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9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28

아나니아의 순종과 사울의 회복

(사도행전 910~19a)

 

[들어가는 말]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여자 분들이 그릇을 좋아합니다. 그렇습니까? 물론 안 그런 분도 계실 줄 압니다. 그런데 그릇을 좋아한다고 집에 있는 모든 그릇을 다 사랑하고 다 똑같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집 안에 그릇이 아무리 많아도 주인이 그 많은 그릇들을 매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그릇을 다 똑같이 취급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인이 특별한 마음으로 다루는 그릇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대개는 값비싼 그릇이 귀하게 다루어지겠지만, 단순히 비싼 그릇보다도 훨씬 더 소중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그릇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그릇입니다.

 

저희 집에는 이전에 진흙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그릇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디엔가 있을 텐데 요즘은 못 보았습니다. 유약도 칠해지지 않고 불에 구워지지도 않은 볼품없는 진흙 그릇입니다. 사실 제대로 된 그릇 모양도 아니고, 그냥 흙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경제적인 가치로 따진다면 몇 센트도 안 될 것이고, 아니 몇 센트라고 해도 사갈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 그릇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집안 한 장소에 놓아두었던 것은 그 그릇이 가진 의미 때문입니다. 그 그릇은 저희 아들이 어릴 때 자기 손으로 학교에서 처음 만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만들어왔는데 이게 뭐냐고 하며 확 버리면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시간이 지난 다음에 저는 버리라고 했는데, 아이 엄마는 아니라고 하며 간직했습니다. 그 그릇은 아주 보잘것없이 보이는 진흙 그릇이지만, 아니 그릇 같지도 않은 것이지만, 엄마에게는 마치 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 같은 소중한 의미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릇의 참된 가치는 그릇의 가격이나 디자인이 아니라 그릇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비싼 그릇이라도 의미가 없으면 그냥 그렇고,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의미가 있는 것이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참된 가치는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직책의 높고 낮음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특히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특히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릇의 가치가 결정되고 어디에 사용을 받느냐에 따라 의미가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본문의 사울입니다. 오늘 사울이 주님의 그릇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아나니아는 어떤 사람인가?

 

사울의 변화를 살펴보려면 주님께서 누구를 통해 사울을 변화시키셨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먼저 보기 원합니다.

 

1)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0)

 

먼저, 아나니아는 다메섹(다마스쿠스)에 사는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사람 외에도 아나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 더 등장합니다. 5장에 나오는 삽비라의 남편 아나니아, 그리고 나중에 사도 바울이 잡혔을 때 그를 고소하는 대제사장 이름이 또 아나니아입니다(23-24). 예수님이 잡히셔서 재판 받으실 때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 바울 때는 아나니아였습니다.

 

이 세 사람이 이름은 같은데 하는 짓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5장의 아나니아는 초대 교회의 리더급였으면서도 탐심에 넘어가 성령을 속이다 죽었습니다. 또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자기가 열을 받으니까 율법대로 하지 않고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할 정도로 전혀 영적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9장에 나오는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름은 같은데 너무 다릅니다. 이름은 같은데 너무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을 가끔 봅니다. 특히 아주 유명한 사람과 이름이 같을 경우 굉장히 힘들 때가 많고, 더 힘든 것은 흉악범이나 악질인 사람과 이름이 같으면 아주 곤란합니다. 어릴 때는 그런 것 때문에 놀림도 받습니다.

 

아나니아는 이름이 같았지만 너무 달랐고,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 신실한 제자였습니다. 22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앞에서 연설할 때 바로 이 아나니아를 언급합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22:12)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는 주님의 제자로서 교회 내에서만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도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도 인정을 받던 사람이 아나니아였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 사는 동시에,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며 사는 아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아나니아야라고 이름을 부르시자마자 뭐라고 합니까? “주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바로 대답합니다.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셨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일이 벌어진 것처럼 대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뭡니까? 그가 평소에 주님과 늘 교제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마스쿠스에 유대인 공동체도 있고, 원래 있던 유대인 크리스천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여러 제자들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왜 아나니아를 사용하셨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셔도 잘 알아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거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했다.”라고 하는 음성을 들려주셨을 때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 하고 놀라며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신다고 해서 사람들이 다 알아듣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셨어도 두려워하거나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민감하고 평소에 주님과 늘 교제하며 말씀을 잘 알아듣고 순종하는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면 됩니다. 매일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동행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까하며 살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육성으로 귀에 들리게 하시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귀로 주실 필요가 없고 뇌로 직접 주시면 됩니다.

 

대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듣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계속 말씀을 하시는데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서 영적으로 깨어 민감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또한 아나니아가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지탄의 대상이었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사용하시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라면 가서 사울을 만나도 괜찮은 것입니다. 사울은 바리새파 유대인의 핵심 인물이었고,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130-40마일 정도 떨어진 다마스쿠스까지 쫓아왔는데, 아나니아라면 그런 유대교 인물들과 만나도 괜찮은 겁니다.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그 동안 주님을 강하게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울을 위하여 다메섹에서 가장 훌륭한 제자를 이미 예비해두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울이 씩씩거리며 살기등등해서 예수 믿는 것들을 다 잡아 넣겠다하며 왔는데, 그 길이 오히려 놀라운 구원의 길이었고, 그런 사울을 위해 이미 하나님은 다메섹에 아주 훌륭한 제자를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쓰다 남은 것이나, 가장 좋은 것은 놓아두고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항상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예비해놓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정말로 깨닫고 믿는다면, 지금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당장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주 답답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때가 이르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이미 오래 전에 준비해놓고 계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2)  신실했지만 주님의 뜻을 한 번에 이해하지는 못했던 부족한 사람

 

이렇게 신실한 제자인 아나니아에게 주님이 무엇을 지시하십니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1)

 

직가라는 것은 straight street, 그러니까 똑바로 뻗은 길입니다. 지금도 1마일 정도 되는 다마스쿠스의 명물인 쭉 뻗은 대로입니다. 보통 도시에 길이 꼬불꼬불한데, 1마일 정도 쭉 뻗어 있으니까 옛날부터 유명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유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집에서 사울이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울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알려주십니다.

 

사울은 시력을 잃었던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식음을 전폐했습니다(9). 그리고 이제 그가 식음마저 전폐했던 정확한 이유가 여기 나옵니다. 그는 시력을 상실한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고, 그때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금식기도는 사흘이 지나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부르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길에서 만나고 시력을 잃은 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이제 기도를 하는데, 그것이 3일 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하는 3일 동안 사울이 애초부터 작정하고 금식하며 기도했다기보다는, 도저히 먹고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왔던 자신의 모든 신앙의 체계가 잘못되었고 그것이 우르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내가 잘못된 것을 믿어왔구나. 잘못된 것을 위해서 행동하며 살아왔구나.’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실 수가 없어 그냥 기도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 하던 기도와 주님을 만난 이후의 기도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이전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인 기도였다면, 주님을 만난 이후의 기도는 자기를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기 위한 기도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당시 사울은 누구보다도 행동력이 뛰어나고 자기중심적이며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갑자기 주님을 만나 시력을 상실했을 때,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더욱 난폭해질 수도 있었고 정신이상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즉시 안 되겠다고 하며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시력을 되찾기 위해 매일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시력을 상실하고 나서도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은 6절에서 사울에게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으리라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고 의사를 찾아다닌 게 아니라 기도를 한 것입니다. ‘주님,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며 기도로 준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 유다 집에서 사흘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올 것이라고 이미 보여주셨지만 아직도 안 오고 있습니다. 3일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겠습니까? 정말 긴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때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울은 원래 유대인의 모든 종교의식에 가장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기도드리는 것을 주요 일과로 삼았고,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경건하다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은 이 기도의 일과를 누구보다 더 철저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불렀던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그의 교회를 박해하며 그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그가 매일 기도를 드렸어도 그 기도는 자기중심적인 기도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열심을 냈던 이유가 아마도 유대교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기도는 그릇된 자기 신념과 관습과 이기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이기적인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는 이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것이 되게 도와주세요.’라는 기도였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그런 기도를 많이 합니까?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기보다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이용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 다메섹의 직가에 있는 한 집에서 드린 그의 기도는 달라졌습니다. 그 사홀 동안의 금식기도는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릇된 생각과 사상과 판단과 욕망을 다 내려놓고 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다 쓸 데 없는 거였구나하며 자기를 비우는 기도였습니다.

 

동시에 그 순간은 이전에 자기가 그토록 핍박했던 주님을 철저히 만나며 선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주님이 나를 선택해주셨다는 놀라운 은혜에 반응하며 자기도 주님을 선택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버림과 선택을 통해 복음의 원수였던 사울은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무한하신 하나님과 비로소 개인적인 관계를 온전히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2)

 

무슨 말씀입니까? 다소 출신 사울이 앞을 못 보고 있으며, 그에게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어떻게 해서 앞을 못 보게 되었는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주라고 하십니다. 아나니아가 올 것도 사울이 다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을 찾아가 그에게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뜻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살기등등해서 교회를 잔멸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날뛰던 사울이 앞을 못 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음입니까?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 하나님께서 정말 역사하셨구나! 우리의 원수의 눈을 멀게 하셔서 더 이상 우리를 핍박하지 못하게 막아주셨구나!’ 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 원수에게 가서 눈을 뜨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눈을 뜬 다음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잡아 죽이며 날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3-14)

 

영적으로 민감한 아나니아였지만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울은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이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는 것은 굉장히 완곡한 표현입니다. 사실은 엄청난 해를 끼쳤습니다. 잔멸했다고 성경에서 표현할 정도입니다.

 

아나니아는 그것을 한두 사람에게 들은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한두 사람의 이야기라면 진짠가?’ 할 수도 있지만, 몇 십 명이 그렇게 이야기해주면 확실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사울의 악함과 살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위험한 사람이다. 절대로 피해야 할 사람이다. 만나면 안 될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게다가 사울은 지금 주님을 믿는 성도들을 잡아가려고 대제사장들에게서 그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에 와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이걸 보면 재미있는 것이, 초대 교회의 정보력이 대단합니다. 사울이 체포 영장을 받아서 이리로 왔다는 것을 어떻게 벌써 알고 있습니까? 정보력이 빠릅니다. 아니면 주님께서 알려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왜 지금 다마스쿠스에 왔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울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교회 성도들이 볼 때 사울은 테러리스트 중의 테러리스트입니다.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그의 눈에 띄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잘못하면 그에 의해서 잡힐 수 있고, 심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데서 핵심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를 모를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아나니아는 주님이 왜 사울에게 가라고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두시면 눈이 안 보여서 더 이상 악한 짓을 못하니까 교회에게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위험한 사람에게 가라고 하시고, 그것도 그에게 안수해서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아뢴 것입니다. 곧바로 순종을 못합니다. 두려워합니다. 걱정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주님의 명령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가 아주 신실한 신앙인이었고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봅니다. 두려움도 있고 선입관과 편견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걸 보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서, 또는 너무 잘나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게 많아서 사용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지금은 안 되고, 나중은 되고, 그런데 그때가 되면 또 안 되고...’ 이렇게 자꾸 변명하거나 핑계 대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주님의 말씀이니까 나는 이해가 안 되도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같이 하자고 하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다음에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형편이 나아지면 섬기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평생 하지 못하게 됩니다. 평생 못 합니다. 왜냐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때, 형편이 나아지는 때는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되어야 더 나은 사람, 더 나은 신앙인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더 나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하겠습니다. 좀 더 나아지면 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정말로 나중에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기 싫다는 말이 아닙니까?

 

또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까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하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얼마나 재산이 모아져야 만족하면서 그제야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사람은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백만장자에게 물어보십시오. “얼마나 벌면 만족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조금만 더! 지금보다 조금만 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에게는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이 주님의 일을 할 때입니다. 여전히 나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갈등도 있습니다. 게으릅니다. 죄에 쉽게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완벽하거나 훌륭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고 불러주십니다. “내가 너를 쓰겠다.” 그리고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기 우리 중 완벽해서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알겠습니다. 저를 써주십시오.’라고 나아오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십니까?

 

교회 일만 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의 장소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가정, 일터(또는 학교), 그리고 교회입니다. ‘내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서, 지금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조금 나아지면 하겠습니다. 형편이 좋아지면 하겠습니다.’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하지만 그냥 해보겠습니다.’ 하면서, 변명하거나 다른 말을 하지 말고 그냥 순종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일이!

 

 

3)  결국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아나니아의 이유 있는 항변에 대해 주님은 전혀 설명해주지 않으십니다. 그럼 뭐라고 하십니까?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5-16)

 

그냥 가라고 하십니다. 사울에 대해서 아나니아가 이야기한 것에 대해 그가 이렇고 저렇다고 하신 게 아니라 그냥 가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사울은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유대인들 앞에 가지고 갈, 주님께서 택하신 주님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를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악독하고 살기등등하게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주님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가 이방인들에게 가게 하실 것이고, 세상의 왕들 앞에 가게 하실 것이고,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택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가장 악독한 사람도 변화시키셔서 이렇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이렇게 강하게 나온 대적자는 강하게 사용하십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에 사용하십니다사도 바울이 강한 성격의 사람, 악독하게 교회를 잔멸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강력하게 나아가서 오히려 더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처럼 사도들 중 핍박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 이겨냈습니다. 이렇게 강한 사람이니까 강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력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택하셨고, 그는 그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엄청나게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할 사람이라면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자기가 그토록 악독하게 행한 짓을 아니까 감격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겁니다.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이 부르셨는데 이런 고난을 못 이기겠는가?’ 하면서 계속 나아가는 것입니다. 굉장한 열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잡아넣어 죽이려 했던 사울을 택하셔서 엄청나고 강력한 복음 사역을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은 사울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신 임무는 주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 디시 말해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상은 어떤 특정 개인이나 특정 그룹이 아니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유대인들이고, 이방인은 비유대인, 즉 유대인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며, 임금들이란 지체 높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방인, 임금들, 이스라엘 자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사울이 받은 사명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지체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동쪽이든 서쪽이든 북쪽이든 남쪽이든,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2.   거듭나고 회복된 사울

 

1)  영적인 회복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7)

 

이제 아나니아는 아무 질문이나 거부를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하셨을 때 그래도 그 사람은 좀 그렇고...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좀 보내시고...’라고 하지 않고 그냥 갑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러니까 즉시 떠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직가로 가서 거기 있는 유다의 집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있던 사울에게 안수를 함으로 시력을 회복시켜줍니다. 사실 꼭 안수해야 시력이 회복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순간이 사울에게, 아나니아에게, 그리고 전 교회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만져서 회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도 이미 환상 중에 계시를 받아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언급하지 않으신 두 가지 일을 아나니아가 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 사울이라고 부릅니다. ‘, 이 웬수 사울아라고 하지 않고 형제 사울아합니다. ‘원수였던 사울도 아니고 형제 사울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호칭입니까? 어떻게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잔멸하고 이 멀리 다마스쿠스까지 쫓아와서 잡아넣으려 했던 원수인 자기를 형제라고 불러줍니까?

 

이때 사울은 감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눈에서 눈물이 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사울이 사실 마음에 얼마나 걱정이 있었겠습니까?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안수하여 시력을 회복시켜주는 환상은 보았지만, 아나니아가 와서 자기한테 뭐라고 할지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자기가 한 짓을 아니까 뭐라고 야단을 쳐도 할 말이 없고 뭐라고 해도 자기는 꾹 참겠다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형제 사울아!”라고 하니, 정말 감격스러운 말입니다.

 

아나니아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은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도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미 명령하셨기 때문에 아나니아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사울을 회복시키기 위해 안수해줄 뿐 아니라 그를 형제로 부르면서 인정해줍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신 사람을 자기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아나니아가 시력을 회복시켜주기 이전에 이미 주님과 만나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회심했고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나니아를 대표로 하는 교회 성도들, 형제자매들과의 관계가 이제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열렸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도 열려야 합니다. 그 문을 아나니아가 열어주었고, 사울은 그리로 들어갔습니다.

 

둘째로, 아나니아는 주님이 사울의 시력을 회복시켜주라고만 하셨는데, 그 목적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력을 회복시키신 목적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이 눈만 낫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나니아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주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그릇으로 부르기만 하신 게 아니라 사울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얘야, 네가 이 일을 좀 감당하면 좋겠다.”라고 사명을 주실 때는, 그냥 가서 혼자 알아서 하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사명을 거부하면 그 능력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명을 감당하면 그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이전에 나에게 없었는데, 그런 능력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목적은 성령 충만하게 하셔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보기도실에서, 목장에서,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열심히 함께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응답을 해주시는 목적은 편안하게 살고 단순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시는 게 아니라, 바로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성령 충만하여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2)  육신적인 회복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18-19a)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집니다. 그리고 시력을 회복합니다. 그때 그는 일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안 보이니까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는데 이제는 일어납니다. 그리고 드디어 세례를 받습니다. 이미 믿었고 회심했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을 확증하는 의미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한 일은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일입니다. 그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습니다단순히 음식을 안 먹은 게 아니라, 엄청난 충격 때문에 깊은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느라 그랬습니다. 이제는 세례도 받고 음식을 먹으며 힘을 얻을 때입니다. 육신적으로도 힘을 얻어야만, 나가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기도만 하고 예배만 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음식을 혼자 먹었겠습니까? 거기에 같이 앉아 음식을 나누며 얼마나 분위기가 성령 충만하면서도 행복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공부하지만, 음식을 같이 먹고 힘을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할 것은, 그 전에 영적인 부분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은 해결되지 않았으면서 먹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여기 보면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은 다음에 음식을 먹고 힘을 냈습니다. 이 순서가 제대로 되어야 나가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영적인 부분이 해결되지 않고 주님과의 관계가 안 뚫렸는데 먹기만 해서 힘만 넘치면, 가서 이상한 짓만 합니다. 엉뚱한 짓을 하고 못된 짓만 하며 돌아다니게 됩니다. 이 순서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나가는 말]

 

사울은 주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그릇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그릇으로 선택받는 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에 대한 결과는 우리 인간의 믿음의 응답에 달려 있다는 것을 사울이 오늘 보여줍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의 반응이 거기에 합해질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시작될 때는 전혀 언급도 안 되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교회가 시작된 때로부터 4년이 지나 주후 32년경인 사도행전 9장에 이르러서야 겨우 회심하게 됩니다. 원래는 교회의 박해자였으며 죄인 중의 괴수이던 그는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이제부터 나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울과 이름이 동일한 구약성경의 사울 왕은 베냐민 지파였고 본문의 사울도 베냐민 지파였는데, 베냐민 지파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인 사울 왕의 이름을 따서 사울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그릇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사울이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한 당신의 새로운 그릇으로 다윗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전에 제사장이던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사시대 말기에 영적 지도자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사장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따라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대신하여 어린 사무엘을 당신의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영적 지도자였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전혀 못 들었고, 어린 사무엘은 사무엘아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는 은혜를 입고서도 하나님의 그릇답게 살려 하지 않았던 사울 왕은 끔찍한 죽음으로 끝났고, 하나님의 그릇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던 엘리 제사장은 충격으로 쓰러져서 목이 부러져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릇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던 다윗 왕과 사무엘은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된 오늘 본문의 사울처럼 그들 역시 구약성경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시대를 위한 주님의 그릇으로 선택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릇으로 선택하셨고 또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고, 또 이렇게 교회로 묶어주신 목적을 따라 교회로서의 사명도 주셨습니다.

 

여러분,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부르심을 받은 그 목적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 하나님은 나의 삶의 목적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사명대로 지금 행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사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것을 맡긴다고 하신 것처럼, 열심히 순종해서 하게 되면 잘했다고 하시며 또 다른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하면 또 다른 것을 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주님과 가까운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 왕이나 엘리 제사장은 사명을 받은 사람들인데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처럼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윗 왕이나 사무엘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나를 부르셨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몰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이미 나를 부르셨습니다. 내가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나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교회로서 함께 주님께로부터 받은 공동체로서의 사명은 바로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됨으로 영혼 구원하여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잘것없는 우리가 주님의 그릇으로 선택된 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이지만, 그 결과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우리가 얼마나 충실하게 감당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 결과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사도행전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남을 수도 있고 또 영원한 가치를 가진 삶이 될 수도 있으며, 아니면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이 끝날 때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우리의 뇌가 아직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동안, 주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주님의 그릇답게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다 느끼시겠지만, 성경도 읽을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성경을 읽고 싶어도 눈이 침침하고 잘 안 보여서 못 읽겠다고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눈이 괜찮을 때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예배도 다리가 멀쩡하고 몸이 멀쩡해서 마음껏 와서 예배드릴 수 있을 때 열심히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삶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안 하면 우리를 다른 그릇으로 대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동안에,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지금도 시간은 11초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생명 같은 시간을 게임이나 하고, 드라마나 보고, 예능이나 보고, 낄낄거리고, 죄 짓고 그러는 데에 허비할 수 있겠습니까?

 

즐기는 것을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생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호흡이 멈추고 우리의 뇌가 작동을 멈출 바로 그 시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의 생명인 것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 있는 삶, 주님께 쓰임 받는 삶, 주님께 순종하는 삶으로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