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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3일 수요예배

우리는 왜 일하는가 13

사람을 살리면서 하는 일

(열왕기하 19~16)

 

[들어가는 말]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죽자고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래위로 누가 상사고 누가 부하 직원인지 별 관심이 없습니다. 곁에 있는 동료에게도 큰 흥미가 없습니다.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며 또 잘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일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 챙기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조사를 빠짐없이 챙기고, 누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반드시 얼굴을 내비칩니다. 그러나 일을 맡기면 제대로 해 내지 못합니다.

 

셋째, 두 가지를 다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도 못 하고 사람을 챙기는 것도 못 합니다.

 

넷째, 둘 다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도 잘하고 사람을 챙기는 것도 잘하는, 아주 바람직한 유형입니다.

 

여러분이 사장이라면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네 번째 사람, 즉 둘 다 잘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1.   참된 영성은 일과 사람의 균형을 이룬다

 

열왕기하 1장을 보면 북이스라엘 8대 왕 아하시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천하의 악녀 이세벨의 아들인 그는, 여로보암의 송아지 우상과 그의 모친 이세벨이 모시는 바알을 섬겼습니다(왕상 22:52-53).

 

아합 왕 때는 국력이 커져서 옆 나라 모압이 조공을 바쳤습니다. 해마다 새끼 양 10만 마리와 숫양 10만 마리의 털을 바쳐 왔는데, 아합이 죽은 뒤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아하시야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습니다.

 

“1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보라 하니라” (왕하 1:1-2)

 

그러니까 가서 모압을 쳐야 마땅한 상황인데, 그때 아하시야가 사마리아 왕궁 다락방 난간에서 떨어져 크게 다칩니다. 그래서 모압의 반란을 진압하러 나가지 못하게 됩니다. 크게 다친 아하시야는 하나님께 기도한 게 아니라, 사절단을 에그론으로 보내서 그들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을지 물어보게 합니다. 이때 주님의 천사가 그것을 엘리야에게 알려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합니다.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왕하 1:3-4)

 

아하시야의 사절단이 길에서 만난 엘리야로부터 아하시야 왕이 병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하시야에게 돌아가 전하라고 말하자, 신하들은 사마리아로 돌아가서 침상에 누운 왕에게 엘리야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하시야는 아마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며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가 누구였는지 옷차림을 통해 엘리야임을 알게 된 아하시야는 오십 부장과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엘리야를 잡아 오게 합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그들은 엘리야에게로 가는데, 오늘 본문이 바로 여기부터 시작됩니다.

 

“9 이에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아 있는지라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10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9-10)

 

엘리야는 원래 불의 선지자입니다. 이전에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맞서 갈멜산에서 그들과 대결했던 사람입니다. 바알과 하나님 중에 누가 참신인지를 가리기 위한 대결에서 엘리야는 물에 흠뻑 젖은 번제단을 하늘에서 내린 불로 단숨에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거짓 제사장 850명을 모두 도륙한 바 있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그런 엘리야를 체포하러 갔던 오십 부장과 부하 50명은 졸지에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도 다시 아하시야는 두 번째 오십 부장과 군사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 모두 불에 타 죽고 맙니다.

 

“11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그가 엘리야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2 엘리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11-12)

 

지금 졸지에 오십 부장 2명과 군사 100, 합쳐서 총 102명이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 왕에게 그들은 단지 숫자에 불과합니다. 사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다 타 죽었다는 게 보통 일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가 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텐데,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또 다시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는 군사들이 죽는 것보다 자기의 권위를 지키고 부하들이 왕인 자기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아하시야는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세 번째로 오십 부장과 부하들을 또 보냅니다.

 

“13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14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13-14)

 

첫 번째 오십 부장과 두 번째 오십 부장은 엘리야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9).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11).

 

첫 두 명의 오십 부장과 세 번째 오십 부장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세 명 모두 군인이었고, 세 명 모두 왕의 명령을 받아서 왔으며, 세 명 다 주어진 임무를 수행한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중 두 명은 죽고, 세 번째 오십 부장만 죽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던 것입니까?

 

첫째로, 세 번째 오십 부장은 왕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기도했다는 것이 성경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가 엘리야에게 한 행동을 보면 그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자리에 오기 전 기도하고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로 올라가서 공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앞의 두 오십 부장은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에 있는 엘리야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친 겁니다. ‘어명이요. 당장 내려오시오!’ 밑에서 크게 외치며 명령했습니다.두 오십 부장은 산 아래에서 저 산꼭대기에 있는 엘리야를 향해 크게 외친 겁니다. “당장 내려와! 어명이야!”라고 외치며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오십 부장은 산 밑에서 내려와 주세요.’라고 한 게 아니라, 엘리야가 있는 산꼭대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실 왕의 명령대로 잡으러 간 군인이 체포 대상자 앞에서 무릎을 꿇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권한과 지위를 먼저 생각하면, 제발 봐달라고 해야 할 사람은 엘리야이지 오십 부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엘리야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에게 올라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앞의 두 사람은 거만한 태도로 밑에서 외쳤습니다. “당장 내려와라. 왕이 명령하시는데 어디 거기 가만 있느냐?” 그러나 세 번째 오십 부장은 자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엘리야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앞의 두 오십 부장들도 엘리야가 누구인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엘리트 군인 장교로서 얼마 전 갈멜산에서 있었던 엄청난 세기의 대결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 앞에서 교만했습니다.

 

사실 엘리야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는데, 두 오십 부장은 왕의 권위를 받아서 왔기 때문에 왕이 하나님보다 높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밑에 있으면서 저 높이 산꼭대기에 있는 엘리야에게 내려오라고 거만하게 외치기만 한 겁니다.

 

셋째로, 세 번째 오십 부장은 일보다 생명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앞서 두 오십 부장과 그 부하들이 몰살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왕의 명령을 받아서 오기는 했지만, 자칫하면 자기도 목숨만 잃을 뿐이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도 알았습니다. 세 번째 오십 부장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15)

 

주님의 천사가 엘리야에게 세 번째 오십 부장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와 함께 내려가라고 말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늘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기도만 들으십니까? 아닙니다. 오십 부장의 기도도 들으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오십 부장이 앞의 두 사람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는 왕에게서 체포 명령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밑에서 당장 내려오시오. 어명이오.’라고 하며 체포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체포하러 온 장교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그는 엘리야를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고 올라가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앞의 두 사람도 엘리야를 향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은 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면서 말만 그렇게 한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리도 건방지고 교만하게 말한다는 말입니까? 앞의 두 사람은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겸손하게 엘리야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가기 전에 그는 하나님께 먼저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부하들을 살리고, 선지자 엘리야도 왕 앞에 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해 주십시오.’

 

명령의 목적은 일이 완성되는 것, 즉 엘리야를 왕 앞에 데려오는 것입니다. 앞의 두 오십 부장은 자신뿐 아니라 부하들도 죽게 했지만, 세 번째 오십 부장은 사람도 살리고 일도 완수했습니다. 무사히 엘리야를 아하시야 왕에게로 데려간 것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 보면, 엘리야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가 엘리야에게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15)라는 말이 뭡니까? 앞의 두 사람은 살기등등하게 중무장한 오십 명의 군인들을 데려와서 무기의 쇳소리를 철컹철컹 내면서 위협을 가한 겁니다. 거기서 엘리야는 두려움을 느꼈던 겁니다. 그래서 내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희를 사를 것이다.”라고 기도한 겁니다.

 

사람이라면 사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세 번째 오십 부장이 왔을 때에도 엘리야는 또 왔구나. 나를 잡아 죽이러 왔구나.’ 하고 두려움을 느꼈던 겁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두려움을 느낄 만한 상황은 너무 많습니다.

 

결국 두려움을 느끼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느끼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두려울 때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 못 한다고 포기하며 스스로 두 손을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두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두려움을 이겨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 손을 들되, 누구에게 두 손을 드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이나 되는 거짓 선지자들과 겨루어 엄청난 승리를 거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이세벨의 협박 한마디에 큰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친 아주 연약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왕상 19:2-4)

 

너무 지치고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께 그냥 죽고 싶다고, 목숨을 거두어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엘리야 역시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인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다윗 같은 사람들도 모두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모두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보통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보통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합니다. 특별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 있고, 사람에게 무릎 꿇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무릎을 꿇는가가 보통 사람, 연약한 사람이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르는 것입니다.

 

그 두 종류 사람들의 차이는 목적의 차이이자 우선순위의 차이입니다. 일이 목적인가, 아니면 사람이 목적인가? 돈이 먼저인가, 아니면 사람이 먼저인가? 늘 사람이 먼저이고 생명이 먼저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 CEO가 부서별로 직원들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가장 표정이 어두운 사람을 점심에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고충을 들어주고 위로하는 일을 꾸준히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직원으로 바뀌었습니다. 게으르고 눈치만 보던 데서 벗어나 성실하게 일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고 관계를 얻으면 일은 따라옵니다. 사실 마음을 얻으면 전부 다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언제나 일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실적보다 관계가 먼저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는 누구든지 윗사람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아랫사람이 되기도 하는데, 그럼 누가 진정한 리더입니까?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 꿇는 사람이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2.   사랑의 영성으로 일터를 빛내라

 

우리는 일을 피해 살 수 없습니다.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참 안타깝고도 어리석은 일은, 평생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일하다 얻은 병을 고치는 데에 다 써버려서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입니다. 일과 영성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찮은 일과 가장 소중한 목숨을 맞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 중독도 모든 중독과 마찬가지로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탁월함은 자기 생명을 더 빨리 갉아먹고 남의 생명도 더 많이 해칩니다. 그리고 그 탁월함은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일에 오히려 앞장서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우선순위를 바로잡고 성경을 기준으로 삼는 진정한 영성이 아니라면 일터는 단지 살벌한 생존경쟁의 장일 뿐입니다.

 

많은 직장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줍니다. 탁월함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갈구는데, 그 때문에 직장은 일 중독자들을 많이 만들어내고, 일단 일 중독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자기 가정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부모 얼굴을 못 보고, 부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타인처럼 지내게 됩니다. 영성을 잃어버린 일 중독자의 열심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기와 가정과 사회를 파괴합니다.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16:25-26)

 

천하를 얻고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은 나이인 서른세 살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두 빈손을 관 밖에 내놓아라.” 그렇습니다. 누구나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갑니다.

 

예수님은 위의 말씀에서 영원한 생명을 목숨에 빗대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목숨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프시케’(Psyche)인데, 바로 이 단어에서 심리학’(psychology) 같은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프시케에는 , 호흡, 영혼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번역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온 천하를 얻고도 지옥에 가면 무엇이 유익한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가치, 영혼의 가치가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그 가치를 증거 하셨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6:24)

 

주님은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일에만 빠지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생각하고 생명의 가치를 우선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영혼의 가치를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태도입니다. 생명의 가치를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로 보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왜 일합니까?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일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일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에는 자기도 포함됩니다.

 

일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에 자신이 먼저라는 뜻입니다. 그 속에 자기 욕심이 먼저라는 고집이 버티고 있습니다. 물론 일에는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전문성이나 탁월한 능력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탁월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정한 탁월함은 사랑을 드러내고, 생명을 드러내며, 비전을 드러냅니다. 영성은 그 점에서 탁월함의 원천입니다.

 

일터에서 사랑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받은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일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영성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며 일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나 자신과 내 가족만 사랑하며 일하고 있지는 않나 돌아보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은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고 쓰러진 자를 되살리는 힘이 있으며, 상처 입은 사람의 상처를 낫게 하고 상처 주는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바로 그런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런 영성의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영성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곧 영성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출근하여 일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그 일터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내 일터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인 나 한 사람 때문에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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