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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 https://www.youtube.com/live/VrpfuMB39wc?si=03gkj431cB3HuDlm&t=98

 

 

 

20231210일 주일예배

영원을 준비하는 인생 2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마가복음 11~8)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19세기 초 영국의 한 천문학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속으로 하늘을 나는 것은 승객들이 질식할 위험 때문에 불가능하다.” 여기 질식하신 분 계십니까?

 

19세기 초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하나였고 연방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 및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라는 사람이 1848년 국회 연설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껏 내가 들어본 말 중에서, 뉴멕시코(New Mexico)와 캘리포니아(California) 땅을 사면 이익을 볼 거라는 주장보다 더 어리석고 바보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땅들은 단돈 1달러의 가치도 없다.” 그때 캘리포니아 땅을 샀으면 지금 억만장자가 되었을 겁니다.

 

19세기 영국의 해운 기업인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 한 관계자는 자기들이 만든 배가 절대로 가라앉을 수 없는 배이며,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안전한 배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타이태닉(Titanic)1912년 첫 항해 때 빙산 조각에 부딪혀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1939년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티브이의 문제점은 사람들이 눈을 스크린에 고정해야 한다는 것인데 보통 미국인이라면 그렇게 할만한 시간이 없다.” 그렇다면 미국에는 보통미국인은 없고 전부 특별한 미국인만 있는 것 같습니다.

 

1958<비즈니스 위크>(Business Week) 지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미 50대 이상의 외국 차들이 팔리고 있는 이 미국 자동차 시장에 일본 차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은 보이지 않는다.” 그 틈이 어떤 틈이었는지가 궁금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사 창업자인 전 회장 빌 게이츠(Bill Gates)1981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드드라이브는 640K 정도면 충분하다.” 640K는 너무 작아서 느낌이 안 옵니다. 지금은 640GB도 그저 그런데, 640K라는 것은 너무 작아서 감이 오지 않습니다.

 

비디오가 처음 나왔을 때, 아마 청년들은 잘 모를 텐데, 당시 베타(Beta)라는 게 있었습니다. 크기가 아주 큰 비디오 테이프였습니다. 그것이 VHS에 밀렸습니다. 베타보다 조금 작아진 테이프입니다. 조금 있다가 CD가 나오고 또 DVD가 나오면서 , 이건 정말 완결판이다.’라고 했는데, 그 후에 또 블루레이(Blu Ray)가 시장을 모두 잡았고, 지금은 블루레이를 사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전부 스트리밍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이런저런 서비스가 많아서 다 그런 것으로 보지, 누가 비디오나 CDDVD나 블루레이를 사다가 보겠습니까? 심지어 이제는 TV도 별로 안 보고, 태블릿이나 폰으로 봅니다.

 

정말 세월이 많이 바뀐 것이, 바로 얼마 전에 교회 물건을 사야 하는 게 있었는데, 산다고 하고서는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 앞으로 가서 앉아 그 사이트에 들어가서 산 게 아니고, 그 자리에서 바로 폰을 꺼내어 구입했습니다. 그러자 그다음 날에 왔습니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5, 10년 전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될 거라고 우리가 언제 예상을 했습니까? 이처럼 미래를 정확히 예상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인데, 한참 미래도 아니고 그저 얼마 후의 일이라도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기 700여 년 전부터 어떤 사람이 온다고 이미 예언되었던 인물입니다. 7년이나 70년도 아니고 무려 700년 전에 이미 이런 사람이 온다고 예언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언된 그대로 그의 삶에서 이루어졌으니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1.   구약 예언의 성취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선지자(예언자)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사역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오래전 예언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예언되어 있는데 요한이 나왔습니다.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2-3)

 

2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말라기 3:1의 인용입니다. 말라기는 세례 요한보다 400여 년 전 사람입니다. 3절이 바로 지난주 살펴보았던 이사야 40:3의 인용입니다. 이사야는 이때로부터 약 700년 전 사람입니다. 아주 진보적으로 봐도 500여 년 전 사람입니다. 400, 500년 전에 예언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됩니까?

 

이 선지자들의 글에 오래전 기록된 것과 같이(3) 세례 요한이 등장한 것입니다(4). 그러니까 요한은 어쩌다가 나왔거나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 이미 성경에 예언된 대로 정확히 역사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세례 요한이 활동을 시작한 이 광야가 어디인가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이곳이 아마도 사해 북부 요단강 유역의 아라바 지역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 그곳에 가보았는데 정말 황량합니다.

 

이곳은 오래전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기적을 행하던 곳이었고, 또 그가 승천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사역했으며 승천한 바로 그 장소에서 엘리야 같은 사람으로 온 세례 요한이 활동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구원자)의 길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이 광야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도시 같은 곳에 오지, 왜 광야입니까? 광야가 어떤 곳이기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까?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말하다라는 뜻인 동사가 다바르입니다. 그러니까 미드바르다바르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 광야는 침묵이 흐르는 적막한 곳이고, 아무도 없는 곳이며, 척박하고 힘든 곳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라는 뜻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빠서든, 시꺼러워서든, 다른 곳에서는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 광야라는 말입니다.

 

이 광야에서 모세의 인도 아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금방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돌면서 훈련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는 기간을 가지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서로 친척관계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이었기에 요한도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제사장이 되어 종교 지도자로서 편안한 기득권층의 삶을 누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사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있는 데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2)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광야는 단순한 곳입니다. 사막이라고 하면 괜히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돌아갈 곳이 있고 사람들이 같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혼자 뚝 떨어지면 사람이 살 수 있는 데가 아닙니다. 굉장히 단순합니다. 황량한 곳입니다. 하나에 집중하게 만드는 장소입니다. 다른 게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고독하고 적막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복잡한 것들을 정리하여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우리 삶에 때로는 광야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사명을 주시고 비전을 주십니다.

 

사울과 다윗이 처음에는 둘 다 능력도 비슷했고 둘 다 겸손하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삶에 광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입니다. 사울은 광야를 거치지 않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갑자기 세워진 리더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었을 때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금방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의 높은 지위가 그를 파괴했습니다. 위치를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울이 자기를 발탁했습니다. 그의 궁중 음악가였고 장수였으며 또 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인인 사울이 왕위의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다윗을 죽이겠다고 쫓아다닙니다. 그래서 다윗은 20대의 황금기를 도망만 다니며 보냅니다. 20대의 시간을 광야에서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니며 보냈습니다.

 

20대의 10년 동안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이 있고 군대도 쫓아오니 도망만 다녔는데, 그러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정말 억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 광야의 시간 동안 허송세월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그가 쓴 시편들을 보면 극심한 고난과 죽음의 위기 앞에서 나온 시들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는 시로서 자기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시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광야를 통해 하나님은 다윗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제2의 사울을 없애 버리셨던 것입니다. 광야가 없었으면 다윗이라고 위대한 왕이 됐겠습니까? 그도 금방 타락했을 게 분명합니다. 다른 왕들도 보십시오. 솔로몬도 그렇고, 그의 후에 나오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들을 보십시오. 대부분이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광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다윗을 겸손하게 빚으시고 또 영성과 인격이 깊어지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광야 생활이 있었기에 위대한 왕 다윗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광야가 없었으면 위대한 왕 다윗은 없습니다.

 

이처럼 의지할 데라고는 전혀 없는 광야에서 주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광야를 만났다고 저절로 좋게 되는 게 아닙니다. 거기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광야를 허락하신 데에는 목적이 있는데, 거기서 불평, 불만, 원망만 하며 허송세월하지 말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광야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찾으며, 왜 이런 광야를 내게 허락하셨는지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혹시 지금 나의 상황이 광야와 같구나.’ 하며 황량하고 막막하고 답답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엄청난 어려움과 슬픔을 겪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어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의지할 곳이 보이지 않고, 끝이 보이지 않고, 모래바람만 불며 황량함만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심한 갈증과 함께 타 죽을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왜 나를 이런 광야로 보내셨습니까?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잘되게 해주시고 길도 열어 주시지, 왜 이런 데로 보내셨습니까?’ 하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그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이런 어려운 시간을 주신 것, 어려운 사건을 만나게 하신 것, 어떤 사람 때문에 곤란함을 당하는 것은 우연히 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뜻이 있으셔서 지금 이런 어려움의 시간을 나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만을 쏟는 데에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나에게 주려고 하시는가? 도대체 어떤 사명을 주시려고 나를 이리로 보내신 것일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그 주님의 음성에 우리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이 광야라는 곳, 즉 지금 내 어려움의 시간, 역경의 시간이 결코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장소가 바로 이 광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쁘면 보통 뭐라고 말합니까? ‘교회 예배에 갔어?’라고 물으면 바빠서 못 갔다.’라고 합니다.  '기도하십니까?’라고 하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라고 합니다. 말씀도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딱 떨어져 보십시오. 바쁜 게 없습니다.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할 일이 없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아무리 얘야, 얘야.’라고 부르셔도 바빠서 못 듣고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많아서 못 듣곤 했는데, 이제 아무 소리도 없는 조용한 곳, 황량한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드디어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축복의 장소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고 낮아지는 곳이 광야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정말 광야에 혼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사람 살려!’ 이렇게 됩니다. 광야가 낭만적이라서 무슨 시가 나오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 이러다 죽겠다.’라고 생각되어 막 외치며 부르짖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명을 받는 거룩한 장소가 광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축복입니다. 물론 어렵지만 그래도 축복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2.   회개의 세례의 선포하는 요한 (4~5)

 

요한이 와서 한 일은 세례였는데, 그것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4). 마태복음 3:8에 보면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말합니다. ,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짜 회개했으면 그에 맞는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회개는 유턴(U-turn)하는 것입니다. 가끔 회개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잘못 든 것 같다고 약간 옆길로 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가는 디투어(detour)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트는 유턴(u-turn)이 회개입니다. 잘못 가던 방향으로부터 완전히 그와 반대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조금 좋아지거나, 길을 살짝 바꾸거나, 후회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죄악 된 길로 잘못 가던 것을 완전히 돌이켜 주님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4)인데, 여기서 사용된 중요한 단어 세 개가 있습니다. 죄 사함, 회개, 세례. 세례는 요한이 베푸는 것이고, 회개는 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며, 죄 사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를 받기만 하면 그 자체에 죄를 사해주는 신통력이 있는 게 아니라, 죄 사함을 구하며 회개했다는 표시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오래전 맥스 루카도(Max Lucado)의 책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라는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우리 안에는 야수 같은 측면, 자기가 해놓고도 깜짝 놀라게 되는 야수적 근성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한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2:3).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선도 행한다. 그보다는, 우리가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여러분, ‘나는 죄인이나 악인이 아니라 선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선만 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을 100% 행해야 선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분이 사실 한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프랑스 수필가였던 몽테뉴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법의 기준을 들이댔을 때, 평생 교수형에 열 번 정도 처하지 않을 만큼 착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우리의 생각까지 다 파헤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죄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쁜 소식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가 회개하며 주님께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다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요한은 바로 이러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군대에 갔을 때 별 의미 없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는 아무 의미도 모르고 그냥 초코파이를 준다고 해서, 또 훈련을 빠질 수 있다고 해서 교회에 갔는데, 그날 머리를 내밀라고 해서 내밀었더니 물을 뿌려주며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했다는 겁니다. 전혀 믿지 않았는데 의미 없이 그렇게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 의미도 알게 되었으니 세례를 다시 받으면 안 되겠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장로교에서는 세례를 한 번만 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받는 사람의 상태나 감정에 따라서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자녀로 택하시고 그 은혜가 이미 임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의미 없이 받았더라도, 이단에서 받은 게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다면 결코 우연히 받은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회개의 세례와는 약간 다르지만, 세례에는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예수님을 주와 구세주로 믿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세례를 안 받으신 분이 계신다면, 안 믿어지는데 억지로 믿고 받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교회에 조금 나오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아직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았는데도, 그 정도 나왔으면 됐으니까 세례받으라고 해서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받으면 안 되고, 정말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며 , 그렇구나. 그래서 나에겐 구세주가 필요하구나.’ 하며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때는 세례받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부족해서 좀 나중에 받겠습니다.’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래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용서해 주러 오신 예수님을 믿으면 세례를 받는 것에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례는 공적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는 것을 선포하는 예식입니다.

 

반면, 별 의미 없이 세례를 받은 분들이 계시는 경우 지금 그 의미를 깨달았다면 괜찮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다시 세례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데, 바로 성찬입니다. 그래서 성찬이 있는 겁니다. 세례와 성찬이 교회에서 행하는 두 개의 성례전입니다.

 

혹시라도 세례를 별 의미 없이 받았더라도 성찬식을 의미 있게 참여하시면 됩니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나는 주님의 것이다.’라는 사실을 깊이 되새기면서 받으시면 됩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5)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할 때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나왔다고 되어 있는데이것은 과장법입니다. 정말로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다 나왔다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나왔다는 말입니다.

 

당시 그곳을 다스리던 헤롯왕(헤롯 안티파스)만 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그때 헤롯은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취한 일로 인해 요한의 책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고 싶겠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그 일로 결국 요한을 처형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씀을 듣는다고 다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흘리긴 흘리는데 눈물이 아니라 침을 흘리며 좁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긴 흘리는데, 졸려서 하품했기 때문에 눈물이 납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이처럼 다르게 반응합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은혜에 감격하는데, 이를 갈며 분노하는 헤롯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듣고 똑같이 마음에 찔렸으면서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믿었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이를 갈며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 태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선포하는 요한 (6~8)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6)

 

여기 보면, 세례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신하들이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하니 왕이 그 사람의 생김새를 물어봅니다. 그랬더니 그는 털이 많은 사람으로 허리에 가죽 때를 띠었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왕이 바로 말하기를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다(왕하 1:8)라고 말합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 (4:5, 새번역)

 

실제 엘리야가 다시 태어나서 온다는 게 아니라, 엘리야의 심령을 받은 예언자가 올 것이라는 말인데 그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외모는 구약의 엘리야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과 그 아내 이세벨이 다스리던 가장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 회복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던 엘리야와 같이, 세례 요한은 그러한 선지자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인 것을 말해줍니다.

 

그는 광야에서 살았고 들에서 나는 음식을 먹었습니다(6). 그런데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하니까 이것은 건강식 organic이 아닙니까?'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해석할 때 지금의 눈으로 보면 잘못 해석하게 됩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것은 organic food를 먹었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지금 눈으로 보면 그렇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다는 말이고, 그러면서도 청렴하게 살았다는 말이며, 들에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7-8)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광야라는 것도 아니고,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는 사실도 아니고, 세례 요한이 길을 예비하고 있는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 메시아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그분은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7). 심지어 자기가 몸을 굽혀서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을 정도로 그분은 높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 자기는 예수님의 종의 자리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미천한 자라는 고백입니다. 둘째로,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입니다(8). 새 생명을 주시며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마지막 때를 확인하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그가 위대한 것은, 그의 모든 삶의 내용이 장차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데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와 자기에게 세례받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제가 여기 있는데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와서 세례를 달라고 하면 , 역시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하며 우쭐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 나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지. 그래, 이렇게 나를 알아보니 너도 참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이제 나는 스타가 되어 보아야겠다. 준비는 무슨 준비? 그냥 내가 하고 말지.’라는 식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그렇게 변질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결코 우쭐해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위치를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비전과 사명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아는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자기 제자들이 와서 사람들이 전부 저 예수에게로 간다고 했을 때 정말 위대한 말을 남깁니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30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3:29-30, 새번역)

 

이러한 요한의 태도는 결코 실패자나 패배자의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소극적으로 그냥 , 어쩔 수 없으니까 현실을 받아들여야지.’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대단한 열정으로 그 비전과 사명을 이뤄내는 사람입니다. 사명을 모른다면 이런 일을 당할 때 그냥 있을 수 없고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정확히 알았기에 자기를 낮추었고 위치를 지켰습니다.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위치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사명을 모른다는 말도 됩니다. 자기 사명이 아닌 것을 맡게 되었을 때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것을 세상에서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교회에서 책임을 맡아 사역하는 경우 더욱 그러한 마음이 요청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내가 영광 받고 인기를 끄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이 주님께로 가도록 할 마음만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사역자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되고 사람들에게 칭찬 들을 때 우쭐하게 될 수 있습니다. 가끔 보면 직분이나 사역 앞에서 저는 자격이 안 되어 못 합니다. 능력이 없어서 못 합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뭡니까? ‘내가 자격이 되면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나 자격으로 사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격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시게 하겠다는 그 마음만 있으면, 능력이 없고 자격이 없어도 주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이 은사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비판이나 섭섭한 소리를 들을 때 사명감이 없으면 괴로워하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감정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라서 왔다 갔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는 표시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하거나 자기가 싫어 안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여사가 있는데, 네덜란드 출신으로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아 감동적인 간증으로 세계를 돌며 전도했던 분입니다. 가는 곳곳마다 큰 감동과 부흥이 일어났는데, 한번은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집회를 마치고 엄청난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박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코리 텐 붐 여사는 전혀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아니, 지금 이렇게 박수를 받으시는데 기쁘지 않으세요?” 이때 코리 텐 붐 여사가 굉장히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귀가 착각하면 쓰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호산나!” 하고 외쳤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난리를 쳤다고 해서 그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향한 박수갈채였고,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는데,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그 박수 갈채를 보고 환호를 보면서 , 나는 확실히 괜찮은 나귀구나.’라고 착각했으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나귀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는데, 바로 그 뜻을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나가는 말]

 

지금도 도시마다 교회들이 많이 있고, 열심히 교회 다니는 교인들도 많이 있으며, 주일 아침에 나와 이렇게 열심히 예배드리는 여러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열정으로 이뤄내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보다는 자기 생각에 더 중요한 일로 바쁜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이 세상을 볼 때 너무나 어둡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혹시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을 제대로 몰라서 그럴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주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세상에서는 자기 일로 바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주인이시라고 하는데, 나가서는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신앙은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나타납니다. 여러분, 진짜 신앙생활은 교회 내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생활은 세상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내 가정에서, 내 일터에서, 또 거리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에서는 뭘 합니까? 이렇게 같이 예배를 드리고 훈련하는 겁니다. 우리가 서로 연습하는 겁니다. 나가서 잘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교회에서는 연습하고 나가서는 실습하는 것입니다.

 

요즘 크리스천의 수가 여전히 많은데도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점점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이 오히려 절대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신앙으로 사는 것 같다가도, 내 이익이 걸린 상황이 되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나 이웃의 유익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부터 챙기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은 세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을 받아 철저한 순종과 열정으로 그것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이것은 하나님이 요한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주시는 사명은 무엇입니까?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발견하고 이루어내어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려 드리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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