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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3 2 수요예배

포기할 수 없는 영적 리더십 23

찬양으로 거둔 승리

(역대하 20 1-37)



이스라엘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아람과 전쟁을 치렀다가 패하고 돌아온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질책을 받고 상당히 침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진실한 회개를 통해 다시 일어나 힘찬 2차 개혁을 시작합니다. 그는 먼저 나라의 모든 지역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려고 애를 씁니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살더니 다시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두루 다니며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19:4)

 

남쪽 경계인 브엘세바에서부터 최북단인 에브라임 산지까지 두루 다녔다는 것은, 그가 남 유다 왕국 전역을 다 돌아보는 대장정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단순히 백성들을 위로하거나 자기가 하는 일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중심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려고 애쓴 것입니다. 이것은 그 동안 악한 아합과의 동맹으로 유다가 영적으로 혼란스러워진 것을 의미하는데, 여호사밧은 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직접 나서서 회개와 부흥 운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호사밧이 손을 댄 것은 사법제도의 재정비였고, 이것은 백성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실제적으로 적용되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사법제도의 개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의 주요 성읍마다 재판관을 두어 재판과 송사를 맡겼습니다.

 

“또 유다 온 나라의 견고한 성읍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읍마다 있게 하고” (19:5)

 

지금까지는 그 지역의 리더가 재판관까지 겸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여호사밧은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재판과 송사를 맡는 재판관을 따로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분명한 지침을 주었습니다.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여 할 것인지 여호와를 위하여 할 것인지를 잘 살피라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심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니라” (19:6-7)

 

그들이 행하는 재판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재판의 최종 권위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세상의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자리인 만큼, 재판관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판결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재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깊이 기도하여 그분의 뜻을 잘 분별할 때에만 공정한 재판이 가능합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 하고 강조합니다(7).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대신하여 판결하는 재판관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모든 판결을 내려야 했습니다. 주어진 힘이 큰데, 잘못 사용하면 하나님의 더 큰 진노를 사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은 물건의 무게를 재는 저울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판단 기준이 되는 저울이 잘못되면 엄청난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재판관이 잘못 판결하면, 재판관 자신뿐 아니라 사회의 질서가 흔들리게 됩니다. 한 나라의 도덕적 수준을 알기 원한다면 그 나라의 재판이 얼마나 공정하고 깨끗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나라가 어지럽거나 후진국일수록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호사밧은 이것을 바로잡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에 있어 여호사밧은 여러 말을 하지 않고, 다만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재판을 하라고 합니다.

 

한 교회도 영적 상태를 알려면 직분자들의 영적 수준을 보면 됩니다. 대개 어느 교회이든 문제가 생길 때 보면 온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경우는 하나도 없습니다. 대부분 직분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서 문제가 일어납니다. 직분자들이 바로 서면 교회가 바로 섭니다.

 

둘째로, 여호사밧은 수도 예루살렘에서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족장들 중에서 사람을 세워 재판과 송사를 맡깁니다.

 

“여호사밧이 또 예루살렘에서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족장들 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예루살렘 주민의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라” (19:8-9)

 

그는 주님께 속한 일과 왕에게 속한 구별하여 사람을 세웠는데, 종교에 관련된 일은 대제사장에게 맡겼고, 일반 민사에 관련된 일은 족장들 중에서 뽑아 위임을 합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관리로서 돕게 합니다.

 

“여호와께 속한 모든 일에는 대제사장 아마랴가 너희를 다스리고 왕에게 속한 모든 일은 유다 지파의 어른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가 다스리고 레위 사람들은 너희 앞에 관리가 되리라 너희는 힘써 행하라 여호와께서 선한 자와 함께 하실지로다 하니라” (19:11)

 

이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9). 그리고 “진실과 성심을 다하여” 즉 ‘성실하게 온 마음을 다하여’ 재판해야 합니다. 귀찮다고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재판 과정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정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단순히 한 사건의 판결만 하는 게 아니라 소송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두려워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성읍에 사는 너희 형제가 혹 피를 흘림이나 혹 율법이나 계명이나 율례나 규례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와서 송사하거든 어떤 송사든지 그들에게 경고하여 여호와께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 너희와 너희 형제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말게 하라 너희가 이렇게 행하면 죄가 없으리라” (19:10)

 

그 사건을 계기로 모든 사람에게 확실히 경고를 주어 다시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못하게 예방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처럼 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재판하는 자들과 그 가족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재판관들은 단순히 하루에 사건 몇 개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결정이 사회 전체의 정의를 세우고 불의를 몰아내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경건한 왕 여호사밧이 이처럼 재판관의 자질과 자세, 그리고 사법제도 확립에 집중한 것은 그만큼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잠 21:2-3)

 

요즘처럼 이 말씀이 실감나는 때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가 옳은 줄 압니다. 특히 뉴스를 보십시오. 전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정치인들이나 요즘 대통령 후보들의 연설을 들어보십시오. 다 자기가 옳은 것처럼 외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는 다 맞는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옳다고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보시기에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예배를 드리고서 그 예배의 결과가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위선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멋지게 예배를 하며 옳게 보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그 멋진 예배가 정의와 공평을 추구하는 삶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암 5:21-24, 새)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열심히 드려야 하지만, 그 예배가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배로 모이는 것이나, 헌금을 바치는 것이나, 노래나 연주로 찬양하는 것에 있지 않고, 공의와 정의가 흐르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질서를 세우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기준으로 보면, 교회에 몇 종류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모든 예배에 다 참석하는 사람, 주일에만 열심히 나오는 사람, 주일도 간신히 지키는 사람, 주일에도 자주 빠지는 사람, 적만 걸어놓고 안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중에 오늘 말씀에 근거하여 가장 위험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Top 2를 뽑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예배에 다 참석하는 사람’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영적 교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나오는데 저 사람은 왜 안 나와?’ 하면서 교만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모든 예배에 다 참석하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며, 말씀을 실천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1위는 제가 보기에 ‘주일에만 열심히 나오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일예배에 참석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제가 어릴 때 ‘주일 성수’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을 말하는데, 보수적인 분들은 주일에 택시나 버스도 안 타고 쇼핑도 안 하고 짜장면도 안 사먹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주일에 열심히 나와서 한 시간내지 한 시간 반 예배에 참석하고는, 자신의 삶의 나머지 시간은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할 위험이 많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며 말씀대로 살기에 힘을 써야만 합니다.

 

 

2. 전쟁에서의 승리

 

1) 적의 침략 앞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여호사밧

 

하나님을 위하여 사법제도의 개혁을 추구하며 나라의 기초를 다지던 여호사밧에게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엄청난 숫자의 적들이 침략해 온 것입니다.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 (20:1-2)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은 그 수가 엄청났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유다의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수입니다. 그들은 이미 엔게디 광야, 곧 유다의 코앞까지 왔다는 보고가 들어옵니다. 그러자 여호사밧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금식을 공포하며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20:3-4)

 

여호사밧은 성전 뜰 앞의 모든 회중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과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며 드렸던 언약을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리면서 매달리는 것을 봅니다(20:6-11).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20:12)

 

정말 상황이 너무 급해서 하나님 외에는 매달릴 곳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인생의 위기 앞에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어려움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어떤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면, 고민할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움 때문에 괴로워할 힘이 있으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이 예레미야 말씀 당시의 상황은 위기상황입니다. 평소에는 부드럽게 기도할 수 있지만, 위기상황에서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응답해주십니다.

 

요즘 다들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기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제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해,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목장을 위해, VIP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사회를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은 곧 기적의 시작입니다. 여호사밧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통해 온 유다에 선포됩니다.

 

“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에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그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20:14)

 

야하시엘은 다윗 시대에 성가대장으로 활동했던 아삽의 자손으로서, 여기 나온 그의 계보를 보면 그가 성전에서 찬양으로 섬기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엄청난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야하시엘을 통하여 승리의 약속을 주십니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20:15)

 

하나님은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그 이유가 나오는데,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맡아서 하시는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하는 전쟁이라면 적의 힘이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전쟁이라면 그 어떤 인간의 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싸울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어떻게 물리치시는지 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20:16-17)

 

이 말씀은 출애굽 당시 앞은 홍해로 막혀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선포한 말과 같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이 상황에서 이러한 놀라운 응답을 들은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은 얼마나 안도가 되고 감격스러우며 또 기뻤겠습니까? 아직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으니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승리에 대한 응답을 들은 유다 백성들은 감사의 경배를 드립니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20:18-19)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적들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때 여호사밧의 백성들을 향한 격려가 참으로 멋지고 좋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0:20)

 

유다의 승리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간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만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을 가지고 있어도 입에 넣어 삼키지 않으면 내 몸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약속을 주셔도 그것을 내가 신뢰하고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의 군대에서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가장 앞에 전투부대가 아니라 찬양대를 세운 일입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0:21)

 

여호사밧은 노래하는 사람들을 뽑아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행진하게 했습니다. 전쟁사에서 전무후무한 진형입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보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니까, 그것을 믿고 찬양대를 앞세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20:22)

 

워낙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유다는 적들이 자멸한 이후 전리품을 취하는 데에만 사흘이 걸릴 정도였습니다(20:25). 정말 믿기 어려운 승리가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찬양을 부르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적들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며,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칭찬해 드리며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임하게 됩니다. 찬양에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시 98:1-2)

 

다윗은 패배를 모르는 최고의 장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찬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찬양으로 승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의 입에는 어떤 언어가 있습니까? 불평과 불만과 원망과 비판과 염려의 언어를 입에서 없애 버리고, 입술로 감사의 찬양을 드릴 때 승리를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더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상식과 현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큰 대적들을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로 물리친 유다 군대는 승리의 영광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며 기쁨 가운데 개선하게 됩니다.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다시 여호사밧을 선두로 하여 즐겁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적군을 이김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그들이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니라” (20:26-28)

 

완전히 온 나라가 하나님께 찬양하며 축제를 벌입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모든 백성이 다 주님의 전 앞으로 나아옵니다. 그들은 승리를 기뻐했지만 거기에 취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성전으로 나아가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이 기적 같은 승리의 소문은 금방 모든 열국으로 퍼져 나갑니다.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 (20:29-30)

 

모든 주변 국가들은 이 소식을 듣고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유다와 그들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어, 아무도 감히 군사적 도발을 할 엄두를 못 내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남은 통치 기간 동안 국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처럼 평화는 인간적인 방법이나 힘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평화를 주시며, 그러한 사람은 주변에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3. 또 한 번의 아쉬운 결정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여호사밧은 통치 말년에 또 두 가지 아쉬움을 남기게 됩니다.

 

하나는 산당을 철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산당만은 철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마음을 정하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20:33)

 

이것은 당시 산당이 우상 숭배의 장소였던 동시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지만, 성전 완공 후 하나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셨으므로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결국 산당을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에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중간하게 방치해놓은 작은 틈을 사탄은 교묘하게 이용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며 상업적으로 동맹한 것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였더라. 두 왕이 서로 연합하고 배를 만들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었더니” (20:35-36)

 

여호사밧은 아하시야와 함께 무역선을 만들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하시야의 아버지인 아합과의 동맹처럼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하시야는 아합 못지않은 악한 왕이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지자들을 핍박하는 등 “심히 악을 행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에셀을 통해 이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말씀하십니다(20:37).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과 연합하여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책망의 말씀을 들었던 여호사밧은, 그것을 회개하고 제2기 개혁을 잘 추진했고 기적의 승리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다시 악한 아하시야와 연합한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자주 똑같은 실수로 넘어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보면 매번 그렇게 새로운 것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전에 실패했던 과거를 잘 살펴보면 분명히 어떤 패턴이 있습니다. 항상 같은 일로 실수하고 넘어지는 겁니다.

 

도박으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계속 도박 때문에 넘어집니다.

이성 문제로 말썽을 일으킨 사람은 계속 이성 문제로 말썽을 일으킵니다.

돈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계속 돈 때문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분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분노 때문에 계속 넘어집니다.

 

우리가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강력한 죄의 힘에 끌려 당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항상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그렇게 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에 무릎을 꿇어야 하고 매일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신뢰하며 개혁을 추진한 여호사밧은 동족이라 그랬는지 유독 이스라엘 왕들에게 약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악한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끝까지 그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를 며느리로 맞는 바람에, 나중에 아달랴가 다윗의 자손의 씨를 말려버리려는 무서운 시도를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나에게도 어떤 반복되는 약점이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나를 넘어지게 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바로 그것을 극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신뢰하겠다고 결단하면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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