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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9일 부활주일 연합예배

부활절 메시지

그냥 돌아간 두 제자, 우는 마리아

(요한복음 201~11)

 

1.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지난 금요일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일찍이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에게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이니까, ‘안식 후 첫날은 지금으로 하면 일요일 아침이 됩니다. 새벽 같이 막달라 마리아가 가는데, 다른 복음서를 보면 다른 여인들도 함께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1)

 

당시는 무덤을 엄청난 바위로 막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큰 바위가 열리고 무덤 문이 열린 채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너무 놀란 마리아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단숨에 달려가 이것을 알립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2)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어처구니없이 생각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생전에 여러 번 말씀해주셨는데도 부활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그들의 영의 눈이 너무나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중 두 사람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2)입니다. 요한복음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사도 요한이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요한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요한입니다.

 

이제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일어나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3). 가보니까 정말로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팽개쳐 있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정리되어 개켜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3-7).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8)

 

요한이 제자들 중 가장 젊은 제자였기에 달리기가 빨라서 먼저 도착했지만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뭔가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살펴보니까 그제야 그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9)

 

그러니까 8절에서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었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전한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에 이어서 생생한 부활의 현장에 직접 도착하여 들어가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깨닫지도 못했고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사라진 주님을 찾아볼 엄두는 더더욱 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무엇을 했습니까?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0)

 

두 제자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들은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24:12)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도 그때 다른 제자들처럼 영적으로 어두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웠던 베드로와 요한은 그 엄청난 주님의 부활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지만,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냥 이상하다고만 여기면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이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이렇게 매주 예배를 드리는 것, 매일 성경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 삶 공부를 하는 것, 다니엘 금식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참 좋은 일들입니다. 귀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좋은 일을 하더라도, 내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몇 년을 다니셨습니까? 1년이 52주이니까 1년에 매주 교회에만 나오면 설교를 52번 듣게 됩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셨다면, 도대체 그동안 들은 설교가 몇 편이고, 또 그동안 읽은 성경 장수가 몇 장이나 됩니까? 그것과 비례해서 내 신앙이 점점 자라고 있습니까?

 

그런데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결국 읽고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속에서 나오며 실천되는 것인데, 말씀을 배운대로 읽은대로 들은대로 실천하고 계십니까?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나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까? 설교자가 설교를 너무 못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이것이 말씀의 탓이겠습니까 주님의 탓이겠습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깨어서 세상을 보면 못 보던 것이 보이고, 주님의 영광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의 방향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영적으로 어두워서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이 두 제자처럼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말씀은 나의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나의 삶은 별 의미 없이 우울함과 두려움 가운데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냥 왔다가 돌아간 것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2.   부활에 대한 막달라 마리아의 반응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와서 그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처음 확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린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대부분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녀의 말을 듣고서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한 채 그냥 이상하다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1)

 

11절이 우리말로 마리아는으로 시작하지만,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 원문에서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러나 마리아는이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리아는...’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말하고, 그중 베드로와 요한이 쫓아왔습니다. 마리아도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갔다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거기서 두 천사를 만나게 되고, 천사들이 예수님은 살아나셨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못 알아보다가 나중에 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온 것입니까? 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안 계신 것을 알고도 그 빈 무덤을 다시 찾아갔습니까?

 

아직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었고, 그 생명을 주신 분을 향한 사모함과 사랑이 그녀를 무덤으로 다시 오게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돌아온 것은 사랑 때문에 돌아온 것입니다.

 

 

3.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돌아갔는데, 그들뿐 아니라 우리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인생도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딘가를 향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어디로 돌아가고 있습니까?

 

10절에서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라는 말이 문자적으로는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갔다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지난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엄청난 말씀도 듣고 엄청난 기적들도 많이 체험했으며 그 누구보다 예수님과 가까이서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분은 우리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그 메시아(구원자)가 틀림없는데, 이분을 잘 따라다니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실 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겠다.’라는 마음 때문에 계속 따라다닌 겁니다. 그들은 열두 명 안에 들어갔고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은 세 명 안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기대가 컸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처형당하시는 것을 보며 소망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까 다 도망가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의 야망을 이뤄보려고 했는데 이제 예수님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뭘 통해서 내 야심을 이루나?’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아직도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이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데, 올라가시기 직전에도 그 질문을 합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지금입니까?” 이제 부활하셨으니까 이 능력이면 다 때려눕히고 로마를 물리치며 충분히 왕이 되실 수 있으니 지금 왕이 되실 거냐고 묻는 겁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것은 너희가 알 바 아니고, 오직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까지도 그들은 자신의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했고, 성경도 많이 알고, 기도도 꾸준히 하고, 체험도 있고, 봉사도 많이 하고, 성경공부를 많이 하더라도, 중심에 주님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님의 빈 무덤으로 되돌아간 것은, 자기 자신보다 주님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시신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런데도 주님의 시신에 기름을 발라 드리겠다고 갔습니다. 자기의 안위보다 주님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직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녀의 믿음은 불완전했지만, 주님의 빈 무덤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뵙는 영광과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게 무엇입니까?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을 위하는 일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버리는 것,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주님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버리고 주님만 생각하는 사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영광과 기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진짜 주인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의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관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주인이냐?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냐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관건입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느냐, 내가 계속 주인 노릇을 하느냐?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염려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걱정합니다. 여전히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 산상수훈의 핵심과 같은 말씀입니다. ‘먼저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면 모든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주님이 다 책임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살면 먹고사는 문제는 다 해결해주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거꾸로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주실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먼저 채워주시면 그 후 제가 형편이 될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겠습니다.’라고 하며 거꾸로 합니다. 그러니까 평생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게 살면 주님을 섬길 기회도 얻지 못하고, 염려에서 해방이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신다면, 한번 해보십시오. 틀림없습니다. 염려에서 해방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구원받았다고 하는데도 염려와 불안에서 해방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구할 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우리가 무엇을 먼저구하느냐에 따라 염려하며 사느냐, 아니면 평안 가운데 사느냐가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구원받아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누리지 못합니다. 지옥 같이 살아가게 됩니다. 왜 그래야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필요한 것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 그런 건 다 쓸데없고 오직 나의 나라와 의만 구해. 그러면 돼. 저런 건 하지 마.’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얘야, 내가 다 안다. 이거 너에게 필요하지? 내가 다 안다.’라고 하십니다(6:32).

네가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잡기를 원하는 것, 네 아이가 잘해서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 사고 없이 안전하게 살고 싶은 것, 미국까지 왔는데 돈 좀 벌어서 풍요롭고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 어느 정도 있어야 이 사회에서 문제없이 살 수 있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것, 좋은 지역에 살고 싶어 하는 것, 내가 다 안다.’

 

그런데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에 필요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지는 말아라. 내가 다 줄 테니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나에게 와라. 먼저 나의 뜻을 구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하나님도 아시고 사탄도 압니다. 하나님은 염려하지 말라하시는데, 사탄은 우리에게 염려하라말합니다.

 

, , 저거 없으면 죽어. 그러니까 빨리 모아야지. 네 아이가 사회에서 뒤처지면 어떡할래? , 돈 다 떨어져서 굶으면 어떡하려고 지금 예배나 가고 그래? 그럴 시간이 어딨어? 빨리 가서 일해서 돈 벌어야지. 그래야 좋은 데 여행도 가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밥도 먹고 그러지.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먼저 해야 하는 거야. 그다음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 그래도 늦지 않아.’ 이것이 사탄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주겠다.’ 하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 너 저거 없으면 죽어. 그러니까 계속 염려하며 살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결코 우리에게 해로워 보이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 우리가 살면서 꼭 필요한 것들로 유혹합니다. 하나님보다 거기에 먼저 헌신하게 만들고, 믿음보다 그것을 먼저 구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안에 어떤 마음이 듭니까? 진짜로 , 이게 없어지면 어떡하지? 이거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가족이 안전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내 자녀가 실패하면 어떡하지?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실패해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 얼마나 창피할까?’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평생 그런 염려 속에 살며 인생을 낭비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먼저구하게 함으로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낭비하게 하고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러한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내가 주인인 삶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삶이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야 당연히 그렇지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내가 사랑하고 싶으면 하고, 사랑하기 싫으면 안 합니다. 내가 용서하고 싶으면 하고, 용서하기 싫으면 안 합니다. 내가 돕고 싶으면 돕고, 돕기 싫으면 안 돕습니다. 내가 교회 가고 싶으면 가고, 교회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갑니다. 내가 섬기고 싶으면 섬기고, 섬기기 싫으면 안 섬깁니다. 그런 식으로 전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 이것이 내가 주인인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하는데 그렇게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그래서 철저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삶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주인이 되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책임을 지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염려와 불안입니다. ‘이거 잘 안 되면 어떡하지?’ 그래서 평생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살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내 필요를 다 아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채워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논리가 아닙니다.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불안해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시인이 자기가 주인인 삶을 풍자하여 쓴 시를 오래 전에 읽은 적 기억이 납니다.

 

     들꽃이 참새에게 말했다.

      “염려 많은 이 인간들은 왜 그리도 조급하게 굴면서 그렇게 염려하는지 모르겠네.”

     참새가 들꽃에게 대답했다.

      “친구여, 그것은 분명히 너와 나를 돌봐주시는 하늘 아버지가 그들에겐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시지 않습니까? 비록 막달라 마리아처럼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고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 있으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그럴 때 부활의 주님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아 변화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 내가 나의 주인인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정말로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며 나가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영광과 평안을 맛보며 또 그 아름다운 복을 나누어주는 고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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