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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13일 주일예배

제자의 삶 산상수훈 20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마태복음 614~18)

 

[들어가는 말]

 

병원 중환자실(Intensive Care Unit)에 가보면 인공호흡기 하나에만 의지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중증 환자들이 많습니다. 소생할 가능성이 있어서 그런 기계를 붙여 놓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게 하도록 위해 하는 것이고, 그저 생명을 간신히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그런 환자에게는 호흡기를 떼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생사를 결정합니다. 만약 의사가 소생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판정하면 계속 호흡기를 붙인 채 최선을 다하게 되지만, 반대로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정하게 되면 가족들의 동의하에 호흡기를 떼게 되고, 바로 그 순간 그 환자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중증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일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이곳은 참 평안하고 우리는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도 바로 이런 호흡기와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경건이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흔히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보고 경건한가, 믿음이 있는가를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뎌 경건하다고 말합니다. 외적인 면으로만 판단하여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더 가깝고 아주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계속해서 그게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에 대하여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라고 표현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며,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아니라 마음의 중심으로 결정된다고 하시며, 계속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교 행위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아무리 겉으로 거창해 보여도 그런 사람의 산소 호흡기는 이미 끊어진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관계를 갖지 못하고 남에게 보일 의도로 기도한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이미 죽었다고 예수님이 이전 본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죽은 사람은 겉으로 굉장히 신앙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내면은 썩을 대로 썩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아니, 아예 끊어져서 죽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인다고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으면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것으로서 예수님은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이미 구제와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고, 같은 맥락으로 오늘 금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세워주는 것이 이러한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그런데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경우는 결코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이 위선적이 되어 버리면 그 사람의 호흡기는 이미 단절된 거나 마찬가지이고, 죽어서 실려 나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그렇습니다.

 

신앙이 굉장히 좋다는 사람들이 갑자기 몰락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고위 공직에 있거나 국회의원 중에 크리스천이 많습니다. 장로, 안수집사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이미 많이 보았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그것은 진짜 신앙이 아니었던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때, 내가 환자인데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질이라고 해서 의사 앞에 저의 몸을 보십시오. 이렇게 튼튼합니다.’라고 자랑하겠습니까? 그것은 굉장히 웃기는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연약하고 보잘것없다고 의사가 진찰하려 할 때 절대 보실 수 없습니다. 저는 부끄러워서 보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의사에게 간 환자는 자기의 강함을 자랑할 것도 아니고 연약하다고 숨길 것도 아니며, 자기의 몸을 있는 그래도 보이면서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제가 이것은 좀 부족하지만 저를 보십시오. 이렇게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자랑할 것도 없고,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고 숨기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닙니다. 부끄럽지만 다 드러내며 나아올 때 고침을 받고 올바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경건과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드러내며 나아갈 때 온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용서이고, 다른 하나는 금식입니다.

 

 

1.   용서

 

1)  용서받은 사람은 용서한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죄 용서를 받지 못했다면 그 관계는 말이 안 되는 관계입니다. 아니,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죄 용서의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14-15)

 

이것을 읽으실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그냥 빨리 피하고 싶다라는 느낌이 드십니까? 이것은 12절의 주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주(note)가 달려 있는 경우가 있는데, 14-15절은 12절의 주(note)입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이 주기도문 가운데 뭐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2)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지난번에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앞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세 가지, 또 뒤에는 나 자신 또는 이웃을 향한 기도로서 세 가지, 이렇게 총 6가지 내용이 담겨 있는데, 죄 용서에 대한 부분 외에는 주를 붙이신 것이 없습니다. 이 용서에 대한 것만 주를 붙이셨습니다.

 

왜 다른 것에는 특별한 해설을 붙이지 않으시면서 이 용서에 대한 부분만은 주를 붙여서 따로 또 두절이나 그 내용을 길게 설명하십니까? 그만큼 이것이 중요하고 우리의 경건, 즉 믿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는 데는 민감하지만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주는 데는 무관심할 수 있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제대로 된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용서받기를 원하고 또 죄 사함을 받기를 원하는데, 다른 사람의 허물은 용서해 주지 않는 경우가 요즘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그것에 대한 용어가 바로 내로남불입니다. 똑같은 일인데도 내가 하는 것은 괜찮고 다른 사람이 하면 안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원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내로남불이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용서받으려면 반드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의 허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기 싫다면, 내 죄도 용서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럼 나는 하나님께 용서 받은 게 아닌가 고민되네.’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조건부 용서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은 것은 완전하지 않고, 진짜로 용서받기 위해서는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조건부 용서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 되는 것이라고 조건부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고백했으면 당연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어야 용서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즉 용서는 받았지만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 용서를 구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게 되어 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가 포함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만 나도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힘들지만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은 표시라는 것입니다.

 

진짜로 회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줍니다. 진짜 회개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을까요?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용서를 체험한 사람이 나에게 조금 잘못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된다는 게 아닙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면 올바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하신 것은 우리에게 완벽하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평생 애쓰며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옛날에 교회를 많이 다녔으니까 이제는 졸업하겠다고 하는데, 신앙생활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죽는 순간이 졸업식입니다. 장례식이 졸업식인 것이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 신앙에 졸업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는 동안 신앙생활을 멈추었다면 그것은 넘어진 것입니다. 학교로 치면 자퇴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마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작은 죄도 깨닫게 하시고 또 그 죄를 우리가 용서받도록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내 죄를 용서해 달라 회개의 기도는 하는데, 그와 동시에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잘 안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회개하는 것은 하는데,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은 잘 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1만 달란트라는 것은 우리가 셀 수도 없는 엄청난 돈으로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의 돈을 탕감받았는데, 자기에게 조금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당장 내놓으라고 하며 용서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는 엄청난 용서를 받았으면서 남은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시면서 여기와 똑같이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지 않으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조건부 용서가 아니라, 정말 용서함을 받으면 남을 용서해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항상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열심히 읽고 예배를 열심히 드리는 걸로 끝이 아닙니다.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와야만 진짜 신앙이고 진짜 경건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좋으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웃과는 좋은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면, 이것은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그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와야 하는 겁니다.

 

회개도 하나님 앞에서 정말 잘못했다고 회개했으면,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에 알맞은 열매가 무엇입니까? 이웃과의 관계에서 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경우는 내가 잘못한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 회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다 해도,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그 신앙에는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못된 거룩이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기도하고 예배하며 십일조도 다 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날카롭게 비판하고 비난하고 정죄했으며,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가혹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리새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야기가 아닙니까?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십시오.’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용서를 전혀 베풀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가짜 신앙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여기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죄가 남들 앞에서 얼마나 많이 드러나겠습니까? 남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긍휼이 필요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법대로 판결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형을 벌써 몇 번은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계속 사형시킵니다. 나에게 조금 잘못하면 한 번, 두 번, 또 세 번을 세면서 내가 세 번이나 참았다. 이젠 끝이다.’ 하고 끊어 버립니다. 그 사람과 관계를 단절시키고 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서로 갈라지고 분열하고 다투고 용서하지 않으면서 많이 인용하는 구절 중 하나가 바울과 바나바도 싸우고 갈라졌으니까 갈라지는 것은 큰 허물이 아니고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오해하는 겁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한 것은 맞지만, 서로 원수가 되어서 이를 갈며 싸우고 갈라진 게 아닙니다. 의견을 끝까지 좁히지 못하여 결국 각자 다른 길로 가기로 하고 서로 축복하며 보내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별하게 된 원인은 마가 요한입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 요한을 데리고 떠났는데 키프로스(구브로) 섬에서 전도하다가 마가는 거기서 너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마가가 너무 힘들었던지 거기서 배를 타고 육지에 내리자마자 밤빌리아의 버가라는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두고 예루살렘 집으로 그냥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2차 전도 여행을 가려고 할 때 바나바는 자기 조카이기도 하고 또 워낙 위로와 격려를 잘하는 사람이니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고 했습니다. 그랬을 때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바나바는 다시 한번 마가에게 기회를 주고 이번에 다시 데려가자고 하고, 바울은 안 된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바울이 결코 마가를 미워한 게 아니라는 것, 용서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마가를 미워해서 저따위 인간은 우리가 데려갈 수 없다. 마가는 안 된다.’라고 한 게 아닙니다.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 그는 아직 헌신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힘든 사역인데, 완전히 헌신되지 않은 사람을 데리고 가면 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렵고 본인에게도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헌신한 다음, 변화된 다음에 데리고 가도 늦지 않습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가 비록 헌신하지 않고 부족하고 변화되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전도 여행을 다시 한번 가면서 이것을 통해 그가 깨닫고 변화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라고 했습니다. 사실 둘 다 옳은 말입니다. 기회를 다시 한번 주자는 것과, 헌신한 다음에 가는 것이 본인에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좋고 복음 전파에도 좋다는 것은, 사실 둘 다 맞는 말 아닙니까?

 

바울에게서 배우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가는 안 됩니다. 저 인간은 안 됩니다.’라고 한 게 아닙니다. 거기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의 행동을 지적한 것이지, 그 사람의 인격을 정죄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남이 뭘 잘못하면 저 인간 틀렸어. 저 사람은 끝이야.’라고 그냥 정죄해 버리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한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100%는 없습니다. 100% 옳은 사람이 있습니까? 100% 틀린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악한 사람도 100% 틀리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사람도 100% 다 옳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합니다. 조금 더 많이 선하다고 선하다 하는 것이고, 조금 악해 보이니까 악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100%는 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분명히 좋은 점과 잘하는 게 있고, 아무리 선한 사람도 뭔가 잘못하는 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 이 사람은 틀렸다.’가 아니라 이 사람이 이런 행동을 했는데 이 행동은 좀 잘못됐습니다.’라고 그 행동과 인격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용서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 사람 자체로 보면 용서가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저 잘못된 인간을 용서하겠습니까? 그런데 저 사람이 나에게 이 점을 잘못했다. 이 행동을 잘못했다.’라고 행동에 초점을 맞추면 용서가 가능합니다.

 

바울이 한 것이 바로 그것이고, 우리도 그것을 바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관계가 풀리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세워진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관대하고 또 용서해 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때 결별했지만, 바울의 편지를 더 읽어보면 원수로 헤어진 것이 아니고 나중에 바나바와 잘 화해하고 계속 동역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시작 직전에 헤어졌는데, 3차 전도 여행 때는 이미 사역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힌트를 발견합니다. 게다가 바울은 말년에 마가를 가리켜 나에게 아주 유익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마가는 변화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바나바도 기도하고 바울도 기도한 것입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져서 마가복음이라는 아주 귀한 그런 복음서가 그 마가에 의해서 기록되어 우리에게까지 지금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2)  용서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먼저 용서가 아닌 게 뭔가 하면, 용서는 잊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또 용서하면 상처가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어떻게 상처가 사라지겠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잘못해서 마음의 상처를 확 받았는데 용서한다 말한다고 그게 없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용서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잘못한 저 사람에 대하여 나는 보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것도 한번 보복하지 않고 그다음에 하겠다는 게 아니라, 계속 복수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감정적으로 풀어지는 게 아닙니다. 감정은 아직 상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수하지 않겠다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잘못됐다고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한 행동이 잘못됐다고 하며 그 행동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나에게 저지른 그 사람의 잘못을 계속 묵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일단 그 사람의 잘못을 생각하기를 멈추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이 생각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꾸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가 안 됐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해서 내가 미워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과 완전한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감정에 앙금이 생겼는데,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하는 것은 사실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또 어떤 경우에는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니까 상대방이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가서 용서한다고 했다가 오히려 더 상처받고 돌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내가 받은 상처와 그 사람의 잘못을 자꾸 생각하지 않고, 그 후에는 저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왜 이런 말을 했을까?’라고 하며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해 보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꾸 화가 나는데, 정말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기도하게 되면 저 사람이 왜 그때 그런 말을 나에게 했을까? 왜 그런 행동을 나에게 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었겠구나.’라고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불쌍히 여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후에는 그 사람을 만나도 나쁜 감정이 사라진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실 그 사람도 그걸 느낍니다. 그러면 내가 이긴 것입니다. 가서 말로 쏘아주고 때려 부수어서 이기는 게 아니고, 용서가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의 첫걸음은 일단 그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그다음에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불쌍히 여기게 되며, 바로 그럴 때 진정한 용서가 가능합니다.

 

지금 철천지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혹시 불편한 관계가 있으십니까? 잘 용서가 안 되는 사람,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일단 그 사람이 나에게 한 잘못을 생각하지 말고, 먼저 그 사람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왜 그렇게 했을까?’ 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들에게 잘 말하지 못했던 어떤 사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그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면 이상하게 진짜로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 참 안됐구나. 그런 형편이었구나.’ 그러면서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하지만 일단 그 사람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다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조심해야 하는 것은,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라고 탁 판단해 버리는 것이 나를 하나님의 위치에 올리는 것입니다.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한다.’라고 주장하면, 바로 그런 것이 자기를 하나님의 위치에 올리는 겁니다. 반드시 이래야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뜻은 항상 불완전합니다.

 

특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다고 객관적인 평가 자료에 의해 평가하는 것은 괜찮은데, 주관적으로 판단하면 정죄로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씁쓸해집니다. 미워집니다. 사실 저 사람을 바른길로 가게 하겠다며 가서 당신 이것을 잘못했어요.’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눈물 흘리며 회개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더 감정이 나빠지고 같이 화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내가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서야 하고, 그러면서 그 사람의 잘못과 그 사람의 인격을 분리해서 볼 줄 아는 눈을 자꾸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잘못했다고 우리의 인격이 잘못됐다고 정죄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는 미워하십니다. 우리도 죄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눈을 자꾸 기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길러지겠습니까? 연습을 통해 길러집니다. 그래서 그 연습을 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가정이고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남들과 하지 못하는 친밀한 가족 관계 속에서 이것을 계속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계속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같이 모여 그것을 훈련하라고 묶어 주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가족끼리도 전혀 그런 대화가 없고, 교회에서도 다른 성도들과 관계를 가짐이 없이 그냥 왔다 갔다만 해서야 어떻게 훈련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기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로 부대낄 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작은 그룹인 목장으로 모이면서 그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아무리 우리가 서로 좋다고 느껴도, 정기적으로 꾸준히 매주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허물이 자꾸 보이게 됩니다. 분명히 보입니다. 내 허물도 그 사람에게 보이고, 그 사람의 허물도 내 눈에 보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해결하라고 지금 같이 묶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 사람의 인격과 잘못된 행동을 분리할 수 있는 이 하나님의 눈을 계속 길러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2.   금식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금식입니다. 예수님 때만 해도 금식은 하나의 신앙 기준이었습니다. 특히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띤 사람들은 금식을 많이 했는데, 우리 시대에도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40일 금식하셨으니까 자기도 40일 동안 금식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님들 가운데 명함에 ‘40일 금식기도 10라고 써 놓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자랑할 일입니까? 자랑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자랑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도 40일 금식기도를 해보겠다고 하며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기도 굴을 하나 받아 거기 들어가서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했는데, 힘들었지만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3주 정도 지나니까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40일 동안 예수님처럼 금식해보겠다고 들어갔는데 3주 만에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거창한 기도 제목을 들고 들어갔지만 이제는 하나님, 살려만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라고 기도했다는 겁니다.

 

금식하면 사실은 육체의 욕망이 어느 정도 컨트롤되는 것을 느끼면서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금식을 해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우리가 하는 다니엘 금식은 사실 채식을 하고 어느 정도 먹으면서 하는 것인데도, 다니엘 금식을 많은 분들이 힘들어합니다. 다니엘 금식에 참여하지 않는 분들 중 건강 문제 때문에 못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건 괜찮은데 건강 문제가 아니고 두려워서, 또는 굶기가 싫어서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이번에도 보았습니다. 못 먹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못한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 다니엘 금식은 그래도 먹을 게 많습니다.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어느 정도 채식하며 할 수 있는 건데도 그것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우리가 육체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사실 다니엘 금식의 경우에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미디어 금식입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히 중독되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폰을 들여다봅니다. 완전히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부터 나를 한번 해방해 보자는 것인데, 그게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3주 동안 미디어 금식을 힘들어 합니다. 그것도 자기 업무나 공부를 위해서는 이메일이나 문자를 하는 것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그게 힘들어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 금식은 안 먹는 것인데 우리는 대개 완전 금식’, 즉 물과 음식을 아예 안 먹고 안 마시는 완전 금식보다는, 보통 일반금식을 합니다. 그러니까 물은 마시면서 하는 것입니다. 물도 안 마시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물은 마시면서 합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40일 금식을 하겠습니까? 무슨 일주일을 하겠습니까? 어쩌다 일주일 정도 하는 분은 있지만, 대개는 하루 이틀이나 3일 정도를 합니다.

 

사실 금식을 해보면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이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오래전 다른 데서 부목사로 섬길 때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3일 금식을 했습니다. 화요일 저녁부터 시작해서 금요일 낮까지 금식하고 금요일 저녁부터 식사하겠다고 생각하고 하는데, 3일 동안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동네에 식당이 이렇게 많은 줄 제가 처음 알았습니다. 항상 지나다니는 길인데 금식하면서 지나다니니까 식당만 보이는 겁니다. 무슨 레스토랑들이 그렇게 많은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굶는다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잠을 잘 못 자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절제하는 방법으로는 금식이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금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금식이 그렇게 귀하고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6)

 

예수님은 여기서 자꾸 자기 상을 받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이 금식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금식을 귀한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계속 지적하시는 것은 잘못된 동기로 금식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구제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기도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금식도 사람에게 , 이렇게 금식하고 있어.’하며 보이려고 하고, 그래서 존경받고 인정받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 사람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금식할 때 , 이렇게 금식하고 있어.’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말로 한 것은 아니지만, 금식할 때 입는 옷을 따로 입고, 얼굴도 안 씻고, 또 재 같은 것을 묻히면서,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지금 금식 중이라고 알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하십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이나 무슨 특별한 종교 행위를 통해서 더 믿음이 좋아지고 그런 게 아닙니다. 물론 훈련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경건의 삶> 12가지 경건 훈련을 통해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훈련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지 그 훈련 자체가 아닙니다. 훈련의 도구로 여러 가지를 사용할 수 있는데, 그중에 금식도 포함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지,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 자체를 중요시하며 자기가 이런 사람이라고 으스대는 데에 이용한 것입니다.

 

화가 나니까 홧김에 금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금식하면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홧김에라도 금식하면 나중에는 화낼 힘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그것도 유익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많이 하는 금식은 조건을 걸고 하는 금식입니다. ‘하나님, 제가 금식하니까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그래서 시간을 정해 놓고 금식하며 기도하면 자기의 그러한 공로를 봐서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냐고 하며 금식합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결단을 하면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하고 또 때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결단하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과 조건 걸고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것을 해 주시면 나도 이렇게 하겠다는 조건부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잘 세우기 위해서 하는 그러한 금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자세로 금식하라고 하십니까?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7-18)

 

오래전 제가 신학생 때인가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있었는데, 안 그러던 분이 하루는 머리에 엄청나게 기름을 바르고 왔습니다. 그래서 왜 머리에 그렇게 기름을 많이 발랐냐고 물으니까, 성경에 금식하면 기름을 바르라고 해서 그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금식한다고 티 내는 게 아닙니까?

 

지금 그렇게 기름을 정말로 바르라는 말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재를 뿌리면서 티 내며 금식하곤 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모습으로 보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그렇게 머리에 기름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발라서 나는 지금 금식합니다.’라고 광고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어려움을 당할 때 금식하게 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금식기도를 해보십시오. 굉장히 도움이 되고, 하나님 앞에 정말 간절히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기도 응답이 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금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표시입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나아갔습니다. 자기 민족이 위기에 빠졌을 때 다 같이 금식하자고 하면서 기도하며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위기 상황이 닥칠 때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지, 내가 이렇게 하면 뭔가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조건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금식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즉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은 다 좋습니다. 그런데 바른 태도로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용서의 문제에 있어서, 평생 부부간에 배우자에게 고통을 당했는데 하루아침에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 부모님 특히 아버지에게 고통을 받은 자녀가 아버지를 하루아침에 용서한다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배신당해서 굉장히 곤란을 당할 때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러나 용서는 결국 복수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나아갈 때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도 알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금식에 있어서도 이런 바리새인들과 같은 외식적, 위선적인 금식이 아니라 주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응답하시는 그러한 금식을 우리가 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음번에 다니엘 금식을 한다고 광고하면 꼭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 가고 또 그 시간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더욱 세워 가는 시간이 됩니다.

 

지금 온갖 모양의 죄가 범람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절제이고 또 훈련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절제의 훈련을 하며, 또한 용서와 기도와 구제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믿음을 연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마음 밭이 잘 기경되고 은혜의 단비를 부으시는 하나님의 복을 주시는 역사가 우리 삶에 풍성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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