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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7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2

이방인의 집을 방문한 유대인 사도

(사도행전 1017~33)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금까지 맡아본 냄새 중에 가장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던 냄새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음식 냄새였습니까? 특히 어떤 분들은 고기에서 비린 냄새가 난다고 고기를 못 드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신학교 시절 사순절이 되어 수업시간에 어느 학생(아줌마 신학생)이 양고기 요리를 해서 가지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같이 먹는데, 그 고기를 입에 대는 순간 너무 노린내가 나서 먹지를 못했습니다. 버릴 수는 없고 먹는 척하느라 아주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생선 비린내도 아주 지독합니다. 땀 냄새도 얼마나 안 좋습니까? 그리고 남자들이 가득한 방에서 발 고린내(전문용어(?)로 꼬랑내)가 얼마나 납니까? 그리고 화장실 냄새, 특히 푸세식(?) 화장실 냄새가 얼마나 납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은 사실 애교 수준에 불과합니다. 시체 썩는 냄새도 아주 역겹다고 그러는데, 1세기 당시 무두장이의 집에서 나는 냄새는 우리 중의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지독하고 역겨운 냄새였습니다.

 

한국에서 어느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몇 년 전에 모로코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무두장이의 작업장에 직접 가보고 그 경험을 나눈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번 모로코 여행에서 무두장이가 얼마나 힘든 일을 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유네스코가 인류 문화유산 보호지로 지정한 훼즈(Fez)라는 도시에는 무두장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옛 방법 그대로 무두질과 염색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작업 환경이 얼마나 더럽고 열악한지 저는 그곳에 단 몇 분밖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작업 첫 단계는 무두장이들이 석회와 비둘기 배설물을 혼합한 액체 속에서 동물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과정은 염료 통에서 염색하는 것이었는데, 역한 냄새로 인해 저는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무두장이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무두장이의 집에서 유숙했다는 성경 내용을 정말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   고넬료의 종들이 욥바에 도착하다

 

1)  고넬료 집 사람들의 도착

 

21세기 무두장이들의 처지가 그런 식이라면, 2천 년 전 1세기 당시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처지는 지금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결코 나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의 작업이 얼마나 더럽고 역한 냄새를 풍겼으면 외딴 바닷가에 따로 떨어져 살아야만 했겠습니까?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한 채 그 힘든 일로 생계를 꾸려가던 무두장이 시몬에게는 자기 집이 작업장이었고 작업장이 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그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만든 음식이 무슨 고급 요리였겠습니까? 혹시 음식이 맛은 있었더라도, 숨을 쉬기도 어려울 만큼 역겨운 악취 속에서 과연 식욕이 일어나고 음식을 먹을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지독한 냄새가 나는 곳에서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면서 그 집안 식구들이 만들어 준 음식을 전날 저녁에도 먹었고, 본문 속 당일 아침에도 먹었고, 이제 곧 점심으로도 먹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무두장이에 대한 편견을 이미 극복한 베드로에게는, 비록 역겨운 환경이었지만 무두장이의 집에서 만들어주는 음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집에서라면, 베드로는 자신이 부정하게 여기는 짐승들을 잡아먹으라고 소리가 들리면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하는 음성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대로 토가 나올 정도의 악취로 가득한 무두장이의 집에서 무두장이의 집안 식구들이 만들어주는 음식은 기꺼이 받아먹었으면서도,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라는 뜻으로 주신 환상과 음성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시 베드로가 무두장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긴 했지만, 즉 죽은 짐승을 만지고 그 가죽으로 가죽제품을 만들어내어 부정하다고 취급받던 무두장이 시몬이었어도 그는 자신과 같은 유대인이었지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베드로가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같은 유대인이지만 부정하다고 취급받던 무두장이에 대한 편견은 극복했지만, 자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방인에 대한 편견까지 극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깬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한 인간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을 극복했더라도, 하나를 극복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다른 인간이나 모든 인간에 대한 편견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번 잘했다고 계속 잘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한 번 잘 극복했는데 그 다음 순간 또 넘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을 붙들고 애쓰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그 환상과 음성의 의미를 깨닫고 이방인에 대한 편견까지 극복하게 되었겠습니까? 베드로가 환상의 의미를 의아해 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 무두장이 시몬의 집 문 밖에 도착하여 베드로가 여기 있는지 묻습니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7-18)

 

지난주에 한편이라는 말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이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편 저쪽에서 베드로는...’이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반대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왔을 때 마침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한편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게 무슨 뜻인가 하고 있을 때 한편 그 사람들이 여기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도착해서 베드로를 큰소리로 찾습니다. “불러 묻되라는 말이 큰소리로 외쳤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베드로를 찾던 순간, 여전히 자기가 본 환상의 의미가 뭔가 하며 생각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19-20)

 

고넬료는 세 사람(하인 2, 군인 1)을 보냈는데 여기서 성령이 말씀하실 때는 두 사람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주를 보면 어떤 사본에는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상관은 없습니다. 군인 한 사람은 뒤에서 이들을 지키는 역할을 했고, 종 두 사람만 집안으로 들어와 베드로를 찾는다고 보면 됩니다.

 

 

2)  베드로와 고넬료의 종들의 만남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1-22)

 

그들은 베드로에게 고넬료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환상을 본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이 일에 개입시키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왜 하필 베드로입니까? 사울을 바꾸실 때는 아나니아를 사용하셨는데, 여기서는 왜 베드로입니까?

 

고넬료와 그의 가족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있지만, 이 사건은 사실 베드로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복음 사역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 있으면, 아무리 사도로서 복음을 전해도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상태에서는 제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시고 바로잡으시며, 얽매인 고정관념이나 전통에서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는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 같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28)이라는 전통과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도 아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사건에서 고넬료는 단순히 자기 개인 차원이 아니라 이방인의 대표라는 상징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고, 베드로도 단순히 자기 개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대표라는 상징적 성격을 가지고 이 사건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쳐야 할 부분이 바로 유대인들이 고쳐야 할 부분이고, 특히 앞으로 세계를 향해 주님의 증인으로 뻗어 나아가야 할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고쳐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나중에 11장을 보면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3)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는 이방인들

 

이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자기를 찾아 온 사람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여 머물게 합니다.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23a)

 

이 말이 얼마나 짧습니까? 그런데 이 짧은 한마디로 성경이 보여주는 기가 막힌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한 사람 무두장이의 집입니다. 거기에 거룩한 유대인 사도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볼 때 깨끗하지 못한 이방인들이 왔습니다. 이처럼 전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한 지붕 밑에서 같이 밤을 보내고 있다는 이 충격적인 모습을 성경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만 그 당시 이 사람들에게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일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일단 무두장이의 집에 유대인 사도인 베드로가 거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이제는 이방인들까지 와서 베드로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한 지붕 밑에 머무는 무두장이, 유대인 사도, 이방인!

 

무두장이의 집에 유대인 사도가 여러 날을 머물고 있다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마치 시리즈를 펼치듯 아이러니의 상황을 더해가다가 여기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고 무두장이의 집에서 고넬료의 집까지 30마일 거리의 먼 길을 세 명의 이방인들과 7명의 유대인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가이사랴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진행됩니다(23b). 그러다 48절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 사도에게 자기들의 집에서 며칠 더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의 전개를 통하여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이러한 모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우리가 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우리가 스스로 얻도록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이 사건을 읽고 살펴본다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넘어설 수 없을 정도로 높았던 편견의 장벽이 무너진 현장을 생생히 확인하면서, ‘이런 일들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고, 결국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음의 능력 때문이라는 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읽어보면 본문은 한 번도 복음은 유대인과 헬라인,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의 담을 헐고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라고 나중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언급하는 식으로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 베드로가 부정한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고 있고,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와 고넬료의 집 사람들이 한 지붕 밑에서 같이 거하며 밤을 지내고 있고,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함께 머물게 되고, 고넬료 집의 이방인들이 유대인 사도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을 담담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어떻게 부정한 자와 거룩한 사도가 함께 먹고 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더러운 이방인과 깨끗한 유대인이 함께 먹고 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 있어 나는 더러운 인간이고 저 사람은 깨끗한 인간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상대방이 다 잘못했고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은 더러운 인간이고 나는 깨끗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깨끗한 인간에게 더 책임이 있습니다. ‘깨끗한 인간으로서 더러운 인간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물어보고 계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괜찮지 않은 사람이나 형편없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할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어떤 장벽도 허물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사이에 조금 불편하고 저 사람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우리의 작은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엄청나게 높은 장벽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런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 살아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베드로 일행이 가이사랴에 도착하다

 

1)  이방인의 집에 도착한 유대인 사도

 

그들과 하룻밤을 같이 지낸 베드로는 이제 고넬료의 집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3b-24)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과 유대인 형제 여섯 사람(11:12)을 데리고 모두 열 명이 30마일 정도 되는 길을 같이 걸어서 그 다음날 고넬료의 집에 도착합니다. 고넬료가 사람들을 보내어 같이 머물렀고, 그 다음날 떠났고, 또 그 다음날 도착했으니, 4일째 되는 날 도착한 겁니다. 도착하여 일가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놓고 기다리는 고넬료의 환영을 받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3, 베드로, 그리고 1112절에 보면 형제 여섯과 같이 갔다는 말이 나오니까. 이들은 모두 10명인 것입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5-26)

 

여기서 마침도 역시 한편에 해당됩니다. 베드로는 모르고 그냥 왔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어느 예능 프로그램 중에 양심냉장고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개그맨 이경규 씨가 나와서 진행을 하는 것이었는데, 제작진이 어떤 상황을 설정해놓고 그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법을 지키는 양심적인 시민을 찾아 선물로 대형 냉장고를 증정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래서 양심냉장고였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는데, 교통법교를 얼마나 잘 지키는지 숨어서 보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새벽이나 밤에 신호등이 빨간불일 때 어떻게 하는지 보는데, 차가 없으니까 그냥 막 지나가는 겁니다. 열에 아홉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진행자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수준이었나?’ 그 다음 미국을 가보았더니 상당히 잘 지킵니다. 캄캄한 밤에 아무도 없는데도 빨간불에 잘 지켜서 섰습니다. 물론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슬금슬금 나오는 차도 조금 있었습니다.

 

   그 다음 일본을 갔는데, 한 명도 안 지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들이 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계에서 선진국인 일본을 무시하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인데, 일본을 무시하지 못하겠다고 다들 서로 말했습니다. 일본은 안 지키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 다 줄 수가 없었고, 한국은 지키는 사람이 가끔 나오니까 냉장고를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 직후, 그것을 맡아 진행하던 개그맨 이경규 씨가 갑자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그때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단순히 재충전을 위함이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이경규 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양심냉장고에 출연하면서부터 사람들이 저보고 이경규 선생님이라고 불렀어요. 검찰에서 강연 요청도 하고요. 저더러 시대의 양심이라는 거예요. ‘아이쿠싶었죠. 그래서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공부할 겸 일본으로 떠났지요. 그때 시대의 양심이라는 말에 제가 도취되었다면 지금의 저는 당연히 없지요. 대중은 연예인의 역할과 실제를 구분하지 않아요. 연예인에게 그것은 독배이지요.”


   이경규 씨는 단지 제작진의 의도에 따라 양심냉장고의 진행자로 출연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텔레비전에 나타난 연예인의 역할과 텔레비전 밖 연예인의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대중들이 선생님, 선생님부르면서 시대의 양심으로 떠받들고, 검찰까지도 시대의 양심이 하는 말을 듣기 위해 강연을 요청하는 데에 그가 도취되어서 스스로 시대의 양심인 것처럼 착각하며 행동했다면, 그는 개그맨으로서도 실패했을 것이고 그의 인생 역시 실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짓이고, 거짓된 삶은 반드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이 그에게 던진 유혹의 덫에 빠지지 않고, 개그맨으로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바르게 알고 지킨 그는 참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베드로가 마침내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고넬료가 자기 친척들과 친구들까지 다 불러 모은 채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24). 도착하기도 전에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있습니다. 혹시 안 오면 어떡합니까? 그 정도로 간절한 마음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있는데, 베드로가 들어오는 순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베드로를 만나는 순간 고넬료는 그대로 베드로에게 절을 합니다.

 

저 같으면 다르게 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사회적으로 별 지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백부장 같이 높은 사람이 자기 앞에서 절을 한다면 일어나세요라고는 하겠지만 사람을 좀 알아보시네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라고 합니다. 자기 위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2)  편견과 모순을 넘어

 

사람이 하나를 잘한다고 계속 잘하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 순간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고넬료에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27-29)

 

베드로는 아직도 편견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방인 고넬료가 사람을 보내서 여기까지 먼 길을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집에 들어왔습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 정도면 하나님이 저에게 가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으면 되는데 굳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안다.”라고 이야기해야겠습니까?

 

이것은 자기방어를 치는 겁니다. 혹시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나중에 고넬료로부터 자신을 청하게 된 사연을 듣고, 즉 고넬료에게 임했던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전개되는 상황들을 보고 나서야, 베드로는 드디어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편견 하나를 깬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하나를 깨긴 깼는데 그 다음 또 다른 편견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베드로가 잘하다가도 안디옥에서 바울과 함께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 형제들이 와서 보면 뭐라고 할까 봐 거기서 도망가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하나를 잘하는 것 같다가 또 넘어지며 극복하지 못하고, 잘했다 못했다 하는 것이 계속 반복이 됩니까? 왜냐하면 우리 인간 자체가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인데, 우리 자신이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말씀이 모순인 것처럼 들립니다. 모순에 빠져 그 모순을 정상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진리의 말씀이 오히려 모순처럼 느껴지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우리 인간사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 보고 싶은 곳이 유럽인데, 특히 서유럽은 정치, 사회, 경제, 역사, 복지, 인권, 교육 등 모든 면에 걸쳐서 최고의 선진국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선진국이 아닌 나라의 사람들이 동경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온 세계인이 동경하는 서유럽이 사실은 얼마나 큰 모순에 빠져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지난 20004, 파키스탄의 이크발 마시(Iqbal Masih)라는 소년이 어린이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계어린이상첫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세계어린이상은 스웨덴의 적십자사가 주축이 되어 결성한 비영리 인권단체 어린이세상이 그해 처음으로 제정한 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상식장에서 미화 8만 달러의 상금을 받은 사람은 수상자인 이크발 어린이가 아니라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크발 소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크발은 4살 때인 1987년부터 파키스탄의 카펫 공장에 감금되어 하루에 1루피(미국 돈으로 2센트 정도)를 받으며 매일 10시간 이상씩 강제 노동을 당했습니다. 이게 상상이 가십니까? 4살짜리가 강제노동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아홉 살이 되던 1992년에 극적으로 카펫 공장을 탈출한 이크발은 파키스탄 노예노동해방전선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곳곳을 다니면서 어린이 노예노동의 실상을 폭로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파키스탄에서는 600만 명의 아동 노동자들이 피눈물마저 착취당하며 카펫을 짜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크발의 외침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그 여파로 파키스탄의 몇몇 카펫 공장들이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크발 어린이는 1995년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안타깝게도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 어린이를 무참하게 죽여 버린 범인의 배후에는 물론 카펫 공장 주인들이 있었습니다따라서 스웨덴이 2000년 새 밀레니엄 계획의 하나로 마련한 어린이 노벨상의 첫 수상자로 카펫 공장의 희생자인 이크발을 선정한 것은 아주 아름답고 적절한 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시상식장에서 이크발의 가족에게 상을 수여한 사람은 스웨덴의 왕비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십시오.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의 왕실들을 포함하여 서부 유럽의 중산층 이상이 다 세계 최고의 카펫 고객들이라는 것입니다. 서부 유럽의 고객들을 위해서 파키스탄을 비롯한 중동과 아시아의 카펫 공장에서 이크발 같은 수많은 어린이 노동자들이 강제 노동과 착취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유럽의 세계 최고 카펫 고객들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 카펫 때문에 목숨마저 잃은 이크발을 위해 상을 만들고 시상하고 뜨거운 축하 박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아주 좋은 일을 했다며 칭찬을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이런 일들이 우리 인간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잘난 것 같고 똑똑한 것 같고 자아도취에 빠지곤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러한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주님 앞으로 가서 말씀 붙들고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도 계속 그렇게 착각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것을 깨닫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간 베드로가 얼마나 훌륭합니까?

 

 

3.   하나님이 하시는 일

 

여기서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베드로나 고넬료나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순종을 했는데,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이 그렇게 환상까지 보여주신 이유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29). 베드로는 하나님이 무조건 가라고 하시니까 순종해서 갔지만, 사실 왜 불렀는지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대답도 놀랍습니다.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0-32)

 

고넬료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 준 환상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난 다음 베드로에게 잘 왔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한 고넬료의 말이 흥미롭습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3)

 

잘 오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기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럼 베드로는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그도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 다 왜 만났는지를 모르고 그냥 만났습니다. 하지만 순종해서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런 식으로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다 알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알 때도 있지만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면 순종하기보다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그거 하면 나에게는 뭐가 좋은가요? 월급은 얼마인가요? 내 위치는 매니저인가요, 부장인가요, 차장인가요, 사장인가요?' 우리는 몇 시간 일하나, 조건은 어떻게 되나 등을 전부 따져보고 난 다음 할지 말지를 결정하려 합니다. 우리의 치명적인 실수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다 그런 식으로 합니다. 직장이나 사업체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요셉인데 그에게 자꾸 이상한 일들이 생겼습니다. 형들에게 팔려 17세의 나이에 이집트로 팔려간 것도 모자라,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실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이게 다 네가 총리가 될 각본이니까 조금만 참아.’ 하고 딱 한마디만 해주셨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안 주셨습니다. 그냥 어려움만 계속 생겼습니다.

 

대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할 때 우리가 다 알고 따르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 알고서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다 알고 따르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될지 보이지가 않지만,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니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냥 순종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결코 잘못 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다가는 내가 망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이 보이더라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종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것을 하고 나면 그 다음은 뭔가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지금 하라고 하신 일에 순종하면 그 다음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가라고 하시니까 갔습니다. 이제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서로 왜 만났는지도 모르고 만났습니다. 참 이상하게 보이지만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도 어떻게 하다가 만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이렇게 만나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은 무조건 옳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무조건 옳습니다. 정말 이유 없이 고통이 닥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내 삶에 벌어진다 할지라도,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고 세상을 떠나거나 나 자신이 죽더라도, 하나님은 무조건 옳으십니다. 실수하시는 게 아닙니다


지금 최악의 상황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더라도 우리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왜 그런지 우리는 알지 못할 수 있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그 이유를 알게 되지 못하더라도, 천국에 가면 반드시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고통을 당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가신 이유가 있고, 나를 빨리 데려가신 이유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그것을 원했는데 안 됐던 이유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염려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염려들은 다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나 고민을 주시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전부 내가 만든 염려이고 고민이며 불안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세상의 것으로 보상을 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보통 축복이라고 하면 세상적인 것으로 보상받는 것을 기대합니다. 특히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기대와 소망과 야망을 자꾸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네게 주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너에게 정말 주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 즉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다.’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한국의 우생순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줄인 말인데, 한국 여자 국가대표 핸드볼 팀의 투혼을 기리며 만들어진 말입니다. 여자 핸드볼 팀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묵묵히 훈련하면서 세계 대회에 나갈 때마다 좋은 성과를 거둔 적이 많습니다. 1988 올림픽을 비롯해서 금메달도 따고 은메달도 땄습니다. 지난 두 번의 올림픽(2016 리우, 2012 런던)에서는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비록 심판의 편파 판정으로 인해 동메달에 그쳤지만 여자 핸드볼 팀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의 감동을 늘 안겨줍니다. 국내 비인기 종목의 한계를 극복하고, 평균연령 34.7세의 아줌마 선수들이 보여 준 투혼이 정말 눈물겨웠습니다. 그 나이에 그렇게 뛸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선수들도 놀라웠고, 그 나이의 아줌마들이 그렇게 뛸 수 있게끔 이끌어준 감독 역시 위대한 감독이었습니다. 마지막 헝가리와의 경기에서 이겨 동메달이 확정된 후 열린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한국의 임영철 감독에게 올림픽을 마친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모든 대회가 끝나면 언제나 허무합니다. 이것 하나 때문에 선수들에게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시키고, 심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대회가 끝날 때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허무에 빠집니다.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심정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큰일을 추진하고 실행하고 성사시켜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 대표 팀 감독이 허무하다고 말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큰일을 이루어도 그로 인한 감격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 ‘이것이 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왜 이것을 위해 그토록 생명을 걸 정도로 애를 썼지?’ 하는 회의와 허무가 몰려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위대한 업적을 이룬다 할지라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호흡을 멈추는 그 순간 후회와 허무함 속에 우리의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업적은 아무리 거창해도 유한할 수밖에 없고, 유한한 것은 우리의 생명을 책임져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우리의 삶은 바르게 정리될 수 있고 영원히 세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이 혹시 지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을 붙들고 순종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자신의 호흡이 멈추는 순간 허망한 허무와 후회가 아닌 환희와 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눈을 감게 되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눈을 뜨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매일 최선을 다해 주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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