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30일 주일예배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31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

(사도행전 101~16)

 

[들어가는 말]

 

어떤 사람이 동부에서 서부로 출장을 가게 되어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어느 정도 되었을 때 그는 지난 밤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피곤하고 졸려서 잠시 잠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시작한지 2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그가 눈을 번쩍 뜨더니 뭔가 큰일이 난 것처럼 자기 주머니를 막 뒤지기 시작했습니다옆에 앉은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어서 물었습니다


    “이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괜찮으세요?” 

    “, 괜찮습니다. 제가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깜빡 잊고 약을 안 먹었지 뭡니까.” 

    “그래요? 굉장히 중요한 약인가 보군요.” 

    “그럼요, 너무 중요한 약이죠. 수면제에요. 어휴, 하마터면 안 먹고 잘 뻔했네. 다행이다.” 


그리고 수면제를 먹은 다음 잤다고 합니다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수면제 없이 잠을 자면 더 좋은 일인데, 습관이 들어서 안 먹으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이처럼 개인적인 습관 하나를 바꾸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우스갯소리겠지만, 우리가 가진 많은 습관이 있는데 하나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습관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 생각이나 관습이나 전통을 바꾼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조건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자기가 그 동안 해오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즉시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유익하고 자신이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베드로가 그런 모습의 시작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니 그 전에 사울이 자기가 믿어 오던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완전히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더욱더 큰 변화, 아주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1.   고넬료에게 임한 환상

 

1)  고넬료는 누구인가?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1)

 

저번 이스라엘에 갔을 때 가이사랴에 가보았는데, 지금은 유적들의 터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아주 웅장한 도시였습니다. 바다에도 건물을 많이 지었었고,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도 가이사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이달리야 군대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로마 군대라고 하지만 이달리야 군인들로 구성된 본부대가 있고 또 현지인들로 구성되는 보조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보조부대 백부장이 아니라 정규 로마 이달리야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사람으로서 로마에서 파견되어 여기 나와 있었던 엘리트 군인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해 놀라운 것을 또 알려줍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2)

 

여기에 보면 그는 또한 경건했고, 자기만 아니라 온 집안, 즉 가족들과 종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는 것은, 로마 사람을 구제한 게 아니라 자기가 주둔하고 있는 유대 지역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선을 많이 베푼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입니까? 그가 베드로에게 보낸 부하들이 나중에 베드로 앞에서 고넬료에 대해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22)이라고 증언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33). 그러니까 그는 유대교로 완전히 개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거의 개종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 중에서 율법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어도 거의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난 8장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가 생각이 됩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었기 때문에 황제에 대한 충성을 1년에 한 번씩 맹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조차 우상숭배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록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또 구제도 많이 하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신앙이 아직 온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봅니다. 구약만 어느 정도 알뿐,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결국 그는 이방인일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억할 점입니다. 아무리 훌륭해도 결국은 이방인입니다.

 

본문을 우리가 제대로 읽지 않으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환상 중에 귀한 말씀을 주시는데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와 경건함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이 잘 봐주셔서 인정을 받고 그런 점 때문에 고넬료가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환상에서 강하게 말씀해주시는 것처럼, 고넬료에게 구원이 이른 사건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심으로 일어난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훌륭해도 결국은 속되고 깨끗하지 못한 이방인인데, 그 이방인을 하나님이 깨끗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언해주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셨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9장에서 살펴보았지만, 사울이 복음을 대적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처럼, 그가 극렬하게 교회를 반대했으니까 그것을 복음을 위해 바꾸면 된다는 식으로 하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가 택한 나의 그릇”(9:15)이라고 하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셔서 사울이 구원받고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과 똑같은 원리로, 고넬료도 그의 경건함이 근거가 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깨끗케 하심이 근거가 되어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고넬료 사건의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람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구나하는 것이 고넬료 사건을 보여주는 의도이지, ‘고넬료가 훌륭하게 기도하고 구제하고 경건생활을 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 메시지의 초점이 아닌 것입니다.

 

 

2)  환상을 본 고넬료

 

그러나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로마 사람으로서 이렇게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경건한 이방인 장교인 고넬료에게 놀랍게도 하나님의 환상이 임합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3)

 

유대인의 시간은 항상 6을 더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 9시는 우리의 오후 3시이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것은 제9, 즉 오후 3시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이었는데, 그러니까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을 때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이것도 역시 고넬료가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으니까 우리도 기도를 정기적으로 많이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적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로 천사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정확히 고넬료야하고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잘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전해준 말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고넬료가 하고 있는 경건 생활을 인정해줍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4)

 

하나님도 그가 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주셨습니다. 고넬료가 잘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도 인정해주십니다.

 

둘째로, 베드로를 청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5-6)

 

천사는 베드로가 있는 집과 장소까지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베드로는 원래 이름이 시몬이니까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합니다. 그가 지금 욥바에 머물고 있습니다. 욥바는 가이사랴로부터 해변 길을 따라 남쪽에 있습니다. 욥바는 지금의 텔아비브(Tel Aviv)라고 했습니다. 50km, 30마일 조금 안 되는 거리입니다. 거기서도 해변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무두장이로서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그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해변에 산 것은, 그가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 수밖에 없는 부정한 무두장이라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알고 계시니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시는데,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청하라고 하십니까?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그냥 청하라고 하십니다. 뭔가 고넬료의 경건생활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는 합니다. 베드로를 청하여 그가 오면 뭘 하겠습니까? 뭔가 베드로를 통해 말씀해주실 것이 있다고 고넬료가 이해했음에 틀림없습니다.

 

 

3)  고넬료의 순종

 

천사가 떠나자 고넬료는 즉시 자기 종들을 보냅니다.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7-8)

 

이것을 보면 고넬료는 개인적으로 자기 집안 하인 2명과 자기 부하 군인들 중 경건한 병사 1명을 뽑습니다. 그리고 이 3명에게 모든 일을 이야기해주고 욥바로 보냅니다. 이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 집안이 주님을 경외했다고 했으니 거기에 속하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왜 베드로를 청하라고 이야기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임을 직감하고 아무나 보내거나 평소에 그냥 인격이 좋은 사람들을 뽑은 게 아니라, 베드로를 청하기 위해서 영적인 사람들을 뽑아서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즉시 순종한 것입니다. 청하라고 하셨으니까 즉시 순종을 했습니다. 사실 고넬료는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계획을 갖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천사까지 보내셔서 환상 중에 알려주실 정도라면 뭔가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이 있으니까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하신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여기서 봅니다.

 

 

2.   베드로에게 임한 환상

 

1)  한편 베드로는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수많은 장면들에서 생각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바로 한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한 곳에서만 일하지 않으시고 동시에 일하실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고넬료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베드로는...’이라는 식입니다. 부정한 자로 낙인이 찍혀 있는 무두장이의 집에 정통 유대인 사도 베드로가 여러 날을 머물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던 한편여기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9-10)

 

한편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중보기도실에서도 기도하고, 목장에서도 서로 기도하고, 개인적으로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아는 사람끼리 기도하고, 가족들끼리도 기도합니다. 특히 어떤 일이 잘 되어야 할 때(학교, 사업, 직장 등) 그것을 놓고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만 다른 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이쪽에서 기도하는 것과 저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서로 연결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은 전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고 있을 바로 그때 한편 이쪽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연결해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본문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나고 보면 , 내가 이렇게 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는 이미 저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구나. 하나님은 이미 저쪽에서 다 준비해놓고 계셨구나.’ 하는 것을 나중에 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걱정이 되시거나 두려움이 생기실 때 한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지만 한편저쪽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묵고 있는 무두장이의 집에 가까이 이르렀는데, 가는 사람들도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하고 베드로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제 6, 즉 낮 12시에 정오 기도를 위하여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으로 올라갑니다. 이때가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은 아니었지만, 베드로는 이 시간에 기도를 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낮 12시면 얼마나 덥습니까? 제가 그곳에 갔을 때가 5월 말이었는데, 12시는 정말 뜨겁습니다. 그 뜨거운 시간에 왜 지붕에 올라가 기도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통 유대인 사도 베드로가, 이때 가장 더럽고 부정한 곳으로 여겨지는 무두장이의 집 가장 높은 곳에 가서 가장 거룩한 기도행위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부정한 곳에서 가장 경건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가장 더러운 곳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경건한 행위인 것입니다.

 

 

2)  베드로가 본 환상

 

본문의 아이러니는 계속됩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황홀한 중에”) 하나님의 환상을 봅니다. 가장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이곳에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무엇입니까? 환상의 내용과 그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나오면서 성경이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절정에 이르는데, 베드로도 한 가지 환상을 봅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1-12)

 

하늘이 열리면서 각종 짐승을 담은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여 내려오는 환상이 베드로에게 임합니다. 네모나고 평평한 그릇 위에 짐승들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직전에 시장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미 12시가 되어 배가 고파서 뭔가를 먹었으면 하는 상태였습니다(10). 그런데 그에게 환상이 임하면서 한 음성이 들립니다.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13)

 

굉장히 배고 고플 때이니까 잡아먹으라고 하는 소리는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 알겠습니다하고 먹습니까? 정반대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4)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말은 같이 쓸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주여, 안 됩니다. Lord, no!’는 말이 안 됩니다. ‘주여라고 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자기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말을 절대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히 종이 주인한테 ‘No’라고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Lord’라고 했으면 ‘yes’라고 하든지, ‘no’라고 하려면 주인이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안 된다며 아주 강하게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속되고 부정한(깨끗하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굉장히 잘하고 있는 것처럼 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베드로가 어디 있습니까? 유대인들에게 가장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무두장이의 집에 있습니다. 가죽을 만들기 위해 죽은 짐승을 만져야 하는 부정한 무두장이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먹고 마시며 머물고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주제에, 부정한 것으로 여겨온 짐승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까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이것은 마치 진흙탕에 들어가서 마구 놀던 사람이 옷이 다 진흙투성이에다 모두 젖어서 감기에 걸릴까 봐 일단 이거라도 걸치세요.” 하고 낡은 재킷을 주었더니, “어허,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런 더러운 것을 주나?” 하며 화를 버럭 내는 것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자기도 더렵혀진 주제에 더 깨끗한 것을 더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정함은 직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그곳에 머물면서 몸으로 선포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부정한 짐승은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부정한 사람 집에는 머물 수 있지만, 부정한 짐승은 먹지 않겠다? 뭐가 다릅니까? 아직 그가 완전히 유대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보여줍니다. 갈 길이 멉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 내가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 아닌가?’ 지금 남들이 다 부정하다고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 괜찮다고 하며 일부러 찾아와서 머물고 교제하고 먹고 마시고 여러 날을 지내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이다.’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굉장히 훌륭한 일을 했다고 만족해할 그때에, 하나님은 너는 아직 멀었다.’ 하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자신의 기도로 살아나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고도, 또 부정한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며 그 장벽을 깼으면서도, 아직 이방인에게 갈 준비는 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게 참 힘든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 한 가지 장벽을 넘어서 주님의 뜻을 이루는가 싶은데, 그 다음 순간 또 다시 옛날 기준에 묶여버리는 이런 모습이 사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하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나누는 담은 정말 두꺼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그 담을 무너뜨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4:14-16, )

 

이것은 나와 조금 코드가 안 맞거나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있다가 그래도 하나가 되어야지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 비슷한 사람들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는 절대 경계를 넘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옛날 양반과 천민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장벽을 무너뜨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이때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5)

 

베드로가 본 환상(11-12)과 잡아먹으라는 명령(13)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14), 그리고 베드로의 그러한 거부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15)은 고넬료 사건을 이해하는 핵심 키(key)가 됩니다. 보자기 같은 그릇에 담겨 내려온 짐승들은 베드로의 관습과 전통으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입니다(14).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잡아먹어라하는 소리가 들릴 때 안 된다고 단호하게 자기주장을 펴면서 거부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말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아주 강한 거부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나를 어떻게 보고 이런 걸 먹으라고 하십니까? 나는 부정하고 더러운 것들은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때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것 역시 마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먹으라면 먹어! 그것이 깨끗한지 속된지를 결정하는 게 너야, 나야? 하나님인 내가 깨끗하다고 하는데 네가 뭔데 안 된다고 해?”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16)

 

이렇게 먹으라는 주님의 명령과 베드로의 거부가 세 번씩 반복적으로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해 무슨 뜻일까 생각하며 속으로 어리둥절하게 생각합니다(17). 그러나 그의 의아함과 상관없이 여기서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시면 깨끗한 것이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더럽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은 단순히 먹는가 안 먹는가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누구냐? 아직도 네 생각이냐, 네 관습이냐, 네 전통이냐? 아니면 너는 정말 내 말을 들을 거냐?’ 하나님이 그것을 여기서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런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렇게 해야 되나, 저렇게 해야 되나?’ 그런데 그때 우리의 판단 기준이 뭡니까? 결국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진로를 결정하는 것도 그렇고, 교회에서 회의를 하여 뭔가를 결정하는 것도 그렇고, 내 생각만 주장하다 보면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내 생각대로 가면 안 좋은 길이 될 때가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베드로의 고정관념과 전통과 관습을 깨뜨리십니다. 왜 깨뜨리려고 하십니까? 그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교회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가게 하시려고 그렇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하나님이 거기서 역사하시며 성령이 내리시는 것을 보고서야 이 환상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3.   교회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

 

이 일 이후로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거듭 성경이 제기해주는 근본 문제는 바로 이 점이 될 것임을 암시해줍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과 고정관념과 전통이 이방인의 구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문제를 베드로를 통해 해결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통 사도 베드로가 그것을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놀랍게도 11장과 15장에 가보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미리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는 그의 과거 경력이 어떠했든지, 그가 무슨 일을 했든지, 얼마나 악독한 일을 많이 하며 교회를 핍박했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복음으로 인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울 같은 사람이 악독하게 핍박하며 엄청나게 잘못된 사람이었는데도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도로 부르셔서 사용하신다면,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주님의 은혜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면, 오늘 고넬료 사건은 그가 이방인이라는 넘을 수 없는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복음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저 이방인인 로마 사람 고넬료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왔다면, 어떤 신분이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출신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무두장이 시몬은 아무리 부정한 사람이라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가 부정하지만 그래도 베드로는 그를 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방인도 그렇게 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이 이방인이니까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도 믿었어? 아니,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내려?’ 하며 깜짝 놀랄 일이고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방인도 너희가 품을 수 있겠느냐?’ 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 사건과 고넬료 사건은 단순히 사울 한 개인이나 고넬료 한 개인이 구원받았다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아주 중대한 사건입니다. 복음이 정말로 땅 끝까지 나아가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어떤 것일지를 미리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사건도 사도행전에 세 번 나옵니다(9, 22, 26). 9장에서는 그 사건이 일어났고, 22장과 26장에서는 사울(사도 바울)이 그 사건에 대해 돌아보며 증언합니다. 고넬료 사건도 세 번 언급됩니다(10, 11, 15). 10장에서 그 사건이 나오고, 11장에서 베드로를 통해 그 사건이 언급되고, 15장에서는 아주 중요한 예루살렘 종교회의에서 그 사건이 언급됩니다.

 

하나님은 사울처럼 인간이 아무리 악독한 짓을 하고 죽을죄를 지었어도 당신의 목적을 위해 불러 사용할 수 있으십니다. 사울이 그 길을 선택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처럼 아무리 경건하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해도 결국은 이방인으로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일 뿐이라고 하는 생각을 또한 뒤집으십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는데 인간이 뭐라고 부정하다 하겠습니까?

 

내 삶에서도 하나님이 된다고 하시는데 왜 내가 안 된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데, 왜 내가 그러면 안 되고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고넬료를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고넬료를 깨끗하다고 하시며 구원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대가 아니라 순종해야 합니다.

 

사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 우리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모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이상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체를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 뜻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신뢰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신분의 장벽을 극복한 한국 초대 교회의 교훈

 

우리 한민족이 세계 역사에 공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입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유래가 없는 일입니다. 특히 초창기에 자랑스러운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조금 긴 이야기이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3년 전 제가 안식월로 한국에 갔을 때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갔습니다. 한국에 가시는 분들은 좋은 곳들에 여행도 가시지만, 특히 자녀들과 같이 갈 때 양화진에 꼭 한 번은 가보시기 바랍니다. 영어로도 가이드를 해줍니다. 가 보면 인생에 도움이 됩니다.


양화진에 묻혀 있는 분들 가운데 새뮤얼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가 있습니다. 189232세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은 무어 선교사는, 현재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인 곤당골에 새문안교회 다음으로 두 번째 장로교회인 곤당골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예수학당을 열어서 조선사람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예수학당 학생들 가운데 봉주리라고 불리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백정 박 씨의 아들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던 백정에게는 이름이 없고 그저 성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봉주리로부터 아버지가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무어 선교사는 백정 박 씨를 문병했습니다. 그리고 의사였던 에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를 데리고 가서 백정 박 씨를 치료하게 했습니다. 후에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한 에비슨 선교사는, 바로 이 근처 델러웨어(First Presbyterian Church of Delaware)에서 파송된 알렌(Horace Allen) 선교사에 이어 당시 고종 황제의 주치의였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에비슨의 왕진으로 백정 박 씨는 깨끗하게 완쾌되었습니다.


그 후 박 씨는 사람들이 인간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는 자기를 위해서 외국인인 무어 선교사가 찾아와주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왕의 주치의가 자기를 몇 주 동안 정성으로 치료해 준 데 너무 감격하고 감사해서 곤당골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무어 선교사는 물론 백정 박 씨를 열렬하게 환영했음은 물론이고, 그에게 박성춘이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으며 세례도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백정 박성춘으로 인해 곤당골교회에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양반 교인들이 백정과는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무어 선교사에게 백정을 내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저 백정들을 내보내라. 안 그러면 우리가 안 나간다.’ 하면서 교회 출석을 거부했습니다. 사실 이해는 됩니다. 어떻게 양반들이 백정들과 같은 건물 안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우리는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출석 거부를 하다가 한 달 뒤에 양반 교인 대표가 무어 선교사를 찾아와서, 양반들의 자리를 예배당 앞쪽에 별도로 마련해 주고 그 뒤로 백정을 앉게 하면 교회에 다시 나오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무어 선교사는 교회에서 그런 차별은 있을 수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양반 교인들은 이제 출석 거부가 아니라 아예 곤당골교회와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양반을 위한 홍문동교회를 따로 세워 나갔습니다.


그 일로 가장 난처해진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바로 백정 박 씨, 박성춘이었습니다. 자기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면서 대부분의 교인들이 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선교사님에게 죄송했겠습니까? 그래서 박성춘은 교회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무어 선교사의 도움 속에서 자기와 같은 백정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정을 사람 취급해 주는 교회가 있다. 우리도 사람 취급을 받는다.”라고 하면서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수원에 있는 백정들에게까지 전도하였고, 그 결과 사람들은 양반 교회였던 곤당골교회를 백정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에 곤당골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홍문동교회의 양반 교인들이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참 훌륭합니다. 그리고 무어 선교사에게 되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양반 교회인 홍문동교회와 백정 교회인 곤당골교회가 합쳐져서 당시 홍문섯골교회라고 이름하여 통합해서 세웠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의 전신입니다. 그때가 1898년이었는데, 당시 100여 명의 교인 가운데 백정이 30여 명이었습니다.


몇 년 후 박성춘은 홍문섯골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그 뒤에 왕손이었던 이재형이라는 사람도 장로가 됩니다. 그러니까 백정과 양반과 왕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주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16:18) 하셨던 바로 그 교회를 이룬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무어 선교사의 용기와 성경에 기초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박성춘을 포함한 백정들은 무어 선교사의 후원과 지도하에 백정 해방을 위해서 수차례에 걸쳐 조선 정부에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의 백정들은 해방의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백정들이 국민의 자격을 얻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호적에 오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양반들처럼 갓과 망건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법률적으로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120년 전 조선 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일로서, 무어 선교사와 그 동역자들이 없었던들 불가능했을 일이었습니다.


마르다 헌틀리(Martha Huntley)라는 분이 나중에 자신의 저서 <한국 개신교 선교 역사(A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 in Korea)>에서 무어 선교사의 백정 해방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turning the world upside down)”이라고 부르면서,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을 얻은 미국 흑인들의 기쁨은 한국 백정들의 기쁨보다 결코 더 크지 않았다.”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던 무어 선교사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서 4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바로 그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가 조선 땅을 밟은 지 겨우 14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14년은 아주 짧지는 않지만 또 길지도 않은 기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과 마음을 고친 한 사람에 의해 사회의 한 부분이 새로워지는 데에 14년은 충분한 세월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시 백정들의 세계에만 국한된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봉주리로 불리던 백정 박성춘의 아들 역시 박서양이란 어엿한 이름을 얻었고, 세브란스 의대의 전신인 제중원의학교 1회 졸업생이 되어서 그 후 10년 동안 모교에서 설립자인 애비슨 선교사와 함께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인간이 아닌 백정의 자식 역시 인간일 수 없었는데, 인간이 아닌 백정의 아들이 사회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무어 선교사에 의한 백정 해방이 그 당시 조선 사회와 조선 사람들의 의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어 선교사의 묘는 양화진묘역 A구역에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총탄을 맞아서 약간 훼손되었는데, 그 무어 선교사의 묘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Dedicated Servant of Jesus Christ).” 그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거나 명목상으로만 주님의 종이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충성하는, 헌신된 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주신 예수님 안에서 그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힘입어 생각과 마음을 바꾼 그리스도인이었고, 주님 안에서 변화시킨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 평생 주님을 위한 삶으로 일관했던 주님의 진정한 제자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나 감정을 넘어, 주님이 원하신다면 내 생각을 얼마든지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신분, 직책, 직업, 학력, 경력, 연령, 국적, 재산 등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병든 세상을 고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까? 그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자기 생각과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과 능력보다 자신을 더 신뢰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기가 막히게 놀라운지 아는 사람, 미천한 자신을 통해 주님께서 얼마나 오묘하게 역사하시는지 깨달은 사람은, 자신을 구원해주신 주님 안에서 생각과 마음을 고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기막히게 놀라운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인간의 생각과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이 최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의 제자로 그분을 따라 산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생각을 주님의 생각대로 고치고, 또 그 바꾼 생각과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의 병든 곳을 고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충복이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충복이 되어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