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5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8

따로 세움을 받는 바나바와 사울

(사도행전 131~12)

 

[들어가는 말]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면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성장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가만히 잠만 자던 아이는 때가 되면 팔과 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무의미한 동작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아이가 계속 팔과 다리를 버둥거림으로써 아이의 어깨와 팔과 다리에 스스로 몸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축적되는 겁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아이는 스스로 몸을 뒤집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깨어 있는 동안 계속 팔다리를 버둥거리지 않는 아이는 자기 힘으로 몸을 뒤집을 수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때가 되었는데도 팔다리를 버둥거릴 줄 모르는 아이는 발육 과정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일단 몸을 뒤집을 줄 알게 된 아이의 그 다음 과정은 기는 것입니다. 아이가 기기 시작하면 아이는 온 사방을 정신없이 기어 다닙니다. 그 과정 역시 아이에게는 그 다음 단계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아이가 기어 다님으로써 어깨와 팔다리의 힘만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등뼈와 허리의 힘도 길러집니다. 그래서 앉아도 될 만큼 등뼈와 허리가 강해졌을 때, 기어 다니던 아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앉게 됩니다. 그래서 이 과정이 안 된 아이를 앉히려고 할 때, 특히 한국에서 100일 때 그러면 아이가 싫어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겁니다.

 

앉아서도 자기 몸을 충분히 가눌 수 있게 되면, 아이가 일어서서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스스로 익히고, 그러면서 넘어질 듯, 넘어질 듯하며 한 발, 한 발 간신히 걷기 시작하는데, 그때가 되면 아빠 엄마는 난리가 납니다. “아이고, 잘 걷네!” 하며 흥분을 합니다. 이제 그것이 익숙해져서 아기가 아장아장 걷고, 그 다음에는 걷을뿐 아니라 뛰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과정 중에서 한 과정만 부족해도 아이는 제대로 걸을 수 없거나, 걷더라도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가 일단 기기 시작할 때, 앉지도 못하는 아이의 두 손을 잡고 일으켜 성급하게 걸음마 연습을 시키는 부모도 있습니다. 또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아이를 의자에 앉히거나 보행기를 태우기도 하는데, 아이가 기어 다니면서 아이의 등뼈와 허리의 힘이 충분히 길러지기도 전에 아이를 성급하게 앉히거나 손을 잡고 걸음마 연습을 시키면,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빨리 앉거나 걸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등뼈나 허리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고 합니다


혹시 지금 등뼈나 허리에 문제가 있으신 분들은 약간 조급한 부모님을 두시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부모가 성급하게 아이를 앉히거나 걸음마 연습을 시킴으로 인해, 어린아이의 등뼈와 허리가 감당할 수 없는 하중을 받아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발육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가 정상적으로 걷기까지는 예외 없이 이상과 같은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하고, 또 그 모든 과정의 때도 모든 아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따라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개척하고 세우는 것 같아도, 사실은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여 교회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교회와 관련된 모든 사항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팔다리를 버둥거리던 아이가 몸을 뒤집고, 또 기고 앉고 서고 걷는 과정을 거쳐 성장하도록 디자인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듯, 교회가 세워지고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과정과 때를 인도해주는 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하신 과정과 때를 무시하고 인간이 조급하게 자신의 계획을 이루려고 하면, 부모가 성급하게 앉히거나 걸음마를 시킨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빨리 걸을 수는 있더라도 평생 등뼈와 허리에 문제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처럼,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그런 교회 역시 외적으로는 성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적으로 성숙하고 건강한 교회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과정을 잘 거쳐서 놀라운 일을 감당하게 된 교회, 교회의 귀한 모범을 보여주는 교회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그 교회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이름을 지을 때 안디옥교회라고 짓는 것을 봅니다.

 

 

1.   성령님이 맡기시는 일을 위해 따로 세움을 받는 바나바와 사울

 

1)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이제 예루살렘 중심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방을 향한 본격적인 선교와 전도를 위해서 안디옥 교회로부터 최초의 선교사가 파송되는 벅찬 현장이 벌어집니다. 13장은 사도행전 전체로 보아도 아주 중요한 장입니다. 지금까지는 예루살렘 중심이었는데, 이제부터는 안디옥 교회가 중심이 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1)

 

여기에 안디옥교회의 리더들 다섯 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첫 번째로 바나바가 나옵니다. 바나바는 이전에도 여러 장에 걸쳐서 잠깐씩 살펴보았는데, 구브로 출신의 레위 사람이었습니다(4:36). 그러니까 그는 정통 유대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또한 굉장히 착한 사람이었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지도자였습니다(11:24). 인격적으로도 훌륭하고 믿음도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회심했을 때 그를 두려워하며 함께 교제하지 못하던 성도들 앞에 그를 데려다가 보증까지 해준 사람이고, 자기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있는 사울을 데려다가 안디옥에서 사역의 장을 열어준 사람도 바나바입니다.

 

두 번째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입니다. '니게르'는 피부가 검은 것을 이르는 말이고,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인데 피부가 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니게르 시므온이 원래 유대인이 아니라 에디오피아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개종해서 유대인이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그가 아프리카 흑인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그 구레네 시몬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니게르(niger)’라는 말이 검다는 뜻이니까 시므온은 흑인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미국에도 노예제도가 없어진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아직도 인종차별의 모습이 있는데, 2천 년 전 로마제국 내에서 흑인은 거의 노예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 중에도 특히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가득한 사람들로서 아주 심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방인과 어울리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예 출신임이 분명한 흑인 시므온은 비천한 존재였는데, 그런 그가 안디옥 교회의 리더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교회입니까?

 

세 번째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 구레네는 현재의 리비아 트리폴리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루기오 역시 리비아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내세울 것이 없는 무명의 이방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네 번째는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이 분봉 왕 헤롯은 신약에 나오는 헤롯들 중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헤롯, 즉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젖동생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난 친형제를 말하기도 하지만, 어릴 적부터 단짝인 죽마고우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둘 중 어느 쪽이었든 간에 마나엔이 헤롯의 젖동생으로 불렸다는 것은, 마나엔 역시 그 당시 헤롯 쪽, 즉 불의한 지배 계층 쪽에 속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로마제국의 하수인으로서 유대인들을 착취하던 헤롯 가문과 그 주변 인물들은 모두 증오의 대상이었고 척결의 대상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적폐 세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 경우를 비교해보아도, 헤롯이나 마나엔 같은 사람은 모두 을사오적 같은, 처단 받아 마땅한 매국노들이었습니다. 그 매국노 출신의 마나엔이 안디옥 교회의 리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안디옥 교회 지도자 그룹의 마지막 인물은 사울입니다. 여기 다섯 명 중 세 명은 약간의 설명이 나오는데, 바나바와 사울은 그냥 이름만 나옵니다. 왜냐하면 바나바와 사울은 설명을 따로 안 해도 사도행전을 읽던 당시 독자들에게 너무 잘 알려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원래 교회를 짓밟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초대교회의 대적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상 다섯 사람의 모습을 보면 모든 면에서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한 그룹으로 엮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한 교회의 구성원이 됐을 뿐 아니라 그 교회를 이끌고 가는 리더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노예 출신인 흑인 시므온과 무명의 이방인 루기오 그리고 불의한 매국노였던 마나엔을 단지 교회 홍보를 위한 장식용으로 영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끔 보면 유명한 축구 클럽에서 아시아나 아프리카처럼 축구 변방에 속한 나라의 선수들을 영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실력이 뛰어나서 데려오는 경우도 있지만, 가끔은 티셔츠 판매용(?)으로 데려옵니다. 그래서 실력은 별로 없는데 그 선수를 데려오면 그쪽 나라의 중계권도 있고 그 나라 사람들이 티셔츠를 많이 사기 때문에 돈을 벌려고 홍보용으로 데려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그런 식으로 홍보용이나 장식용으로 이들을 영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 파송되자, 남은 그들 세 사람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안디옥 교회를 이끌어 나갈 정도로 확고한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안디옥 교회는 세상에서라면 결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한마음으로 나아간 아주 놀라운 교회였습니다. 철저한 계급사회를 이루고 있던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그것은 정말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지금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이더라도 대단한 것인데, 그 당시 이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안디옥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기들은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중보기도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7:11)

 

예수님은 제자들이 정말 하나가 되기를, 또한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도 함께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서로 다른 제자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인 것처럼 이 땅을 떠나신 뒤에도 주님 안에서 계속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마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도가 제자들 가운데에도 이루어졌고, 서로 더욱 이질적인 이방인들로 구성된 이 안디옥 교회에서 놀랍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안디옥에서 정통 유대인 바나바, 흑인 노예였던 시므온, 무명의 이방인 루기오, 불의한 매국노 출신 마나엔, 또 교회의 대적이었던 사울이 한데 모여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살아온 사회적 배경이 달랐고, 생각이 달랐고, 삶의 방식이 달랐고, 지적 수준도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간에 문화적, 사회적, 교육적, 사상적 차이로 인해서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습니까? 서로 답답한 일이 또 얼마나 많이 발생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모든 다른 점을 극복하고 하나 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에게 차별 없는 구원을 베풀어주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진짜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한마음을 이룬 교회를 이룬 그 안디옥 교회를, ‘그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주님께서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2)  최초의 선교사를 보내시는 성령님

 

이제 성령님이 그 교회에서 최초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십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2)

 

하나님께서 가장 핵심 지도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구별하여 따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담임목사와 부목사를 빼서 파송한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 1년 정도 밖에 안 된 어린 교회에서 특히 가장 중요하고 권위 있는 인물이며 예루살렘에서 파송받아 온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리더십에 있어서 탁월했으며, 잘 섬기고 위로하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교회가 어떤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 주를 섬겨라고 합니다. 여기서 ‘섬기다의 원어는 봉사하다라는 뜻보다는 예배하다(worship)’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는 먼저 예배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같이 예배해야 하는가 하면, 교회 공동체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 하나님을 같이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함께 모여 주님을 예배하고 또 금식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이들은 또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음식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먹는 것만큼 힘을 씁니다. ‘밥심으로 일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끊는 것입니다. 금식은 어떤 인위적인 힘의 작용, 즉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나에게 힘을 주는 공급을 끊고 나는 하나님께만 집중하겠다.’라는 결단의 행동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의 원리이고, 교회가 사명을 이루는 사역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고난주간에 금식을 하고, 다니엘 금식기도를 통해 금식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또는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금식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특별한 이슈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도 예배하는 가운데 수시로 금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집중했고, 또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더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임하시고 성령께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모임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이끌고 가는 당회가 있고, 또 연석회의, 제직회, 공동의회 등이 있습니다. 이런 회의들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사람의 뜻을 알아보기 위한 회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동의회를 통해 직분자들을 뽑는데, 투표에서도 내가 볼 때 나에게 이 사람이 좋은가, 안 좋은가하는 내 판단과 내 뜻을 드러내는 회의가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이분을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시기에 합당한가?’ 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회의라는 형태를 띠는 것뿐이지, 회의를 통해 우리의 의사나 뜻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고 그 뜻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곳입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예배와 금식이 그 중심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배하고 금식하는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불러 세운 이유가, 그들이 너무 훌륭하고 탁월한 능력과 재능과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자꾸 사람 자체에게 초점을 맞추고 이 사람이 훌륭해서 하나님이 쓰셨구나하게 되면 성경은 위인전과 비슷해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신 것은 그 사람들에게 어떤 훌륭한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시고 사용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3)

 

안디옥 교회는 예배와 금식 가운데 성령의 뜻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두 사람을 세우고 다시 금식하면서 기도하며 이 두 사람을 안수하여 보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제껏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안디옥 교회가 두 사람을 보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보내니라라고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 원어를 보면 놓아주다또는 풀어주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알려줍니다. 누군가를 보내고 파송하기 위해서는, 보내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으로부터 그 사람을 놓아주고 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풀어주지 않으면, 보내도 사실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사랑도 똑같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자기 뜻이라는 감옥 속에 가두어놓고 자기가 원하는 자녀로 만들려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것을 가리켜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육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크리스천 부모는 자식을 사육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기 편견의 감옥에서 자녀를 풀어주고 놓아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원하는 자녀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자꾸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바나바와 사울이 너무 훌륭한 리더들이라 자기들과 함께 계속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너무 훌륭한 사람들이니 당연히 같이 사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나바와 사울을 자신들의 편견이라는 감옥 속에 가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 두 사람을 내가 원하는 일을 위해서 따로 세워라하셨을 때, 자신들의 편견이라는 감옥으로부터 바나바와 사울을 기꺼이 풀어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정통파 유대인 바나바, 흑인 노예 출신 시므온, 무명의 이방인 루기오, 매국노 출신 마나엔, 그리고 교회를 잔멸하던 박해자 사울이 서로 사랑하지 않고서야 하나 된 교회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그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 상대를 자기 뜻, 자기 편견, 자기 생각이라는 감옥에 계속 가두어놓고 자기 뜻대로 그들을 움직여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감옥에서 풀어주고 놓아주는 것, 즉 상대를 더 이상 내 생각, 내 뜻이라는 감옥 속에 가두어두지 않고 풀어주고 놓아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정통파 유대인인 바나바가 유대교와 완전히 단절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불가능할 거야.’ ‘흑인 노예 출신인 시므온은 노예였으니까 분명히 매사에 수준이 형편없을 거야.’ ‘이방인 루기오가 복음의 진수를 제대로 알겠어?’ ‘불의한 매국노였던 마나엔이 주님을 영접했다고 얼마나 달라지겠어?’ ‘교회를 짓밟던 사울이 회심했다고 해도 그 포악한 옛 성질이 어디로 가겠어?’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러한 자신의 편견 속에 상대방을 가두어놓지 않고 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또한 바나바와 사울을 담대히 보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목회편지를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상대방의 말을 그렇게 잘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장에서 삶의 나눔을 할 때 굉장한 경청의 훈련이 됩니다. 대개 우리는 단지 상대의 말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과 이미지 같은 것만 받아들이고 기억합니다.

 

또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 누가 와서 이야기해주면, 그냥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고 속단해 버립니다. 만나본 적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을 해버립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만났거나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을 자기 편견의 감옥 속에 가두고 살아갑니다. 누군가가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면 그 사람이 이럴 리가 없고 그 사람은 그냥 그런 사람이야.’라고 하며 기존의 생각을 바꾸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것을 가리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는 아무리 많은 숫자가 모여도 하나 된 교회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는 오해와 갈등과 다툼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자기 편견, 자기 생각, 자기 뜻이라는 감옥에 남들을 가두어놓지 않고 풀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성령님께서는 나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 아니 그 사람을 통해 더 크게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고, 결과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그와 더불어, 또 모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정한 주님의 교회, 정말 하나 된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자기 편견, 자기 뜻, 자기 생각의 감옥으로부터 서로를 풀어줌으로써 진정으로 하나 된 교회를 이룰 수 있었고, 사랑하는 동역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풀어주고 놓아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의 복음이 세상을 향해 흘러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 복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편견, 자기 생각, 자기 뜻의 감옥에서 상대를 풀어줄 때 성령님께서 상대를 통해 더 놀랍게 역사하심을, 자기보다 더 작은 사람을 통해서도 성령님께서 더 크게 역사하심을 그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했던 것입니다.

 

 

2.   구브로에서의 전도 활동

 

1)  키프로스에서 복음을 전하다

 

이제 이렇게 파송을 받아서 바나바와 사울이 길을 떠납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4)

 

여기서 한 가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파송은 누가 합니까? 3절에는 분명히 안디옥 교회가 안수하여 보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파송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은 놓아준 것, 풀어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보내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파송은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사 파송은 교회가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가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파송하기로 작정하신 그 사람을 놓아주는 역할,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과 교회의 중요한 협력 관계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으로 보통 생각하는데, 깊이 들어가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작정하시고 사람을 파송하시며 곳곳에서 일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교회는 그 성령님의 계획에 순종하여 성령님께서 내가 보내겠다. 내가 쓰겠다.’라고 하시는 사람들을 놓아주는 역할을 감당할 뿐입니다.

 

이 개념이 잘 안 잡혀 있을 때 교회에 혼란이 옵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바뀌거나 담당자가 바뀔 때 이제 우리는 이쪽 선교지를 안 하고 다른 데를 하겠다.’라고 하며 이쪽을 다 끊어버리고 다른 곳을 하기도 하고, 아주 심한 경우에는 돈을 무기로 삼아서 선교사의 사역 내용 자체를 교회가 이렇게 저렇게 좌지우지하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뭔지를 잘 들여다보고, 거기에 협력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나바와 사울은 실루기아라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갑니다. 바나바의 고향이 바로 이 구브로(키프로스)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로 갔는지는 여기 안 나와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나바의 고향이라 익숙한 점도 있었을 것이고, 또 그곳에 있는 바나바의 가족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나아가는 것이니까, ‘예루살렘즉 자기와 가까운 그곳에서 시작하려 그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5)

 

두 사람은 구브로의 동쪽에 있는 살라미에 도착해서 유대인의 회당으로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헬라인들이나 이방인들을 먼저 찾아간 것이 아니라, 아직도 무지한 가운데 영적인 눈이 열리지 못해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생명의 예수를 알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의 회당 안에 들어가 복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이때 요한도 함께 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는 1225절에 나오는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셨던 마가의 다락방이라 불리던 곳(사실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소유), 오순절에 120명이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은 바로 그곳, 또 베드로가 잡혔을 때 간절히 기도하던 바로 그곳을 소유한 마리아의 아들 마가가 이 요한입니다. 그가 이때 동행을 합니다.

 

 

2)  바보에서 만난 마술사

 

바나바와 사울은 이제 구브로의 살라미라는 동쪽 항구에서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이 섬을 서쪽으로 가로지르며 복음을 전하다가 한 곳에 도착합니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6)

 

제가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초등학교 때 이 부분을 읽다가 요즘 말로 빵 터졌습니다. 어린 마음에 바보? 아니 바보라는 말이 성경에 있나?’ 하면서 굉장히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 퀴즈에도 가끔씩 등장하는 지명이 바보입니다. 그런데 하필 왜 바보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어로는 페이포스(Paphos)’이고, 헬라어 원어로는 파포스입니다. 그럼 파포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바보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보가 중요합니다. 바보에도 구바보가 있고 신바보가 있었습니다. 제가 옛날에 살던 곳이 반포인데 구반포신반포가 있는 것과 이름이 비슷합니다. 내륙 쪽이 구바보이고, 바닷가 쪽에 새로 개발된 쪽이 신바보입니다. 그런데 이 구브로 섬은 비너스여신에게 봉헌된 섬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보에 비너스 상이 있었습니다. 바보 사람들이 신당을 만들어 놓고 이 섬을 비너스에게 봉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이름 그대로입니다. 이들은 영적 바보들이었습니다.

 

역사책을 보면 로마제국 산하에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할 수 있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곳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아주 더럽고 추잡스러운 일들이 다 벌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게 많지만 당시에는 더러운 문화가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본거지가 바로 이 바보였다는 것입니다. 또 당시에 파피안(Paphian)’이라 부르는 바보 사람들은 그 단어 자체가 사창가 사람’, ‘더러운 동네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 바나바와 사울이 도착했고, 그곳에서 거짓 선지자인 박수 마술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여기에 와서 마술사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섬의 총독 옆에 붙어서 먹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7)

 

로마 시대의 고급 관리들은 다 이런 박수무당을 하나씩 끼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도 얼마나 더럽고 혼탁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이라는 사람은 비록 로마 원로회의에 의해서 파견된 사람이지만, 이 더러운 곳에 와서 권력을 쥐고 살면서도 마음속에는 뭔가 영적 갈급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악한 영 쪽으로 붙어 있는 박수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항상 죄를 마구 지으며 살다보면 그게 좋은 것 같아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인생을 살면 안 되는데. 이게 과연 내가 제대로 사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최악의 죄를 짓는 사람도 마음속에 다 그런 게 있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고 경험하고 사는데도 마음 한복판에 뻥 뚫린 게 있는 겁니다.

 

서기오 바울 총독에게도 바로 그런 깊은 영적 갈망이 있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소문을 듣습니다. ‘낯선 두 사람이 대륙에서 섬으로 왔는데, 그 사람들이 전하는 말은 뭔가 다르더라. 뭔가 신령하고, 생명력이 있고, 사랑이 회복되고, 우리가 번쩍 정신이 드는 일이 일어나더라.’ 그런 소문을 듣고 바나바와 사울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합니다. 그때 어떻게 됩니까?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8)

 

이 사람을 묘사하는 것이 너무 화려합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이고, 이름은 바예수(구원의 아들)이고, 거짓 선지자이고, 게다가 마술사이며, 엘루마입니다. 여러 표현이 있는 아주 화려한 사람인데, 이 사람만 보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3부작을 보셨습니까? 그 영화의 2편과 3편에 나오는 그리마 웜텅’(Grima Wormtongue)이라는 등장인물입니다. 로한(Rohan)이라는 나라의 왕이 마법에 걸려서 폐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 왕에게 옆에서 주문을 걸어 자기 말을 듣게 해놓고 그 나라를 악의 세력 아래 있게 사주하는 인물입니다. 주인공 일행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든 주인공이 왕과 대면하지 못하도록 애를 쓰고, 주인공이 결국 왕 앞에 섰을 때 왕이 회복되지 못하도록 왕의 옆에서 가라고 하라는 등 계속 방해를 놓는 인물입니다. 이름부터가 틀렸습니다. ‘웜텅이 한자어로는 충설’(벌레 충, 혀 설), 벌레 혀입니다. 이름부터 더럽게(?) 지었습니다. 혹시 <반지의 제왕> 원작자인 톨킨(J. R. R. Tolkien)이 바로 이 부분을 읽고 작품을 쓴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너무 비슷합니다.

 

본문의 서기오 바울 총독과 바예수 사이에는 이익이라는 공생 관계가 있었습니다. 총독은 아주 고위층 사람이고 총독 앞에서 한 건씩 점칠 때마다 복채가 굴러 들어오는데, 이 물주가 제정신을 차려서 끊어지면 수익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 마술사는 서기오 바울 총독이 절대 다른 데로 눈 돌리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든 것의 끝은 결국 돈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고귀한 직업을 가지고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의 결론은 결국 돈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나 예수 믿는 사람도 그 끝이 하나님이 아니라 돈인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술사는 서기오 바울 총독이 바나바와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자기의 돈줄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의 선포와 총독의 회심

 

그러자 사울이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9-10)

 

사도행전에서 바로 이 순간부터 사울의 이름이 바뀌어서 바울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을 만나고 나서부터 내가 이제 헬라 지역에서 사역할 때는 사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보다는 바울이라는 헬라식 이름이 더 효과적이구나하는 것을 느끼고 이때부터 이름을 바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봐도 바울이 전도하거나 사역하는 과정에서 이토록 강하게 저주를 선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 박수무당 바예수 사람 자체에 대해서 분노했다기보다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그 영혼을 사랑했기 때문에 이 한 영혼을 그토록 사로잡고 있는 마귀에게 분노하여 이렇게 통렬하고 준엄하게 저주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 박수무당을 짓누르고 있는 사탄의 권세에 대해 강하게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박수무당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잡고 있는 자, 어둠의 권세를 잡은 자, 즉 사탄의 존재를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실체에 대해 정확하게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성령이 충만하여 그곳에 갔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바울로 하여금 어둠의 권세에 짓눌린 이 한 영혼을 보게 하십니다. 그냥 분노하고 끝낼 수 있는데 사탄에게 사로잡힌 그 불쌍한 영혼이 보인 겁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인데, 그 마음이 악한 세력에 대한 분노로 나타나서 사탄을 향해 통렬히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11-12)

 

우리의 일상생활은 매일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 편안하게 살고 계십니까? 사실은 우리의 매일의 삶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순간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 하나가 다 이루었다입니다. 어둠의 권세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분은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의 죄 값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나중에 에베소서를 쓰면서 6장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간계와 세상의 권세 잡은 자에 대한 것’, 즉 사탄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꾸짖으며 나아갔을 때 놀랍게도 서기오 바울 총독이 그것을 보고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주변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방해하며 가로막고 있는 어둠의 권세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를 함에 있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 없이 영혼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 없이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그 영혼을 정말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로 말미암아 어둠의 권세는 결국 다 쫓겨 가게 되어 있고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하며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보내심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어둠의 권세가 꽉 잡고 있는 그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며, 마귀의 간계를 향해 담대히 선포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복된 승리의 역사가 늘 일어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