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2일 주일예배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 8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

(야고보서 119~27)

 

 

[들어가는 말]

 

우리 중에는 저처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신앙이거나,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또 성인이 되어 예수님을 믿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나중에 예수님을 믿은 분들은, 믿기 전에 분명히 크리스천들로부터 전도를 받으셨을 텐데, 전도를 받자마자 한 번에 바로 믿은 분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도 전도를 받았을 때 한 번에 믿겠다는 분들보다는 주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믿은 분들은 왜 처음부터 곧장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나중에 믿게 되셨습니까? 아마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 보면, 믿기를 주저하는 분들 중에서 예수 믿는 것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이 되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다 끊어야 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기 인생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기를 주저합니다. 그러면서 교회에는 조금만 더 놀고 즐기다 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입니까? 예수 믿으면 인생이 끝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속과 억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이 세상 아무 데서도 줄 수 없는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이전에는 살기가 불가능했던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을 느끼게 되고, 감사하는 삶이 되고, 참으로 경건하고 크리스천다운 삶,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도록 교훈을 주는 대표적인 성경의 책이 야고보서입니다. 제가 찾아보니까 10년 전에 야고보서 강해설교를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실제적인 교훈을 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자인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신학 때문에 여러 문제가 생기니까,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큰 은혜를 받고,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자꾸 행함을 강조하니까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틴 루터가 극단적으로 말했거나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로마서는 원래 믿지 않는 이방인이었던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쓴 것이고, 야고보서는 이미 믿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초점이 다릅니다. 로마서의 초점은 예수를 믿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다.’라고 하며 뒤에서 삶을 다룹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는 당신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느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야고보서는 아주 실제적인 교훈을 주는데, 이것을 오래 전에 이미 다루었기 때문에 전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우리의 실생활에 잘 적용되고 꼭 필요한 내용들을 다시 나누어보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러한 참된 경건, 즉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세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참된 경건이 무엇이고 또 참된 경건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를 설명해줍니다.

 

 

1.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는 것이 참된 경건이다 (19-2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

 

말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것을 빨리 하는 대신 먼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반대로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듣기는 천천히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굉장히 빠르게 합니다. 그런데 말을 많이 하기보다 듣기를 많이 하라는 가르침은 성경의 곳곳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고보는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성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의로운 분노(의분)이라 할지라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 좋지 않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0)

 

다른 데도 그렇지만 특히 교회에서 의견이 갈릴 때가 있습니다. 의견이 갈리고 해결이 잘 안 될 때, 다투는 경우가 벌어집니다. 오래 전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도 다투고 분열되어 거의 갈라지게 된 경우를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서로 주님을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주님의 뜻이고 다른 쪽은 사탄의 뜻이라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둘 다 주님의 뜻이라고 하니까 싸웁니다. 그럴 때 분을 내면 그것이 주님을 위해, 정의를 위해 내는 의분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1)

 

여기에 보면, 분을 낼 경우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말고, 즉 말을 많이 하거나 성을 내지 말고, 온유한 마음으로 우리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한 명만 꼽는다면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서 뽑으라면 구약에 나오는 모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모세는 정말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온유한 모세가 화를 낸 것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 모두 자기를 위해서 분을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기 때문에 화를 낸, 진정한 의미의 의분입니다. 그러나 그랬어도 결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첫째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입니다(32). 모세가 산에 올라간 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다 보니까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모세가 산에서 안 내려오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며 축제를 벌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장면을 보고 분노합니다.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32:19)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영화 <십계>를 보셨습니까? 저도 아주 어릴 때 봤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모세가 그 장면에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던지니까 그것이 휙 날아가서 금송아지에 팍 맞아서 깨집니다. 그것은 영화이지,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냥 화가 나서 돌판을 던져 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날 때 뭘 막 집어던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화가 나서 집어던져 깼습니다. 그 결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실 자기에게 잘못했다고 화를 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자기를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세가 굉장히 참으면서 계속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손수 십계명을 새겨주신 그 소중한 돌판들을 깨뜨리고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와서 다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돌판을 모세가 만들어가지고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돌에 새기려면 그냥 됩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게다가 파면서 손도 다치고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괜히 화를 냈다가 그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민수기 20장에 나옵니다. 이집트를 나온 백성이 가데스라는 지역에 도착했는데 물이 없어서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바위에게 명령하면 될 것을, 화가 나서 내가 너희에게 물을 내랴?” 하면서 지팡이로 쾅쾅 두 번 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총회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20:12, )

 

화를 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도 있었지만, 이 사건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스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착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분을 낼 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는가?’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를 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는 없습니다. 분명히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화를 내서 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사업체나 직장도 그렇습니다. 내가 화를 낸다고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가정과 생업과 교회에서 정말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결코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9)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도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 바꾸는 사람과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면서, 상을 엎고 심지어 채찍까지 휘두르시면서 분노하지 않으셨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는 것을 보고 화를 내셨으니까, 우리도 불의를 볼 때는 화를 내도 괜찮지 않느냐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불의를 맞서 싸우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분노하신 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화를 내십시오, 예수님과 똑같은 인격을 가졌다면. 그러나 예수님과 같은 인격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면,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화를 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아무리 해도 100% 예수님의 인격과 믿음을 닮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닌 이상 화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건은 듣기는 빨리, 말하기와 노하기는 천천히 하는 것입니다. 천천히 하라고 하니까 나중에는 화를 내도 되나 보다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말하기와 노하기를 천천히, 더디 하다 보면 그것이 사그러 들면서 결국 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다른 사람의 말도 들어야 하지만,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즉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 먼저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보다 듣기에 힘써야 할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듣고 계십니까? 혹시 쓸 데 없는 말만 많이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의 말씀보다 다른 것들을 더 많이 들어서, 말씀보다 그런 것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저 사람은 귀가 얇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하는 말에 너무 영향을 받고 휘둘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여기에 귀가 얇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귀가 얇습니다. 남이 하는 말에 다 휘둘립니다. 내가 듣는 것에 휘둘립니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듣는가가 정말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듣습니까? 성경에는 별 은혜를 못 받는 분들이 드라마의 명대사에는 눈물을 흘립니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인터넷, 스마트폰, 남들이 하는 잡담, 가십, 신문의 내용들을 너무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은, 말하기와 노하기는 천천히 하고 듣기는 빨리 하되, 주님의 말씀을 듣기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들으며 살고 있는가? 항상 잘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행하는 것이 참된 경건이다 (22-27)

 

야고보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듣기만 하고 삶은 완전히 말씀과 반대로 사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2)

 

그러니까 말씀을 들었으면 거기서 배운 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거울을 보고 조금 후에 자기 생긴 모습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3-24)


자기 자신의 모습은 분명히 그대로 있고 없어지는 게 아니지만,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냥 목적 없이 사는, 정신이 나간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거울을 보고도 그냥 가는 사람이 뭘 말합니까? 거울을 보니까 얼굴에 시커먼 게 묻어 있습니다. ‘, 그래서 아까 사람들이 나를 보고 킥킥 거리고 웃었구나.’라고 깨닫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더러운 것을 닦아야 당연한 것인데 그냥 무시하고 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냥 다시 나가면 또 비웃음을 당하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바꾸고 고쳐야 하는데 그냥 그대로 삽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었으면 그것을 행해야 함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삶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입니다. 그럴 때 속박을 당하고 구속을 당하고 짐스럽고 부담되고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롭게 해줍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5)

 

여기서 율법을 자유롭게하는 율법이라고 표현합니다. 율법이라는 표현을 썼는가 하면, 이 야고보서가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냥 성경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어떻게 자유를 줄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자유가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생명의 삶> 공부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한데,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부자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 전 캘리포니아에 한국 사람으로 나이가 50이 넘도록 일정한 직업이 없이 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머리도 좋고 학교도 좋은 데 나오고 아는 것도 많은데,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뒤 끝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전부 다 앞에서 다 말하지, 뒤에서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며 독설을 퍼붓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한 직장에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조금 지나면 상사와 관계가 틀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 직장을 옮겨도 또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게다가 기분이 내키면,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어도 그냥 휴가를 내고 혼자 작은 텐트 짊어지고 카메라 하나 들고 산 속에 들어가며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외칩니다. 가서 며칠을 지내다가 갑자기 다시 나타납니다. 자연히 가정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결국 그 사람의 삶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아주 부자유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경제적으로 부자유스럽게 되고, 부부관계나 친구 관계도 부자유스럽습니다. 모임에도 못 갑니다. 남들은 다 좋은 형편인데 자기는 안 좋으니까 동문회에도 못 나갑니다.

 

반대되는 예도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길 때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그 전에 그 목사님이 섬기시던 교회에 탁구 선수 출신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도 중학교 때 탁구 선수였지만, 그 사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 교인들과 탁구를 칠 때 그분은 점수를 반을 접어주고 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자기가 쓰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도 쳐줘도 상대가 안 되고, 그래서 탁구채도 아니고 칫솔을 갖고 치는데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칫솔 하나 가지고 탁구를 치는데도, 이곳저곳 자유자재로 공을 보내는 엄청난 실력자였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자유입니다.

 

우리 교회도 월요일 저녁마다 탁구모임이 있는데, 탁구를 치는 분들은 이것을 아주 잘 이해하실 겁니다. 탁구채를 가지고 나의 모든 에너지를 실어서 마음대로 있는 힘껏 휘두르면 어떻게 됩니까? 네트에 걸리거나 밖으로 나갑니다. 그렇게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탁구공을 자기가 원하는 지점으로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러한 자유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엄청난 훈련과 노력이 있을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는 마음대로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훈련을 통해 얻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사랑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겠다고 뱀의 코치를 받아가면서 하나님에게 도전을 했습니다. ‘우리도 한 번 하나님처럼 되어 보자.’ 그래서 이것만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자유스러워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에 받은 상처의 노예, 열등감의 노예, 못된 성격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마귀는 뭐라고 속삭입니까? ‘하나님 없이 네 맘대로 사는 것이 자유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불편해진다.’

 

작년 가을 연합부흥사경회에 강사로 오셨던 김동호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탄교의 사탄경을 보면 가장 앞부분이 네가 너 자신의 주인이다.”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탄이 지금도 우리를 속이는 게 그것입니다. ‘네가 너 자신의 주인이다.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불편하다고 자꾸 속삭이는데,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가끔 보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탈주범은 얼마나 열심히 계획을 세웠겠습니까? 그러다 도망했을 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좋아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부터 오히려 굉장히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잡니다. 탈옥한 다음부터 항상 불안하게 지내다가, 결국 쫓아온 경찰에게 잡혀서 수갑을 차는 순간 뭐라고 합니까? “아휴, 이제야 두 다리 뻗고 잠 좀 자겠네.” 자기가 원하던 대로 탈옥을 하고 탈주를 했는데 자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잡히니까 자유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이 사랑인데, 특히 용서하기를 강조하셨습니다. 몇 번 용서하라고 하셨습니까? 베드로가 물어봅니다. “주님, 일곱 번 용서해줄까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ᄁᆞ?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계속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도 용서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계속 용서합니까? 그것도 그렇게 미운 사람을 어떻게 용서합니까?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불편한 일입니다. 하기 싫은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때 자유가 옵니까, 아니면 용서하지 않을 때 자유가 옵니까? 당연히 용서하지 않았을 때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굉장히 불편하고 부자유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에게 말로 상처를 주었습니다. 대부분 상처는 말로 옵니다. 그때 섭섭한 마음이 생기고, 그것을 넘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유를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교인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그 사람이 오는 모임에는 가지도 못합니다. 그 사람이 나의 삶을 지배합니다. 이런 부자유가 또 어디 있습니까? 교회에 와서 앉을 때에도 그 사람이 앉아 있으면 멀리 떨어져 앉습니다.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러다가 용서를 하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유가 옵니다. 평화가 옵니다. 그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어집니다.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봐도 마음이 평안하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면서 기도를 해주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러면 행하는 일에 복”(25)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유익(benefit)’이라고 생각하셔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하게 되는 복을 주시기 위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를 옭아매고 억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대로 순종해서 살면 정말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되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 복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듣기만 하면 안 되고, 실제로 행해야 합니다.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라고 했는데, 듣고 잊어버리는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일까요? 저나 여러분 중 많은 것처럼 모태신앙,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듣고 잊어버리는 명수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이상하게 더 좋아지지 않고 더 안 좋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을 자꾸 닮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생길 때 보십시오. VIP나 초신자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없습니다. 대부분 소위 중직자나 목회자가 주로 싸웁니다. 그렇게 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왜 교회를 분열시킵니까? 말씀대로 행하지 않아서입니다.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행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이 근처에 새 체육관(Gym)이 오픈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새로 운동복을 사서 입고, 선글라스를 착 끼고, 새로 오픈한 Gym에 가서, 거기 냄새도 맡아보고 기계도 손으로 만져보면서 , 이게 최신식 기계구먼.’이라고 하고 집에 옵니다. 내 건강에 유익이 되었을까요? 전혀 유익하지 않습니다. 거기서 진짜로 운동을 해야 내 건강에 좋지, 그곳을 그냥 한 바퀴 구경하고 온다고 내 건강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많이 알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Gym에 가서 한 바퀴 돌고 오니까 마치 내가 건강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별로 행하지 않으면, 자기가 굉장히 경건하게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실제로는 변화가 없습니다.

 

22절에서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속인다는 것은, 실제로는 없는데 있는 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도 속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자신을 속인다는 것은 다른 말로 착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착각이 언제 생깁니까?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많이는 들으니까 내가 그렇게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겁니다. 가장 불리한 사람이 설교자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셔야 됩니다!”라고 하니까 자기는 다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입니다.

 

주일날 딱 한 번 예배 참석하는 것으로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훈련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훈련의 장소입니다.

 

교회는 병원처럼 아픈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환자가 많고 병균이 많은 곳이 병원입니다. 고치는 곳인데 문제가 가장 많습니다. 영적으로 아프고 상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나도 환자이고 상대방도 환자인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해보고 용서해보고 용납해보고 그런 노력 가운데 우리가 변화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나의 모난 모습이 깎여지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만 딱 한 번 나왔다 바로 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분들은 이렇게 부대끼는 것이 싫으신 분들일지 모르겠습니다. 예배만 참석하면 걸리는 것이 없어 좋습니다. 불편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앉아서도 얼마든지 예배가 가능하고, 설교를 통해 배우는 것이나 깨닫는 것도 있습니다. 은혜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또 혼자 신앙생활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집에 가서 성경 읽고 QT하고 기도할 수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자신의 삶의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예배, 성경 읽기, QT, 기도)은 신앙 성장의 바탕이지, 그 자체가 신앙 성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하니까 내가 신앙 성장이 되고 경건해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 훈련소가 어디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으로 모여 그 훈련을 하는 겁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매주 봐야 합니다. 듣기 싫은데 계속 들어줘야 합니다. 내가 할 말도 없는데 자꾸 감사의 제목을 말하라고 하니까 찾아서 자꾸 말을 해야 합니다. 기도제목도 내야 하고, 음식도 대접해야 하고, 자기 집도 오픈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별 문제가 없는데 그런 것을 통해서 자꾸 귀찮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이 말씀을 행하는 적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은혜 받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것을 가지고 나가서 그렇게 행동할 때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연습하고 배우는 곳입니다. 동시에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훈련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3.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참된 경건이다 (26-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27)

 

누가 성경을 많이 알든지, 기도를 많이 하든지, 성령의 체험이 있든지, 방언을 하든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면, 우리는 보통 그런 사람을 보면서 영적인 사람이고 참 경건하다고 하며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경건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당시 가장 어려운 계층이 고아와 과부입니다. 부모가 없이, 남편이 없이 살면 아무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관심이 경건의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쌍한 사람을 돕는 것만이 경건이 아니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을 따라 실제로 사는 것이 경건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키면서도 남을 돕는 것이 진짜 경건입니다. 세상 기준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을 따라 사는 게 경건이라면,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6)

 

옛날에 그런 경우가 꽤 많았는데, 정말 영적이고 엄청난 능력(치유, 예언, 방언 등)을 보이던 부흥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 막 욕을 섞어서 말씀을 전하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말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며 남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경건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에서 말씀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데 말로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건은 그런 것이 아니라, 고아들과 과부들이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보며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러운 세상에 오염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를 지키는 가장 좋은 길이 혀를 절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나의 언어생활을 살펴보십시오. 내 입에서 주로 나오는 말이 뭔가? 지난 며칠간을 생각해보십시오. ‘감사하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참 좋다.’ 이런 말이 많이 나옵니까? 아니면 못해먹겠네, 죽겠네. 너는 왜 그래?’라고 남의 탓 아니면 신세 탓을 하는 말입니까?

 

그리고 지금 내 손과 발이 도우며 섬기는 대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섬기고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또한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행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나가는 말]


다시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경건이 무엇입니까?

 

첫째, 참된 경건은 듣기는 빨리,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는 것입니다.

둘째, 참된 경건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셋째, 참된 경건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며, 세속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경건의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을 소유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