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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16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5

불신앙과 불순종의 비참한 결말

(열왕기하 1 1-18)

 

1.   아하시야의 죽음에 대한 예언

 

지난 동안 살펴본 왕들로부터 시간을 조금 과거로 돌려서 열왕기하 1장의 아하시야 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번부터는 엘리사를 비롯하여 열왕기하서로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유다에도 아하시야 왕이 있었는데, 그는 공교롭게도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의 아들, 아합의 외손주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하시야 왕은 아합의 장남입니다. 그러니까 아하시야는 서로 삼촌과 조카 관계가 됩니다. 사람은 이름도 같았지만 하는 짓도, 마지막 운명도 비슷합니다.

 

아합이 죽은 다음에 왕위를 이어받은 장남 아하시야는 자기 아버지의 악행을 그대로 본받아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합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그에게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기를 그의 아버지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왕상 22:52-53)

 

세상에서 가장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고, 가장 저주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아합이 그러더니 아들 아하시야도 하는 짓마다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켰다는 것입니다. 보고 자란 것이 그것 밖에 없는 이유가 큽니다.

 

부모가 악하다고 자녀도 악한 것은 아닙니다. 왕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아버지는 악한데 아들은 잘된 적도 있고, 여호사밧처럼 아버지는 훌륭했지만 아들은 그렇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삶은 자녀의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히는 가장 영향력을 가집니다. 그러니 좋은 영적 환경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것은 많은 재산이나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는 신앙인은 결국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자녀가 본인의 선택에 의하여 믿음의 길을 벗어나는 것은 어쩔 없는 일이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부모들은 최소한 때문에 자녀가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합이 죽고 나서 왕위를 이어받은 아하시야가 처음 직면한 상황은 모압의 배반입니다(1). 모압의 배반은 이스라엘이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던 이스라엘의 멸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거칠게 대하기 시작하며 반역하고 배신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막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엎친 덮친 격으로, 아하시야는 사고로 부상을 당합니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바알세붑에게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2)

 

아하시야는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다치는데, 사고로 심하게 다친 아하시야는 깊은 병이 듭니다. 그리고 어이없는 일을 합니다. 자기가 회복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에그론의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바알세붑은 ‘파리의 (lord of the flies)’이라는 뜻으로, 학자들은 이것이 파리 형상의 우상이거나, 파리가 전염시키는 질병에서 보호해준다고 믿은 우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아픈 와중에 아하시야는 자기의 병이 나을지를 알아보기 위해 우상 신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아하시야가 얼마나 깊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는지, 그리고 그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황폐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구에게나 사고는 일어날 있고 어려움도 생길 있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전부 하나님의 저주라고 말해서는 됩니다. 그런데 인생의 폭풍이 닥쳤을 어디로 달려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문제가 생겼을 누구의 도움을 청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나의 평소 신념과 생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힘들 , 어려운 일이 생겼을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회를 다니지만 점을 치는 사람, 부적을 붙여 놓는 사람, 아니면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거나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행동은 평소 자신의 영적 상태를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픈 것도 힘든데 처방을 잘못해서 잘못된 치료를 받으면 큰일입니다. 자기가 나을지 알아보려고 우상 신에게 신하들을 보낸 아하시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의 치명적인 실수는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어려움이 닥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는 진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하시야에게 분노하십니다. 그래서 우상 신전으로 가는 아하시야의 사신에게 엘리야를 통해 무서운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3-4)

 

왕이 되자마자 악행을 일삼은 아하시야가 사고를 당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을 찾으라는 그분의 초대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고작 한다는 것이, 신하들을 이방의 우상 신전으로 보내서 자기가 어떻게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의아한 것은,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두로와 시돈의 바알에게 보내지 않고 에그론의 바알세붑에게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시야가 바알세붑만 섬겼다는 아니라 , 신을 섬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하시야처럼 인생의 위기 앞에서 이방 신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믿는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겠지만, 믿는 사람이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데를 먼저 찾는다면 문제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자녀가 자기 부모를 놓아두고 다른 부모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구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딸이 자기 아버지를 무시하고 북한 김정은에게 가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말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말이 되는 일이 아하시야가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인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가서 매달릴 하나님은 노하십니다. 노하십니까? 감정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인생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헛된 , 있지도 않은 것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하면 도움이 오겠습니까? 마귀에게 놀아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생이 망가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우시니까 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으며 의지했던 다윗을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더욱더 고통을 당할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피로 빚은 제삿술을 신들에게 바치지 않겠으며, 나의 입에 신들의 이름도 올리지 않겠다. ,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나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 16:4-5, )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이런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면 어떻게 기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윗이 죄도 짓고 실수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던 기도의 사람이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좋아하지 않으실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만 행복하게 되어 있어서, 다른 신을 섬기면 탈이 나게 마련입니다. 아하시야는 수많은 악행에 더하여 우상 신에게 자신의 병세를 묻기까지 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비참하게 끝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가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생명을 거두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제 죽음으로써 아하시야는 자신이 의지했던 바알세붑의 헛된 실체를 깨닫게 것이고, 자신이 무시했던 하나님이야말로 우주를 다스리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덕분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려 두시기 때문이고, 살려 두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거룩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살기를 거부한다면 이상 땅에 살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생명을 끝내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말을 너희에게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7-8)

 

사자들로부터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해들은 아하시야는 예언을 전한 사람이 엘리야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엘리야가 전에 아버지 아합의 죽음을 예언한 바로 같은 엘리야라는 사실에 놀라며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하시야가 회개할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토록 악했던 그의 아버지 아합도, 범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는 엘리야의 선포를 들었을 놀랍게도 겸비하며 나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을 연장시켜주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마지막 기회마저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가 거부를 것입니다.

 

오히려 아하시야는 분노하면서 무장한 친위군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감히 그런 말을 전한 엘리야를 잡아와서 처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엘리야에게 군대의 오십부장은 산꼭대기에 앉은 엘리야에게 오만하게 외쳤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오십부장에게 부하 명을 딸려서 엘리야에게 보냈다. 오십부장은 엘리야가 산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소리쳤다. ‘어명이오. 하나님의 사람께서는 내려오시오!’” (9, )

 

이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러놓고는 정작 왕의 명령을 받들어 내려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왕의 권위를 높이 세우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왕이 직접 와서 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합니다. 아니면 깍듯한 예우로 모셔야 합니다.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더라” (10)

 

이것을 , 오십부장의 말에는 “네가 진정 하나님의 종이냐?”라는 식의 조롱 섞인 말투가 담겨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있습니다. 말투만 들어도 상대방이 어떤 마음인지를 눈치 있습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놀라운 권능들을 행한 하나님의 선지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대하는 지휘관은 왕의 권세를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었습니다. 전에 갈멜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850 거짓 선지자들과 홀로 맞섰던 엘리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한 군대 위에 하나님의 불을 구했고, 그의 기도대로 순식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50명의 친위대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패역한 왕의 패역한 부하들은 순식간에 비참한 죽음을 맞고 맙니다. 하나님은 결코 소홀히 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지만, 우리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놀리는 자세, 조롱하는 자세로 대하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겸손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부하들이 전멸당한 기막힌 상황 앞에 아하시야는 그때라도 놀라 엎드려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홉 가지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았던 애굽의 바로처럼, 아하시야는 어리석게 50명의 무례한 군대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서 똑같이 행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그가 엘리야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1)

 

엘리야에 대한 아하시야의 이런 적의와 분노는 하나님께 대한 적대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미련한 자는 실패에서 배우지를 못한다고 성경에서 말씀한 것이 정확합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 ( 27:22)

 

아하시야의 어리석은 고집은 번의 참극을 불러옵니다. 번째로 50명의 군대도 왕의 권위를 앞세워 오만한 태도로 속히 내려오라고 재촉하다가 똑같은 재앙을 당해 전멸하고 맙니다(12).

 

차례에 걸친 부하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는 번째로 군사들을 보냅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고집스러우며 강퍅한 리더라고 말하지 않을 없습니다. 이런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부하들이 불쌍합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번째 오십부장은 아주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야 앞에 꿇어 엎드려 겸손하고 간절하게 애원합니다.

 

왕이 번째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그의 무릎을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의 군사 오십 명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13-14)

 

그는 확실히 이전의 오십부장들과는 달랐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어쩔 없이 오기는 왔지만 이전의 지휘관들의 오만함과는 달리 겸손한 태도로 엘리야에게 자비를 호소합니다. 그는 자신을 보낸 왕보다 하나님의 엘리야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겸손히 나아오고 있습니다.

 

번째 오십부장에게서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배웁니다. 왕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어쩔 없이 따랐다고 말한다 해서 자기 책임을 피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연결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흉노족의 영웅 묵돌선우가 있었는데, 그는 왕위를 물려주려는 자기 아버지 두만선우를 살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제부터 내가 활로 쏘려는 표적을 너희들도 무조건 쏴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처음에는 들판의 사슴을 쏘았습니다. 그러니까 부하들도 쏘았습니다. 다음에는 자기가 아끼며 타던 말을 쏘았는데, 그것이 의아해서 말을 쏘기를 머뭇거린 부하의 목을 가차 없이 베었습니다. 며칠 후에는 자신의 아내를 쏘았는데, 이때도 망설인 부하들이 있었고 그들의 목을 베었습니다.

 

드디어 며칠 부친인 두만과 함께 사냥을 나간 묵돌은 느닷없이 자기 부친에게 화살을 날렸고, 거의 동시에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 부친 두만을 벌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이 묵돌선우는 한반도 북부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아랄 해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세워 중국의 () 나라와도 대등하게 맞서는 시대의 제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과연 묵돌의 부하들의 충성은 타당한 것입니까? 충성은 원래 봉건사회에서 군주() 대하는 신하의 의무나 마음가짐을 의미했습니다. 지금은 충성의 대상이 다양해졌지만, 충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바른 마음에서 우러난 충성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는 맹목적인 충성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조폭들이나 갱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충성합니까? 그러나 잘못된 충성입니다.

 

2 세계대전 600 명이나 되는 유태인들을 학살한 나치 독일 군인들이, 자기는 그저 히틀러 총통이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어쩔 없이 군인으로서 복종했을 뿐이라고 핑계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명령에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학살은 학살이고, 지금까지도 나치 전범들을 찾아서 잡아 벌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결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봅니다.

 

우리는 자신이 모든 행위에 대해 최종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사람의 권위 사이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할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아하시야가 보낸 번째 지휘관처럼, 비록 왕의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과정에서 모든 권위보다 위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아랫사람으로서 잘못된 명령을 수행할 때에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세상 한가운데서 쉽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판단하여 처신해야 합니다. 우리 위에 세우신 세상의 권위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과 다를 타협해서는 되겠습니다.

 

 

3.   아하시야 앞에 엘리야

 

번째 오십부장의 겸손하고 간절한 요청이 있은 ,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엘리야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아하시야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 (15)

 

그러니까 엘리야는 왕의 명령에 따라 호출된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반응하여 왕에게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도 No”라고 말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더라도, 하나님의 법에 맞서는 잘못된 법이라면 우리는 손해를 보더라도 No”라고 담대히 외칠 있어야 합니다.

 

이제 아하시야 앞에 엘리야는 자신이 이미 신하들에게 전했던 예언의 말씀을 다시 재확인시켜줍니다.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16)

 

왕이 병든 중에 우상 신의 도움을 구했으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다시 회복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왕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권능을 믿었고,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순종한 것입니다.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다음에는 이상 아무것도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보여 주겠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 12:4-5, )

 

지금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하는 말입니까? 평판이 잘못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전하며 말씀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안전은 하나님께서 직접 책임져주십니다. 믿으십니까?

 

왕이 엘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그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둘째 해였더라” (17)

 

엘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아하시야는 왕이 된지 2 만에 침상에서 죽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토록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악한 아합의 피를 이어받은 아하시야는 악한 부친의 리더십을 그대로 이어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결과 제대로 영광을 맛보지도 못한 2 만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악한 부모의 영향력은 이토록 파괴적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정치적으로 아합은 므깃도에 지하 수로를 파는 , 업적도 있었습니다. 유다와 외교관계도 맺은 왕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로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아하시야도 마찬가지로 악한 왕이었습니다. 거듭되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아하시야는, 제때 회개하지 않으면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악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성경은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뜻대로 살기를 선택하고 사는 사람들이 결국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는데, 바로 거기가 지옥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없이 살던 악한 자들이 스스로 선택해서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붙들며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놀라운 복을 매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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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단기선교 간증 및 보고 (마 16:13-19) - 이금주 교우 (8/15/18) kpccoh 2018.08.16 165
161 "부모 치유와 자녀의 회복" (엡 6:1-4) - 치유기도 7 (8/8/18) kpccoh 2018.08.09 1129
160 "내면의 갈등을 치유하기" (롬 7:15-25) - 치유기도 6 (8/01/18) kpccoh 2018.08.02 1267
159 "성인자아와 내면아이의 갈등과 치유" (마 11:28-30) - 치유기도 5 (7/25/18) kpccoh 2018.07.26 1246
158 거절의 상처를 싸매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라 (눅 10:38-42) - 치유기도 4 (7/18/18) kpccoh 2018.07.19 1150
157 기질과 성격을 영적으로 이해하라 (창 26:12-22) - 치유기도 3 (7/11/18) kpccoh 2018.07.12 2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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