도 똑같습니다. ‘(아름다움을) 보았다, (자기들이) 좋아했다, 아내로 삼았다(취했다).’ “자기들이좋아하는 대로 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사람의 딸들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먼저 생각해볼 것은, 도대체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이고 사람의 딸들은 또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놓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이단들도 나왔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몇 가지 해석들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해석은 욥 1:6, 2:1 등에 기록되어 있는 천상 회의에 참석하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고 있다는 데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사람의 딸들은 당연히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영인 천사들과 육체를 가진 인간이 섞일 수가 있습니까?

 

그런 것은 그리스 신화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설득력이 희박합니다. 그런데 그게 맞다고 생각이 되신다면, 그것은 드라마에 너무 심취해서 그런 겁니다. ‘도깨비같은 드라마를 좋아하다 보니까 현실에서도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왕족들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해석도 아주 오래 전부터 제시되어 왔으며, 네피림의 존재에 근거한 것입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4)

 

고대 근동의 정서에서 왕들은 흔히 자신을 신격화하는데, 그렇게 신격화된 왕족들이 평민의 딸들(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매우 특이한 자손(네피림)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이들의 죄는 무분별한 일부다처제와 성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그 당시 사회 속에서 일부다처제를 죄라고 분명히 지적하며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자손들로서 믿음의 사람들을 뜻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 온 해석입니다. 어거스틴(4세기 말~5세기 초 북아프리카 주교)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나 존 캘빈도 그런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본문에서 사람의 딸들은 믿음이 없는 가인의 후손들이며, 여기서 행해지고 있는 죄는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결합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맥을 감안해 볼 때도 이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 진행되는 죄인의 자손들이야기가 4장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 후 거룩한셋과 그의 자손들의 이야기가 5장에 나옵니다. 5장까지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가인의 자손들과 셋의 자손들, 즉 불순종의 자손들과 믿음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구분함으로써 그 둘을 따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장에 들어오면서 이 두 그룹에 대한 구분이 아예 사라져버립니다. 셋의 자손들이 가인의 자손들과 결합하면서 함께 타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노아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신자와 비신자간에 구분이 없이 결합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결합했다고 해서 문제라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결합을 통해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결합하여 세상의 방식으로 타락해버리고 죄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을 보시면서 한 가지 선포를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3)

 

이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굉장히 난해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 해석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두 단어가 함께하다나의 영’(하나님의 영)입니다.

 

여기서 함께하다로 해석된 히브리어 동사가 사실은 다투다, 심판하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NIV 영어성경은 이것을 ‘contend’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또한 모세오경 안에서 하나님의 영하나님이 주신 은사 또는 능력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의 수명이나 생명을 말할 때 의도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종합해서 볼 때 3절의 뜻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처럼 타락한 사람들에게 계속 은혜를 베풀기만 하겠느냐?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들과 함께 다투지 않을 것이다.” 자꾸 죄의 길로 빠지려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이 자꾸 끌어오려고 하며 마치 다투는 것처럼 보였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해주겠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우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고 하실 때의 120년은 사람의 수명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 말씀을 선포하신 때부터 홍수가 시작할 때까지의 시간임을 암시해줍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제한적인 기한으로 120년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120년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심판하시기 전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베푸신 마지막 자비의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12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때 이것이 얼마나 충분한 시간입니까.

 

그러므로 노아가 방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홍수가 나기 120년 전, 즉 그가 480세가 되던 해라고 볼 수 있고(7:6), 120년에 걸쳐 방주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 중에 노아는 500세 때 세 아들을 낳았고(5:32), 그 기간 동안에 세상 사람들을 향해 방주를 만들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니까 회개하라고 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인 노아와 그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주셨습니다.” (벧후 2:5, )

 

노아가 정의를 부르짖었다고 할 때 이 정의는 빨리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3절에서 함께하다라는 것을 실제로 함께 계시는 것으로 해석하고 나의 신을 생명이라고 해석하여 120년을 실제 사람의 수명으로 본다면, 노아 시대 이후에 120년 이상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안 됩니다.

 

노아 홍수 이전에는 700, 800, 900년을 살았습니다. 홍수 이후에는 수명이 확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120년 이상 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120년 이상 살았습니다. 창세기에서 120년 이상을 살지 못한 주요 인물은 요셉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는 120년 이상 사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입니다.

 

3절에서 또 어려운 표현은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이 아니다가 육신이 되었다는 식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이것은 으로 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순히 그들은 나와 달리 육체를 지닌 자들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에는 썩어 없어질 육체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 네피림입니다. 4절의 네피림의 존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란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해서 네피림이 나왔다고 보일 수가 있는데, 실제로는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대 신화들을 인용하면서 이 네피림이 반인 반수의 괴물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특정한 지파나 족속이라기보다는 덩치가 매우 큰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세가 열두 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또 네피림 자손을 보았다.”라고 보고를 합니다. 엄청난 거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다음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다가 그들을 대적하는 몇 나라와 싸웠는데, 그 중 바산 왕 옥과 전쟁을 해서 이겼습니다. 그 바산 왕 옥은 굉장히 큰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 3:11을 보면, 바산 왕 옥은 길이 약 4미터(13ft) 정도나 되는 쇠 침대에서 잠을 자던 사람이니까 얼마나 키가 컸을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골리앗도 키가 290센티미터(9.5ft) 정도나 되는 거인이었습니다. 요즘 NBA 농구선수들을 보면 얼마나 큽니까? 그러니까 네피림은 그런 거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즘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사람들이 농구 코트나 배구 코트를 휘저으며 절묘한 실력으로 공격을 성공시킬 때 관중들이 열광합니다. 또 그렇게 크고 강한 사람이 작고 약한 사람을 도우며 섬기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노아 당시 그러한 거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도와주며 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강력한 힘을 이용해서 다른 약한 자들을 압제하고 괴롭히고 전쟁과 폭력을 일삼으면서 살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한 네피림이 있던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용사들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새번역>이나 <공동번역> 등의 성경번역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 사이에 태어난 용사가 곧 네피림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확실한 것은, 노아가 살던 당시는 그런 엄청나고 강력한 거인들이 있어서 굉장히 폭력적인 무법 시대였다는 사실입니다.

 

 

2.   홍수 심판의 진짜 이유

 

인간에 땅 위에 번성했던 만큼 악이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5)

 

사람들의 마음이 병들었고 그들의 삶에서 악이 끊임없이 행해졌습니다. 여기 5절에서 모든이라는 말과 이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눈에 비추어진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을 때 가장 심각한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6-7)

 

죄의 심각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구절의 뜻이 뭔가를 해석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참 좋다. 너는 내가 볼 때 참 기쁘다.’라고 하시는가, 아니면 나를 보실 때 한탄하시면서 근심하시는가? 이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를 지을 때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 그냥 내가 죄 짓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죄를 짓는 것은 나를 만드시고 지으시고 이끄시고 사랑하시고, 내가 바른 길을 가기를 그토록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에 못을 박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끊임없이 죄를 지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죄악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이렇게 알려줍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1-12)

 

하나님께서 직접 밝히신 인류의 멸망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1)  부패(샤하트)

 

세 번이나 반복되는 이 단어는 황폐, 썩음, 타락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12:10에서 이방 통치자들이 내 포도원을 망쳐 놓았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망쳐 놓았다는 말이 바로 부패와 같은 단어인 샤하트입니다. 또 예레미야애가 2:5에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라도 되신 것처럼, 그를 삼키시고, 모든 궁을 삼키시고 성채를 부수시어라고 되어 있는데, ‘부수다가 바로 그 단어(샤하트)입니다.

 

그러니까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했고, 땅이 부패했고, 모든 자의 행위가 부패했다는 말은 분명히 타락하고 썩었다는 말인 동시에, 그들의 악의 구체적인 모습이 세상을 파괴하고 부수는 것들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가 살던 당시 곳곳에 건물이나 집들이 다 파괴되어 있고 부수어져 있는 모습들로 가득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도 전쟁이나 테러가 일어나면 다 폭발시켜서 파괴합니다.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를 보면 얼마나 흉측하고 끔찍합니까? 그런 것과 같습니다. 그 부서진 건물들 사이사이에 사람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고 그런 끔찍하고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노아의 시대 당시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그랬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것을 부수고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생명까지 죽여버리는 모습입니다. 아주 악한 그런 시대였습니다.

 

 

2)  포악함(하마스)

 

히브리어 하마스라는 단어는 원래 난폭하게 다루다라는 의미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누군가를 폭력으로 괴롭히고 죽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아들들에게 축복과 예언의 말씀을 남기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 특별히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단짝 형제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난폭한 무기다.” (49:5, )

 

난폭한 무기라고 할 때 난폭하다는 말이 바로 포악함과 같은 단어인 하마스입니다. 야곱이 이 말을 남긴 이유는 과거에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족속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해놓고는 다 누워 있을 때 몰래 가서 공격하여 무자비하게 다 죽였습니다. 칼로 대량 학살을 했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노아 당시 왜 이런 홍수의 심판을 통해 멸망이 임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원인이 바로 힘 있는 자들의 이유 없는 폭력과 전쟁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강하다라는 말에 어원을 둔 기보르용사라는 단어와 습격하다라는 뜻의 네피림이라는 단어가 그 당시 세상에서 잔혹한 학살과 기습과 폭력이 얼마나 난무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주로 한 일이 힘을 가지고 잔혹하게 학살하고, 숨어 있다 기습하고, 폭력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사람들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끝 날이 이르렀으니, 내가 반드시 사람과 땅을 함께 멸하겠다.” (13, )

 

하나님은 이렇듯 무법천지가 된 폭력 세상을 보시면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습니다. 그것은 후회하셨다는 게 아니라 슬퍼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고 사람의 악함을 보시며 너무 슬프셔서 흘리신 그 눈물이 홍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슬프셔서 눈물을 너무 많이 흘리시니까 세상이 멸망했습니다.

 

 

3.   이 시대에 주는 홍수의 교훈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 매일 폭탄이 터지고,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테러 공격 때문에 그렇게 되고, 전쟁 때문에 그렇게 되고, 또 오폭 때문에도 그렇게 됩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굶주리며 울고 있습니다. 수많은 난민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이나 나라의 이익을 내세우며 아무리 정당화하려고 해도, 이 땅에서 잔혹한 파괴와 폭력이 끝없이 행해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정말 슬프시게 하는 일입니다.

 

흔히 소돔과 고모라가 왜 멸망했는가 생각하면서 그 이유를 동성애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천사들과 롯을 폭력으로라도 굴복시키려고 한 그 성의 부패와 포악함의 분위기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이 세상에 존재하는 폭력과 전쟁과 다툼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슬프시게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서로 다투고 폭력을 쓰고 부패하고 포악하여 서로 죽이고 죽는 일입니다. 서로 아껴주고 섬기며 행복하게 살지를 못하고, 자기 이익, 명분, 자존심을 위해 자기보다 약한 자를 힘으로 억압하며 살아가는 모순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보며 하나님은 얼마나 슬퍼하실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홍수가 났는데 진짜인가 가짜인가, 전설이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왜 그 홍수가 일어났는가가 중요합니다.

 

그 홍수가 일어나게끔 만든 인간들의 부패함과 포악함이 내 삶에는 없는가?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부패와 포악함의 모습이 나에게는 없는가? 이런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실제로 가서 죽이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말, 마음을 상하게 하고 무너뜨리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일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내규를 개정하면서 동성애는 성경적이 아니며 반대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서 동성애자들을 나쁜 인간들이며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정작 내 안에는 그런 부패와 포악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서 안타까운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의 주요 교단들이 총회를 했습니다. 이번 의제 중에 동성애 문제를 다루면서 동성애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고 죄인이라고 취급하면서, 그와 동시에 가만히 보니까 교회 안에는 다른 무서운 죄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죄를 열심히 짓고 있으면서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는 손가락질하는 그런 이중적인 모습이 너무 많습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모습, 남은 정죄하면서 정작 나에게는 부패와 포악함이 있는 모습이 없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하여 경고하셨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이 믿음을 통하여 그는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을 따라 얻는 의를 물려받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11:7)

 

노아의 이런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8-9)

 

은혜값없이 주시는 사랑인데,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혜’, 즉 특별한 혜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것처럼 우리를 대해주시고, 또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고, 또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내가 내 자격으로 천국에 갈 수 있겠습니까? 자격 따지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완벽한 곳에 죄가 하나라도 있는 사람이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죄가 하나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노아 당시의 상황은 물로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노아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9)라고 표현합니다. 노아는 그렇게 죄로 가득한 시대 속에서도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물들지 않았고 유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로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외로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세워주고 격려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어떻게 완전한 자입니까? 이것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노아도 당연히 죄를 짓는 사람이었고 잘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가 의인이고 왜 완전한 자인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녹이 왜 하늘로 올라갔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죄를 지을 때 그는 곧바로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고 바로 돌아왔습니다. , 늘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산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였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말입니다. 형식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혹시 예배 시간에도 속으로 딴생각하며 죄를 지을지는 모르겠는데, 우리가 제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 집중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를 제대로 드렸는지 안 드렸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배를 마치고 나가서 어떻게 사는가를 보면, 내가 드린 예배가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였는지 아벨의 제사였는지는 끝나고 알 수 있습니다.

 

끝나고 나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합니다. 서로 대화를 합니다. 서로 섬깁니다. 회의도 합니다. 집에 갑니다. 또 일터로 나갑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의 모습이 어떠한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모습인가, 아니면 거기에 부패와 포악함이 있는가? 그것을 보면 내가 예배를 제대로 드렸는가, 안 드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그냥 여기서 한 시간 하고 끝나는 그런 예배가 아니라, 끝나고 나가서 예배가 삶으로 이어지면, 내 삶 자체가 예배가 되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노아가 누렸던 축복이었습니다. 온 세상은 다 부패하고 다 포악했지만, 노아는 그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바로 그런 기쁨을 누렸습니다. 바로 이런 노아의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축복이, 우리 모두의 삶에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