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30일 주일예배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12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야고보서 41~10)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이 세상에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들이 종종 벌어집니다. 그 중 하나가 어려운 일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 아들과 중학교 졸업 기념 여행으로 뉴욕에 다녀왔습니다. 오기 바로 전 날에 재미있게 놀고 뉴욕에서 버스를 타고 뉴저지에 있는 숙소로 밤 11시쯤 돌아왔습니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갑자기 제 아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더니 아빠, 내가 전화기를 두고 내렸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버스는 떠났고 그 밤에 어디서 전화기를 찾겠습니까? 그래서 택시를 타고 쫓아가려고 하는데 마침 다음 버스가 왔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택시를 타고 쫓아가면 되겠느냐고 운전사에게 물었더니, 그건 소용없을 것이고 오히려 반대편에 가서 기다리면 그 버스가 돌아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알아보니까 버스가 35분쯤 후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고, 아마도 그 버스가 그 버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은우에게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그때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드디어 버스가 왔는데 보니까 운전사가 바뀌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전화기 이야기를 했더니 이것이냐고 하면서 돌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 아들이 너무 감격하고 기뻐하며 운전사와 막 악수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에 가끔 이렇게 힘든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런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잃어버렸으면 아쉽고 힘들긴 해도, 또 구입하면 되니까 목숨이 걸린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진짜로 언제 삶이 힘들다고 느껴지십니까? 일이 힘들 때? 아니면 일이 안 풀릴 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여러 가지 원인들 중에서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뭔가? 저는 이 한 가지라고 말하겠습니다. 바로 그것은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세상이 어지럽고 갑작스런 사고가 생겨도, 우리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있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기도해줄 수 있는 믿음의 지체들이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해보자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서로 들어주고 기도해주며 영적 가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좋고, 돈도 잘 벌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좋은 학교를 가고 해도, 딱 한 사람과만 인간관계가 틀어지면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을 철저한 인간관계의 단절이라고 합니다. 아무와도 교류가 없이 혼자 외롭게 어둠 속에 있고 불 속에 있으며 받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영원한 갈등이 아닌가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 일어났을 때 괴로웠던 그 마음을 기억해보십시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며 해결이 안 된다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런 것이 지옥이라고 생각됩니다. 반면 천국은 전혀 그런 갈등이 없고, 모든 사람과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상관이 나를 아껴주고 동료들이 서로 협력하면, 일이 힘들고 또 오래 일을 하고 야근을 해도 별로 피곤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직장 상사나 동료가 나를 싫어한다거나 갈등이 있어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아무리 직장의 환경이 좋고 엄청난 연봉을 받고 있어도, 일하러 가는 것이 싫어집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다른 성도와의 갈등이 교회 생활을 아주 어렵게 만듭니다. 아무리 교회의 예배가 뜨겁고, 설교 말씀이 은혜롭고,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철저히 하고, 기도를 아주 뜨겁게 또 많이 하고, 분위기가 아주 좋아도, 딱 한 사람과의 관계만 나빠져도 아주 가시방석처럼 느껴지면서, 그 사람만 보면 가슴이 철렁 하고 가기가 싫어집니다.

 

이러한 갈등은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질병을 일으킵니다. 우리 건강에 가장 치명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스트레스입니다. 관계가 나빠지면 몸도 나빠집니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관계를 좋게 해야 합니다. 관계가 나쁜 사람들 중에서 건강이 좋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갈등이 생기면 대개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립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저 사람이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뭔가 하면,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결이 안 됩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갈등에 대해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씀해줍니까?

 

 

1.   잘못되는 원인은 자신 안에 있는 정욕이다 (1~3)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1)

 

여기에 보면 갈등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 탓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있는 정욕 때문입니다. 정말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이 사실을 깨닫고 또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보통 정욕이라고 하면 성적인 것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되지만, 원래 이 단어의 의미는 강한 욕구’(strong desire)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내가 강하게 원하는 것이 정욕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반드시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 바로 정욕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험 때가 되었는데도 공부는 뒤로 하고 일단 자기는 무조건 영화부터 봐야겠다고 강력히 주장하면, 바로 그런 것이 정욕입니다. 이처럼 정욕강한 욕구인데(사실은 똥고집/쓸데없는 고집), 만족이 잘 안 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2a)

 

왜 살인을 합니까?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다투고 싸웁니까?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정욕이란 것은, 아무리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이 되지가 않는 욕구입니다. 또 정욕에는 언제나 다툼과 싸움이 따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더 얻으려고 하고 더 취하려고 하니까 서로 싸우는 겁니다. 싸워서 내가 얻기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아무리 싸워도 얻어지는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가정에서 한 번 해보십시오. 부부간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배우자와 맞붙어 싸워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내는 남편에게 성경을 인용해가면서,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며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해보라고 계속 주장해보십시오. 또 남편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성경에 써 있다는 것만 주장해보십시오. 그렇게 요구해서 사랑이 이루어지고 순종이 되는 것을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으십니까? 저는 없습니다.

 

자기 정욕대로 요구하며 주장할 때는, 결국 다툼과 싸움 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한 명만 되어도 분위기가 나빠지고, 두 명만 되면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럼 이 문제에 대한 야고보의 해결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2b)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온 우주에 딱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배우자도 안 되고, 자녀도 안 되며, 부모님도 안 됩니다. 하나님 밖에 채워주지를 못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하신 하나님께 구해서 얻으려고 하지를 않고 계속 자기주장만 내세우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고 얻지는 못하며 계속 괴로워집니다.

 

여러분, 지금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 있으시죠?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하며 자꾸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가면 되는 건데, 많은 분들이 자꾸 사람에게로 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욕구와 필요를 다 아십니다. 내 배우자가 어떻게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채워줍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100%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채워줄 능력이 있으십니다. 혹시 내 가족이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아도 해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실뿐 아니라 해줄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구하며 나아가는 것이 야고보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현실을 보면, 기도를 해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도했는데도 안 됩니다. 여기에 대한 답도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3)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욕이 또 나오는데, 오직 자신의 유익과 쾌락만을 위하여 쓰려고 구하기 때문에 못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구했으면 되는데, 계속 자기가 원하는 것만 주장하며 기도하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구할 때에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고, 그 구한 것을 언제 어떻게 어디서 주실 지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고집을 부리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주셔야 한다고만 주장할 때 그것이 정욕이 됩니다.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원하는 때에 되어야 한다고 우긴다면, 그것이 정욕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 삶에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사업을 할 때 사업이 잘되어서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만큼 교육비 등에 지출이 더 많아지니까 수입도 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다 자란 후에도 쓸 일이 계속 있으니까 수입이 늘어야 합니다. 또 직장생활에서도 실력이 쳐지면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의심을 심어줄 수도 있고 하나님이 우습게 여김을 당하실 수도 있기 때문에, 직장에서 탁월한 실력을 갖추도록, 또 잘 풀려서 승진이 되도록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또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간구가 아니라 정욕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고 싶은 이유가 혹시라도 다른 사업체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라면, 그 사람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라면, 직장에서 승진하고 싶은 이유가 자기 잘난 것을 뽐내고 싶은 동기에서라면, 그런 마음으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가 없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들, 특히 배우자가 안 믿는 분인 경우 그분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사랑으로 섬기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안 믿는 배우자가 교회에 나오기를 기도하는 것조차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남편이나 안타까워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왜 잘못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내 자녀를 위해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혹시라도 교회에 다니면 착해져서 나에게 더 잘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나, 다른 사람들 보기에 남편(아내/자녀)이 같이 안 다니니까 창피해서 같이 다니길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조차 정욕으로 기도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살피며 기도해야겠습니다.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 앞에 나와 구원받고 우리와 함께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다른 교회들보다 커지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우리 교회가 최고가 되겠다는 야망에서 나왔다면, 그것 또한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 됩니다. 큰 교회일수록 그런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비교의식과 라이벌 의식으로 더 커지기 위해 경쟁하는 것을 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2.   정욕으로 성공해보려는 사람들 (4~5)

 

그런 식으로 정욕을 통해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것이 정욕인지도,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두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4)

 

먼저는 간음하는 여인들입니다. 여기에서 여인이라고 했지만, 실제 여자만이 아니라 정욕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4절에서 간음하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의 신부라고 표현하는 데가 많습니다. 구약에서도 신랑이신 하나님과 결혼한 여인으로 묘사합니다(에스겔, 호세아, 미가 등).

 

그런데 만약 결혼한 여자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남편이 아니라 옛날 남자친구에게 전화해서 상담을 하면서 위로를 얻는다면 어떻습니까?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한 남자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옛날 여자친구에게 상담을 해서 위로를 받는다면 어떻습니까? 또 툭 하면 집을 나가서 여자이면 다른 남자친구들과, 남자이면 여자친구들과 놀고 다음날 들어오면 어떻습니까? 그런 것이 간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욕구와 필요를 다 알고 채워주는 분이신데, 세상의 방법으로 자꾸 자기 욕구를 채우려 하면, 그것이 간음과 같다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이 되려고 하면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너는 내 원수다.’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자기가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표현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세상의 친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경고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면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마귀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정욕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의 풍조 또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일 2:15-16)

 

이러한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고 흐르는 사상은 기본적으로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사상입니다. 사실은 다른 종교들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가 뭔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의 사상에 동조하면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5)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느끼든 못 느끼든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사시며 떠나지 않으십니다. 구약 때는 왔다 갔다 하셨는데,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예수님을 믿은 사람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영원히 함께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시는데, 자꾸 우리가 다른 데를 기웃거리고 세상으로 가니까, 우리를 향해 질투하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실제로 시기나 질투를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야고보가 그렇게 강한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원수가 되는 길로 나아가면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찔러 주십니다. ‘네가 이러면 안 된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가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3.   은혜가 해답이다 (6~10)

 

결국 우리는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우리의 원하는 바를 이루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 구절에 그 비결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6)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가능합니다. 은혜를 통해 우리는 완전히 채움을 받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값없이 주시는 사랑, 위에서 내려주시는 사랑, 조건 없이 주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채워진다는 겁니다.

 

안 믿어지시면 다른 것들로 채워보시기 바랍니다. 절대 채워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우리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큰 존재이기 때문에 억만금을 갖다 넣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온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면 꽉 찹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면, 하나님의 은혜는 내 마음에 담아두지 못할 정도로 너무 크기 때문에 막 흘러넘칩니다. 그래서 이웃에게로 흘러가 이웃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를 체험하면 이웃에게로 흘러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는데 이웃에게로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앞길까지 다 정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 그런 것이 나옵니다. 두 남녀가 사랑해서 부모님에게 가면 부모는 안 된다고 합니다. 집안이 어때서 반대하고, 뭐가 어때서 반대하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녀의 삶의 주인인 겁니다. 자기 정욕대로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너는 직업을 이 길로 해야 한다. 이 학교를 가야 한다.’ 부모가 정해줍니다. 부모의 정욕입니다.

 

그렇게 이전에는 나의 정욕의 대상이었던 가족이, 이웃이, 교회 지체들이, 더 이상 다툼과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며 서로 섬기는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그러면 정말 행복을 느낍니다. 행복한 삶이 됩니다. 행복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관계에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 다음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은혜로 차고 넘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하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10)

 

여기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 겸손한 자를 높여주십니다. 그러니까 자기 정욕을 채우려고 날뛰거나, 높아지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겸손하면 됩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면 오히려 높여주십니다. 그러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겸손한 것이며 주 앞에서 낮추는 것입니까? 본문은 그것을 네 가지로 설명해줍니다.

 

1)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7)

 

어떤 분들은 사탄아 물러가라!”라고만 하는데, 앞은 잊고 물러가라고만 합니다. 그런데 그 앞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라!”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서 마귀를 대적하면 잡아먹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편이 될 것인가, 정욕의 편이 될 것인가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로 결정하면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순종하며 마귀를 대적하면 도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마귀에게 물러가라.’ 한다고 물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가 건드리지 못합니다.

 

마귀가 가장 건드리기 쉬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이럴까 저럴까 하는 사람입니다. 아예 마음을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는 사람은 별로 건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잘못 가니까 그렇습니다. 또 하나님을 막 붙들고 나가는 사람은 괜히 건드렸다가 자기에게 안 좋을까봐 못 건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하는 사람은 건드려봅니다. 그러면 움찔하니까 계속 건드리며 괴롭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먼저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2)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8a)

 

그리하면우리를 가까이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그리하면은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만 오신다는 조건이 아니고,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면 들어주시고 응답해주시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너무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33:3)

 

부르짖으면 응답하겠다고 하셨는데, 부르짖지를 않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7:7-8)

 

찾기만 하면, 구하기만, 하면, 두드리기만 하면 다 주겠다고 하시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마태복음 18:19-20에서도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들어주겠다고 하셨는데 합심해서 기도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입니까? 그만큼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구하지를 않으니까 받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기도라는 것은 자기 원하는 것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가까이서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하나님은 너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까이 가질 않으니 친밀한 대화를 못 합니다. 친밀한 대화 가운데 말씀드리질 않으니까 받지를 못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내게 어려운 일이 닥쳤다고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십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것 같은데, 사실 많은 사람들은 전화를 돌립니다. 자기를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일이 있는데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어려운 일이 없어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입니다. 평소에 늘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문제가 터져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괜찮지만, 평소에 늘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큰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3)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손을 깨끗이 하는 사람의 반대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죄인입니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사람의 반대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두 마음을 품은 자입니다.

 

두 마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따르고 세상도 따르겠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사실 제일 나쁜 마음입니다. 세상만 따르겠다고 하면 차라리 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덥든지 차갑든지 하라. 미지근하면 쓸데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겼습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다가 망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마태복음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는데도, ‘아니다, 나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교만이며, 곧 우상 숭배입니다. 능력이 없는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한다는 말은, 오직 내가 하나님만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데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보고 가겠다는 마음, 양 다리를 걸치지 않고 하나님만 따르겠다는 헌신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세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받겠다고 결단하는 마음입니다.

 


4)  회개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9)

 

여기에 보면 웃지 말고 즐거워하지도 말고 무조건 슬퍼하고 울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회개하는 것이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죄악 된 모습을 보며 애통하고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동안 자기 정욕으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늘 추구하며 채우려 했던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회개합니다. 회개를 하려면 먼저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죄를 지었다.’라고 하며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하지 못합니다. 죄가 있으면서도 죄를 인정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요즘 한국에 보면 잘못했다고 구속되는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탄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만약 순순히 죄를 인정하며 자백하면 사람들이 동정이라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그런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다가 결국 증거에 의해 잡히게 될 때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을 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하나님과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죄다.’라고 하시면 , 그것이 죄이군요. 그것이 제 안에 있군요. 제가 정말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할 줄 아는 것이 회개이고, 회개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것이 곧 은혜를 받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혹시 지금 갈등관계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 갈등은 우리 삶을 너무 힘들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갈등의 원인은 결코 그 사람 때문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웬수, 그 인간은 절대 안 변합니다. 그냥 내가 변하면 됩니다. 내 정욕이 문제입니다.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다투고 싸우게 만듭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있습니까? 혹시 배우자가 아니라 내 정욕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까? 자녀와 또는 부모님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이 내 정욕 때문이 아닙니까? 이웃과 갈등이 있는 것도, 내 정욕 때문은 아닙니까? 교회의 다른 성도와 갈등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내 정욕 때문은 아닙니까? 반드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욕으로 살게 되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기도 응답이 안 됩니다. 정욕을 벗어나는 길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 겸손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경험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